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점점 시골로 귀촌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일어난다. (이것도 욕망이라면 욕망일 텐데 버리라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에서 계속 욕망하고 살기에는 하루하루가 욕망에 지쳐가고 지겹고 구역질 나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더라.) 흡사 연어가 자기 태어난 곳으로 강을 거슬러 헤엄을 치며 올라가는 것이 탄생이자 장지이듯이, 늙어가니 시골이 태생인 사람의 운명과도 같은 귀향을 노리는 것도 한편 자연스러운 삶인지도 모른다. 시골 생활이라는 게 도시에서처럼 살 수가 없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어느 지역으로 갈 수 있느냐 이게 제일 큰 관건이다. 어느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최대 난제 중 하나이다.
제주도 지방에 가면 특이한 문화가 [관당 문화]라는게 있다고 한다. 제주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만의 유대감이랄까, 제주지역에서 출생한 사람만이 진골이 되는, 그러니까 제주 출신만이 끼여 들 수 있는 섬 지역의 독특한 끼리문화를 말한다. 아무래도 제주도가 섬지역이다 보니 배타적인 심리가 작용하는 그런 문화인데, 이는 시골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제주도의 관당 문화처럼 배타적인 것은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정도는 다 있다. 그래서 가고자 하는 지역도 마찬가지로 사돈의 팔촌이라는 약간의 지역적인 연줄이 있어야 하는 것은 고질적인 배타성이다.낯섬의 경계가 그래서 어렵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고 후보지를 검색하는 편이 매우 중요하다. 약간의 연관된 곳. 이를테면 고향이 군지역이라면 어느 면 단위로 좁히더라도 무슨 면 무슨 리가 어느 정도는 다 먹히기 마련이다. 시골 지역이 워낙 좁다 보니 고향이 어떤 군의 면이라고 하면 일종의 연고가 생기는 것이다. 도시민이 아무런 연고조차 없이 오로지 다른 요인으로 그 지역에 가서 정착하는 것은 조금은 말리고 싶은 생각이다. 특히 시골의 배타성을 헤집고 들어가기 위한 일말의 끈이라도 있으면 상당히 유리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면 단위 군 단위는 나고 자란 곳이라면 워낙에 뻔한 동네라서 어느 집 누구라면 직접 연관이 없더라도 한 다리 걸치면 대부분 소문 정도는 들릴 수 있는 기시감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느 정도는 후보지는 물망에 오르게 된다. 역시 고향 근처가 아무래도 최고의 후보지가 됨은 물론이다. 그런 배타성이 고향이라는 일종의 끈 같은 인연으로 수용화될 수 있는 곳이면 제일 낫다.
시골 땅은 부동산 중계업소에서 소개받고 다니게 되면 정보가 부족하다.계약을 성사시키기 바쁜 업소는 자칫 정보를 누락시킬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후보지라 하더라도 부동산 토지의 매물이 거의 잘 나오지 않고 설사 나온다 하더라도 아름아름 소문으로 거쳐가며 먼저 지역민이나 친척들에게 먼저 선점하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후보지 마을에 돌아다니며 마을 이장에게 음료수 한 박스라도 들고 가서 부탁이라도 해야 할 겨우 몇 마디 듣게 될 뿐이다. 매물정보는 부동산 중계소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숨은 정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제일 좋은 것은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의 대체적인 의견이 매우 중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지역에서 임차로 몇해 살아 보는 파악해나가는 것이지만, 이게 현실적으로도 거의 어렵다. 중계업소에서 절대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경우이다. 이를테면 후보지 마을에 나온 매물이 지번을 찾아가 보면 입지나 위치가 썩 좋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물건이 몇년 단위로 소유자가 바뀐 것은 어떤 문제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뭔가 모르는 것이 숨어 있다. 마을 주민이라면 뭐가 문제인지 이를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숨은 정보를 얻으려면 작은 실마리 같은 끈이라도 있어야 캐취 해낼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아무런 연고 없이 낯선 사람이 마을에서 두리번거리게 되면 분명, 경계심이 생기기 마련이기도 하다. 부동산 등기부나 공부상에는 드러나지 않는 토질과 지형의 형태는 지형도의 등고선과 실제 지형과 대조하여야 하고 방문해서 물어봐야 하는등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한다. 아니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다.
이주 전에 봤던 토지도 그런 케이스였다. 땅의 위치나 입지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주변 부지에 이미 한두 채 정도씩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고 마을에 사는 분들도 이야기해보면 대부분은 고향 어디에서 왔다니 경계심을 풀어 주었다. 땅이 나와서 고향에 터 잡으려고 한다고 하니 쉽게 말을 틀 수 있었는데 마침 점찍어 둔 매물지에 대해 물어보니 땅에 물이 많이 나온다는 소리가 들린다. 지형을 보니 구거(물도랑) 포함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토지는 물을 얻을 수 있어야 하지만 토지 내 지하에 지하수나 지표수가 흐르는 곳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토지 각 필지의 특질은 공부 상에서는 표시가 되지 않으니 직접 보고 정보를 수집하는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건설 쪽 일을 하다 보니 토지하고는 관련 깊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중이 지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막상 부동산 업무를 했다고는 하나 막상 내가 갈 곳을 정하는 게 쉽지 않다. 땅은 이렇게 넓은데 내가 다리 뻗칠 자리 하나 없다는 게 참 웃긴다. 하기야 땅도 일종의 작은 인연이다. 어느 곳이든 머무른 곳은 크든 작든 모종의 인연이 닿아야만 한다. 학교 다닐 때 조선의 풍수라는 책에서도 보면 지세 외 지기가 자신의 연과 닿아야 비로소 그 땅의 임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요즘 시대에 인연은 무슨 빌어먹을 거라고는 하지만 땅이란 자신과 맞아야 서로 끌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터를 잡는 것도 하나의 지기와의 인연이라는 것. 그런데 욕심을 내고 싶은 땅도 있는데 내가 가용할 부동산 구입 자금과는 터무니없이 비싸다. 돌아다녀 보면 늘 좌절스러운 가격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부터 나온다. 워낙 산을 좋아해서 다리 아프기 전에는 거의 주말마다 산을 찾았다. 봄 산이 다르고 여름 산이 다르고 가을 산과 겨울 산이 모두 다르니 하나의 산이라도 사계절을 전부 봐야 그 산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산은 주변에 있었고 자주 찾다 보니 정이 들만도 했다. 게다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라 각종 개발 사업이 번잡하지 못한 잇점도 있었다. 통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은 일체의 개발 행위가 금지된다.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는 행위 제한이 산의 보존과 밀접한 이유야 다들 아는 바, 그래서 가급적 금지 행위가 많은 곳의 근처로 가는 것이 오히려 더 조용할 것이란 판단이었다.
사유재산제를 옹호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부동산이 재산의 근간을 이룬다. 우리나라 부동산 자산에 묶인 것이 가구당 75%라고 하는데 이는 지대 이론에 따르면 토지이용 계획의 최대한 난제 중 하나이다. 도로 하나 딱더라도 보상비가 건설비보다 더 큰 경우가 왕왕 생기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온 이론이 부동산 공개념이론이다. 여기에서 자유기업원(전국 경제인 연합의 산하에서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의 이론적 뒷받침을 하는 단체)에서는 공개념을 부정하고 부동산도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부동산 중에서 토지의 특징은 어떤가. 토지는 유구한 땅이다. 누가 재산적 가치로 땅은 줄을 긋고 등기부 대장에 등재하고 소유권을 명확히 하였다고는 하나 땅은 너희들끼리의 제도일 뿐이지 1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땅은 그대로 일뿐이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형질이 바뀌는 것인데 여기에 인간은 네 거 내 것으로 상속하고 소유를 주장하는 꼴이다. 국토는 좁다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은 국토가 좁은 게 아니라 몇몇 개개인들의 소유가 많아서 대다수의 토지 이용에 재한이 되기에 부족할 뿐이지 전 국토를 인구당으로 나눠보면 결코 작지는 않다. 우리가 고작 살아봐야 100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토지는 100년도 넘는다. 비할 바조차 못 되는 수명으로 유구한 토지의 소유권으로 이용이 제한한다는 게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살았을 적에 적정한 이용이 되고 죽고 나면 다시 공적으로 되돌리는 것. 이것이 토지공개념이 핵심이다. 토지는 개개인이 소유가 사실을 불가능하다. 내 몸은 내 거지만 토지는 내 거라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든 공부 대장에 올렸다고 해서 그곳에 천재지변으로 땅이 뒤엎어졌다면 그게 과연 내 소유를 누가 맘대로 바꿨는지 따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공정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 토지는 공정이나 할까. 요즘 심심찮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또한 마찬가지다. 낙후된 골목길에 몇몇 소수의 예술가들이 찾아 들어서 골목길의 특색화시켜 살려 놓으면 건물주는 임대료를 올리고 예술가들을 쫓아내고 그 길에 임대료가 비싼 업종을 유치하게 되지만 결국은 그 골목길이 사양화시켜 죽어가는 것을 몇몇 사례로 볼 수 있는 것도 공적인 개념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전국에 무슨 거리라며 특화 시킨 곳의 말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쇠락하는 걸 지켜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당장의 욕심에 임대료 팍팍 올리겠지만 결국 모두 떠나는 골목길에서 텅 빈 건물은 건물주가 떠안아야 할 애물단지가 되는 것이다. 왜 조금씩 양보하고 물가 인상 수준으로 적정하게 오르는 임대료를 생각하지 못할까. 토지에 결부된 탐욕은 제한이 없는 것을 우리모두는 목격하고 있다. 내 살을 내가 깎아 먹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참 모를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기야 당장에 욕심 내려놓는 게 어디 쉬올리는 없겠지만 결국 차후에 발생할 낙후되는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의 임대료을 올리는 무모함은 당장의 달콤한 사탕이라는 것을 느낄 법도한테 말이다.
어디든 투기가 있는데 부동산 투기는 사회 전체적인 경쟁력을 떨어지게 하고 비용의 증가로 인한 사회 활력에 찬물을 끼 얻는다. 하기야 당장에 내 이익을 위해 이 한 몸 불싸질러 대출을 내는지는 모르지만 또 누군가는 그 대출을 감당할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것이다. 시골의 일부 지역은 땅값이 얼척없이 투기판과 다를 바도 없다. 토지의 가격 인상은 건축비의 부대비용의 증가에 따른 분양가 상승의 주요한 원인이다. 아파트의 투기 방지책은 있어도 토지의 투기방지책은 아직 들어 보지를 못했다. 고작 해봐야 토지 거래 허가뿐인 걸로 안다. 개발 호재의 무성한 소문들과 투기심리가 만들어낸 땅값은 지역민들조차 가슴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동안 농사짓는다고 돈도 못 벌었는데 땅 값이 덜썩 거리는 소문이 돌아다니고 너도 나도 윗대에게 받은 조각 땅조차 팍팍 올라 팔자가 한번 피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거래가 실제 활발히 이루어지고 내 통장에 대금이 입금이 되어야 마무리되는 건데 현실은 갈 길이 멀기만 하다. 호가만 자꾸 높아지는 걸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나같이 실수요자로써는 나의 능력 부족에 좌절하기에 딱 좋게 돌아가는 판국이다. 대도시 아파트가 일정 기간에 두 배 세배씩 오르면 바로 뉴스에 오르내리는데 시골 땅값은 소리 소문 없이 호가만 계속 올라가는 형국이다. 어저께도 몇 군데 보고 왔던 곳도 기절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오를 만한 호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터무니없어도 너무 없다.

참고로 앞에서 토지 가격의 폭등 현상을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위 예시 참고)
일요일 성주군 대가면 소재 모 필지. 공시지가는 40,000원. 면적은 469m2. 계획관리지역.(건축할 수 있는 땅, 건폐율과 용적률은 각 조례에 따름. 통상 성주지역의 용적률은 40%) 대가면 소재지에서 5분 거리. 인접 4차선 진출입로가 있고 2차선 도로로 진입 가능. 앞으로는 유지가 있어 주변 환경이 나쁘지 않음. 면적이 약간 작은 것이 흠결. 위치상으로는 B급지.
토지등기부등본 분석을 해보면, 1990년에 매매가 되었고 2013년에 3900만 원에 거래가 되었다고 나온다. 150평 되는 대지의 가격은 평당 26만 원 선. 최근에 나온 매물 가격은 9500만 원에 다시 나왔다. 그렇다면 2013년에서 2018년까지 5년간 나대지 상태로 보유한 후 다시 매물로 내놓은 가격은 평당 63만 원꼴이다. 결론은 5년동안 나대지 상태로 보유하고 매년 1000만 원씩 올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도데체 이 땅에 무슨 짓을 했길래 매년 1000만 원씩 가치가 상승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잦은 소유권 이전은 이 필지가 결국은 투기화된 부지임을 유추할 수 있다는 거다. 과유불급도 유분수지 올려 불러도 너무 올려 부른 호가를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5000~ 6000만 원 정도면 그간의 지가 상승분을 고려하고 수익을 감안한다해도올라도 너무 올라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예술이 밥 먹어 주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예술은 밥을 먹여주지는 않겠지만 돈을 벌게 해주는 것도 없는 게 아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경남 남해와 경남 합천에 바람흔적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여기에 가면 바람이라는 주제로 설치 예술을 하는 작가가 설립하였다고 한다. 오지로 내몰린 설치예술관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마을을 찾게 하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토지가 가치가 올라갔다는 걸 의미한다. 설치예술 미술관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목마른 갈증을 풀어주는 효과와 더불어 사람들의 발길로 인한 지역 경제의 효과도 발생하는 이치가 숨어 있는 거다. 그야말로 토지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 가지고 그 토지를 이용해서 활용함으로 오가는 이동이 발생하는 발길에 있다. 바람흔적미술관의 공시지가는 공부상으로 찾아보니 M2 당 21,200원이다. 그러나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 발길에 대한 가치는 공시지가 이상일 것이다. 이처럼 시골에 작은 겔러리 하나 만들려는 계획이 터무니 없는 지가에 대해 점점 어렵게만 여겨지기도 한다.
젊을 때는 시골에서 살면 문화생활도 못한다는 등등의 이유를 대며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이 들어 취미가 갈리고 나니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어도 나한텐 무용지물이고 가까운 대학 대공연장의 뮤지컬 공연장이 있어도 뮤지컬 한번 보러 간 적이 없다. 영화가 심드렁하고 도시에서 하는 문화가 심드렁하다. 관심많은 독립영화는 여기서도 물론 꿈도 못꾼다. (상업적인 요란떠는 영화가 싫다는 뜻.)도시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돈벌이 활동을 빼면 뭐가 남겠는가. 문화조차도 돈벌이의 수단화된 각색된 도시의 허상들이 아닐까 싶었다. 하다못해 콩나물조차도 시장이나 마트로 가지 않으면 먹기가 어려운 도시 생활이 아니었던가. 누군가 시간을 소비시켜 일을 하고 대신에 받는 봉급쟁이의 삶이라는 게 대부분 "시간의 압류"이란 대가이다. 도시는 시작부터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에너지이든 먹거리이든 공급이 되어야만 돌아가는 곳일 뿐, 자급할 수가 없다. 뭐라도 팔거나 서비스와 용역을 제공해서 무엇으로 다른 것으로 바꿈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시의 삶이란 살기 위해 종속돼야 할 인생이다.
도시는 아매바처럼 젊은 사람을 흡수하려 들며 유혹하는 요인들이 많고 시골은 흡수 요인이 없이 배척 요인만 있으니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간다. 시골 가면 대부분 젊은 사람은 그림자 구경도 못하며 동네 마을 경로당마다 늙어가는 노인네만 득실거린다. 시골은 늙어가고 있는데 왜 받아들일 토지이용에는 무관심할까. 시골의 지자체마다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유입원을 만들고자 안깐 힘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착 젊은 사람들이 갈 곳이 없다. 농지은행을 만들고 농지를 불하시키고자 하고 있어도 정주할 집하나 마련하기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더라. 그런데도 땅값은 투기꾼들의 암암리에 설치기나 하고 싼 곳은 점점 드물어져가고 산간 오지조차 땅값은 이미 도심 주변 변두리를 위협할 정도이다. 이제 겨우 가족의 동의를 받았는데 막상 알아보니 어이가 없다. 마음이야 급했으나, 장기전으로 봐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길어 봤자 시골 땅은 10년이다. 10년 이상을 토지 가격의 고가 유지는 어렵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지금 시골에 있는 70대, 80대의 노인들의 부재가 조만간 시골 토지의 가격 하락의 원인이고 인구가 점점 희박할수록 토지 수요는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미 시골의 학교는 대부분 폐교 수순이 멀지 않았다. 현상 유지조차 어렵다면, 결국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들은 도시로 나가든가 아이를 도시로 유학을 보내야만 하는 시대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도시에서 10년을 어떻게 버티려나. 캄캄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