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초상화들이 소개된 책이다. 그림도 크고 글자도 크고 시원시원하다.
그 중에서 라파엘전파의 여인들 목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라파엘전파는 라파엘 이전으로 돌아가자며 아카데미 학파에 반기를 든 19세기 젊은 화가들의 그룹이다.
그 대표격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이 그룹은 요란한 연애사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졌던 엘리자베스 시달은 처음엔 밀레이의 모델이었다. 모자점에서 재봉사로 일했던 시달을 모델로 밀레이는 <오필리아>를 그렸다. 그런 시달에게한 눈에 반한 이가 바로 로세티이다. 그는 시달을 그렸고, 시달에게 시를 바쳤으며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그렇지만 로세티는 곧 흥미를 잃었고, 시달에겐 정신적 사랑을, 육체적 사랑은 그 당시 매춘부였던 패니 콘포스와 혹은 윌리엄 홀먼 헌트의 모델이었던 애니 밀러와나눴다. 유산에 거기다 로세티의 바람기로 우울증에 시달은 아편에 손을 댔고, 결국 32살에 요절했다(아편팅크를 마시고 자살했다). 그 후 죄책감으로 시달의 묘지에 자신의 시집을 넣었고, 훗날 그 시집을 파냈다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니까. 시달을 베아트리체로 그린그림은 실상 시달에게 바치는 묘비와 다름없다고 한다.
그런 시달 또한 재능있는 화가였다. 그녀의 그림은 따스한 색감으로 가득하다.
로세티가 그린 그림 중에 알렉사 와일딩을 모델로 그린 <레이디 릴리트>란 그림이 있다.
릴리트는 아담의 전처다. 처음 남자와 여자를 같이 만들 때, 아담옆에 있던 인물이다. 그녀는 독립적이었고, 아담이 남성상위체위를 요구하자 그를 걷어차 버리고 나가버린다. 그래서 아담의 갈비뼈로 순종적인 여인을 만드니 바로 이브다.
아담에게 순종하는 대신, 신과 아담을 버린 여자, 그녀는 아담보다 뱀을 총애했다. <미드라시>에선 뱀과 간통하여 수많은 악마의 아이들을 낳았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에서는 다산의여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곧 릴리트는 밤의 여인으로 폄하되었고, 부엉이가 트레이드 마크인 복수와 재앙의 여신이 된다. 아이가 죽어도 역병이 돌아도 릴리트의 탓이 된것이다.
탐욕과 재앙의 근원인 릴리트가 유혹적이 모습으로 머리를 빗고 있다. 그녀 주변의 꽃들도 심상치 않다. 디기탈리스는 변덕을 흰넝쿨장미는 관능적 사랑을, 양귀비는 잠과 망각을 의미한다.
그 시대 남자들은 관능적이고 유혹적인 여성상을 원했다. 그러나 그 여성이 주체가 되어선안되는 것이다. 유혹하되 욕망은 가지지 않은 여자가 그들의 이상향이었다.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이 금지된 것은 욕망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로세티는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인 제인 모리스와도 불륜관계였다. 제인 모리스는 마부와세탁부의 딸로, 상류층인 윌리엄 모리스와는 세계가 달랐다. 그러나 둘은 결혼을 했고, 제인 모리스는 빠르게 상류층의 문화를 습득했다. 이 이야기에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게 바로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란 이야기가 있다.
결국 그 시대 남자들에게 여성은 유혹하는 존재이나 욕망은 없는, 그리고 자신들이 빗어낸조각일 뿐이었다. 모델로서 뮤즈로서 남성의 창의성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스스로 창의적예술가가 될 수는 없는 존재. (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들을 그리던 르누아르는 여성 예술가들을 다리가 다섯개 달린 괴물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시달의 그림을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든다. 그 시대의 남성들처럼 제대로 교육을받고 그림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그저 어깨너머로 혹은 연인의 도움으로 조금씩 배우며 그저 취미로나 치부되면서도 그녀는 붓을 들 때 행복했을 것 같다. 그림 속 두 사람의 모습이다정하다. 그녀가 꿈꾸던 모습이 아닐까. 서로를 배려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사랑.
그런 그녀의 그림에 비평가 러스킨이 관심을 표한다. 로세티의 모델이 아니라 화가 시달이될 수 있었을텐데, 사랑과 삶의 배신이 그녀를 자살로 몰아간 것이다. 시달이 이브가 아닌 릴리트였다면 어땠을까
그 사람의 얼굴은 많은 것을 보여준다. 동양화와 달리 반짝이는 서양의 눈동자들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을 닮았다. 세상을 비추면서 자신을 보여주는 눈동자들을 들여다보면, 숨길 수 없는 마음들이 보인다. 서 있는 자세, 뒷모습들 모두 그 사람을 보여준다. 가난한 어깨, 낡아가는 머리결,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몸의 선은 그 사람의 삶을 닮기도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초상화를 보는 것은, 어쩌면 그의 삶을 엿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 엘리자베스 시달의 그림을 보면서, 그녀가 꿈꾸었을 다정함과 화가에 대한 소망을 가만히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