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유명한 예술 작품의 경매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거래가 되었다는
뉴스를 종종 보게 됩니다.
고흐가 그린 작품, 혹은 우리나라에서 박수근의 그림.
앗제의 파리 아침 사진들과 최근에 알려지게 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작품들,
(피카소는 당대에 부터 그림이 많이 알려진 상당히 드문 케이스였겠지만요.)
모두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고 이미 선 세대들이었지요.
피카소, 살바도르 같은 작가는 당대의 사람들이 예술가를 알아 줬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작가에게
너무나도 인색합니다.
살아 있는 ,특히 같은 시대에 살아 있는 작가들에게 주목도가 덜한 경우가 많거든요.
죽고 나서야 평가를 재대로 받을 런지는 모르겠지만, 살았을 적에는
몇 몇을 빼고는 대부분 가난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워거든요.
사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에게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사진은 동시대를 사는 작가에게는 더 더욱 각별하지도 못하고
각박하기만 하죠.
최민식 선생도 사진 찍을 당시에는 주류 사진계에선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김영갑 작가에게도 본채 만채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작가들이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서 지금도 계시다면
찾아가서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직접 피부로 부대껴 볼 일인데
불행히도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습니다.
흔히 그런 말이 있습니다.
가리늦게.호들갑이 라고 해도 이미 떠나고 난 후라는 것입니다.
살았을 때는 그렇게 몰라 주다가 죽고 나서야 호들갑을 떠는 꼴이 못내 못마땅하거든요.
사진은 그대로 인데, 작가의 죽음이 사진을 달리 보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작가가 살았을 때의 사진이나, 죽고 나서의 사진이나 같잖아요.
작가가 존재성과 부존성으로 작품이 달라질리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작가는 가난과 고통속에서도 자기 고집으로 작품을 일구워 낼 때는
알아 주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나는, 동 시대 함께 살아 있는 작가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싶습니다.
죽고 난 후 작가는 자기 작품에서 손이 떠납니다.
떠나버린 작가의 허울같은 작품이야 남겠지만
작가의 살아 있는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에 귀를 열고 눈으로 듣는 그런 활동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대에 직접 만나서 직접 부대껴 보는 온도를 만나야
작가의 심저에 일렁이는 파도를 내 가슴으로 울렁이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동 시대를 함께 산다는 거, 그래서 더 절실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 년전에 사람이나 100년 전의 사람이나 떠났음에는 같은 것이거든요.
반대로, 100년 후에 나올 사람과도 소용도 없거든요.
지금 이 시대 같은 곳에 같은 시간대라는 관계성.
그래서 당 대의 작가에게 더 많은 애정을
주어야 하는 이유죠.
시인이나 화가나 작가나 모두 당 대에 좀더 안락하게 작품 활동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내 삶이 그들로 인해서 조금이나마 윤택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가지게 됩니다.
고흐가 지금 다시 나와 자기 그림이 그렇게 천문학적으로 거래 되고 있다고 알게 되면
뭐라 했을까요?
띠발! 살아 있을 때는 조또 모르더니만.
내 그림 가지고 지들이 지랄하네 하고 욕이나 한판 시원하게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자기 귀를 짜를 만큼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