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중 인 명 선 ,,,)
우리집 족보에 나오는 순서는 못 외워도 조선시대 왕조는 꼭 시험에 나온다고 강요?아닌 역사교육으로 외우게 된 순서입니다.
글쎄, 기억해봐도 시험에 순서 나오는 문제는 없었던 거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았어요.
초기부터 참 말 많은 집안.
이른바, 콩까루성 가계도가 분진처럼 일어나 앞을 흐립니다. 쿨럭쿨럭!
뭐 일반 가정 집이야 그러려니 해도 말이죠.
이게, 하나의 나라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 집안이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집니다.
음. 함경도 위 쪽 사람이 한양을 접수해 버렸으니까요.
아비의 시작에서부터 위화도 회군이란 반역의 유전이 베여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 아비의 피를 물려 받아 아들 태종이 형제들을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흡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집안도 얼추 막장 드라마랑 비슷한 형국입니다.
하기야 그리스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바탕의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겠지만, 조선의 역대 왕실의 역사가 신화와 비슷한 경우라면 글쎄요.
웃습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태종의 아들이 넷 있는데 셋째 아들이 바로 세종입니다.
두 형을 제치고 왕으로 간택된 경우죠.
세종 다음에 큰 아들이 문종입니다.
문종은 병약하고 글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39에 문종이 12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2세 아들이 바로 비운의 단종입니다.
세종의 아들 중 첫째 문종, 둘째가 수양대군, 즉 세조입니다.
조카인 단종을 유배 보내고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게 되죠.
세종은 둘째 아들 때문에 근심이 많았죠.
둘째 아들이 혹시나 첫째 아들의 권력을 빼앗을까바서
세종도 두 명의 형을 제친 것처럼 근심이었으나
이 근심이 우려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재현되어 버립니다.
수양산에서 백이, 숙이처럼 수양하라고 수양대군이라 붙혔지만
수양은 수양만 하는 아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결론적으로 단종을 복위 시킬려는 의도가
결국은 단종을 일찍 죽게 만들었죠.
어린 아이가 아무런 힘도 없는데 그노무 명분이란 것 때문에
계속 복위운동으로 부추키니 세조는 이 화근을 없애려고
조카를 죽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 살아 있다면 복위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는 세조의 권력기반을 지속적으로 누수시키는 큰 위협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각색하자면, 다음의 예가 있죠.
세조가 많이 아꼈던 성삼문.
살려주고 싶어서 성삼문은 죽이기 싫어서,
"삼문아, 단 한번만이라도 나보고 임금이라 카면 널 살려주께.
진짜 나는 너를 버리기 실타 안카나.
부탁이다 한번만 왕이라 불러 주믄 안되겠나?."
"내가 미쳤어요? "나으리"를 "임금"이라고 부르게요.
내 사전에 두개의 태양이 없꺼등요.
절대 그럴 일은 없땅께로.
꿈이나 깨세요. 나! 으! 리!"
당신은 임금이 아니라 내가 모시는 나으리일 뿐이요."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니도 잘 알잖아.
임금이라고 한번만 캐도고.
고집이제 그만 부리라.
그 마이 했으믄 마이 했다 아이가.
니한테 자리도 줄테니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않되겠나?"
"절대 네버~
명분이 생명이라. 그렇게 배웠거등요.
어린 아이도 왕이라면 난 못버린다 아입니꺼.
나으리에겐 진짜 미안하여요.
나도 어쩔 수 없어라"
"햐. 진짜 말끼 몬 알아듣네.
도저히 설득이 안된다 카잉.
할 수 없다.
포기하마.
멀리 보내라.
내가 그만큼 애걸복걸, 걸걸걸 했고
살려 주고 싶은데 졸! 아깝지만 보낼 수 밖에.
아 따 고집 쎄네.
자네 고집 덕에 자네가 임금이라 부르는 단종이
죽게 만든거야"
성삼문은 그렇게 사육신과 함께 복위 운동을 발각되어 갖은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물론 일가 식솔들 남자는 모조리 다이, 여자는 노비로 ....깡그리 ㅠㅠ
< 말이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문초와 처형은 상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
그런 사연이 깃들 곳, 대구 달성군 하빈면에는 육신사가 있습니다.
사육신 6분을 기리는 사당이 있습니다.
참말로, 비통스럽기도 한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권력이 바뀌면 명분이 뭔지, 실리가 뭔지. 성삼문은 악바리로 오기를 끝까지 부려 명분을 지켰고 한명회같은 신하는 세조를 부추쳐서 당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12살짜리 애가 어떻게 왕이 되냐고 다그쳤으니까요.
또한 단종이 계속 살아 있다면 성삼문처럼 두개의 태양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반기를 들려고 할텐데 화근이 두려운 것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정당한 권력을 얻은 자리가 아니라 빼았은 권력은 그래서 늘 두려웠을 법도 했으니까요.
단종은 결국 성삼문같은 명분 때문에 일찍 죽을 운명이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그 왕이나 이 왕이나 그리 다른가, 비슷한 건가요?
아니면 죽어도 도 아니면 모 인가요?
대체 어느 게 맞는 건지,
딱히 이거나 저거나 분간키도 어렵긴 매 한가지입니다.
육신사에 들러서 바라보는 느낌이 그래서 가끔 갈 때마다
뭔가 울렁울렁이는 게 있거든요.
마침 연못에 연잎이 점점 가을 빛으로 녹색이 갈색으로 탈색되어 가고 있더군요.
(가을에 찍은 사진이라서 그랬겠죠.)
여기 연잎 하나가 검은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문의 처철한 비명과 신음과 가솔들의 처연한 눈물이 아직도 연잎에서 흐르게 만든 것인지 진정 모를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명분이냐 실리냐를 따지며 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가치를 잡아서 명분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지도 따지고 볼 일이고 또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명분에 대한 모든 가치를 뒤엎어 버릴 수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사에 제일 합리적인 것은 명분도 얻고 실리도 챙기는 것이라면 오죽 좋겠습니까만은,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는 것이고 늘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갈등을 때리게 된다는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흔히 드라마에서처럼, 사회적으로 돈 번 사람인데 가난한 시절에 함께하며 뒤바라지를 했던 조강지처를 차버리고 다시 돈많은 과부에게 주파를 던지는 한명회같은 사람도 어쩌면 실리를 택한 것을 비난도 합당한 것인지 물어 볼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실리이든 명분이든 그 실리에 대한 사리적이고 분별적인 의구심과, 명분에 대한 실질적인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인 자각도 동시에 해야만 한다는 것이니까요.
위의 성삼문처럼 두개의 태양을 부정함에 따른 단종이 일찍 죽게 된 것을 알았더라면, 성삼문같은 명분이 죽인 셈이 되는데 차라리 버리지는 못했을까 라는 성삼문의 고민은 알려진 바도 없고 고민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으니 알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인간이 가진 생존의 딜레마이자 도그마는 아닐까 싶습니다.....
PS : 오늘 토요일 출근해서 포스팅 두개 하니 시간 금방가네요 ㅎㅎㅎㅎ퇴근하고 사진찍으로 가야겠슴~
이웃분들 좋은 휴일 되시고요..
아참 바쁘신분들은 투표하시죠..물론 딜레마와 도그마를 가진채로의 가치 선택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