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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 - 왜 빌린 자의 의무만 있고 빌려준 자의 책임은 없는가
제윤경 지음 / 책담 / 2015년 8월
평점 :
빚 권하는 사회, 빛 못 갚을 권리.(서평) 제유경 저, 2015.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이라는 소설의 제목이 기억난다. 술이라도 권하면 다행이지만 이 시대는 빚내라고 권한다. 하루에도 수도 없는 광고와 지라시들이 뿌려진다. 싼 이자로 전화 한 통이면 바로 입금된다며 유혹하고 흡사 돈을 쉽게 거저 주는 듯이 광고를 뿌려 돈을 쓰라고 권한다. 빚에 시달려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시대에 아주 특별한 일인지도 모른다. 빚 없이 산다는 게 정상적이지 못할 정도로 빚은 빚을 낳는다. 한 두 장, 혹은 서너 장의 신용카드는 결국은 선불로 당겨쓰는 빚이고 자기 조절력이 없다든가, 혹은 어떤 비상사태에 급전으로 당기는 고리 사채이다.
나도 한때 IMF 때 회사의 부도로 건설업을 떠나 잠시 자영업을 1년 한 적이 있었다. 한달 한달 매출에 따라 피 말리는 싸움에서 상처가 결국 빚이었다.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고 이에 걸맞은 빚을 떠안고 매일 이자가 빠져나가고 임대로 나가니 결국 내 손에 남는 것은 빚뿐 이었다. 그때 시절만 생각하면 뭔가 모르게 울컥한 느낌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때 딸아이가 태어났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 아기 분유 값이라는 게 무얼 의미하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아직도 그 때만 생각하면 딸아이에게 제대로 아빠 구실을 못해준 미안함은 지금도 인간적인 부채의식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사업을 청산하고 남은 채무는 다 갚아 나가는데 상당한 시간 동안 궁핍하였지만 어쨋든 모든 채무는 다 갚았다.(지금이야 여유롭게 말하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나도 지독한 생활이었다.) 그리고 보증채무 때문에 아버지가 물려준 고향 집도 고스란히 날려 먹었다. 아버지가 보증했던 보증 채무를 집을 증여 받고 내가 떠안게 되었다. 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직장도 없어 소득도 없으니 빚을 갚지 못하였으며 결국 싼값에 집을 처분하고 처분한 돈으로 채무를 다 갚았다. 집만 사라지고만 셈이다. 물론 나는 그 돈을 한 푼도 만지지도, 본 적도 없는 돈 때문에 집만 고스란히 빼앗겼다. 그 당시에는 많이 억울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빼앗겨야 한다는 열패감은 내내 가슴에 대못처럼 후벼 팠고 아픔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원인이야 가타부타 하기 전에 일단은 채무부터 갚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실감이 오랜 기간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지만 그래도 빚의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요즘은 지갑에 한두장 가지고 있는 카드가 신용 사회라는 믿음이라는 가식으로 카드를 남발하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물건을 사들이라며 가처분 소득을 생각하지 못하게 금융사는 끝없이 유혹한다. 명품의 치장이 마치 자신의 수준을 대신해 줄 것처럼 꼬시고 이에 착각당한다. 빚이란 단순한 수학적인 셈법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에 사회의 제도와 금융적 구조가 사람을 점점 더 가난하게 하고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화되었고 알고리즘으로 이를 말해 준다.
책에서는 모럴 해저드에 대한 모순적인 교리를 설득력 강하게 설명한다. 단적인 예로, 금융기관이 투자자에게 돈을 떼먹는 것이 허용되면서 금융기관은 채무자에게 돈을 절대로 떼 먹히지 않는 승자의 독식 구조가 야만스럽다고 개탄한다. 억울한 피해자의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경제가 좋지 못하고 건강이 좋지 못 해서 억울한 사람들이었으니 채무자의 모럴 해저드보다는 과도한 이자 부담의 부당성에 대한 지적을 지난할 정도로 언급한다. 그런데 채무자들 중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과도한 부채는 책에서 언급한 대로 문제이고 그 채무가 노예 증서화되었다는 것에서는 일정 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채무자들도 생각만큼 다수가 선량하지도 못하다. 도박 빚으로 채무를 지는 경우처럼 채무자들이 반드시 선량하리라는 보장도 없다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균형감은 약간 떨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써 채무에 부당한 논리도 일정 부분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았겠지만 정말 개망나니처럼 소득이나 수입도 생각하지 않고 고가의 사치품으로 자기 절제되지 못한 경제생활에 채무도 없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들이 보통은 어쩔 수 없이 큰 병이 나서 의료비 지출에 채무를 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구제되어야 하고 동정하고 도움이 되어야 하겠지만, 경계해야 할 것은 삶의 행동에 무절재한 자본의 욕망이 잉태한 이익만 쫓다가 채무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까지 채무를 탕감해야 할 논리적 근거로는 부당하다. 일례로 부동산으로 대출받고 시세차액 노리다가 부동산의 수익이 생각만큼 오르지 않아서 떠안게 된 빚까지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판단과 욕심의 상관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이익은 사유화할 줄 알아도 개인의 손해에 대해서는 사회화시키는 경향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지 과도한 이자율이 문제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먹고살기 퍽퍽할 때는 고리 대금업이 사회를 좀 먹었고 고율의 이자가 사회가 큰 변혁이나 사변을 일으키기 딱 맞는 충분조건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유럽에서 유태인이 오래전부터 그렇게 미워했던 이유가 중세 시대부터 유태인은 고리 대금업으로 성업했다고 한다. 노동 없는 이익이 가져다주는 질시와 투기는 유태인이 그 대상이 되었고 그게 수백 년이나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고 하니 민족의 배척 사유이자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는 아니었을까 싶었다. 따라서 유럽에서 유태인이 미움의 대상이 된 것은 그만큼 뿌리가 깊다. 이게 다 고리대금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고액의 이자 부담은 결국 복지와도 연결되어 있다. 갚아도 늘어나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만은 막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겠지만, 쉽게 빌려 주는 만큼 떼일 염려가 높은 채권은 대체적으로 고액의 이자를 낳는다. 대체적으로 안전한 자산에 투자하는 것은 수익이 상당히 낮다. 따라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고수익 고위험에 투자하는 심리는 결국 욕심이 금융사는 철저히 이용해 먹는다. 사기당하는 사람은 상당히 욕심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 욕심으로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눈이 멀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면 투자에서 사기 치는 사람보다 사기당하는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 몇해 전에 "조희팔"이라는 피라미드 다단계 사기꾼이 떼먹고 달아난 돈이 4조라고 했다. 4조의 투자금을 모으기까지 벌인 행각은 신뢰를 이용하였다. 여기에 투자하면 절대 돈을 떼일 염려가 없다는 표시에 모두 당한 케이스였다. 그 욕심에 대출까지 받아서 전부를 걸었는데 홀라당 도망가 버렸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그러나 여기에서 이렇게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를 감행한 용감한 욕망이 종교 신도들의 빚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다. 작은 돈은 큰 돈에 쉽게 먹힌다. 돈이 이자를 만들고 이자는 다시 돈을 만든다. 화폐의 교환 수단은 수단으로써의 기능뿐만 아니라 세 끼치고 알까지 낳게 만들었다. 탐욕적인 사회에서는 빚이 줄어들 여력은 없다. 끊임없이 증식하고 끊임없이 몸집을 불려도 도저히 만족은 없다. 아메바의 영원한 포식성이 곧 자본주의적인 속성과 닮아 있다. 현대에 들어서 단 한 번도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사회의 전체 공사를 구분없이 빚이 줄어든 적이 없었다. 결국 현대 사회를 이어 나가는 기조는 자본주의는 채무가 근간을 이룬다고 봐도 하등의 문제가 아니다. 소수의 1%를 위해 99%는 빚을 지는 체계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건전한 자본적 생활이 가능이나 할까?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렇게 자본적인 약탈로 인해서 빚이 수렁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활동이 시작되었다. 주빌리 은행이 바로 이것이다. 헐값으로 매각 청산되는 채무를 떠안아 채무자에게 탕감을 시켜 주는 운동을 말한다. 이런 활동은 기본적인 전제가 비록 한번의 실수로 인하여 가족이 해체되고 심지어 자살로까지 내몰리는 상황은 막아야 할 것이며 경제 활동의 여건이 나빠져서 망하더라도 일정 부분만큼은 다시 재기의 기회와 발판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 번의 실수와 과욕이 실패한다고 해서 모두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인권적인 발상은 아주 참신해 보인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기로서니 여전히 인간의 생명 값만큼은 아니라는 지구의 의미가 살아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반대되는 사회라면 우린 이 사회에서 앞으로의 생존 자체가 담보되지 못한다.
이 책에서는 과도한 사금융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가 부정확할 때는 고리 대금업이 성행했듯이 이를 막아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 든지 빚이 수렁에 빠진 사람을 일단은 구해야 하는 절박하게 요청한다. 당연히 그래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인 가치이다. 그라나 자본 본위의 철저한 사회에서는 어떤 삶이든 빚이 없을 수가 없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생존하기 위한 자본적인 소비가 없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본주의 시대는 소비 과잉 시대에 누군가의 제조품과 서비스는 당장의 편리함이 최대의 이익이자 무기이지만 여기에는 과도한 에너지가 집적되어 있고 따라서 부가가치적인 비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에 아파트에 살아 편리함이 상당하지만 이는 과도한 채무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것도 현실이다. 오래전 회사에서 아파트를 분양할 때 보면 자기 자본 100%로 아파트를 구매하는 사람은 2%도 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 98%는 대출을 발생시켰고 회사는 이에 걸맞게 담보대출을 연계시키며 집을 주는 대신에 부채를 주고 회사는 이익만 챙기고 쏙 빠져 버린다. 현재 우리나라 가계의 부채 대부분이 주택 담보대출이 상당한 것의 원인이 결국은 더 편리함에 따른 부채의 증가에 있다. 조금만 불편을 감수한다면 빚에 따른 노예적 상황은 막을 수 있겠지만 이게 어디 씨알이 먹히는가 말이다. 심리적 부채 공식으로 도식화해 놓고 봐도, 편익과 빚은 반비례 관계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본주의 시대에 빚을 멀리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 약간 이상적이긴 하지만, 약간의 불편을 감수할수록 빚은 반대로 떨어지는 공식이 있다. 차량을 할부로 지불하면서 편리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할부의 빚 부담을 없앨 것인가라는 선택의 판단의 문제는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현재의 약탈적 금융구조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먼저 나오지만 빚을 어떻게 하면 더 줄이면서도 삶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그 피해의 양상이 채무자에게 훨씬 더 크게 다가오는 문제를 지난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책에서는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의 사회에서 살면서 일반 시민들이 금융지식에 대하여 공부가 너무나도 안되어 있고 공부가 안된 것은 둘째치고 모르는 것에 대해 상담을 받으려고 할 줄도 모른다는 답답함을 엿볼 수 있다. 빌릴 때는 금융기관에서 친철한 상담사가 제때 갚지 못할 때는 온갖 수모를 주는 불법추심까지 일삼을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내가 모르면 아는 곳에 도움을 청하고 카운슬러라도 받을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과도한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꼭 책을 통하여 금융지식을 쌓고 부채를 해결하여 삶의 추락을 간곡히 방지하려는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지금도 강 다리 위에서 더 이상 감당을 할 수 없는 빚으로 생의 마지막을 계획하려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막아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필수가 된 시대라는 것을 책은 강력히 주장한다. 책이 부채로 어려운 사람을 살리는 길로 인도하는 노력이 엄숙하게 다가온다.
Ps : 이 책은 책담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참가하여 책을 받아 구독하고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