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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부터 봄 - 거친 삶,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이들에게
노익상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3월
평점 :
1. 들어가기에 앞서.
요즘 뭔가 허전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진 관련 책 출간 소식도 없다. 그러고 보니 작년 기준으로 사진 책 출간된 량이 몇 권 되지 않았지만, 올해는 점점 더 출간이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불길한 예상을 하게 된다. 물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출간해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하물며 사진 찍는 사람들도 사진 책은 거의 안 본다. 안 보는 책 내서 뭐하나 싶을 정도라고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진계가 제대로 진정한 예술 분야의 한 축으로 끼여 들려면, 사진에 관한 다양한 저술이 이루어져야 하고 더불어 사진의 감상평이나 또는 사진론, 사진 해설집과 같은 전반적인 사진의 학술적인 심층 분석하는 책들이 많아야 하는 등의 고도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사진 찍는 사람들은 찍기만 찍고 다른 사진의 글은 읽으려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분야가 전반적으로 예술적인 부분으로 이입시킬 만큼 수준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또한, 예술이라는 전체적 범주에 대한 이해력이나 공부가 상당히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카메라만 달랑 둘러메어 잡고 사진 찍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늘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공허한 이미지만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사진 찍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물어볼 여력도 남아 있지도 않고, 이런 판단도 생기지도 않는가 보다. 그저 즐기면 그만이겠지만 이 즐김이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학문적 배경이 없이는 그다지 오래갈 것도 못된다. 공허감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는 까닭이었으리라.
물론 이 시대가 비단 사진 뿐만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문학에서 나아가 예술까지 대학에서조차 퇴출 1순위로 지목되고 오로지 돈벌이 가 되는 분야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가 사람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왔던 게 결국은 인문학과 예술이 점점 고도화될 때서야 만에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은 근본적인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결국 철학 없는 시간에 떠도는 허무한 낭인처럼 넝마자로 허허로이 맴도는 이 시대의 허무를 돈만 가지고는 절대 충족시켜 내지를 못한다는 결정적인 문제점이다. 그러니 태어나 산목숨 억지로 끊어 내는 휴머니즘 파탄 시대는 아니었던가 말이다.
영화 중에 매드맥스 시리즈가 있다. 이 영화의 스토리의 골간이 되는 상황은 지구가 석유가 떨어지고 난 이후의 세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런 시대에 약육강식의 약탈적 생존만 있는 설정이다. 이는 영화에서 주는 경고성 영상은 아닐까 싶었다. 물론 누군가는 전부 약탈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지만 결국은 더 강력한 약탈자에게 약탈 당할 수밖에 없음을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철학도 없고 예술도 없고 오로지 생존이라는 명제에 따른 행위만이 존재한다면, 과연 인간이 왜 생존해야 하는 것인지는 이유가 만들어 낼 수도 없다.
2. 사진 취재.
이 책은 비록 사진 에세이지만 사진보다는 이야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이 먹먹한 사연들이 굴비처럼 엮여져 있다. 가난과 결핍과 통절함이 버무려져 있는 개별적인 하나하나의 사연들을 읽고 있다 보면 사진은 전부 다 슬프게 보인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슬픈 사연을 찾아서 취재를 하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구성했던 것인지, 엄마가 없는 아이들 이야기나 시골 산골 오지 마을을 늙은 노부부 이야기나 다 엇비슷한 삶의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있지가 않는다.
결국은 사진이란 것은 등장하는 인물의 삶에 대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인생이 결국 어떤 매개체로 된 울림이 되는 살아 있는 드라마이냐라는 부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삶이 곧 예술처럼 분장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며 이런 등장하고 발굴된 이야기가 때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때로는 쥐어짜게 만들며 때론 유쾌하고 통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삶의 이야기를 내면적인 영글어가게 만드는 것은 각색된 주체가 되는 작가의 잔여 부분일 따름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며 살아온 삶들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울림은 안타까움, 애처로움, 서글픔이라는 정서의 반향을 우리 삶에 다신 반영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진을 오랫동안 보다 보면, 도회지의 근사하고 호화롭고 번쩍이며 화려한 사진도 많이 보게 되지만 반대로, 오히려 낡아가고 누추하고 시간에 문질러져가는 퇴락하는 골목길, 시골길, 뼈대만 남은 빈집, 허물어져가는 길과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경향은 바로 이런 정서적인 반향의 결과였을 테다.
이 책에는 번듯한 모습의 정상화된 삶을 사는 듯한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하나같이 결핍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엄마가 아이를 낳고 살길을 찾아 재가를 하고 남겨진 아이는 할머니 손에 자라는 이야기와, 홀아비로 늙어가는 아저씨 이야기와, 자식도 건사하지 못하고 외진 산골에 사는 노부부의 이야기 등등이 연달아 나열되어 있다. 작가는 10년간 삶을 추적하고 찾아다니면서 생리적인 오지에서 사진을 찍어 댄다. 어쩌면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먼저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찾아서 발굴해 낸다고나 할까. 사진을 그저 겉 달린 사족 같다. 그런데 사진은 사람 마음의 깊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앙금을 휘휘 저어 뭔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돋구는 힘이 있다. 별다를 것도 없는 사진에서 앙금이 일어나는 뿌옇고 탁한 결핍이란 기운은 그래서 더 울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무 예정성으로 살아간다는 게 상당히 불안하다. 안정되지 못한 삶들을 예고하는 듯이 불안함으로 조마조마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희망적이라는 일말의 기대감도 없는 듯해도, 지금은 마냥 겨울 한가운데에서 춥고 배고프고 떨리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언젠가 봄이 올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은 무모하기도 하다. 가다 보면 좀 쉴 곳이 나오겠지.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는, 당장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 텐데 그래도 우리 꾸역꾸역 시간의 인생 길 위를 아슬 아슬한 외줄에 걸음을 떼고 있다. 누구는 균형을 잡기 위해 부채질을 하고 누구는 좀 더 균형이 맞도록 장대를 들고 삶의 무게 중심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나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삶은 이를 통칭하는 표현이 산다는 것의 압축된 의미로 남길뿐이다. 그래 산다는 것.
그런데 이와 같은 저변에 깔린 작가적인 시선은 그래서 자연스럽게도 휴머니티, 즉 인도주의로 옮겨 간다. 이런 경향은 다큐멘터리를 지향점으로 하는 많은 작가들의 공통된 시선이었다. 우리나라 휴머니즘 작가의 반열에 올려진다. 휴머니즘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기록성은 결국은 주제가 인간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노익상 작가의 취재하는 사진의 내용이 인간적인 따뜻함과 인간적인 안쓰러움을 버무려 놓았다고 봐야 한다. 사진의 화두를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명제에 매달린다. 그래서 안쓰러움을 외면하지 않고 작가는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자본에 떠밀린 사람들은 겉으로 보면 멀쩡해도 심각한 내상을 입고 내상이 긴 시간 동안 새로운 상처를 덧내며 다시 아물기를 하며 삶의 옹이를 만들어 낸다.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 상처가 아물어서 딱딱한 옹이를 가진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의 취재기에 부닥치게 되는 경계심을 허물기 위한 작가의 애달픈 노력은 감히 풍경 사진에 비할 바 없이 각고해야 한다. 자연이 다가오는 인연처럼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 작가 스스로가 그들보다 더 따뜻함을 가지고 먼저 다가가야 열린다는 점이다. 생뚱맞게 카메라 매고 와서 한두 마디 건네는 것으로써 사진이야 피상적으로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 손치더라도 그들의 내면을 읽는 기록은 닫힌 마음을 허물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던가. 애절함은 그래서 더 깊을 수밖에 없다.
3. 짧은 리뷰를 마치며.
이 책을 딸아이가 공부하고 있는 교실에서 읽었다.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심야시간까지 연장되는 관계로 감독을 하는 선생님의 피로를 대신하여 학부모가 돌아가면서 하루 저녁 시간을 내고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는 건지 지켜보는 시간에 읽은 책이다. 학생들이 잔기침도 조심하며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의 잔잔한 동요를 애써 감추었다. 학생들이 저마다의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의 지난한 과정이 곧 겨울인 것처럼 살벌한 얼음판 위를 걷고 있을지는 모르나, 이 겨울이라는 혹독한 과정이 있어야만 이 비로소 자신의 봄을 구가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를 바람을 가졌다. 공부도 살벌하더라도 일생에서 그렇게 밤늦게까지 책을 펼 수 있는 시간은 인생살이에서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고 보면 봄은 겨울을 지난 나무에서 싹을 티우는 힘을 가졌지 않았을까 했다.
사진은 생의 전면을 보는 공부가 아니다. 삶의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사진으로 보고 그 안에서 머무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들어내는 작업이다. 공부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한순간이 시간에 담긴 단면을 읽고 이면을 사유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사진이 단순히 사물의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사진이 발전하는 힘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