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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쓰레빠 블루스 - 김석진 사진집 ㅣ 눈빛사진가선 22
김석진 지음 / 눈빛 / 2015년 12월
평점 :
내가 제일 의미 있고 유심히 보게 되는 사진이 있다. 모름지기 자신이 손 내밀어 닿는 시선의 거리가 담긴 사진이다. 물론 세상에 좋은 사진도 넘쳐나지만 멀리 있는 것은 깊이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멀리 보다 가까이에 있어 자신의 터전에서 직접 닿아서 수용성 화학작용처럼 드러나는 사진의 이야기가 그래서 돋보이기 마련이다. 제대로 느껴 보지 않아 멀리 있는 것의 뜬구름 잡는 식의 사진 이야기는 그래서 와 닿지가 않고 공감도 느껴지지도 않고 사진의 진정성과 연대감 또한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사진의 깊은 심도는 가까 이서만 보이기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김석진 작가의 사진은 자신의 현장에 직접 부딪혀서 퍼즐을 맞춰가는 듯이 딱 들어맞는 사진이 아니었겠나 싶었다. 지난번에 출품한 전시회 "지속되는 과도기"라는 주제의 그 연장선 상에서 그의 첫 사진집 "삼선쓰레빠 블로스"라는 책이 눈빛에서 출간되어 이어진다. 이것은 그의 사진 작업에 있어서 연쇄 반응과 같이 일련의 그 맥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그의 사진은 고전적 다큐라는 장르이면서도 사진의 시선이 닿는 거리에 작가 자신의 고민과 안타까움과 또한 미동도 하지 않는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숨 막히게 벌어지는 치밀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 냈다.
이른바, 고삼. 고등학교 3학년의 이야기를 작가 자신의 직장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연작으로 보여줌으로써 교사가 늘 가지는 그 속성을 적나라하게 담아냈고 이 학교 현장의 민낯으로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한 성찰적 반성을 도모하게 되는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일전에도 김 작가의 전시회 사진으로 리뷰를 했었던 적도 있었기에 사진은 낯설지가 않다. 그런데 그의 사진을 통해서 고삼의 모습을 기성세대로써 나아가 교사로서 학생들에 대한 안쓰럽고 답답한 마음이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낯설지 않음에서 나의 고 삼 시절의 느낌과 지금 고삼이 되어가야 할 아이들을 교차되며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 내 자식으로까지 대를 이어 가며 당면한 문제인데 어떻게 허투루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적인 작품론을 제 차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빚어지는 교육에 대한 과잉과 결핍의 문제에서 어느 누구라도 관심의 대상이며 저마다 주장하는 바가 거의 교육 전문가 수준으로 통설한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직접 닿는 선생님으로써의 작가적 시선은 그리 흔하게 접할 수는 없다고 본다면, 우리나라 교육자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석진 작가처럼 사진적인 스토리로 엮어 낸 선생님은 이때까지 사진으로 접해 본 적이 드물었기에 그의 현장에 대한 철학에서 소명의식을 피부로 와 닿게 된다.
나는 그의 사진을 햇수로 몇 년간에 걸쳐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봐 왔다고 자부한다. 어느 작품치고 한두 번 보고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진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교육 심리를 파악하게 된다. 이게 사진의 표피에서 더 나아가는 사진 이면의 속살까지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이면의 깊이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보이는 시간적인 과정은 필수적이며 한두 장으로는 진면목을 만날 수가 없다. 또한 그의 사진 활동을 지켜보면서 교사 못지 않게 교사로서의 사진 활동은 치열하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서 역시 작가다운 면모를 읽어 낼 수 있다.
사진을 10년 넘게 찍어가다 보면, 아니 무슨 취미든지 간에 10년이란 시간을 연마하다 보면, 나름의 소명의식을 만나게 되고 또 그렇게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작가의 이구동성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느낀다. 단순히 취미가 취미로 끝나지 않고 다시 정렬하여 연장됨으로써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대하여 작가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는 확립되고 만들어지고 이런 의식이 더 심화시키고 고취시키며 작품의 난이도를 꾸준히 높여 가는 추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의 사진 철학과 현실적인 이미지와 직업정신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짐으로 그의 사진은 특별하게 공감으로 표현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놀랍지 않는가? 우리의 당대 시절에 겪었을 고삼이라는 일생의 한 부분이 여전히 현재의 학교 현장에서 거의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에는 놀라지 않는 것은 일종의 무감각증이자 불감증이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으며 어떻게 사회 발전 이론에 철저히 배제되어 있는 이유를 작가의 사진은 증명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놀랍도록 발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왔다. 10년이 다르고 20년이 다른 환경의 진행형에서 어떻게 학교 현장이라는 곳은 하나도 변함이 없는 변함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번민을 작가의 사진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무풍지대를 과도기적이라는, 즉 언젠가 제대로의 모습으로 안착되는 계속된 과정이라고만 하기에는 학교를 바라봐야 하는 고역을 감수해야만 한다. 따라서 그 현장의 살벌함의 숨 막힘을 답답한 형태의 민낯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알고 있다. 지금의 고삼 학생들이 앞으로의 삶에 대한 지극한 연민을 나는 느낀다. 자신의 제자들이 이 사회에 나가서 금수저 흙 수저론을 나오는 형국의 실상을 어떻게 해쳐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이 곧 그의 연민이었다. 직업인으로써의 돈벌이 수단이 교사였더라면 굳이 제자들에게 연민을 보낼 이유도 없다. 그저 한때 한 시절을 거처 졸업하고 지나치는 존재들이라는 단순히 계산적일 수도 있는 게 많은 교사들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어떤 말도 없었지만 절대 아니라고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진을 보고 아이들이 힘들어 보이는 사진에서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게 그의 사진에서 보이는 그 이면의 이야기다. 즉 아이들이 아파할 것이 뻔한 줄기에 서서 작가는 줄타기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올해 딸아이가 고 2를 목전에 두고 있다. 나도 고등학생의 학부모라서 그런가? 아이를 보면 왜 그렇게 안쓰럽고 답답한 것인지, 그 청춘의 꽃같은 시절에 공부라는 것, 먹고사는 공부라는 것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장차의 꿈과 희망을 수립해나가야 할 나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문학적인 감성의 말로 에둘러 이야기 하지만 막상 닥친 당사자는 아파해야 함을 어느 누가 당연시해야 할 이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 좋아 아프니까 청춘이지 각자의 닥친 상황은 힘든 가운데 한숨과 부담의 복합체이다. 덜어줄 수 없는 답답함도 동시에 느낀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떻게 보면 교육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자본론의 그 중심에 있다. 학원과 학습지와 이와 결부된 거대한 조직과 카르텔이 묵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형국이고 사학이나 공립이나 약간씩 다르더라도 자본론의 모습 그 자체이다. 지금 학교는 미래를 걸고 협박을 한다. 지금 공부를 못하면 미래는 추락하고 말 것이라고 끝없이 불안을 조성하고 이 불안으로 자본을 살을 찌우는 형국이다. 이 협박에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는 끝없이 시달린다. 미래의 불안을 걸고 협박에 어느 누구도 순응과 적응, 세뇌가 되어 있는 사회 전체적 모습이다. 따라서 작가의 사진 메시지는 사진적인 해석에만 국한해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의 시선에 담긴 사진을 통해서 이 사회가 교육적인 본래 목적에 대하여 모두가 정당한 고민을 해보자는 의지에로 외연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결국 다큐멘터리라는 분야의 사진은 사진 본래의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주제의 과제를 동시에 던져 주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교육으로 돈 벌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끝없는 불안을 조성하는 방식은 타락한다. 대체 공부가 무엇인가? 오늘에 몰랐던 것을 오늘 공부함으로써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은 그저 남들보다 더 약탈을 잘하는 수단의 지식과 이 지식의 총량의 기준으로 줄 세우기라면 교육은 죽었다. 줄 세워서 더 똑똑하게 일 잘하는 노예로 만들 속셈을 알아차려야 한다. 사진은 바로 여기 이 지점에서 돌을 던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것도 짱돌 하나로 골리앗의 머리를 맞추는듯한 사진. 정신이 번쩍 드는 사진의 속내를 들어 내는 걸로 보였다.
바람이라면, 우리 아이들이 공부의 즐거움과 행복을 가지고, 과중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난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학교가, 교육이 사람을 사람답게 행복을 만들고 미래를 아름답게 계획하고 설계하는 시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소위 일류 대학을 진학하더라도 자본가의 노예처럼 주는 월급받고 시키는 일하며 사는 게, 그리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으로 끝없이 더 공부 더 공부에 목을 매다는 노예의 비예를 겪으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빠의 금수저론에 이 사회 전체가 주눅 들고 아이들에게 미안해야 할 상황에 우리 스스로가 자성과 각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사회는 점점 우울한 그 전형이 지금의 학교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끝없이 침울한 미래에 아이들을 고문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그들의 미래가 아름답기를 바라고 낳았는데 기성세대는 이와 반대의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이 모순은 대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김석진 사진작가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가 단순히 학교 현장에서 나오는 사진으로만 끝나지 않고 이 사진의 단면이 사회 전체의 화두로써 고민해야 할 숙제를 던져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다큐 사진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당장에 이 방학 때 얼음 위에서 놀지도 한번 못하고 독서실에서 혹은 학교 자율학습하느라 책상과 의자에 포박당한 아이들에게 자유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선생님의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PS :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