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때아닌 물장사가 대박 났었다. 낙동강 취수장에서 받은 물이 불화합합물(탄소와 불소)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발암물질이자 갑상선 이상을 일으키며 간에 안 좋고 뭐 등등이라는데, 그렇다 해서 대구 사람들만 난리 날 것도 아니다. 같은 낙동강 수계에서 물 받아 마시는 경남, 사람 부산 사람들이 대구 사람들이 흘려보낸 거 받아 마시는데 경남 부산 사람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상황은 다 마찬가지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직접 나에게 피해가 오는 것에는 화들짝, 붉으락푸르락, 버럭질 나지만 막상 자신이 피해주는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쇠 정신이 일관되는 걸 대체 어떻게 봐야 할는지 보면 웃기지도 않을 터이다. 역시 내로남불형의 이 지역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너무 괴심하고 밉다. 뭐 하기야 MB는 감방 갔다 해도 MB의 강바닥 파헤치는데 동조하고 일조하고 사업의 논리를 뒷받침한 제2, 제3의 명박스러운 사람들이 부지기 수이다. 그들의 책임은 없는 게 아니란 거다. 언제 당신들이 개발의 논리는 있어도 낙동강 환경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관심이라도 있었는가. 4대강 시작할 때 다수가 찬성하고 다수가 낙동강이 유린되어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자들이 이제 발암물질 성분 때문에 난리라니 얼마나 자기모순적인 것인지 이 북새통이 웬 말이냔 거다. 당장 내 입에 발암물질이 들어오면 그제서야 난리들이다. 이걸 모순적 지랄이라고 한다. 일관성이 없음이 곧 지랄병이라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이익은 개인화, 손해는 사회화의 전형이 아닐 수 없지.
물론 소수 낙동강 보존에 관심을 가지고 환경에 신경쓴 분들이야 오염된 물을 마신다면 너무나도 억울하다. 강이 더렵혀 진다한들 당장에 내 입에 마실 물과 연결되지 못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불을 보듯 이 뻔한 상황이 오리라는 건 충분히 예측 되고도 남는다. 낙동강 환경 지킴이로 있는 대구 환경연합의 정** 사무총장도 오래전에 블로그를 하면서 알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 분들의 환경 활동에 대해 늘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 가졌었다. 그가 얼마나 낙동강에 대해 애쓰셨던 점을 보면서 지지와 성원이 미약함에 너무 송구스러웠던 걸 기억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길래 이정도이지 없었다면 아예 시궁창물을 마셔도 몰랐을 것이다.
자기는 깨끗한 물 마시고 싶고 내가 흘려 보낸 물은 더러워도 되는,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에서 현대인이 지닌 자기 모순의 문제이며 일관성의 문제이다. 똥 싼 놈이 똥 치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우린 대게가 내가 싼 똥은 누군가 치울거라는 마인드가 팽배해 있다. 낙동강이 흐르면서 지나온 곳곳마다 공장이 몇 개이며 인구가 얼마인가.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와 생활 하수는 얼마나 정화할 수 있는지 관심이 가지도 않는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고 하나, 하나, 아무리 돈을 써도 전부를 막는 데는 물리적으로도 한계도 있다. 따라서 각 개별의 공장에서 나오는 자체 정화시설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 주택지에서 나오는 오수의 총량을 1차적으로 걸려내야 하는 자신들의 의무도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내 돈은 쓰기 싫고 누구는 써라고 하는 이 철저한 자기모순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도 하기 싫어진다. 내가 버린 물은 또 누군가가 마셔야 할 물이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알바가 전혀 아니라는 것의 기막힘일 뿐이다.
이번에 검출된 성분이 반도체 세정제라고 한다. 뭐 원인이야 구미에 반도체 공장들이 한두 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공장에서 일차적으로 걸려 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공장에서 폐수 정화시설의 비용은 경비니 뭐 다 줄이고 싶었겠지만 역시 아니었다는 게 수질 검사로 드러났을 뿐이다. 그러니 솔직히 이 현상에 대해 따져 본들 정말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오늘날의 삶에서 내로 남불을 어디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몇 년간 가까이에 있는 낙동강을 자주 찾았다. 카메라를 들고 다녀 보면 항상 강에 미안했고 불안했다. 이 강이 언젠가 버럭질을 한번 낼 텐데라는 불안감. 강은 자연적인 포용했다. 자기 정화력이 있었고 자기 스스로 오염을 거르며 바다로 향한다. 드넓었던 백사장을 나는 기억한다. 쌓여 있는 모래섬들에서 각종 수풀이 자라고 물을 걸러 주며 고기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물방울을 포집하고 그래서 강의 여름에는 맑은 빛을 반사시켰다. 어느 날부터 강은 막혀 버렸고 숨을 쉴 수 없었고 보를 막아 건설하면 경제가 산다는 논리는 환경의 보존 논리를 억눌렀다. 지역민들도 돈벌이가 된다니 찬성과 찬성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떤가. 당장에 당신들 자신들 입에 오염물이 들어간다고 왠 호들갑인가. 인간이 이렇게 모순적이다. 지랄하지 마라. 그냥 오염물이든 뭐든 마셔라. 다 자기가 싼 똥 들이다. 강이 병들면 사람도 병드는 거야 이치가 아니었든가.
4 대 강으로 보를 막으면서부터 시작된 여름철의 녹조라떼를 매년 봤다. 질소와 인의 과영양화는 녹조가 번성하게 만들고 용존 산소를 고갈시켜 버린다. 물고기를 숨이 막혀 헐떡거리며 죽어간다. 사람들이야 미세 먼지가 날아오면 마스크를 끼며 방어라도 하려 들지만 고기는 말도 못하고 숨이 막혀 입만 버끔 거리다 절명한다. 도대체 사람의 목숨과 물고기의 목숨에 대한 생명적 진화적인 가치는 이렇게 다르다.
사람은 살아갈수록 현대 자본사회의 에너지 집약적 형태에서 이용하는 모든 것을 결국 쓰레기가 된다. 어느 강바닥을 뒤져봐라. 마시고 버린 패트 플라스틱 병이 뒹굴고 낚시하고 지난 자리엔 온갖 쓰레기가 쌓여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더러운 족속들이다. 500년이 지나도 썩어지질 않고 자연에 흡수되지 못하는 폐기물을 생존이란 미명하에 끝없이 만들고 이용하다 버린다. 금수강산이라 자뻑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쓰레기 강산이 된지 오래이다. 심지어 한때 국립공원에서 산행을 해도 먹다 버린 페트병이 뒹군다. 역시 인간은 제자리를 잡지 못한 쓰레기에 대해 미안하지도 않는다. 강이라고 다를까. 머실 물이 더러워지면 더럽게 마실 일이지 왠 생수 타령이라는 말일까. 모순되는데 정도껏 모순이라야지. 뭐 플라스틱 병에 뭣을 담아 마시면 미세 플라스틱은 몸속에 쌓이지 않을까? 미세 먼지의 중금속이나 미세 플라스틱이나 오염물질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약간의 불편을 참지 못하면서 편하고자 이용했던 것도 역시 편하게 버렸을 때 처리되지 못한 오염물질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내가 마시는 물로 되돌아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거다.
( 미세 플라스틱에 관한 기사 참조 http://v.media.daum.net/v/20180716144516995 )
이왕 환경에 대해 언급했으니 몇 가지 더 이야기해보자. 최근에 모 침대 가구에서 라돈 매트리스 때문에 홍역 중이다. 라돈이 방사능 물질이라는 걸 안다. 그럼 일본산 물건에 방사능이 들어 있는 것은 인식하지 못할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동안 국가의 무역 대응 부재로 일본산 농산물의 수입을 막는 재판에서 무역국제 분쟁 위원회에서 졌다. 그래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인데 그럼 어떻게 대처를 했어야 했는지는 자명한 일이다. 다른 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산 농산물 수입을 금지했고 우리는 수입 중이다.) 일본산은 먹거리로 방사능이 오염된 것이라면 내부 피폭되는 건 어쩔 건데? 먹는 건 되고 매트리스는 안되는 이유가 뭔가?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많아서 대부분 자연산 방사능이 나온다. 생수라고 예외 일 수는 없다. 어디에서라도 생수의 방사능 검출에 대해 검사한 측정치라고는 들어 본 적도 없다. 마시는 물은 그렇게 찾아 생수 사 먹으면서 정작 생수는 어떤지 모를 일이다. 물도 프랑스 알프스 산에 눈 녹은 물을 정화시켜 마신다고 될 것같지도 않는데 말이다. 일본산 폐기물을 소각시켜 만든 시멘트는 이미 우리나라 레미콘 공장에서 시멘트를 다 받아쓴다. 방사능이 어디 불로 태워서 없어질 물질이라고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렇게 오염된 시멘트로 만든 아파트에서 나오는 방사능은 또 어쩔 건지 생물학적인 환경에 무지하다. 신축하는 새 아파트가 좋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시멘트 제조 회사들은 일본산 폐기물을 받으면 돈 받고 가지고 오고 일본산 폐기물은 그렇게 일부가 처리되고 있는 거다. 하물며 모 가구회사에서 매트리스에 라돈이라는 방사능이 나온다고 억울해할 일인데, 이미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서 오염물질을 범벅으로 처바르고 살아서 나오는 건 어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그야말로 별 뽀족한 수가 없이 속수가 무책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 사망자 중에서 셋중 하나는 암 발병으로 죽어가는 것도 다 이런 영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자기가 가진 자연스러운 노화로 인해 제 명을 다해 평균 수명까지 살 수 있는 확률은 따저 보면 참 아득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위험과 오염은 인간의 수명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사고 위험이 높아가고 오염은 심해진다. 그야말로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싸우는 형태가 아닐 수 없다. 전쟁 나면 피란이라고 가야 할 텐데 위험으로부터 또는, 오염으로부터 과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또는 위험과 오염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넘어가야 할 큰 산이다.
최근에 일부 강 수계의 몇몇개 보에 강바닥까지 수위를 낮추고 방류하고 나니 떠났던 철새들이 돌아오고 죽었던 고기들이 다시 돌아오고 모래톱이 생기며 강의 자기 복원력이 생겼다는 뉴스가 얼마나 반가웠던가 싶었다. 강은 강의 그 모습대로 두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강의 이용을 전혀 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도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다. 철새가 돌아오지 않는 강인들 무슨 소용이며 물고기가 노닐지 못하는 강이 무슨 소용일까. 강은 깨끗할 때만이 강 다운 모습을 하고 강의 이용에도 유리하다는 점이다. 썩은 물에 오리 배를 띄워 본들 악취 마시며 뱃놀이가 재미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막아 놓은 보를 전부 다 개방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여기에 반대 논리는 몇 가지로 추려 보자면, 보를 열게 되면 강 수계의 지하 위가 낮아져서 강 주변의 농사에 지장을 준다고 한다. 그럼 전에 강에 보가 없었을 때 지하수위가 높아져서 농사를 망친 사람들에겐 어떤 보상이 주어진 것인가 따져 볼 문제이고 보가 생기기 전에도 강에 취수원이었고 치수를 했는데 이제 와서 수위가 낮아지면 취수를 하지 못한다는 건 또 무슨 논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취수 수위를 낮추면 될 일이다. 강은 강의 자연이라는 제 스스로의 모습이 제일 아름답고 효율적이다. 이런 아름다움과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인간이 강에 손을 대면 댈수록 망가질 것이고 인간이 강에 손을 댄다는 것은 일종의 탐욕과 욕망의 투영일 뿐이다. 누군가는 이익을 얻겠지만 또 누군가는 자연을 망가지게 함으로써 받는 불이익이 많다는 뜻이다. 자연의 강에 손을 대는 것에서 이익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손해는 다수에게 골고루 퍼진다면 분명 잘못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수자원 공사에서 매년 물값을 인상했던 걸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강과 산과 구름과 비를 통해서 누군가는 돈을 벌고 오염은 모두의 세금으로 방재를 해야 하는 모순은 없어져야 한다. 자연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정상이고 상식이다. 이걸 누가 깨뜨렸던가? 슈퍼에서 불안한 호들갑을 떨며 마트의 카트에 가득 담긴 생수병을 그저 바라만 봤다. 물론 난 생수를 한 통도 구입하지는 않았다. 내가 버린 오염물을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든다. 마음껏 소비하고 지구의 모든 자원을 파고 마구 파헤치며 알뜰 살뜰하게 다 써버리고 쓸모없게 모든 것들을 다 버려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구가 아작 나는 시간은 이미 예정되어 있고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지구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불모의 부동산으로 남을 것은 확실하다. 지구의 수명이 얼마인지 가봐야 할는지 모르는 유구한 역사겠지만 또한 영원할 수가 없다. 우주 어딘가에는 행성이 새로 태어나고 새로 죽어 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구상에 사는 인간은 뭐가 그리 위대하다 따져도 무슨 의미도 없다. 영원에 비해 유한한 인간의 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오늘도 무척 덥다. 당장 오늘의 날씨가 찜통이더라도 지구 온난화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모든 나라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오늘의 일상과 괴리감을 가질 때 찜통은 더 뜨거워질 것이고 겨울은 더 추워질 것이다. 자연 제 스스로가 자정력을 잃어감으로써 그 대가는 모두에게 골고루 치러야 할 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당장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도 별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뭔 개소리라 치부하겠지. 에어컨 돌리는 것에 이산화탄소가 얼마나 배출될 수밖에 없는 에너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도 사실 알바도 아니겠지만 자연환경이 악화되면 될수록 저소득층과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먼저 그 벌이 가해진다는 모순을 보고 있는 지금이다. 이런 날씨에 도시의 쪽방에서 선풍기 하나로 버티거나 외부에서 숨이 턱턱 막히게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연이 주는 벌을 먼저 받는다는 것 또한 고통스럽지 않을까 한다. 우스께스럽지 않는 소리로, 이익에서는 나만 되고, 손해 앞에서는 나만 아니면 되면 사실 아무런 문제가 아니겠지.
때마침 얼마 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을 때 공약 중 하나가 낙동강 취수원 이전을 꼽았다. 반드시 낙동강 취수장을 구미 위쪽 지방으로 옮기겠다는 거다. 그런데 부산이나 경남도 똑같이 취수장이 있는데 그럼 그 지역의 단체장은 왜 취수장을 옮기자는 공약이 없을까? 어떻게 해서라도 수계의 자치단체장들이 모여서 낙동강이라는 공동의 취수원을 살려야겠다는 발상이 아니라, 내가 버린 물은 하류에 누군가는 마시든 말든 내물 받아먹을 곳은 더 위쪽의 깨끗한 물이 흐르는 지역으로는 옮기겠다는 발상이 참 웃기지 않는가라는 거다. 역시 손해에서는 나만 아니면 되고 이익은 나만 이어야 되는 것이 여지없이 적용되어서 씁쓸하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물건은 자연의 순환에 도움보다는 방해가 훨씬 많다. 산업화되기 전에는 순환의 방해가 미미해서 지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적었지만 지금은 지구의 자연정화로써 감당하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식량과 의류와 주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제 역할의 가치를 잃어 갈 때 쓰레기가 되는 경우이다. 그러니 이 쓰레기가 지구의 순환이 감당하기에는 순환의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서 브레이크가 팍팍 걸리는 상황이라는 것. 오늘도 우리가 마시고 먹고 차를 이용하고 플라스틱을 배출하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 순환의 동맥경화 상태에서 삐걱거릴 때 벌어질 자연은 막힌 것을 뚫으려고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태풍이 잦아들고 홍수와 가뭄이 더 심해지고 기후의 편차는 벌어질 때, 이 경고에 대해 일상은 무심하기 그지없다. 환경의 위기는 위기로 인식하지 못할 때 진짜 위기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대책 또한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미니멀라이즘의 시골로 떠나고 싶었다.시골서 산다고해서 도시처럼 살면 소박하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소박함이라야 한다. 크고 넓은 집이 아니라 작은 집이고 가급적이면 자연으로 순환이 가능한 집을 꿈꾸었다. 살았을 적에 남기고 떠날 것은 크고 넓은 집과 재산이 아니다. 물려 준다는 것은 정신과 가치로도 충분하다. 산을 자주 가다보면, 흔히 마주치는 문구가 하나 있다. 아니온듯 다녀 가시라는 문장.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뜻. 쓰레기가 머문 자리에 누군가 또 보고 기분 좋을리야 없을 것이다. 나도 이 세상 아니온듯 떠나고 싶었다. 물론 그리움 하나라면 족하지 않을까 한다. 내가 떠난 자리에 쓰레기가 흥건 하다면 나도 쓰레기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