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들어가면서,
우선 책 소개부터 간단히 복기하자면, 이 책은 아주 짧은 단편이며 책의 분량도 얼마 되지도 않아 빠르게 읽힌다. 특히 소설 치고는 문체가 상당히 간결하고 깔끔하다. 문장의 호불호는 일단 제쳐 두더라도 문장을 읽어 나가는데 있어서 거침없이 쉽게 읽힌다는 점도 특히 주목할 대목이다.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상업고(요즘에 정보고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곳도 많다.)를 다니는 주인공이 동네 형뻘인 선배로 로부터 소개받은 시급 3천 원의 편의점 알바를 하다가 주유소 알바를 거쳐서 시급 1만 원 하는 지하철 푸시맨이 되었다. 아침마다 분비는 지하철에서 아버지의 등을 지하철에 꾸겨 넣어야 하는 심정이 잔잔하고 약간 울렁거리게 나열하고 있다. 아버지의 직장의 위태로움에 이은 해직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겹쳐진 주인공은 그 부담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이어지는 아주 단순한 스토리이다. 아버지의 직장에 대한 해고의 불안이 소설의 말미에는 급기야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 실종신고를 내고 아버지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를 못한다. 그리고 푸시맨은 지하철에서 환영을 본다. 기린이었다. 기린이 마치 아버지의 환영으로 오버랩되어 보이고 아버지가 맞는지 묻는다. 아버지에게 토로하듯이 기린에게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가 맞는지 묻지만 기린은 "(당신의 사정이) 그렇습니까? (나는 단지) 기린입니다."로 대답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딸아이가 읽고 싶다고 구매를 독촉도 하는 차에, 마침 딸아이의 선물이 이 소설책이었다. 딸아이의 선물 선택이 흡족하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이 책의 스토리가 마음을 자극하는 게 상당했던 모양이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딸아이가 자신의 입장에 대한 고민을 엿보였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찡! 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비교적 얇은 두께와 문장의 간결성으로 인하여 가볍게 빨리 읽긴 했지만, 다 읽고 난 후의 여운이나 잔여감은 하루 종일 내내 지속되었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한 단편적인 민낯을 보는 듯했고 흔히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신분적인 차별에 대한 용어로써 금수저니, 흙 수저니라고 하는 세태를 대표하는 뉘앙스를 떠올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2 . (자본주의 시대에의) 산수.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정보력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본의 수학은 필요 없이 산수의 대물림이라고 했다. 더하기와 빼기, 곱하기와 나누기의 사칙 연산에 따른 산수적인 존재의 유전성 앞에서 주인공은 악전고투와도 같은 푸시를 한다. 지하철의 정원을 훨씬 넘어선 초과 인원을 꾸겨 넣기 위한 등을 밀고 사람들은 자본의 산수를 위해 분비는 지하철에 등을 떠밀린다. 이런 대물림과 되돌이 표같은 기호가 실질적인 자본적인 행위의 대물림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물려받은 재산이 아들의 성장에 발판이 되고 발판을 통하여 이룩하는 축적은 고스란히 그 아들에게로 도돌이표 같은 발판이 되는 형국의 상황은 결국 기회적인 균등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시급 만 원에도 달가워해야만 하는 비정규직 파견직 일용직의 고단한 삶은 그대로 우리의 등을 밀어 댄다. 비정규직 시급 일당제의 푸시맨이 회사에 출근하는 정규직의 등을 밀고 있는 셈이다. 일어서기 힘들 때, 지팡이 하나가 참 요긴하다. 그러나 그런 지팡이는 아무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 시대의 지팡이 하나 없는 자들의 푸시는 늘 고단한 일상의 힘겨움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팡이 하나 건네주지 못한 아들들에게 무어라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다. "미안하다"라는 말.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버지도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뭐가 미안한지는 물어보지도 않는다. 이젠 그 미안하다는 말조차 식상한 나머지 다른 할 말이 없을 때 대용으로 튀어나오는 무미건조한 말이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딱히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고, 이거 밖에는 다른 말이 할 수도 없는 그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된 시대였다. 아버지의 산수와 아들의 산수는 차이는 있더라도 산수의 속성은 닮았다. 마찬가지로 미안함도 닮았다. 나도 내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가끔 한다. 그저 미안할 수 밖에 없는 인연으로써 우리는 만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맺음에서 엿보이는 그 내면적인 미안함들. 그런 수학을 가르치지 못하고 산수를 겪어야만 하는 미안함이다.
최근 뉴스에서 로스쿨의 입시에 있어서 자기 소개서 항목이 문제가 불거 졌다. 입시생의 여건, 즉 입시생이 관계 맺고 있는 사람의 직위를 자기 소개서에 서술하였다고 했다. 주로 고위직 내지 법률가 등등 사회적으로 기득권층을 이루는 집안의 아들 딸임을 직접적으로 표시된 부분이었다. 아버지가 어디 법원장, 어디 변호사 어디 시장 어디 고위직임을 나타내고 이를 반영이라도 해달라는 식의 무언적 언질 했던 것이다. 금수저는 그래서 반은 따고 들어가는가? 싶었다. 우리 아버지가 농부라고 소개한 것은 단 한 건도 없고 어부도 없고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라고도 치킨집 사장님도 없다. 아버지는 소개 시킬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따른 차별의 시선을 그래서 엄연한 묵시적인 반영을 노리는 것이리라. 대놓고 주장이 아니라, 아버지가 이 정도니까 너희들은 알아서 먼저 기어라 라는 식의 압박이자 협박이고 이에 작당같은 동조 시스템이라면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래서 우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아버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듯이 나도 자식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비굴함이 떠 올려 진다면 이 시대가 진정 깝깝하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배운다. 오래전 과거에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 것에 대한 태생적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배운다. 역사가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받으면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목적이 그저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면 다 된다는 식의 사회 시스템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은 요원할 수만은 없는 당위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까지 아버지 더 이상 우리들에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당신 자신의 산수가 산수로만 그치지 않고 더 멋뜨러진 수학의 미분과 적분을 하며 궁극으로 수렴하는 비상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서 말이다.
3 . 각자도생의 전쟁터.
노량진 같은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여기가 총칼이 없어도 전쟁터라는 것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다. 지금 우리들의 전쟁에 임하는 젊은이들의 각자가 가진 전투 자세라는 것이다. 하다 못해 대학 도서관 열람실 등에서 오늘도 치열한 입시 전쟁터로 내 몰린다. 우리 시대가 얼마나 희망이 없는 것인지 측정하는 그 척도의 기준으로써 공무원에 응시하는 비율이다. 이제는 대학 입학할 때부터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소위 가진 사람들은 온갖 스펙이다 뭐다 요란을 떨지 않을 수 없겠지만, 여기서도 끼이지 못한다면 선택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 공무원 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교육, 학업, 지식 따위는 없다. 오로지 시험에 나오는 지식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부가 되어 버렸다. 창조성? 또는 창작성? 따위는 배부른 놈들이나 지껄이는 레퍼토리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공무원이 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과 우리는 공무원이 되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단순히 인식의 격차와는 다른다.
젊은이들의 최선의 도전이 바로 공무원 시험이었던 것이다. 철저한 상명하복적 체계라든가 조직의 구성원으로써 살아가야 할 답답함은 삶의 안정성에 비해서 간단히 무시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젊은 친구들은 너무나도 잘 안다. 온갖 스펙과 좋은 대학이고 치열한 입사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다시 업무의 경쟁한다. 대리 달고 과장 달고 부장 달기까지의 그 고단함을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알량한 몇 푼과 자동차 아파트, 그리고 먹고 살아 낸다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나이 50도 되기 전에 해고의 불안은 늘 먹고사나이즘의 불안정성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꼴이다. 그러니 연봉이 다소 빵빵하게 많이 준다 한들, 많이 주는 게 많은 게 아니란 것을 미리 알아차린 것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작은 연봉이더라도 9급 공무원 월급의 박봉이라고 한들, 그 불안정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어느 대형 온라인 사이트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설문이 바로 대기업 직원?, 또는 9급 공무원의 선택지에는 늘 공무원이 항상 이유 있는 1승을 챙긴다. 기본적으로 관료는 창작은 없다. 그들의 일은 관리하고 조정하고 서비스하는 곳이라면, 우리 시대의 각자도생하는 부질없는 비창작성은 공무원이 최고이다. 희망. 또는 발전. 이런 개념은 이제 버리라는 시대에 암울한 서글픔 들만 가득하다.
일부 꼰대 아저씨들은 흔히 그런다. 자기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러지 않았겠지만, 일단은 과도한 학자금의 대출 빚이라는 마이너스에서 출발하지는 않았잖은가? 말이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자기처럼 그러지 말라는 논리는 유아적 가치 함물된 발상 밖에는 되지 않는다. 알지 않겠는가. 지금의 이 시스템을 만들고 일조하는데 크게 이바지 한게 누구라는 거 말이다. 충실한 협력자가 되었던, 조력자가 되었던 지간에 의도한 바는 없을지라도 뭐 하는지도 모르고 매몰된 채로 사회는 점점 헬로 접어 들게 했다는 것을 부인하면 자기 부정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4 . 아르바이트 시급 만 원의 꿈 혹은 월급 200만 원의 꿈.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사무직, 생산직 등 모두 포함, 혹은 비정규직 일용직 포함)을 전체 직장인으로 나누었을 때 자치하는 비중이 얼마인지 통계를 정확히 확인해보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자는 소수의 독점된 자본으로 뭉쳐진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한다. 대기업에서 만든 아파트, 심지어 대기업에서 만든 건축 자재로 지은 집과 대기업 패션회사에서 만든 의류, 대기업 회사에서 만든 식료품 등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대기업에서 생산되고 서비스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컴퓨터, 복사기, 자동차, 심지어 전기 선로를 까는 작업도 모두 대기업에서 만든 것들이고 상하수도, 도로, 항만, 공항등 일상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이 전부다 대기업의 것들이다. 심지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유심히 보면 중소기업에서 나온 제품과 서비스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또 통계를 찾아 보면 전체 일하는 사람들이 시급 만 원에 해당하는 한달 급여 200만 원 이상 소득자가 50%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구성 체계상으로도 상위층에서 하위층으로 내려 갈수록 그 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이런 불균형적인 소득의 구조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야 조건에 처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연대와 공감은 없다. 그러니 협력도 없고 하루를 버티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다. 교육적 가치의 부재와 함께 빚어낸 소위 하부 구조의 냐약함은 이 사회의 기초를 지지하기 어렵다.
플라톤이 말했던가? 정치는 인간이 구사하는 최고의 덕이라고 했듯이, 정치의 덕이란 역활은 대기업처럼 가만 나눠도 자기들의 역량으로 잘 사는 사람을 위해서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며, 가난하고 못 배우고 허약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역량이 집중되어야 할 것이며, 법과 제도, 교육과 문화가 지향할 점이 바로 약한 사람들에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역량이 반대로 향하고 있다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제는 사회구성원 전체가 패러다임을 바꾸면 안될까라는 절박감은 점점 축적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의 낙수효과는 최근에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그렇다면 이제는 낙수효과를 버리고 분수 효과를 한 번이라도 해보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회적이 담론이 구축되었으면 한다. 가장 가슴 아픈 현상은 한창 배우고 공부할 시간에 과도한 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공부가 아니라 당장에 학자금 대출이다 생활비를 벌어야 할 처지라면 그렇게 시간을 소비시키게 되면 막상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가난이 고스란히 계속 진행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심층 구조에는 임시직이 오히려 비용을 더 많이 들이는 구조로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규직보다 더 낮은 편이다.
5 . 일해도 가난한 워킹 푸어.
성경에 일하지도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이는 열심히 일하면 먹을 수 있다는 확실한 전제가 깔려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담보가 없는 시대라면, 일 열심히 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열심히 일 해도 밥 먹고 살기가 퍽퍽하다. 열심히 죽어라 일 해도 축적될 건더기가 없는 자산 형성의 불가능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만으로는 불가능함과 같다. 비정규직은 늘 시간에 쫓긴다. 근로기준법에 있는 연차와 월차는 해당사항이 없다. 비정규직에게 월차와 연차는 없다.낮에 은행 볼일 한번 보러 가기 어렵다. 시급에 따른 소득은 다른 일이 생기면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연장근로와 잔업으로 그 부족한 시급을 시간을 때운다. 그렇게 젊은 날에 먹고 살 만큼 벌다 보면 일을 못할 시기에는 소득이 없고 벌어 놓은 돈도 없으니 노령의 나이에도 하루를 벌어야 살 수있는 저소득층에 편입할 뿐이다. 누군 한탄한다. 열심히 일했는데 왜 늘 이 모양이냐고 한다. 이제는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이 모양의 상태에서 벗어 날 제 간이 개인에게는 없다는 뜻이다.
6 . 신에게 벌받기 위해 태어났는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흥부에게 있어서 로또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였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와 흥부에게 건넨 박 씨는 흥부의 인생을 역전시키기 위한 로또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부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라도 자기 집이 있었다. 흥부의 아들 딸들은 아버지가 그나마 박 씨에 금은 보화가 가득 담긴 로또 터졌으니 너무나도 다행이었지만 지금의 흥부 아들 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흥부 아버지는 뭐가 못나서 놀부네 삼촌이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다 차지하고 나의 아버지 흥부는 받지를 못 했던 것일까. 흥부 아버지는 서자 출신이었나? 싶을 정도로 전래동화가 참 가혹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흥부네는 또 누구이며 그 아들 딸들은 뭐란 말일까. 그런데 흥부는 결혼이라도 했으니 아들딸이라도 낳았다. 요즘의 흥부 아내는 흥부를 선택에 주저함은 없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흥부처럼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낳기 불가능하다. 아니 낳기를 거부한다. 설사 흥부네에서 태어났다 한들, 재대로 배울 수가 있겠나, 하물며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공부라도 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가난은 돈 없다는 것이 먼저겠지만 단순히 돈이 없음으로 시간을 과도하게 소모시켜야 하는, 그러니까 시간의 가난도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즉 시간의 기회비용을 얻을 수 없단 뜻이 될 테니까 말이다.
오래 전부터 다출산은 큰 축복이었다. 물론 축복의 기준은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준일 뿐이다. 태어날 아이들에겐 축복일 수는 없다. 다만 비의도적인 선택의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출산은 남자 아이를 많이 낳아서 가문이 크지 길 원했다. 다산의 상징이 그래서 고작 남근 사상이었다. 열심히 세 끼치고 열심히 수가 늘어나고 노동력이 증대되어 생산량이 늘어나서 부를 축적시키고 싶은 그 이기적인 욕심의 결과이다. 그런데 키우는 비용은 하나도 생각하지는 않았다. 많이 낳으면 키우는 비용도 많이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던 시대에서는 당연히 많이 낳는 게 좋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 얼마인지 투자를 먼저 생각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가끔은 투자 비용이 없음에도 태어났다는 것은 흡사 벌 받는 것과 같이, 태어 나는 순간 부터 원죄의 옵션을 달고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투자해도 쉬울 리가 없을 텐데 투자 하지 않고 어떻게 이룰 수 있는 자본의 시대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흔히 속담에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하겠지만, 개천이 무슨 용의 그릇을 담을 수나 있던가 말이다. 이제 개천은 실개천도 아니고 개천이란 개천은 모조리 말라 버리고 이끼 말라버린 돌덩이만 널려져 있다. 이무기도 말라 버려서 뼈만 남아 고사해버려 승천할 수도 없다. 개천엔 개구리나 살지 용이 용을 낳을 수 없을진대 극히 희박한, 어찌나 특출한 용을 우리는 개천에서 구하는 꼴이 웃습지 않는가 말이다. 유전자는 그렇게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간혹 돌연변이 같은 경우 하나 를 보고 속담을 지어낸 것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커다란 저수지에서 이무기가 거침없이 하늘로 승천할 용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시스템 같은 저수지 만들어 놓지 않고서 왜 개천 탓만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나 그런 사상적인 세뇌는 아니었을까. 절대 개천에서는 용이 나오지 않을 것이 뻔함에도 열심히 노력해. 그럼 비록 실개천일지라도 용처럼 하늘을 승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노력의 강요 내지는 노력의 세뇌 작용을 노렸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7 . 왜 기린이었을까?
아니 해필 목이 긴 기린을 아버지처럼 보였을까. 일반적으로 기린은 초원에서 높은 나뭇가지의 잎사귀를 긴 목으로 뜯어 먹을 수 있는 동물이다. 일반 초식 동물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돋아난 풀을 뜯어 먹지만 기린은 긴 목이 오히려 바닥의 풀을 뜯으려면 오히려 불편하게 되어 버린 셈이다. 진화는 독점적인 욕구에 의해서 목의 길이를 자꾸 길어 지게 했다. 목만 길어 진 것 뿐만 아니라 다리도 길어졌다. 자꾸 높은 나무에게로 먹이의 강력한 생존성이 수만 년을 이어 오면서 유전자가 그렇게 변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기린이라는 상징은 키가 높은 나무의 이상을 먹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높은 나무의 이파리가 아니라, 하늘을 자꾸 처다 보아서 목이 길어진 유전적 형질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윤동주의 시, "하늘을 우러러" 라고 노래 불렀듯이 기린에 대입된 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싶었던 것처럼 현실에서 깨금발로 서며 하늘을 우러러 보고자 했던 자신의 현실을 비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온갖 상상을 하게 된다.
현실의 바닥은 늘 질척거린다. 비가 오지 않는 메마른 먼지는 바람에 불어 재끼고 질척거리는 거친 땅에 서 있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하늘을 처다보고 긴 목을 빼며 비와 같은 단비의 기다림이 긴 목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늘을 처다 보니 목이 길어져서 결국 높은 나뭇가지 잎사귀라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현실의 아래를 내려다 보고도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꼭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우리가 우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을 그리워 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진 것은 없어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쪽수는 많지 않는가 말이다.
(PS : 독자로써 기린에 대한 별별 상상으로 의미 부여는 읽는 자의 고유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설사, 작가의 의도에 부합이든 불일치든 간에 말이죠.두서 없이 막 써갈겼습니다. 문장이 다소 거칠고 중구난방이라도 이해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