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밴야민(독일 철학자)의 사진에 대한 몇 가지 저서에 대한 사진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사진에 대한 책. on photograpy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와 똑같은 제목의 책, 수전 손택(미국 사회 비평가, 저술가)의 책 on photograpy는 사진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사진을 "대하는 것"과 사진에 "관한 것"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카메라 초창기 시절에는 카메라 한대 가격이 거의 집 한 채 가격이었고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카메라가 있는 집이라면 그래도 좀 먹고살 만한 부잣집처럼 각인되었다. 사진은 애초부터 먹고살 만한 수준의 부르주아급 찍는 행위들이었다. 카메라가 워낙 비싸고 일반적인 대중들이 손쉽게 접하기 부담스러운 고급스러운 장비였다.(물론 아직도 일부 카메라 상표 중에는 명품이라는 빨간 쌕 라이카 상표가 붙은 카메라는 먹고살 만해진 사람들의 고집한 선택 사향이다.)
기술의 발전은 카메라의 기능이 첨단급으로 향상시키면서도 가격은 너무나도 많이 낮췄다. 가격이 낮아짐으로 인해서 카메라의 보급은 늘어났고 이제는 사진이 거의 일상 속에서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종례의 카메라라는 고전적 형태는 아니더라도, 카메라와 똑같은 기능을 하는 스마트폰에는 카메라가 한대씩 장착되어 있고 어디서든 누구나 사진을 찍기 바쁘다. 일례로 어느 봄날 벚꽃이 아름답게 핀 관광지에서 보이는 현상을 상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전통적인 카메라의 형태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셀카봉을 들고 벚꽃을 배경으로 저마다 사진을 찍기 바쁘다. 어쩌면 꽃놀이가 사진 놀이화된 것처럼 어디를 가서 놀러 가면 그날을 기념하든 기록을 하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스마트폰을 꺼내고 셔터를 눌러댄다. 이게 일상적인 사진을 대하는 일반적인 자세이다. 기술의 발전은 카메라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커다란 카메라 대신에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에 카메라 기능을 넣고 쉽게 저장하고 SNS로 저마다 인화한 사진처럼 디지털 앨범에 기록을 하고 지인들에게 보여준다. 오늘 나 어디 놀러 갔었고 이뻤고 무얼 먹었고 등등 개개인의 일상을 보여준다. 나 오늘 이렇게 행복한 모습이라며 자랑삼아 보여준다. 이 역할이 사진을 통해서이다. 글로 써서 보여주기보다는 먼저 사진부터 보여준다. 그 사진을 보고 즐거웠겠구나. 멘트를 날린다. 그럼 사진의 역할은 다했다. 즐거웠음을 보여주는 것. 이게 우리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사진의 역할이다.
카메라의 발명은 회화의 문화적 양식을 변모시켰고 예전에 없는 삶의 방식도 사진 찍고 사진을 보는 행위들로 바꿔 버렸다. 이처럼 카메라의 없었던 시대와 있는 시대의 삶의 행위가 달라졌다. 달라졌으니 의식 또한 바뀌는 것 또한 당연하다. 사진에 대한 밴야민의 철학자로서의 사진이란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예전에 없던 문화적 배경이 되고 오늘날까지 그의 철학이 이어지는 놀라운 효과를 당대에서 만나고 있다. 이것이 사진에 대한 것들이다.
독일 베를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태계 독일인은 삶이 종국에는 불운했다. 유럽의 용광로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분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았고 급기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던 때 프랑스를 탈출하지 못해서 피레네산맥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비록 사진을 찍지 않고 사진가는 아니었더라도 유럽의 사진계의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지금의 사진 현상을 밴야민은 일찍이 내다보았고 사진적인 현상에 대해 철학적인 예언도 지금에서야 이해되는 현상을 우리 시대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미래의 시대는 이미지를 읽지 못하면(파악하지 못하면) 문맹자라고 인용한 부분의 일갈은 마치 오늘을 예견한 그의 사진에 대한 시선이었다. 아마 오늘날의 사진을 밴야민이 보았더라면 무척 기뻐했을까 슬퍼했을까? 그 당시의 사진과 오늘날의 사진을 감히 비교할 것은 못되지만 오늘날의 사진을 그가 만난다면 얼마나 많은 사진에 대한 저술이 나올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일이다.
오늘날 이렇게 사진이 광범위한 삶의 한 방식에 편입된 현상에 대해 비평을 한 수전 손택은 그의 저서 사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잊고 있던 밴야민을 부활시킨 듯이 조명한 대표적 저술가 있다. 그의 책도 역시 "ON photogray"였다는 점에서 같았다. 여기에서 수전 손택은 밴야민의 사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사진의 사회적인 현상의 전반에 관한 비평을 이어나갔고 사진 비평의 확장성에 일조를 하였다. 사진만의 범위에서 넓혀 나아가 사진의 사회성에 대한 현상을 사유하고 비평한 것이었다.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사진은 전 인생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현대인의 사진은 놀이로써 또는 현재의 증명으로써 이어진다. 또한 사진은 다큐로써 역사를 기록하고 예술로 승화시켜 미학적인 발전을 도모한다. 하다못해 오래전 초상화같이 대형 걸개 사진에서부터 작은 신분증명서에 붙은 증명사진까지 우리가 일상의 사진은 알게 모르게 사진화되어 있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학생증 등등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은 신원증명을 하는 문서에 반드시 있다. 사진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이제 사진적인 의식화이 되었다. 병원에서 태어났을 때 첫 번째 찍는 사진부터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걸리는 영정사진까지 사진은 따져보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일상에서의 사진이 나아가서 예술화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과 같이 된 것도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닌 시대임에는 틀림없는 사회적인 현상이다.
사진을 십수년 찍어 오면서 흔히 사진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진 찍으면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냐, 그걸 왜 찍냐고 타박했던 말이 떠오른다. 물론 사진은 돈도 안되고 밥도 안 나온다. 그런데 사진이 없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돈을 아예 만들 수가 없고 밥벌이를 시작도 할 수 없다. 어디 이력서 하나 제출하려고 해도 이력서에 사진이 없으면 지원조차 할 수 없는데 돈벌이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처럼 사진은 일상의 삶에 나무의 뿌리처럼 지하에서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시스템의 방식이 된 것이다. 당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다면 당장에 무등록자로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현시대를 살고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의 존재 근거는 신분증명서에 담긴 사진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진의 가치라는 것이 어떤 작용을 하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지금 당장에 자신의 얼굴이 담긴 주민등록증에 담긴 자신의 사진에 눈을 맞추어 보는 것은 아닐까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내가 존재의 증명을 사진으로 한다면 내가 거주하는 이 공간의 증명 또한 사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곳으로 풍경 사진을 찍는 것 또한 내가 그기 그곳에 존재했다는 시간의 증명이 바로 사진이 된 것은 아닐까 한다.
사진은 나의 신분 증명이듯이 내가 찍는 사진은 내 존재의 증명이다. 그렇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셔터를 누를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계속 사진을 찍을 것이다.
PS : 페이퍼글 마지막으로 사진에 대한, 혹은 사진에 관한 책이 나왔다고 해서, "사진하면 유레카를 떠올렸다"며 책을 보내주신 이웃 분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 오랜만에 사진책 이렇게 흥미롭게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