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보내주었던 잉크 향이 올라오는 신간 시집.
나는 시집 중에 한 편을 골라 필사했다.
붓에 먹을 찍고,
종이 위에 붓 끝을 대고 나니 손가락에는 벌써 힘이 들어가고
모종의 알 수없는 긴장감으로 손은 파르르 떨린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은 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감이었다고 했다.
시가 새의 긴장감처럼 쓰여진 것과 같이,
나도 과연 피사체에 담긴 의미의 일정한 거리에
긴장감을 가지면서 사진을 찍었을까?
오늘처럼 이렇게 붓 끝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떨리게 긴장한 채로 셔터에는 얼마나 힘이 들어간 걸까?
간혹, 우리는 중요한 시험이나 관문을 통과하는 면접 과정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칫 실수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긴장을 풀라며 위로를 건네는 말을 종종 듣게 되지만,
지금은 너무 긴장감이 없는 시대에 풀풀 날리는 가벼움 들만
가득한 것은 아닐까.
긴장조차 할 수도 없게 가려진 안개는 미혹당하게 하고
대신에 불안으로만 점철된 자본의 우울증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시인은 펜을 들어 시에 긴장하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에 긴장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덮어지는 쫄지 않음의 담대함과
의연함으로 뭉쳐진 긴장감을 곧추세우는 것도 괜찮다.
얼마나 짜릿한 인생 이런가.
끝끝내 골로 갈 때까지는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득 김어준의 '야이 씨바, 쫄지마"가 생각났다.
시에는 쫄아도 권력과 자본에는 쫄지 말자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게다가 대학 시절,
어느 날 온통 최루가스 처마시고 눈 따갑고 목 따가웠을 때,
밤이 이슥도록 선배 집에서 막걸리에 깍두기 먹고
곧 들이닥쳐 잡혀갈 것만 같았던 그 긴장감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왜 일까.
사법적인 무력에 대한 긴장감이야, 스스로가 당당하고
스스로에게 저항했다는 자기만족을 주었던 반면,
지금은 하루하루 그저 어떻게 벌어먹고사는 건지에
몰두한 자본적인 굴욕과 자기 비굴함과 비애로 점철되는
쪽팔림이 나날이 강화되어 간다.
얼른 자본의 농락에 최저로 살 수 있는 산으로 가야 할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