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스터를 화분 받침깔게로 넣어 봤습니다.

잘 어울리더라구요.

손으로 만든 거라서 그런지 공장으로 찍어내는 것보다

상당히 꼼꼼하기도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잘 쓸께요^^..


어떻게 이런 손재주가 좋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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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5-10 19: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 예쁘게 찍어주셔서 감사해요.
저희집 티코스터(컵받침)도 편하게 써주시면 좋을거예요.
유레카님,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yureka01 2016-05-10 20:25   좋아요 3 | URL
ㅎㅎㅎ분위기에 아주 멋찌게 어울리더군요^^..

네....물론이죠.

감사합니다.....

2016-05-10 2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왕♡

yureka01 2016-05-10 23:16   좋아요 3 | URL
수재품이라 정성이 캡쑝짱!!! 이었습니다^^..
 
박민규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Is That So? I’m A Giraffe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34
박민규 지음, 김소라 옮김, 전승희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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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들어가면서,

우선 책 소개부터 간단히 복기하자면, 이 책은 아주 짧은 단편이며 책의 분량도 얼마 되지도 않아 빠르게 읽힌다. 특히  소설 치고는 문체가 상당히 간결하고 깔끔하다. 문장의 호불호는 일단 제쳐 두더라도 문장을 읽어 나가는데 있어서 거침없이 쉽게 읽힌다는 점도 특히 주목할 대목이다.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상업고(요즘에 정보고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곳도 많다.)를 다니는 주인공이 동네 형뻘인 선배로 로부터 소개받은 시급 3천 원의 편의점 알바를 하다가  주유소 알바를 거쳐서 시급 1만 원 하는 지하철 푸시맨이 되었다. 아침마다 분비는 지하철에서 아버지의 등을 지하철에 꾸겨 넣어야 하는 심정이 잔잔하고 약간 울렁거리게 나열하고 있다. 아버지의 직장의 위태로움에 이은 해직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겹쳐진 주인공은 그 부담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이어지는 아주 단순한 스토리이다. 아버지의 직장에 대한 해고의 불안이 소설의 말미에는 급기야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 실종신고를 내고 아버지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를 못한다. 그리고 푸시맨은 지하철에서 환영을 본다. 기린이었다. 기린이 마치 아버지의 환영으로 오버랩되어 보이고 아버지가 맞는지 묻는다. 아버지에게 토로하듯이 기린에게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가 맞는지 묻지만 기린은 "(당신의 사정이) 그렇습니까? (나는 단지) 기린입니다."로 대답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딸아이가 읽고 싶다고 구매를 독촉도 하는 차에, 마침 딸아이의 선물이 이 소설책이었다. 딸아이의 선물 선택이 흡족하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이 책의 스토리가 마음을 자극하는 게 상당했던 모양이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딸아이가 자신의 입장에 대한 고민을 엿보였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찡! 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비교적 얇은 두께와 문장의 간결성으로 인하여 가볍게 빨리 읽긴 했지만, 다 읽고 난 후의 여운이나 잔여감은 하루 종일 내내 지속되었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한 단편적인 민낯을 보는 듯했고 흔히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신분적인 차별에 대한 용어로써 금수저니, 흙 수저니라고 하는 세태를 대표하는 뉘앙스를 떠올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2 . (자본주의 시대에의) 산수.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정보력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본의 수학은 필요 없이 산수의 대물림이라고 했다. 더하기와 빼기, 곱하기와 나누기의 사칙 연산에 따른 산수적인 존재의 유전성 앞에서 주인공은 악전고투와도 같은 푸시를 한다. 지하철의 정원을 훨씬 넘어선 초과 인원을 꾸겨 넣기 위한 등을 밀고 사람들은 자본의 산수를 위해 분비는 지하철에 등을 떠밀린다. 이런 대물림과 되돌이 표같은 기호가 실질적인 자본적인 행위의 대물림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물려받은 재산이 아들의 성장에 발판이 되고 발판을 통하여 이룩하는 축적은 고스란히 그 아들에게로 도돌이표 같은 발판이 되는 형국의 상황은 결국 기회적인 균등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시급 만 원에도 달가워해야만 하는 비정규직 파견직 일용직의 고단한 삶은 그대로 우리의 등을 밀어 댄다. 비정규직 시급 일당제의 푸시맨이 회사에 출근하는 정규직의 등을 밀고 있는 셈이다. 일어서기 힘들 때, 지팡이 하나가 참 요긴하다. 그러나 그런 지팡이는 아무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 시대의 지팡이 하나 없는 자들의 푸시는 늘 고단한 일상의 힘겨움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팡이 하나 건네주지 못한 아들들에게 무어라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다. "미안하다"라는 말.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버지도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뭐가 미안한지는 물어보지도 않는다. 이젠 그 미안하다는 말조차 식상한 나머지 다른 할 말이 없을 때 대용으로 튀어나오는 무미건조한 말이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딱히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고, 이거 밖에는 다른 말이 할 수도 없는 그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된 시대였다. 아버지의 산수와 아들의 산수는 차이는 있더라도 산수의 속성은 닮았다. 마찬가지로 미안함도 닮았다. 나도 내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가끔 한다. 그저 미안할 수 밖에 없는 인연으로써 우리는 만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맺음에서 엿보이는 그 내면적인 미안함들. 그런 수학을 가르치지 못하고 산수를 겪어야만 하는 미안함이다.

 

최근 뉴스에서 로스쿨의 입시에 있어서 자기 소개서 항목이 문제가 불거 졌다. 입시생의 여건, 즉 입시생이 관계 맺고 있는 사람의 직위를 자기 소개서에 서술하였다고 했다. 주로 고위직 내지 법률가 등등 사회적으로 기득권층을 이루는 집안의 아들 딸임을 직접적으로 표시된 부분이었다. 아버지가 어디 법원장, 어디 변호사 어디 시장 어디 고위직임을 나타내고 이를 반영이라도 해달라는 식의 무언적 언질 했던 것이다. 금수저는 그래서 반은 따고 들어가는가? 싶었다. 우리 아버지가 농부라고 소개한 것은 단 한 건도 없고 어부도 없고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라고도 치킨집 사장님도 없다. 아버지는 소개 시킬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따른 차별의 시선을 그래서 엄연한 묵시적인 반영을 노리는 것이리라. 대놓고 주장이 아니라, 아버지가 이 정도니까 너희들은 알아서 먼저 기어라 라는 식의 압박이자 협박이고 이에 작당같은 동조 시스템이라면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래서 우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아버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듯이 나도 자식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비굴함이 떠 올려 진다면 이 시대가 진정 깝깝하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배운다. 오래전 과거에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 것에 대한 태생적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배운다. 역사가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받으면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목적이 그저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면 다 된다는 식의 사회 시스템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은 요원할 수만은 없는 당위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까지 아버지 더 이상 우리들에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당신 자신의 산수가 산수로만 그치지 않고 더 멋뜨러진 수학의 미분과 적분을 하며 궁극으로 수렴하는 비상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서 말이다.

 

3 . 각자도생의 전쟁터.

노량진 같은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여기가 총칼이 없어도 전쟁터라는 것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다. 지금 우리들의 전쟁에 임하는 젊은이들의 각자가 가진 전투 자세라는 것이다. 하다 못해 대학 도서관 열람실 등에서 오늘도 치열한 입시 전쟁터로 내 몰린다. 우리 시대가 얼마나 희망이 없는 것인지 측정하는 그 척도의 기준으로써 공무원에 응시하는 비율이다. 이제는 대학 입학할 때부터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소위 가진 사람들은 온갖 스펙이다 뭐다 요란을 떨지 않을 수 없겠지만, 여기서도 끼이지 못한다면 선택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 공무원 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교육, 학업, 지식 따위는 없다. 오로지 시험에 나오는 지식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부가 되어 버렸다. 창조성? 또는 창작성? 따위는 배부른 놈들이나 지껄이는 레퍼토리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공무원이 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과 우리는 공무원이 되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단순히 인식의 격차와는 다른다.

 

젊은이들의 최선의 도전이 바로 공무원 시험이었던 것이다. 철저한 상명하복적 체계라든가 조직의 구성원으로써 살아가야 할 답답함은 삶의 안정성에 비해서 간단히 무시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젊은 친구들은 너무나도 잘 안다. 온갖 스펙과 좋은 대학이고 치열한 입사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다시 업무의 경쟁한다. 대리 달고 과장 달고 부장 달기까지의 그 고단함을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알량한 몇 푼과 자동차 아파트, 그리고 먹고 살아 낸다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나이 50도 되기 전에 해고의 불안은 늘 먹고사나이즘의 불안정성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꼴이다. 그러니 연봉이 다소 빵빵하게 많이 준다 한들, 많이 주는 게 많은 게 아니란 것을 미리 알아차린 것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작은 연봉이더라도 9급 공무원 월급의 박봉이라고 한들, 그 불안정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어느 대형 온라인 사이트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설문이 바로 대기업 직원?, 또는 9급 공무원의 선택지에는 늘 공무원이 항상 이유 있는 1승을 챙긴다. 기본적으로 관료는 창작은 없다. 그들의 일은 관리하고 조정하고 서비스하는 곳이라면, 우리 시대의 각자도생하는 부질없는 비창작성은 공무원이 최고이다. 희망. 또는 발전. 이런 개념은 이제 버리라는 시대에 암울한 서글픔 들만 가득하다.

 

일부 꼰대 아저씨들은 흔히 그런다. 자기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러지 않았겠지만, 일단은 과도한 학자금의 대출 빚이라는 마이너스에서 출발하지는 않았잖은가? 말이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자기처럼 그러지 말라는 논리는 유아적 가치 함물된 발상 밖에는 되지 않는다. 알지 않겠는가. 지금의 이 시스템을 만들고 일조하는데 크게 이바지 한게 누구라는 거 말이다. 충실한 협력자가 되었던, 조력자가 되었던 지간에 의도한 바는 없을지라도 뭐 하는지도 모르고 매몰된 채로 사회는 점점 헬로 접어 들게 했다는 것을 부인하면 자기 부정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4 . 아르바이트 시급 만 원의 꿈 혹은 월급 200만 원의 꿈.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사무직, 생산직 등 모두 포함, 혹은 비정규직 일용직 포함)을 전체 직장인으로 나누었을 때 자치하는 비중이 얼마인지 통계를 정확히 확인해보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자는 소수의 독점된 자본으로 뭉쳐진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한다. 대기업에서 만든 아파트, 심지어 대기업에서 만든 건축 자재로 지은 집과 대기업 패션회사에서 만든 의류, 대기업 회사에서 만든 식료품 등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대기업에서 생산되고 서비스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컴퓨터, 복사기, 자동차, 심지어 전기 선로를 까는 작업도 모두 대기업에서 만든 것들이고 상하수도, 도로, 항만, 공항등 일상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이 전부다 대기업의 것들이다. 심지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유심히 보면 중소기업에서 나온 제품과 서비스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또 통계를 찾아 보면 전체 일하는 사람들이 시급 만 원에 해당하는 한달 급여 200만 원 이상 소득자가 50%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구성 체계상으로도 상위층에서 하위층으로 내려 갈수록 그 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이런 불균형적인 소득의 구조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야 조건에 처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연대와 공감은 없다. 그러니 협력도 없고 하루를 버티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다. 교육적 가치의 부재와 함께 빚어낸 소위 하부 구조의 냐약함은 이 사회의 기초를 지지하기 어렵다.

 

플라톤이 말했던가? 정치는 인간이 구사하는 최고의 덕이라고 했듯이, 정치의 덕이란 역활은 대기업처럼 가만 나눠도 자기들의 역량으로 잘 사는 사람을 위해서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며, 가난하고 못 배우고 허약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역량이 집중되어야 할 것이며, 법과 제도, 교육과 문화가 지향할 점이 바로 약한 사람들에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역량이 반대로 향하고 있다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제는 사회구성원 전체가 패러다임을 바꾸면 안될까라는 절박감은 점점 축적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의 낙수효과는 최근에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그렇다면 이제는 낙수효과를 버리고 분수 효과를 한 번이라도 해보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회적이 담론이 구축되었으면 한다. 가장 가슴 아픈 현상은 한창 배우고 공부할 시간에 과도한 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공부가 아니라 당장에 학자금 대출이다 생활비를 벌어야 할 처지라면 그렇게 시간을 소비시키게 되면 막상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가난이 고스란히 계속 진행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심층 구조에는 임시직이 오히려 비용을 더 많이 들이는 구조로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규직보다 더 낮은 편이다.

 

5 . 일해도 가난한 워킹 푸어.

성경에 일하지도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이는 열심히 일하면 먹을 수 있다는 확실한 전제가 깔려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담보가 없는 시대라면, 일 열심히 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열심히 일 해도 밥 먹고 살기가 퍽퍽하다. 열심히 죽어라 일 해도 축적될 건더기가 없는 자산 형성의 불가능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만으로는 불가능함과 같다. 비정규직은 늘 시간에 쫓긴다. 근로기준법에 있는 연차와 월차는 해당사항이 없다. 비정규직에게 월차와 연차는 없다.낮에 은행 볼일 한번 보러 가기 어렵다. 시급에 따른 소득은 다른 일이 생기면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연장근로와 잔업으로 그 부족한 시급을 시간을 때운다. 그렇게 젊은 날에 먹고 살 만큼 벌다 보면 일을 못할 시기에는 소득이 없고 벌어 놓은 돈도 없으니 노령의 나이에도 하루를 벌어야 살 수있는 저소득층에 편입할 뿐이다. 누군 한탄한다. 열심히 일했는데 왜 늘 이 모양이냐고 한다. 이제는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이 모양의 상태에서 벗어 날 제 간이 개인에게는 없다는 뜻이다.

  

6 . 신에게 벌받기 위해 태어났는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흥부에게 있어서 로또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였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와 흥부에게 건넨 박 씨는 흥부의 인생을 역전시키기 위한 로또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부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라도 자기 집이 있었다. 흥부의 아들 딸들은 아버지가 그나마 박 씨에 금은 보화가 가득 담긴 로또 터졌으니 너무나도 다행이었지만 지금의 흥부 아들 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흥부 아버지는 뭐가 못나서 놀부네 삼촌이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다 차지하고 나의 아버지 흥부는 받지를 못 했던 것일까. 흥부 아버지는 서자 출신이었나? 싶을 정도로 전래동화가 참 가혹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흥부네는 또 누구이며 그 아들 딸들은 뭐란 말일까. 그런데 흥부는 결혼이라도 했으니 아들딸이라도 낳았다. 요즘의 흥부 아내는 흥부를 선택에 주저함은 없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흥부처럼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낳기 불가능하다. 아니 낳기를 거부한다. 설사 흥부네에서 태어났다 한들, 재대로 배울 수가 있겠나, 하물며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공부라도 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가난은 돈 없다는 것이 먼저겠지만 단순히 돈이 없음으로 시간을 과도하게 소모시켜야 하는, 그러니까 시간의 가난도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즉 시간의 기회비용을 얻을 수 없단 뜻이 될 테니까 말이다. 

 

오래 전부터 다출산은 큰 축복이었다. 물론 축복의 기준은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준일 뿐이다. 태어날 아이들에겐 축복일 수는 없다. 다만 비의도적인 선택의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출산은 남자 아이를 많이 낳아서 가문이 크지 길 원했다. 다산의 상징이 그래서 고작 남근 사상이었다. 열심히 세 끼치고 열심히 수가 늘어나고 노동력이 증대되어 생산량이 늘어나서 부를 축적시키고 싶은 그 이기적인 욕심의 결과이다. 그런데 키우는 비용은 하나도 생각하지는 않았다. 많이 낳으면 키우는 비용도 많이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던 시대에서는 당연히 많이 낳는 게 좋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 얼마인지 투자를 먼저 생각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가끔은 투자 비용이 없음에도 태어났다는 것은 흡사 벌 받는 것과 같이, 태어 나는 순간 부터 원죄의 옵션을 달고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투자해도 쉬울 리가 없을 텐데 투자 하지 않고 어떻게 이룰 수 있는 자본의 시대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흔히 속담에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하겠지만, 개천이 무슨 용의 그릇을 담을 수나 있던가 말이다. 이제 개천은 실개천도 아니고 개천이란 개천은 모조리 말라 버리고 이끼 말라버린 돌덩이만 널려져 있다. 이무기도 말라 버려서 뼈만 남아 고사해버려 승천할 수도 없다. 개천엔 개구리나 살지 용이 용을 낳을 수 없을진대 극히 희박한, 어찌나 특출한 용을 우리는 개천에서 구하는 꼴이 웃습지 않는가 말이다. 유전자는 그렇게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간혹 돌연변이 같은 경우 하나 를 보고 속담을 지어낸 것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커다란 저수지에서 이무기가 거침없이 하늘로 승천할 용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시스템 같은 저수지 만들어 놓지 않고서 왜 개천 탓만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나 그런 사상적인 세뇌는 아니었을까. 절대 개천에서는 용이 나오지 않을 것이 뻔함에도 열심히 노력해. 그럼 비록 실개천일지라도 용처럼 하늘을 승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노력의 강요 내지는 노력의 세뇌 작용을 노렸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7 . 왜 기린이었을까?

아니 해필 목이 긴 기린을 아버지처럼 보였을까. 일반적으로 기린은 초원에서 높은 나뭇가지의 잎사귀를 긴 목으로 뜯어 먹을 수 있는 동물이다. 일반 초식 동물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돋아난 풀을 뜯어 먹지만 기린은 긴 목이 오히려 바닥의 풀을 뜯으려면 오히려 불편하게 되어 버린 셈이다. 진화는 독점적인 욕구에 의해서 목의 길이를 자꾸 길어 지게 했다. 목만 길어 진 것 뿐만 아니라 다리도 길어졌다. 자꾸 높은 나무에게로 먹이의 강력한 생존성이 수만 년을 이어 오면서 유전자가 그렇게 변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기린이라는 상징은 키가 높은 나무의 이상을 먹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높은 나무의 이파리가 아니라, 하늘을 자꾸 처다 보아서 목이 길어진 유전적 형질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윤동주의 시, "하늘을 우러러" 라고 노래 불렀듯이 기린에 대입된 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싶었던 것처럼 현실에서 깨금발로 서며 하늘을 우러러 보고자 했던 자신의 현실을 비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온갖 상상을 하게 된다.

 

현실의 바닥은 늘 질척거린다. 비가 오지 않는 메마른 먼지는 바람에 불어 재끼고 질척거리는 거친 땅에 서 있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하늘을 처다보고 긴 목을 빼며 비와 같은 단비의 기다림이 긴 목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늘을 처다 보니 목이 길어져서 결국 높은 나뭇가지 잎사귀라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현실의 아래를 내려다 보고도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꼭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우리가 우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을 그리워 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진 것은 없어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쪽수는 많지 않는가 말이다.

(PS : 독자로써 기린에 대한 별별 상상으로 의미 부여는 읽는 자의 고유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설사, 작가의 의도에 부합이든 불일치든 간에 말이죠.두서 없이 막 써갈겼습니다. 문장이 다소 거칠고 중구난방이라도 이해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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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피우라 부탁이라도 한듯

강가로 난 오솔길 가에

흐드러지게 온 몸으로 맞아

흔들거리는 노랑 풀꽃, 애기똥풀.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꼽아 본 적도

없었는데 한 결같이 길 옆을 수 놓고서

미풍의 강바람은 온통 어루만진다.


저 너머 먼 산 아래로 점점 사그라드는

노을 빛에도 풀꽃향이 합쳐 지고

눈 부시게 하루를 과거의 시간으로

차곡차곡 포개 놓는 애기똥풀꽃.


그들의 육신 사이로 헤집으며 

돌아나는 선혈은 차라리 밝은 노랑.


애기 기저귀에 뭍은 시큼한 빛깔처럼

흩어지는 꽃잎파리 세계의 무지개는

엘로 보우만 가득했다.


노란 물감으로 물들인 노란 물결,

잊지 않겠다는 그 약속이라도 한듯이,

떠난 이가 기억해 달라며

피우라 했던가 보다.


------------------------


PS  : 강가를 한 서너시간 걸었더니

혼자만이 즐기는 화원의 강길에는

꽃들이 만발하더이다.


노란색을 보니 그 아이들의 어릴적

기저귀가 생각 나더군요.


잊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건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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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5-07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순간 노랑 나비가 앉아있는 줄 알았어요^^

yureka01 2016-05-07 09:16   좋아요 1 | URL
네 네 노랑나비가 빛 속에서 날고 있는 것처럼요.^^.

세실 2016-05-0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시인이셨군요^^
저도 어제 혼자 산책하다 애기똥풀 보고는 잠시 멈췄지요.

yureka01 2016-05-08 08:0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시인은 과합니다...
그저 사진에 붙인 글이었습니다^^.

2016-05-07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8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5-07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어떻게 이런 사진을! 한 폭의 동양화입니다.
배경은 담묵 처리, 노란색 꽃은 채색을 하셨고요.

yureka01 2016-05-08 08:04   좋아요 1 | URL
네 빛조절^^이었지요..
꽃 사진은 소재가 너무 평범해서 빛으로 채색하지 않으면
식상한 사진이 되거든요...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피해를 당하였다. 이 문제가 좀 더 일찍 부각되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대한 논란은 제차하더라도, 우리 삶에 있어서 좀 더 근본적이고도 심층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싶었다.

 

가습기에 담긴 물이 가습기 통에 오래 머물게 되어 각종 먼지나 이물질 등으로 세균이나 곰팡이가 번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가습기 대신에 건조한 실내 공기에 습기를 공급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가습기가 상당히 편리하니까. 그런 편리함으로 고인 물에 세균이 번식하여 건강에 해로울 수 있으니 여기에서 또 살균제를 붓게 된다.

 

인간의 욕구는 늘 앉으면 눕고 싶다고 했던가, 인간의 편의성은 끝이 없다. 인류가 과학문명을 발전시킨 배경이기도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일 편한 것은 죽음 이후다. 그러나, 죽음 이전까지 최고의 편함을 추구하다 보니 벌어진 편리함에 대한 대가 치고는 참 가혹한 사건이었다.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질 때마다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이고도 공적인 책임의 부분을 이익 앞에서 전혀 도외시한 부분은 지탄받아야 하고 이에 분명한 책임과 보상이 뒤따라야 할 심각한 문제였다. 

 

가습기 대신에 다른 것으로 수분을 공급하는 방법으로 부지런을 떨었더라면, 혹은 설령 가습기를 놓아 가동했어도 물통을 자주 세척하는 약간의 불편을 겪었더라면,,,,이라고 하는 아쉬움은 상당히 크다.

 

자본은 항상 그 이면의 가면성이 있다. 돈을 지불하는 대신 편리함을 구입하고 세련됨을 구입하겠지만 자본의 속성은 윤리성과는 사실 크게 신경 안 쓴다. 사회 규범적으로 기업은 사회적으로 공헌 등등 따위를 운운하겠지만 이건 허구다. 철저히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비용에 대한 손익의 차익 실현이 최대의 목적일 따름이다. 자본의 전략은 간단하다. 편리함이 최고의 선이며 불편함은 최악이라고 협박한다. 이거 써보면 건강해진다는 세뇌는 하루 종일 떠들어 댄다. 그러나 이 속성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 결국 당한다. 조작된 증명과 근거 의 주장에 건강이 위협을 받은 셈이다. 돈에 매수당한 학자는 양심을 팔고 실험 근거를 왜곡시키며 충실한 자본의 개로 전락당해 버렸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 여기서 운동은 몸을 불편하게 해서 땀을 흘리고 에너지를 소비시켜서 몸이 불편에 대해 저항을 위해 튼튼하게 만드는데 있다. 그러니까 편한 운동은 없다는 이야기다. 고된 운동일수록 운동의 효과 작용으로써 몸이 더 건강해지는 원리이다. (더 화나게 운동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치에서 편리에 길들여진 시대는 약간만 불편해도 에너지를 소비시키게 되고 누군가가 대신하게 만들고 참지를 못한다. 뭐든 그렇지 않은가? 과도한 안락감은 없는 이만 못하다. 존재의 최고의 안락은 죽음일 텐데... 그렇게 빨리 안달할 것도 없지 않나? 좀 불편하더라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좋을 텐데.... 조선시대도 다 사람이 살았다. 지금은 그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약간 불편하게 살아도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오히려 불편에서 오는 부단함에서 찾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약간의 불편함이 주는 건강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시대가 난 불편하다. 이론과 지식은 일상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나마 알량한 지식과 이론이더라도 행동으로써 움직임이 교감과 공감이  떨림이 되고, 이 떨림이 감동의 울림으로 연결되는 시대가 그리울 따름이다. 오늘날의 시대가 불편한 이유가 몸은 점점 편리함을 가지게 되지만 오히려 마음은 녹초가 되어 가는 우울한 시대라는 점이다. 왜 자살자가 많은 현상과도 같지 않을까 한다.

 

삶이란 생존에서 멈춰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존재가 사라질 때라야만이 정지된 멈춤이 있을 뿐이다. 지금도 우주는 끊임없이 무한대의 확장과 팽창의 변화를 하고 태양은 은하의 중심으로 돈다. 지구는 단 한 번도 자전을 멈춘 적이 없고 공전을 쉬어 간 적이 없다. 물질의 양성자는 고유의 진동주기로 영원히 떨고 있고 한 방울의 피가 온몸을 몇 번이나 돌고 있는가 말이다. 흐르던 피가 멈추거나 박동하던 심장이 멈추지 않아야 삶이 있는 것과 같이 세포의 증식과 사멸과 물질 간의 움직임은 전방위적으로 이동하며 돌아다닌다. 그런데 왜 인간은 멈춘 것을 편리함이라 여기는가. 에너지의 이동은 뇌의 통증과 고단함을 수반한다. 살아 있는 한 존재하는 한, 감각은 늘 호불호의 기로에서 춤을 춘다. 죽지 않는 이상 움직임은 끝이 없다.

 

어느 산악인의 악전고투하는 움직임이 결국 산 위에 오른 그 희열을 맛보는 삶에 만나는 행복감과 기쁨의 역설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휴일이다.

 

가까운 뒷산이라도 오르자. 난 가까운 동네 앞 강이라도 갈련다.

 자, 무브 무브, 레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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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5-05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휴일 즐겁게 보내세요.^^

yureka01 2016-05-05 09:49   좋아요 3 | URL
오늘은 어린이날..어린이처럼 순수하게 즐거울수 있는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
날씨 좋습니다..봄 빛에 마음 반짝이는 시간 되시구요 ㅋㅋㅋ

2016-05-0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6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2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2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16-05-07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생각하는 것과 비슷해서 반갑네요. 인간이 편리에 길들여지는 바람에 다들 자본주의에 물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과 얘기하다보면 무엇을 가졌는가, 어떻게 하면 돈 걱정 안 하고(불편을 겪지 않고) 살아갈까 를 고민하고 있더라구요.

yureka01 2016-05-07 22:12   좋아요 1 | URL
네 인생이 오로지 돈돈돈이 전부라면 대체 우린 돈을 빼고나면 뭐가 남을건가..싶어서 서글픕니다.
태어나지 않아서 돈돈돈 안그려도 된다는 게 때론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
참 공허하고도 슬픈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연대가 무너지고 남는 것은 오로지.단 하나라면..부질없는 세상 아닐까 싶어서요.

yureka01 2016-06-10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절 주절 떠벌린 글도 페이퍼 당선으로 채택해 주시고,
신기하게 감사합니다.

(두리번 두리번 뭐지??? ㄷㄷㄷ)

2016-06-11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2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06-12 19:28   좋아요 2 | URL
이제 보이시죠? 위에 답글^^..

2016-06-12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루뭉술하게 사진이라고 하는 이해는 단순히 이미지의 총체성이라고 단정하겠지만, 그러나 다양한 카테고리가 존재하고 무수한 주제가 있다. 그런데, 사진은 이런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반드시 기계 또는 도구에 의해 철저히 종속된다. 다시 쉽게 말해서 주제에 걸맞은 사진 장비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기본적으로 카메라와 렌즈를 필두로, 빛의 효율적으로 제어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각종 조명장치와 빛에 걸맞은 다양한 필터들, 물리적은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한 삼각대, 모노포드 등 많은 장비들이 주제에 따라 필요성이 달라진다.


이에 따라서 사진의 목적과 주제에 의해서 도구는 필수적으로 가춰질 때 가능한 것이 사진이다. 예를 들어, 누드나 인물 사진, 어떤 제품이나 상품 이미지 사진은 세팅된 스튜디오와 조명이 반드시 있어야 가능하다. 명암에 따라 제품이 어떻게 화장을 하고 선을 보일 수 있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조건이다. 그저 단순히 사진이라고 해서 카메라만 있다고 다 찍어 낼 수야 있겠지만 조명도 없이 찍는 사진은 그저 이미지일 뿐이지 웃음거리이고 제품이 집중도는 형편없다. 보잘것없을 가능이 많은 사진은 안 찍는 이만 못하기 때문이다. 주제나 테마에 도구가 세팅되지 않아 최적화되지 못한 사진은 사진이 용도에 맞게 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진가들이 있다고 하나, 모든 사진가들이 전방위적으로 모든 분야에 대한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스튜디오에서 전문적으로 인물 사진을 위시해서 모델 사진에 특화되기도 하고, 제품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상업용 사진을 공급하는 작가가 그래서 있는 이유가 있다.


적어도 무슨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려면 그 작가가 찍어 온 사진의 레퍼토리를 꼭 한 번쯤은 보고 판단을 해야 한다. 전혀 다른 분야의 사진을 찍어 달라면 참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고, 자칫 오해한다. 부탁했는데 들어 주지 않음에 대한 섭섭함이 크게 일어난다. 사진가가 내내 풍경 사진만을 찍어 왔는데 사진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켜 놓고 증명사진을 찍어 보라면 상당히 난감한 입장에 처해지는 이치와도 같다. 사진의 상업적인 분야는 상당히 전문성을 요하고 클라이언트의 주문에 부합하는 사진을 찍어 내야 하는, 그래서 그 주문에 걸맞은 최상의 품질을 보장해주어야 하기에 분야가 달라서 경험이 미천한 사진가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저 간단히 찍어만 달라고 해도 난감하다. 사진가는 체질적으로 어떤 주문(자신이든 타인이든)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사진을 찍기를 늘 고민하는 게 체질화되어 있는데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한들, 이론적으로 알고는 있다 하더라도 실제 경험이 많지 못하다면 상당히 어렵다. 사진이라고 해서 모든 사진을  다 잘 찍어 낸다면, 전문적인 사진 분야는 무의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런 전방위적인 사진가는 없다. 아니 있다면 사진 천재이든가 둘중 하나이다.


간혹, 사진을 찍는다는 소문이 났을 때, 참 난감한 것이 무슨 행사용 사진, 어떤 물건의 제품 사진을 찍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 올 때이다. 일단은 무슨 사진이든 찍어 왔으니까 모든 사진을 다 잘 찍을 것이라는 전제부터 깔고 부탁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혹은 가족 관계라면 더더욱 이런 부탁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그런 사진 찍기 어렵다고 하면 왜 못 찍냐에서부터, 혹은 찍기 싫어한다는 등의 오해와 섭섭함을 직간접적으로 토로한다. 마음이야 백번 잘 찍어 주고 싶지. 그런데 그런 행사에서나 또는 그런 제품의 사진은 내가 찍어 온 분야가 전혀 아니고 찍어 본 경험도 전무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일단 사진 찍어 왔으니까 다 잘 찍는다라고 오해한다.

단 한 번이라도 이때까지 무슨 사진을 찍었으며 어떤 사진의 작업을 해왔는지 본 적도 없이, 어떤 사진적인 주제를 해왔던지 관심도 없었으면서, 단지 그저 사진이 필요하니까, 이왕 잘 찍을 거니까 요구를 하는 것일 텐데, 참으로 호응하기 어려운 부탁이다. 하다못해 여성 잡지에 나오는 인물사진이나 제품 사진이 어떻게 찍혀지는 것인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하다못해 신문에 꼽혀 있는 지라시에 들어간 사진이라도 유심히 본적이라도 있는가, 그런 사진들도 그 나름의 방식과 방법을 가지고 찍은 사진들이라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일반인의 결혼사진은 결혼식이라는 연출된 장소에서 찍을 수 있는 기회는 한 번이다. 사진을 실수하면 두번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 사진 제대로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해서 다시 촬영은 어렵다. 사진 제대로 안 나왔다고 해서 결혼식 두 번 했다는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진을 결혼식을 전문적으로 찍는 프로 사진가들에게 의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순전히 돈 아끼려는 욕심이자 이기심일 뿐이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사진을 찍어 왔던 사람을 메인 사진 기사로 쓰는 것은 사진 촬영비 아끼려는 욕심이거나 사진을 별로 중요하지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혼식 사진 한번 못 찍어 봐라. 평생을 두고 씹힘을 당하거나 두고두고 원망성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한번 마음에 안 들었던 사진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좋아질 리는 없던 이유이다. 응당한 욕구에는 적절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하여간 생짜배기 공짜성 사고방식은 요구에 적합하리라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벌써 오류이다.

비근한 예로, 어떤 제품 사진도 마찬가지다. 무슨 제품의 특성, 제품의 가치와 의미, 제품 가격에 걸맞은 이미지의 결정성 등등이 홍보자료로 쓰이게 될 텐데 사진 못 나와 봐라, 어디 그게 설득력이 있어서 제품이 팔리겠냐 말이지. 그래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최적화된 사진을 업으로 삼는 상업 사진가가 필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최소한의 품질 정도는 보장받는 길이니까.


최근에 어떤 제품에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 !~참 난감한 고민) 비교적 길이가 4-5미터가 되는 큰 제품이었는데 이걸 찍어 달라고 한다. 카메라가 단순히 크니까 사진이 잘 나올 거라는 몰이해적인 부탁이었다. 잠깐의 부탁이더라도 선 듯 내킬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때까지 사진의 빛을 쫓아 다녔지만 인공적인 조명을 써가며 제품의 카탈로그에 넣은 만한 사진을 찍은 경험도 없고 그런 홍보용 카탈로그 사진에 집중해서 담을만한 조명이나 스튜디오조차 경험도 없고, 그런 장비를 전문가처럼 구비된 것도 없다. 하여간 그런 분야에 걸맞은 사진을 찍기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충족되는 게 없었다. 따라서 장비가 준비가 안되면 아무리 노력과 지식 가지고는 커버할 수 없는 것이 사진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다. 사진은 철저히 도구에 종속된다고 ㅠㅠ.

게다가 제품 가격도 몇백만 원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비교적 비싼 가격의 제품을 홍보용 사진을 찍는데 단순히 카메라 크다고 사진이 잘 나올 거라는 생각은 어이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성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라도 약간 개념이라도 잡아야 한다. 적어도 부탁 정도 하려면 이런 사진을 찍기에 적합한 사진 포트폴리오 정도는 관심을 가지고 한 번이라도 봤더라면, 이렇게 부탁한다고 해서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정도는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 한 번이라도 블로그 들어와서 어떤 사진을 주로 찍었는지 보기나 했더라면,,,, 그 부탁에 적합한지 아닌지는 금방 판단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니라면 전문 작가는 왜 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나는 상업적으로 사용될 만한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다. 자신이 순수한 클라이언트가 되었지, 나 이외의 클라이언트는 없었다. 아니 만들지도 않았다. 사진으로 밥 먹고살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누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어 준 적도 없다. 나의 사진 논리가 상업적으로 이용될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결국, 예상한 바대로 우회적으로 들리는 이야기가 섭섭함! 이었다. 내 진즉에 그럴 줄 알았다. 이 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었으니까. 너무나 뻔한 감정적인 소모들이었다. 나도 등달아 사진에서 심리적인 피로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사진의 슬럼프에 빠져 사진 찍기에 대한 재미도 찾을 수 없었는데 엎친데 덮쳤다고 해야 할까 싶었다.

역으로, 사진 부탁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무슨 사진을 찍어 온 것인지, 어떤 사진적인 주제에 관심을 가졌는지 전혀 생각한 적도 없었으면서, 필요할 때 불러다 쓸 오분 대기조처럼 준비된  사로로부터 쏘는 사진 찍는 군대 수준이었냐는 것이다. 그래서 더 답답했던 것이다. 꼴랑 사진 하나 가지고도 이 모양인데, 기업을 상대로 cf 작가나 크리에이터들은 얼마나 오죽하겠는가. 그 답답함을 !~~

사진이라도 다 같은 사진이 아니다. 더욱이 카메라라고 다 같은 카메라도 아니다. 렌즈, 필터, 조명 장치, 각종 사진 도구에 따라 사진은 전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치중하는 사진의 주안점도 다르다. 요리 사진, 인물 사진, 종군 사진, 스튜디오 사진, 풍경 사진 등등 다양하고 많은 분야의 카테고리들 중에 한 부분만을 다룰 수밖에 없다. 고작 취미 삼아 찍는 사진이야 어설프게 흉내라도 내는 거야 누가 따질 게재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유이다. 그런데 이 많은 부분에서 전문적인 상업 사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튜디오 하나 마련하려고 해도 장소부터 수천이 들어갈 수도 있고 장비도 마찬가지로 수 천만 원에서 수억은 족히 든다. 그런 자본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고 경험과 배경의 지식이 깔려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다. 물질적인 투자와 이론적인 지식의 시간 투자가 병행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걸 싹 무시하고 용도에 맞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 충족되어도 사진의 기술에 따라 어려운 마당에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는다면 신이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흉내 낸다고 그게 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투자가 없어도 가능하다면 뭐 하러 수천만 원씩 투자하는 허튼 돈을 쓰는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투자가 이루어져야 이익이 발생하는 거다. 투자 없이 이익이 발생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사기 수준일 것이 뻔하거든. 사진은 완벽한 수준은 될 수 없어도 투자에 대한 품질은 그래서 사기가 아닌 것이다.

자 정리하자. 사진에 있어서 부탁은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한 기초적인 포트폴리오 정도는 보고해야 한다. 별거 아닌 가볍게,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을 했다고 하더라도 부탁을 받은 사람은 자칫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느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 사진 찍어서 홍보용으로 사용하려면 부탁을 하지 말고 대가를 주고 의뢰를 하시라. 그래야 정당한 것이고 부담이 없다. 세상에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아주 지극하고도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것이 때로는 사기 칠 것을 요구하고 허위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갈등과 오해를 일으킨다. 사전에 미리 전제된 인식의 차이로 비롯되었다. 기초적이고도 아주 작은 것에서 깔려 있는 조그마한 인식이라도, 그래서 꼭 가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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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5-04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

yureka01 2016-05-04 13:15   좋아요 2 | URL
우리 사회의 일상적이고도 치명적인 단점이거든요..
하늘에서 공짜가 떨어지길 바라는 욕심들..

몇 년전 대구에서 4조대 사기 사건도 다 그런 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장소] 2016-05-04 16:40   좋아요 3 | URL
세상에 공짜 없죠 .
제 기본적 생각도 그런 주의라 ㅡ가끔 호의와 선의 사이에서도 무조건 기쁨을 느끼길 바라는
부분들을 놓치곤 할때가 있어서 참 어렵곤 해요.
일과 사적인 부분 ㅡ잘 분리하는 게 중요한것 같아요
감정처리도 ..그렇고요..^^
갚을 건 많고 ..날로 경기는 어렵고 ..그렇습니다.ㅎㅎ

2016-05-04 16: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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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5-05 00:58   좋아요 2 | URL
봄바람에 돌개바람이 거세더라구요..
낯설은 돌개바람..ㅎㅎㅎ

편안한 시간 되시구요~^^.

cyrus 2016-05-04 16: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직 사진을 보는 방식을 잘 모르지만, 유레카님이 사진에 대해서 진지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신 심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yureka01 2016-05-05 00:57   좋아요 2 | URL
사진에 있어서 만큼은 순수함을 가지고싶어요..ㅎㅎㅎㅎ
순수는 절대와맥이 통하는거라서..

2016-05-04 1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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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0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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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18: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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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0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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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2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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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0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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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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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09: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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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1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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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6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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