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카시 : 사진에 짧은 5행 이내의 치밀하고 농축된 시를 넣은 문학 장르. )
저자 김종태 시인은 최초 디카시로 등단한 최초 시인이라는 책 소개가 있었다. 그동안의 작품 활동으로 발표한 것만 해도 500편이 넘는 다작의 꾸준함이 시인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흔히, 매년 신년에 발표되는 신춘문예에서 당선작으로 내는 심사평에는 꼭 들어가는 심사자의 평론글이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라는 의미가 주는 수식어는 하나의 사명감과도 연결된다. 그만큼 새로운 문학 장르에 개척자의 임무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해의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은 대체적으로 평이했으나, 본 심사에서 당선작은 시의 작품성이 다소 떨어질지라도 앞으로 활발한 활동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열정을 보았다." 이어서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우리 문학의 반석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기대"를 갖게 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자주 나온다. 이는 아마도 신춘문예랍시고 등단시켜 놓으니 꼴랑 등단만 하고 나서 꾸준한 작품활동이 전혀 없는 타이틀만 시인이거나 무늬만 시인이 될 우려를 두려워해서일 것이다. "솔직히 뭐 빠지게" 당선 시켜 놓으니 사라져 버린 일회성 시인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당선작을 선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뭐든 꾸준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저력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라도 일회용 휘발성의 시가 아니라 꾸준한 문학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그런 시인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등단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시를 사랑하고 시와 더불어서 사진을 찍고 지속적인 시적 사유를 끝없이 이어가야 하는 작가의 내적인 치열한 아우라와도 같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시 500편 쓰기도 어렵겠지만 사진을 500컷 찍기란 시보다 어쩌면 더 어렵다. 사진은 특히 시와 달리 장소성과 시간성이 반드시 따라다닌다. 한 번에 한 컷씩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나오는 것이 사진의 특징이다. 500컷의 사진은 500초가 걸리는 것은 아닌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시심은 시에 대한, 그리고 사진에 대한 돈독함을 시집 이 하나로도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직 어떤 사진에 시가 담겨 있는지 읽어 보지는 못했으나 시인의 사진에 대한 시심을 대략 유추해볼 수 있는 통박이라는 것이 굴려진다는 점이다. 사진은 철저히 시인의 주관적 시선이라는 그 고독한 시선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바라본 사진을 어떻게 시의 문장으로 표현된 것인지 그 사상의 고유함을 만나고 싶은 이유이다. 세상에 시집은 많다. 또한 사진도 많다. 그러나 시와 사진의 앙상블 혹은 콜라보에서 느껴지는 하이브리드. 융합은 시심과 시선의 해체와 집약으로 도출되고 그래서 새롭게 뭉쳐지는 사진과 시라는 응어리와 덩어리를 하나로 만들어내는 직조를 볼 수 있다. 씨줄과 날줄의 직조야말로 천 조각의 무늬를 새기게 하고 재단하고 분해하고 다시 이어 붙이며 문학이라는 거대한 예술 패션이란 근사한 웃한벌 만들어지는 원리가 디카시라는 새로운 장르 문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온통 검은 탁류에 때가 켜켜이 쌓여가는 혼탁한 세계에서 문학은 지평이 넓어져야 하고 넓어진 지평에서 깊이가 나온다. 답습과 반복의 새로움보다 새로운 사진이라는 매체가 문학과 융성한 결합이 이루어질 때 혹은 노래가 시가 되고 음악이 되는 것처럼 영상문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예술이란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고고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인간의 표현은 본능이다. 따라서 이 본능의 고유함과 융합으로 표현력이 더 확대되어 그럼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 표현이 닫힌 게 아니라 점점 확장되어 열려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다양한 표현에서 미학이 창조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다. 본능이란 형이하학에서 이상이란 형이상학으로 전염하듯이 인간은 몸은 땅을 짚어 서 있어도 머리는 항상 하늘을 보고 이상을 꿈꾸는, 그래서 이상을 향한 예술적인 집념이 여전히 오늘날의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유효한 행위라는 점이다. 사람은 결코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표현이 막혀서도 안된다. 비록 육신의 한계에서 이 한계를 넘는 초월적 상상력의 표현의 기법으로 우리의 그리고 자신의 삶이 반득반득하게 저마다의 윤기를 자랑할 때, 밥 세끼 먹은 효력은 인생의 긍정으로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디카시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리 시가 은유적이더라도 사진이 있음으로 인해서 은유가 직관성을 들어낸다. 사진을 보고 시를 읽음으로써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를 공부하지 못하거나 자주 접하지 못한 일반인은 우선 어렵다는 느낌을 갖기 마련이다. 문학성이라는 것이 특별히 어려울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산문처럼 쉽게 읽히는 것도 아니다. 시의 특징은 산문의 나열적 구성이 아니라 압축과 축약 그리고 표현의 응집이다 보니 단어의 저마다의 고유의 뜻이 한번 비틀어진다. 시에서 물이 물이 아니다. 산이 산이 아니라 다른 상징으로 나타나고 이를 은유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디카시는 산 사진 한 컷으로 다른 어떤 것을 시에 비유를 하더라도 시적 상상력에 대한 유추가 직접적으로 쉽다. 그러니 흔히 가지고 다니는 디지털카메라에 사물이나 자연 혹은 상황을 찍고 이에 시적인 양식을 더한다는 것이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광범위한 확장을 의미한다. 시와 사진은 시인의 전유물이나 전매특허도 아니다. 또한 사진도 사진작가만의 고유한 독점적인 것도 아니다. 누구나 시를 읽고 사진을 찍고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윤택함을 더할 때, 요즘 소위 특징적인 소확행의 삶을 영유할 수 있는 점이다. 사실 행복은 거창한 것보다는 작은 일상에서 발현되는 행복이 더 많다. 우린 이 행복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전체의 인생을 조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게 소확행이라고도 하는 이유이다. 일상에서의 감동은 애써 찾지 않으면 보이질 않으며 아름다움은 감나무에 걸린 홍시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부단히 찾는 길만이 자신의 인생을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점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구질구질한 인생인데 실망과 비극으로 장식되어서야 한 번뿐인 인생 얼마나 억울할 것인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시와 사진이 간단하면서도 쉽게 자신의 인생을 미학으로 포장시킬 수 있다면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단히 시인의 시집을 읽고 사진을 감상하는 태도야말로 소확행의 오늘날의 삶의 방식에서 맞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쁘고 아름답고 선한 것만 보고 살아도 모자른 짧은 인생에서는 더더욱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