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시에 비해 그 역사가 일천하다. 사진을 찍는 도구, 즉 카메라의 역사가 사진의 역사에서부터 출발이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사진은 존재할 수가 숙명. 이런 사진의 숙명에서 디카시의 사진에 대한 입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시에 비해 일천한 역사를 가진 사진의 한계가 있지만, 오늘날 현대는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더 활발한 경향은 현대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진은 즉시성이고 텍스트는 암시적이라는 것.
카메라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1930년대 시기에, 발터 베냐민이 언급 하기를, "앞으로의 세계에서 이미지를 읽지 못하면 또 하나의 문맹"이라고까지 했을 만큼 이미지의 해석이 텍스트를 앞지름을 간파한 혜안을 나타내기도 했다. 따라서 디카시에 있어서 시 문학은 당연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미지, 즉 사진에 대한 사진론도 시 문학에 못지않게 점점 큰 비중으로 확대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조금 개념이 헛갈린다. 디카라는 게 디지털카메라를 말하고 그렇다면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 + 시로 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이라는 매체는 디지털뿐만 아니라 필름이라는 아날로그 카메라로도 사진을 얼마든지 찍고 있기도 하다. 디카 사진만 사진이 아닌 거다. 그런데 디카 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크게는 사진 시와 뭐가 다를 바도 없다. 다만 매체가 디카인지 필카인지의 차이일 뿐 사진이란 매체적 속성은 다를지라도 넓은 의미에서 사진이란 것은 다 같다.
디카시, 사진시. 과연 이게 어느 것인지 정의를 디지털 사진이라야 할 이유가 뭘까. 사진 시는 다시 포토포엠이라고 영문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미지는 사진 뿐만 아니라 동 영상이나 그래픽 등 모든 것을 통칭하기도 한다. 더 넓게 이미지 시라고도 불가능한 것인지?
또 하나 고민거리도 있다. 보통 사진을 찍을 때, 어떤 피사체를 보고 사진을 찍기 전의 생각과, 사진을 찍는 순간적으로 불쑥 올라오는 생각과 사진을 보고 나중에 떠 천천히 오른 생각 등. 사진 한 장의 전, 중, 후가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기 때문이다.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피사체)의 그 자체의 시심을 가지고 찍고 쓴다고 한다만은, 시심이라는 것이 시심의 텍스트화로써 사진이 추가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진은 찍기 전에 생각도 물론이지만, 찍고 나서 사진 자체에서 나오는 이미지의 그 자체 언어도 분명 있다. 사진을 오래 해보신 분들은 충분히 느끼실 것이다. 찍기 전의 생각만 시가 될 수 있고 찍고 난 이후의 새롭게 익어가는 생각은 그럼 시심이 아닌 것일까?
저는 예술이 부단히 정형을 파괴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이란 끝없이 해체와 조립, 그리고 다시 분해하고 통합함으로써 예술이란 사조가 끝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생물적 요소를 가졌다고 여긴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 고정 관념화되어 버릴 때, 예술은 죽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예술이란 영원한 비틀기의 변화라는 것. 그래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궁극적 이상의 세계로 진입을 끝없이 시도하는 것. 비록 다가갈 수 없는 것일지라도 결국은 창조의 세계는 변화의 새로움이란 세계였던 것이다.
사진과 글.(글이 시가 됐든 산문이 됐든 간에) 그간 두 축을 견지하며 자주 써왔다. 사실 사진 하나만으로도 버겁기 그지없었다. 시라는 형식에 대해서는 사진보다 더 벅찬 것이기도 했다. 시도 시 문학의 기초 없이 막 쓴다고 다 시가 아닐 것이다. 낙서와 시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금방 개념이 떠오를 것이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의 기초 없이 막샷 날린다고 다 사진이 아닌, 그저 낙서 같은 이미지가 될 것이다. 시가 시다운 것과 사진이 사진 다운 것이란 관념은 형태가 변하더라도 좀처럼 돌변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 사진은 다키시에서 두 개의 양날이자 혹은 수레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시의 텍스트에 대한 고민과 사진의 퀄리티에 대한 고민은 어느 것이 덜하고 더하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수레바퀴라는 이 두개의 바퀴가 하나의 축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 디카 시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디카시인은 일반 텍스트 시인과는 뭔가 다르고 달라야 한다. 시에서 사진이 끼여들던, 사진에 시가 끼여들던 어쩌면 이 두개의 양립성은 피할 수없는 디카시의 태생적인 운명이라는, 그러니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장르의 문학성을 나타낸다.
시인으로 살아가기도 어려운 시대이고 비슷하게 사진가로 살기는 더 어렵다. 어느 분야치고 예술이라는 것이 상업성을 배제한 채로 버티는 것은 오롯하게 각 개별적인 환경과 조건과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생각해보면 그림을 좋아했던 학생이 결국 미대를 못 가고 공대를 진학하는 것도 어쩌면 예술의 배고픔을 겪지 않겠다는 일반적인 평범한 현실적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듯이 요즘 누가 시인이 되겠으니 국문학과를 가겠다고 한다면 대부분은 뜯어말릴 것이다. 그저 요즘의 예술이야 살아가면서 보조적인 즐김용으로 소비되는 것만이라고 여기는 엄혹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디지털카메라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디지털카메라의 광풍이 불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메이저 카메라 회사조차도 매출 감소의 경영난에 빠진 꼴이다. 카메라의 시장은 그리 밝지 않다. 필름의 명맥은 아직도 유지될지언정 그렇게 대중적이고 광범위하지는 못하다. 매체가 바꿨었다. 대부분 요즘은 핸드폰에 카메라로 찍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라를 들고 찍어 보면 아무리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좋다고 해도 큰 카메라의 화질을 못 따라잡는다. 렌즈의 크기가 다르고 빛을 감광하는 센서의 크기가 다르고 묘사의 디테일이 다르다. 그런데, 디카시라고 나온 형식의 시와 사진에서 보자면, 사진의 퀄리티가 대게가 스마트폰 사진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마트폰 사진도 잘 찍히긴 하지만 폰 카메라의 기능이 상당히 열악하기 때문에 화질이 제약을 많이 받는다. 사진가들이 무슨 돈이 남아 돌아서 비싼 카메라 쓰는 이유가 뭐겠는가. 카메라의 기능에 따른 화질이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몇 픽셀이냐에 따라서도 우리가 사진을 보는 첫인상은 너무나도 다르다. 특히, 디카 시에 있어서 우선 먼저 보여지는 사진과, 읽는 과정을 거처야 하는 시의 구성으로 봤을 때 사진을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먼저 보이는 사진의 조악함은 아무리 시가 좋은 의미를 부가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시가 사진을 수식하든 사진이 시를 수식하든 그 모양새의 퀄리티에서 첫인상에 따라 감응의 반응은 차이가 많다. 사실 사진 하나 잘 찍는 것도 시 하나 잘 쓰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의 구색용이 될 수 없다. 구색용이 되어서도 안된다. 디카시의 숙명은 피사체 자체만으로 완성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피사체를 사물의 시심화시켜서 시를 쓰면 그게 시일 따름이지만 사진을 통해서 발견하고 피사체의 시심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은 사진과 시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의 연합체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피사체의 의미를 만들고 이입시키는 것에 있어서 시를 붙일 것이란 정의도 구차할는지도 모른다. 무슨 글이 되었든지 간에 사진에서 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을 글이 수식하거나 글에서 미쳐 즉시성으로 수식하기 어려운 매타포라면 사진이 보완재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사진과 시는 단독으로써의 분명한 역할뿐만 아니라 둘의 카테고리를 합쳤을 때의 역할이나 표현적인 방법과 방식의 차이라는 거다. 굳이 무엇으로 국한 시키고 규정하고 한정적으로 제한하는 예술이란 한편으로 답답함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 디카시의 한계가 아닐까 싶었다. 새로운 장르의 발현은 상당히 고무적이고 긍정적이지만 그동안의 시에 사진을 붙이든 글에 사진을 붙이든 사진에 시나 글을 붙이든 나는 그저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반드시 이것이어야만 된다는 것의 규정됨은 예술의 또 다른 감옥 같기도 하다. 사진에 글을 붙이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발명품은 결코 아니라는 것. 이미 오래전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사진에 글을 붙여왔고 사진의 부족한 표현 방법을 시적인 방법으로 보완 시켜 왔다는 점. 그러나 이런 역사성을 새롭게 해석하고 규정시킨다는 것은 역시 새로움이란 범주의 한 방식일 것이다.
따라서, 많은 문학 시인들이 디카시에 관심을 키우고 사진을 찍으며 시를 만들지만 정작 사진가들이 디카시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사진은 사진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있어서 디카시의 디카사진은 사진스러움의 고민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디카시가 새롭게 제창되고 조명되면서 디카시 공모전을 하는 와중에 사진이 얼마나 홀대받고 있는지 보자면 수상작을 선정함에 있어서 사진작가들의 사진 품평이 전혀 없다는 거다. 디카시에 디카로 찍은 사진도 분명 사진일 텐데 왜 사진가의 안목에 따른 사진 평가는 왜 전혀 없는 것일까? 단순히 문학의 한 장르로 관련 시인들의 무대가 될 때 기존의 산문시나 운문시 서정시의 부분에 사진만 첨가된 것이라면 문학의 장르로 봐야 하는 것인지 분명 시에 사진이 있는데 사진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듯한 작품들을 보면 의문스럽다. 디카시의 출발이 디카라는 사진 장르도 포함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면, 사진의 작품평도 시와 같은 비중으로 나와야 함은 물론이 아닐까 싶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시를 짓는 것 못지않게 사진 찍는 것도 어렵다. 어느 젓의 비중을 더 우선시할 것인지는 앞으로의 디카시를 정의하고 주창하는 분들의 해결해야 할 난제 문과도 같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때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여전히 디카시라는 장르에 구예 없이 사진과 글을 같이 쓸 작정이고 사진에 반드시 시라고 적고 싶은 마음은 생기질 않는다. 그것이 어떤 글이든 시라는 부분에 촛점을 맞추고 싶지는 않다. 사진의 보완재로서의 글이든 아니면 시이든 구분없이 했던 대로 해도 그저 사진과 글은 자유롭게 찍고 써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