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1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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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813.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1-모옌

소설가는 항상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자 하지만 소설 그 자체는 정치와 근접해 있다. 소설가는 항상 인간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자 하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비극이다.(5)

별빛은 깜빡이고 융단처럼 부드럽고 두터운 하늘은 대지를 뒤덮고 있으며 들에는 한참 자라는 옥수수 줄기가 사각거리고 있었다.(36)

나는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옥수수 밭에 드러누워 칼날 같은 옥수수 잎새 사이로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노라. 구름이 없구나, 구름이 날아가 버렸구나. 햇빛만이 작열하는 가운데 부글부글 끓는 부토가 내 등줄기를 뜨겁게 삶아대고, 백색의 농약액이 진주처럼 응결되어 옥수수 잎사귀 융모에 매달린 채 떨어질 듯하면서 떨어지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그녀의 눈썹에 매달린 눈물 같구나...(40)

달빛으로 농작물의 잎들은 은가루를 칠한 듯했고 밤벌레들은 쉴새 없이 둘어댔다. 농작물 잎에서는 이슬방울이 굴러 떨어져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고 있었다.(58)

고향 사람들은 마늘을 심어야 집안이 번영하고 부자가 되는데

화가 난 사람들이 크게 패거리를 짓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잔혹한 인간이 되었구나

세금을 거두기 위해 파견된 자들이 무리를 지어 줄을 서 있으니

억눌린 군중 백성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는구나(73)

바람이 쉬지 않고 불자 옥수수 밭은 불안하게 한바탕 떠들어댔다. 벌써 시들어버린 옥수수수염과 절반쯤 시들어버린 옥수숫대는 이미 옥수수가 한창 여물던 시절과는 형세와 기복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 시절에는 비취색의 잎에 부드럽고 가벼운 리본이 펄럭이는 듯했고, 맑고 서늘한 녹색 물결이 한 덩어리씩 모여들곤 했다.(125)

눈을 떴떠니 하늘에 가득 찬 무성한 별들이 보였는데, 별들은 다들 신비하게도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152)

모옌의 소설을 읽다보면 저는 이 사람이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과거에 그가 태어났다면, 그는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각종 이야기들을 모아서 이야기 모음집을 낸 인물이 되지 않았을가요? 어찌되었든 현대라는 시대에 태어난 그는 소설이라는 문학적 형식으로 자신의 이야기의 재능을 맘껏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0세기 중국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토대로 한 무수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면서.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에서도 모옌의 이이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1980년대 개혁개방의 시대를 맞아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현 정부의 무능하고 대책없는 수매정책으로 큰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분노하여 현 정부를 상대로 봉기한 실제 사건을 토대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모옌은 1980년대 개혁개방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농민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잘 읽히는 이야기로 술술 풀어냅니다.

무능하고 권위적이며 폭력적이며 농민들의 삶에 관심없는 관료들, 가난하게 살면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물질적인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농민들, 변화의 흐름이 당도했지만 여전히 과거의 낡은 풍습이 지배하는 농촌의 현실, 그 현실 속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모옌은 어딘가 우스우면서도 서글픈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말도 안되는 현실 때문에 너무나 현실적인 모습이 되는 모옌의 이야기는 읽다보면 뭐라고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봉기에 참여 했다는 이유로, 봉기에 참가한 그 수많은 인원 중에서 대표격인 인물로 선정되어 잡혀간 까오양은 감옥에 갇혀 선배 죄수들의 압력 속에서 자신의 오줌을 마시게 됩니다. 아니, 눈먼 딸이 울고 몸이 불편한 아내가 절규하는 사이에 잡혀간 한 남자가 지주 출신 아버지 때문에 억울한하게 당한 문화대혁명 시절의 과거를 회상하다가 자기 오줌을 마시고 자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 앞에서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가난한데다 다리를 절어 결혼혼을 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큰오빠의 결혼 때문에 의도하지 않는 곳으로 신부로 팔려가게 된 처녀 진쥐가 자신이 사랑하는 이웃집 총각과 도주했다 잡혀 갇혀있다 그 총각의 아이를 임신하고 마늘종 봉기 사건 이후 아버지는 차에 치여 죽고 어머니는 봉기의 주모자로 잡혀 가고 두 오빠는 분가하여 가난의 그늘을 느끼고 목을 메다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어떤 느낌을 가져야 할까요? 진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녀와 도주했다 실패하고 두드려 맞고 큰 돈을 가져오라는 진쥐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절망하고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마늘 판매가 현정부의 수매 정책으로 수포가 되면서 분노하여 마늘종 봉기에 참여했다 주모자로 몰려서 도주하고 간신히 돌아왔더니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 집에서 목을 메단 걸 목격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요?

모옌이 그려내는 이야기 앞에서 명확한 하나의 감정이 떠오르는 건 아닙니다.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뿐입니다. 뭐라고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를 탁월한 이야기의 형식으로 잘 읽히게 만드는 모옌의 솜씨에 감탄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건, 그 이야기들이 현실적이라는 겁니다. 현실은 뭐라고 하나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더군다는 20세기 중국 같이 격동의 역사적 흐름을 겪은 곳이라면 현실을 하나로 표현하기는 힘들죠. 모옌의 소설은 그래서 현실적이죠. 동시에 그의 이야기는 현실을 넘어서는 환상의 모습까지 담고 있기에 환상적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이면서 환상적이고, 환상적이면서 현실적인 모옌의 소설. 이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이야기를 마주하는 우리는 뭐라고 말하기 힘든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의 소설을 읽을 뿐입니다.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를 읽은 저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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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기 힘든 긴 밤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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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2.동트기 힘든 긴 밤-쯔진친

'아주 좋은데, 상당히 문명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말이야. 무고한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보단 나쁜 사람을 놔주는 게 나아.'(59)

'전 경찰이 아니라 대학교수라서 그저 진실을 알아내는 것만이 제가 할 일입니다. 그 진실이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말이죠.'(308)

'이날 밤, 그들은 말없이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다.

어둡고 어두운 밤, 언제쯤이면 날이 밝아올지 알 수 없었다.'(452)

'2014년 7월 29일, 거물급 호랑이가 낙마했다.'(453)

지금도 분명 세상 어디선가는 '기나긴 어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전쟁과 내전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극심한 불평등과 양극화로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폭력과 범죄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이 내몰린 '기나긴 어둠'은 언제쯤 끝날까요? 아니, 그들에게 과연 어둠을 걷어낼 아침의 빛이 찾아오기는 할까요?

<동트기 힘든 긴 밤>의 주인공인들도 '기나긴 어둠'을 보내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의 부패와 범죄, 그것을 덮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주인공들은 '기나긴 어둠'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 앞에서 주인공들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주변인물들이 괴롭고 힘겨워하는데 포기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죠. 하지만 오직 한명, 10년에 걸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포기하지 않는 '장양'이라는 인물 때문에 다른 인물들은 함께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이 소설의 판타지성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골백번은 넘게 포기했을 상황 앞에서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권력자에게 저항하는 사람의 모습이 판타지가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하지만 이 판타지는 사람들에게 현실을 잊게 만드는 나쁜 판타지가 아닙니다. 이 판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현실을 보게 만드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다 보면 빛이 찾아들 수 있다는 걸 깨우쳐주는 좋은 판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이 가진 판타지의 힘은 소설 자체의 내용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판타지성은 배경이 중국이라는 사실과 맞물리면서 더욱 더 빛을 발합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민주주의 시스템이 아닙니다. 권위주의적 정부 시스템 안에서 표현의 자유라든가 비판이 쉽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구조라는 걸 독자들이 자각하는 순간, 이 소설은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어떤 가상과 비현실의 쾌감을 중국적 정치 시스템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강렬하게 전해줍니다. 실제 현실의 장애물이 판타지의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죠. 현실의 장애가 크면 클수록 그걸 극복하는 판타지의 힘이 큰 것처럼.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틀 자체는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번뜩이는 도입부를 지나 이야기가 본 궤도에 오를 때 '너무 뻔한 거 아냐'하는 생각을 했죠. 그러나 우직하게 권력자의 부패에 저항하는 이야기로만 몰고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감동하는 저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묵묵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감동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밤이 아무리 길더라도 낮을 보겠다는 그들의 신념과 행동은, 아무리 어둠이 길고 힘들어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감동과 더불어 마지막 구절을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동트기 힘든 긴 밤'을 보내는 이들이 밤을 지나쳐 빛이 비추는 낮을 맞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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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23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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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1.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칼럼은 '즉물적'이다. 특정한 시기의 사건이나 상황을 바탕으로 그에 따른 자신의 생각을 직조해내는 '칼럼'이라는 글은, 즉물적이고 즉각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칼럼은 특정한 시기에 유효한 글이자 특정한 시기나 상황의 분위기를 담은 글이자 그 당시 상황에 시의적절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 특정한 시기를 지나서 칼럼을 보면, 그 글은 무언가 이상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 글이 쓰인 특정한 시기는 지나가버렸고, 장기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글은 특유의 즉물성과 즉각성, 시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즉물적이고 시의적인 칼럼의 특성상 굳이 그런 글들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때는 그 글이 맞는 듯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그 글이 맞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특정 시기에만 매몰된 '칼럼'이라는 글은 순간적인 글의 소비나 상황에 대한 일시적인 분석에는 맞을지 몰라도, 큰 틀에서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글의 가치가 사라질 확률이 높으니까. 그러나 황현산의 칼럼 모음집인 <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칼럼'에 대한 내 고정관념은 산산히 부서졌다.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황현산의 칼럼은 특정한 상황이나 시대상을 바탕으로 하고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전해질 묵직한 힘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특정한 상황에서 태어난 즉물적이고 시의적인 글이 보편성이라는 맥락에 포함됐다고 해야할까. 나는 <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시대를 넘어서 전해질 좋은 칼럼의 어떤 전형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는 딱히 '칼럼'을 읽지 않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됐다. 칼럼에도 시대의 흐름을 견딜 칼럼과 시대의 흐름을 견디지 못할 칼럼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소설가 중 한명인 움베르토 에코의 인기 칼럼 모음집인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은 그 중 어디에 속할까. 불운하게도 이탈리아어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패러디와 유머의 특성을 잘 살린 이 칼럼들은, 언어와 번역의 한계상 내게 묵직한 힘을 전해주지는 못했다. 대신에 순간순간의 기지와 유머, 톡톡튀는 감성과 독특한 상상력, 패러디와 풍자의 힘으로 중간중간 빛나는 글의 기지를 보여주었다. 또 어떤 글에는 시대를 넘어 전해질 힘도 느껴졌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언어와 번역과 해석의 한계는. 나로 하여금 움베르토 에코 칼럼의 속살에까지 가닿게 못하게 했다. 그 부분이 아쉽지만,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책으로 천년을 사는 꿈을 꾸는 에코처럼 나도 책이 천년을 살아서 미래의 그 누군가에게 가닿기 바라니까. 미래의 누군가도 에코나 나처럼 자신만의 꿈을 꾸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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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이민자들-W.G.제발트

261.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수 클리볼드(2)

262.장르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듀나

263.미스터리 아레나-후카미 레이이치로

264.중간의 집-엘러리 퀸

265.잘자요 라흐마니노프-나카야마 시치리

266.러시아 기행-니코스 카잔차키스

267.아가씨와 밤-기욤 뮈소

268.안개-미겔 데 우나무노

269.철의 시대-존 쿳시

270.여자 없는 남자들-헤밍웨이

271.요괴를 빌려드립니다-하타케나카 메구미

272악보와 여행하는 남자-이시베 다쿠

273.염원-시즈쿠이 슈스케

274.아자젤-보리스 아쿠닌

275.네번째 피해자-천지무한

276.찾아올 이를 그리워하는 밤의 달-미치오 슈스케

277.스켈리튼 키-미치오 슈스케

278.민트의 세계-듀나

279.전쟁은 끝났어요-곽재식 외

280.여자들의 등산일기-미나토 가나에

281.천사는 침묵했다-하인리히 뵐

282.남겨둘 시간이 없습니다-어슐러 K. 르귄

283.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장강명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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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듀나

톡톡 튀는 상상력를 기반으로 SF를 쓰고, 영화관련 글을 쓰는 작가 듀나가 장르에 대해 이야기한 책. 듀나는 이 책에서 끊임없이 장르를 정의하면서도 동시에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마치 건물을 지으면서도 다시 무너뜨리는 건축가처럼. 정의하면서도 정의를 무너뜨리는 듀나의 글쓰기를 읽다보니 내가 아는 장르의 정의에 대한 이미지가 '고체'가 아니라 '액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딱딱하고 고정된 장르의 정의가 흐물흐물거리는 액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 것처럼.

 

미스터리 아레나-후카미 레이이치로

TV쇼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추리를 통해 끊임없이 본격 미스터리 소설을 풍자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추리소설. 서바이벌 추리 프로그램 형식의 TV쇼에 출연한 출연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추리를 통해 쇼에서 제시하는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하고, 연출자와 진행자는 그들의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며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려 하는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본격 추리소설에 등장했던 다양한 트릭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본격 추리소설에 등장한 트릭의 사례들을 TV쇼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그 트릭의 허점들을 다시 파훼하는 방식으로 본격 추리소설에 대해 풍자를 한다는 느낌의 이 소설은 결국은 본격 추리소설의 룰을 무너뜨리면서 막을 내린다. 리얼리즘이 퍼즐 미스터리에 침입하는 방식으로.

 

중간의 집-엘러리 퀸

<중간의 집>은 엘러리 퀸 2기의 작품들 중 하나이다. 철저하게 퍼즐 미스터리의 형식을 따르며 마지막에 '독자에의 도전'으로 독자들이 이 퍼즐 미스터리를 풀도록 촉구하고 영웅적이며 신적인 탐정이 수수께끼의 사건을 해결하는 엘러리 퀸 1기의 작품들과, 사건에 휘말려들어간 탐정이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드라마에 침잠하여 스토리에 이끌려 다니는 엘러리 퀸 3기의 작품들 사이에 있는 이 작품은, 1기와 3기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본격 퍼즐 미스터리의 특징과 강력한 스토리텔링과 인물들의 개성 강한 캐릭터가 모두 모아졌다고 해야할까.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둘 사이의 경계 지대에 머무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작품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두 가지의 특징을 모두 가진 잡탕의 매력을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과 경계에 매력을 느끼는 이라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중간에 나오는 법정의 공방전은 더욱 더 재미를 배가하고.

 

잘 자요,라흐마니노프-나카야마 시치리

음악의 선율들을, 음악이 빚어내는 정서와 감동과 상황들을 언어로 풀어내는 소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일 수 있게, 그것도 독자가 충분히 감정이입 할 수 있게 그려낼 수 있다면 그 소설은 얼마나 매력적일까.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소설들에 약하다. 책에 쓰여진 들리지 않는 음악들을 상상하는 것들이, 책 속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그 음악에 녹아드는지를 떠올리는 것들이, 나를 책에 빠져들게 하니까. 여기에 일본의 떠오르는 스토리텔러 나카야마 시치리가 설정해놓은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요소들이 더해진다면 이 책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기행-니코스 카잔차키스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 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여행기. 그리스의 현실 속에서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920년대 말에 세 번에 걸쳐 러시아를 여행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러시아의 현실을 목도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러시아의 현실을 보고 회의와 환멸을 느껴 러시아와 멀어진 다른 지식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에게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서구의 물질만능주의와 이성중심주의의 폐해를 극단적으로 밀고간 장소였다. 그는 이런 극단의 장소에서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여겼다.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으로 러시아를 본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래서 그는 러시아에 대한 아주 강렬한 비판의 글과 러시아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가능성을 담은 글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생명력을 갖춘 여행기를 <러시아 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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