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만 해도 수월한 팔자?라서 살만하면 "까이 거" 좋아하는 독서를 안 할 이유가 없다. 시간 없다는 핑계라 해도 어쩔 도리 없이 바쁜 일상에 정신이 아득하다. 돈 복은 없이 일 복이 터진 인생이라 그런지 독서할 시간이 "좃또마떼" 부족하다. 널널한 시간을 가진 사람이 진짜 부자라는 걸 실감한다. 돈 많아도 늘 시간이 부족해서 허덕거리는 놈은 가난한 자이다.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만 있다면 모를까, 다들 이렇게 바쁨으로 삶에 매몰되는 줄도 모르고 인생이 묻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책 사놓고 책장에 쌓인 책도 아직 몇 권이나 된다. 낮에 일하고 퇴근하여 운동이라도 한두 시간 소비하고 나면 그다음은 책을 펴놓고 졸음과 싸운다.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라는 게 괜히 나온 건 아니다. 피곤함인지 그야말로 몽롱함으로 마치 꿈을 꾸는 듯 멍해진다. 내가 무슨 수험생이나 된다고 읽다만 책과,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을 읽어 내야만 하는 의무감을 가질 것도 없다. 맑은 정신으로 또렷할 때나 가능하다. 책상에 앉으면 졸리니 러닝머신에 걸으면서 책을 읽는다. 한편으로 내가 뭘 하겠다고 이렇게까지 책 읽기에 몰입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감도 살짝 들기도 한다. 함께 운동하던 와이프가 옆에서 "운동으로 워킹하며 책 보는 냥반은 당신이 처음이지?"라고까지 핀잔성 거들먹거린다. 답은 간단하다. 안 그래도 희미해지는 지성이랍시고 조금은 또렷해지고 싶은 몸부림, 이게 독서라고 설명했다. 사진 찍으러 가고 싶다. 책 끼고 살고 싶지는 않는데, "그나마 책이라도..."라는 꿩 대신 닭의 심정일뿐이었다.

 

오늘도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이 너무 흔하게 다량 출판 시대이다. 하루에 몇 권이나 출간되는지조차 다 모른다. 알라딘 서재에서도 소개되는 거의가 대부분 신간으로 구입도 못 했던 책이다. 그거 다 보겠다는 목표라면 도저히 무리. 간행물 등록 건수가 얼마인지도 찾아보기도 벅차다. 그리 많은 책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나 해야 할 텐데 결국 다 못 읽고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뭐라고 되는 것도 아닌데, 이 책의 편집자께서 친히 메일까지 주셔서 고맙기는 한데 '앗, 철학 책을 소개' 했다, 솔직히 (학문적 혹은 기타 등등) 철학은 내가 쥐뿔도 모른다. 철학에 사용하는 단어조차 전혀 적응이 되지 않는 독자 중 하나이다. 아쉽게도 편집자 분께서 나의 알라딘 서재 글 몇 번만 주의 깊게 봤다면, "아 이놈은 사진 좋아하는 놈이구나"라고 간파하고도 남을 것이다. 대상을 잘 못골랐다. 그런데 철학 책이라니. 뭔가 조금 찜찜하다. 철학 책은 상상의 세계. 대부분 단어조차, 개념조차 모르니까 활자가 레코드판에 바늘 튀듯이 글씨가 겉돈다. 게다가 꾸벅꾸벅 졸다 보면 책 페이지가 진도가 잘 나가질 못한다. 그래서 휴일 주말에 몰아서 읽는 편인데 가끔 책 읽기도 때로는 노동같이 피로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진에 관한 현장에서 기록한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더라면 진짜, 뻑~갔겠지만, 철학의 읽기가 어렵다. 괜히 메시지 받고 책까지 구입해놓고 쌓여 있는 책 읽기에 대한 부채감이 생기기도 한다. 빨리 읽지 못해 뭐라도 책 안내성 글이라도 쓰고 싶지만 빨리 쓰지 못해 미안하고 한편으론 뭐냐, 사진 서재 블로그에게 사진 책 소개는 못할망정 철학 에세이 책이라니, 갑뿐사~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까? 개인적으로, 누구 부탁이나 요청에 대해 진짜 거절을 못하는 편이다. 오죽했으면 거주하는 집 명의를 와이프 이름으로, 통장이나 카드의 대부분을 와이프 명의로 했겠는가. 보험도 마찬가지로 와이프 명의로 했다. 아예 내 이름으로 하지를 않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하는 와이프의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책에 대한 요청은 와이프 허락받을 건 아니라서 질렀는데 여전히 책장에 쌓여있어도, 또 이 책도 구입했다. 이 나이에 아직도 부사수 하나 없이 가방 들고 다니며 버티는데 게다가 요즘 가을철로 접어들어 사진 찍으러 나가기가 너무 간절하다.  책보다 사진이 좋은데 언제 책을 읽고 리뷰까지 마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집중하여 몰입하게 읽어야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읽자니 너무 졸아서 시간 관계상 이 책도 운동하면서 읽었다. 쉽게 쓴 철학 담론의 책이라고 저자가 설명하고 있지만 역시 퍼득 이해되기가 간단하지가 않다. 며칠 동안 땀나게 걸으며 읽은 바, 첫 느낌은 그저 "쎄하다"였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자가 "그"이다. "그것, 그들, 그런데, 그러나, 이런저런 그런 등등의 지시대명사와 접속사의 연속". 내가 철학"적" 사유나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서 지시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철학의 문장은 왜 "그것", "그들"이 많이 나오는가? 지시하는데 지시의 대상을 찾아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재차 "그것"이 대체 뭘 지시하여 말하려 하는 건지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찾는다. "그것들, 그것이, 그들은"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읽어도 읽은 거 같지가 않았다. 아! 책 읽기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또한, "우리, 우리들"이란 단어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과연 여기서 의미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타자인가 자아인가? 한참을 헤맨다.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적"이다. 논증적, 자연과학적, 선험적, 초월적, 현실적,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실증적, 관념론적, 독자적, 자발적, 어떤 단어에 무슨 적, 무슨 적 적적적이 줄줄이 알사탕으로 엮어져 나온다. 그야말로 ~적은 만능"적"인 철학"적"의 조어 같은 단어인듯하다. 아무런 단어 하나라도 "~적"이라 붙여도 문장이 되는 듯이 보인다. "그"와 "우리"와 "~적". 이 세 가지를 빼면 과연 책의 정체는 무슨 철학 책인가? 문장 자체가 이 셋을 빼면 뭘까? 오늘도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끝까지 달린다.

 

회사의 회식이 있어서 입빠이 한잔하고 얼큰하게 취한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며 오기로 책을 펼쳤다. 끝까지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꼭 마지막 페이지까지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펼치려고 작정을 했다. 그런데 또 지겹게 나온다. 그것들. 우리들. 뭐시적들. 아니 이 세 가지를 빼면 문장이 아니게 된다. 일부러 빼고 읽었는데 아, 너무 철학"적"이다.  (김어준처럼) 씨발!~. 철학을 다루는 책에서 철학이 "것"과 "적"과 "그"라는  세 가지의 복합 작용은 아닐까. "그, 우리, ~적."이 셋을 빼면 과연 문장이 되는 걸까 모르겠다. 진짜로~. 아 또 하나 빼먹은 "것이다"이다.

 

실증과학? 예술, 문학. 이런 단어도 종종 등장한다. 철학 책에서 과학과 예술과 문학이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사진을 10년 넘게 사진으로 예술을 구하려 해도 예술이 뭔지를 여전히 모르겠는데 철학을 전공한 학자의 예술에 대한 관념이 도대체 무엇인가. 혹은, 과학자로써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구하고 데이터를 토대로 수식을 더하여 공식을 만들어 내며 기호를 써서 표현하는 그 과정을 알기는 아는가? 뭘 해봤다고 하지 않고도 상상으로 언어의 유희같은 애매함과 모호함의 지시대명사 남발과 "것"과 "~적"의 나열이 주야장천 나오는가 말이다. 정 궁굼하면 전자기 회로도를 공부해서 컴퓨터 PC 메인 보드의 회로도를 캐드로 한번 그려나 보시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하다못해 건축학을 전공해서 캐드로 건축 도면이라도 그려서, 철근과 시멘트의 저항을 구하고 힘의 공식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해보는 건 어떨까? 혹은, 전자기학으로 전류가 어떻게 흐르고 많은 콘덴서와 저항 보드를 거처서 모니터에 나타는 현상이 어떤 건지 철학"적"인 사유로 말이다. 아! 철학은 이렇게 공허하게 나열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예술을 하는 사람은 말로는 하지 않는다. 내가 찍은 사진이 얼마나 개 허접해서 마냥 사진에 글을 써대는 이유가 뭐겠는가. 여전히 다 사진으로 만으로써의  사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와 적과 것과 우리가 철학인 거 같았다. 이게 대체 뭐냐는 거다. 철학이 이렇게 모호하고 애매하고 오리무중의 언어의 난무의 무용수가 되어 막춤으로 오늘도 책을 넘긴다. 힐렐레 팔렐레. 맥락도 없는 상징도 의미조차 내가 모르는 읽어도 읽은 거 같지 않은 느낌은 내가 뭔지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서 한 판의 춤사위라고 해도 좋을듯하다.

 

철학은 사유와 논증이라고 한다. 사유는 어쨌거나 단어의 능력에서 나온다. 일단 내가 자주 접하는 단어가 아니라서 그런지, 철학적인 사유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이 책의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공했는 거 같다. 학위를 못봤으니 무엇으로 학위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비트겐슈타인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종군 기자로 전쟁 사진으로 유명했던 로버트 카파, 유진 스미스,  결정적 순간의 카르티에 브레송 이런 작가들의 사진을 자주 봤었다. 난 비트겐슈타인이 뭘 했던 사람인지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찾아 봤다.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보여져야 한다"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쮜뿔도 모르면서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를 하고자 했다. "언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아무리 떠들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즉 주절거리지 말고 행동으로 말하라는 의미로 받야 들어진다. 이 해석이 맞든 틀리든 난 아쉽지만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서 대화를 해본 적은 없다. 대체 그 말의 의미 해석이 맞나요?라고 묻고 싶지는 않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유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며 설사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서 만난다 하더라도 대화는 불가능하다. 즉 알 턱이 없다. 혹시 비트겐슈타인도 그, 우리, ~적, 것이다 이걸 많이 사용했을까 난 이게 더 궁금하다. 궁금할 뿐 직접 답변을 듣는 건 역시나 불가능하다.

 

글이 길었다만은, 하나의 예를 들고 끝내기로 한다.

 

오래전에 모 방송국 TV프로그램 중에 가족오락관이 있었다. 가족 오락관 프로그램 중에 게임의 참여자가 5명씩 일렬로 서서 맨 첫 사람이 진행자가 보여준 단어 팻말에 적힌 단어를 맨 끝 사람이 맞추는 게임이었다. 다만 입모양만으로 진행자가 보여준 단어를 표현해서 처음 팻말을 봤던 사람이 맨 끝 사람이 맞추어 점수를 내게 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철학도 어쩌면 가족 오락관에서 하는 게임처럼, 원래의 저자인 철학자가 펴낸 철학의 책과 논문으로 다음 사람으로 전달되고 또 전달되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번역된 언어로 다시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최종적으로 나에게 까진 전달될 때, 과연 나는 원 저자 철학자의 뜻과 마지막으로 내가 전달받은 철학"적"인 것을 얼마나 알아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가족 오락관에서 처음 전달한 사람과 마지막 전달자의 입모양은 거의가 빗나갔으며 전혀 엉뚱한 단어로 둔갑해버린다. 언어의 소리가 없는 단어의 무음 전달은 뉘앙스가 없고 억양이 없고 고저가 없는 흡사 금붕어가 뻥긋하며 입만 벌리는 무음의 입모양으로 금붕어의 철학을 알아듣는 듯이 철학자의 뜻을 알아듣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나는 이 책이 뭔 말인지 몰라도, 활자만큼은 끝까지 다 읽을 예정이다. 이제 반 이상 읽었고 취향 편에서 변명 편으로 넘어간다.

이 책은 철학자로써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다. 쉽게 쓴 책이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철학에 대해 무지하였다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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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28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예전에 소개팅을 나갔을 때 여러 면에서 좋은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계속 만남을 하기에는 주저하는 상대가 생각이 나네요. 모든 사람과 다 맞을 수 없는 것처럼 맞지 않는 책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여겨집니다. 유레카님 좋은 하루 되세요!^^:)

yureka01 2019-09-28 11:57   좋아요 1 | URL
사진 책은 소개를 안시켜 주니 사진 출판사에게 뭔가 섭섭함이 들어요..ㅎㅎㅎ...
감사합니다.~

2019-09-28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8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28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읽다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끝까지 안 읽고 중간에 덮어요. 아는 분이 이 책을 언급하셔서 책 소개를 봤는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 책 소개마저 어렵게 쓰면 그 책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ㅎㅎㅎ

yureka01 2019-09-28 17:11   좋아요 1 | URL
읽는다와 본다의 차이죠..
이 책은 읽는 책보다는 글자를 본다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너무 모르는 분야의 책은 늘 낯설어서요..

강옥 2019-09-2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걸 쉽게 말할수 있어야 해요. 글도 마찬가지지요.
침팬지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철학인지 처락인지 장르 자체가 어려워서 현학적으로 쓸수 밖에 없는 모양이지요 ㅎ
철학도 쉽게 풀어놓은 책이 있던데요. 가독성 높은 책이 좋은 책이다, 라고 생각하는 지우당 ^^*
애러븐 책은 휙 던져버립니다. 느낌 아니까~

yureka01 2019-09-29 20:01   좋아요 1 | URL
전기공학을 공부하지 않고 전기 회로도를 이해 못하겠지요.
전축학 전공하지 않고 건축캐드 도면 보고 적산을 못하거든요...
철학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일단 철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의 개념 조차 없으니 당연히 어렵더군요..
어려운걸 지시대명사가 너무 많이 나오니 더어렵더라구요..ㅎㅎㅎㅎ

2019-10-01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9-10-03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너무 공감되는 글이에요. 철학적 사유 뭐 이런 거 다 좋은데.. 이런 ~적 이라는 표현이 한 문장에 2~3개 이상 나오면, 가독성이 쏙 떨어지죠. 문제는 ~~적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명확하지 않다는 거에요. ~적이라는 게 ~~같다는 소리인건지, 사실 ~적 뿐만 아니라 쉽게 뜻을 알 수 없는 용어들이 많은 것도 문제죠. 아 이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전문평론가들이 쓰는 평론류나 2차저작물 형태의 철학서적에서 흔히 볼수 있는 글들 말이에요. 그래서,, 뭘 분석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인가보다.. 이렇게 어렵게 글을 써야 하니 말이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공감하다보니 두서도 없는 답글이 되었네요 ^^

yureka01 2019-10-03 22:25   좋아요 0 | URL
한문장에 ~적이라는 게 너무 많아서요..
철학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 하나 하나가 파고 들면 깊이가 상당해서인지
한 문장을 읽는데도 꽤 긴 생각이 필요하고 찾아봐야 할 문제가 많았어요..
철학이 참 멀리 있구나..싶었습니다..
긴 답글 감사합니다~
 


뉴스가 소설이 되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사실 확인이나 검증 없는 뉴스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뉴스가 뉴스 관련자에게 휘두른 멍에는 분명 억울함을 만든다. 뉴스에 억울한 사람에게 항변권도 동시에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그 뉴스가 일방적으로 거의가 비슷한 논조의 목소리로 통일된 걸로 나온다면 소위 작전같이 일사불란한 오류라는 판단 미스의 카드섹션이 같아 보여서이다. 노동 신문만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논조가 거의 비슷하다면 난 일단 뉴스의 신뢰성에 의심하게 된다.

 

사진을 찍으면서 관점이란 것을 생각한다. 다양한 각도와 위치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사진의 프레임과 위치와 화각에서 결정된다. 사진이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담는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와 같이 뉴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뉴스의 논점은 사실이거나 진실이거나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쪽 편의 일방적인 관점의 시선으로 보면, 편견이 작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성의 뉴스는 더더욱 그러하다. 객관적 사실은 어떤 시선과 어떤 관점에 따라 진실성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뉴스가 추리 소설이 되면 소설가들이 섭섭해서 운다.

사실을 하나하나 파고들고 자료를 수집하고 증인의 인터뷰를 따며 인터뷰를 다시 확인하고 그래서 종합적인 판단을 언론의 기자가 하는 것을 취재라 하고 이것을 기사로 내는 것인데, 누군가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걸로 그것만 전달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기자 직업이 받아쓰기는 아닐 것이다. 사진은 꼭 현장에 가야만이 찍을 수 있다. 뉴스도 마찬가지로 현장에 가서 찾아 봐야 한다. 만약, 현장에 가지 않고 나온 사진이라면 그것은 사진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지 그림이라고 한다. 뉴스가 그림처럼 그려지면, 앞서 말한 억울함이 생기게 된다. 뉴스가 얼마나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으며 기업인들에게 메시지 넣어 개인적 청탁이나 하고 공짜 점심을 그리워했을까? 기름칠한 기자에게 공정성은 너무 오버스럽지 않을까?

"왜요?"라니, 어디서 장난 같아 보이나? 기자 간담회에 증인의 답변에 왜요?라는 기자는 왜요라는 딱 하나의 반응으로 수준을 결정해버렸다. 기사마다 기자의 실명이 공개되어 있는데 기자 이름으로 기사를 검색해보라. 얼마나 이그러져 있는 관점이 편중된 기사인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말의 어투뿐만 아니라, 자세와 태도, 그리고 그간에 쓴 모든 저작물과 글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왜요?"라는 질문이 얼마나 개그 수준인지는 뉘앙스와 맥락에서 느껴지기 충분하다. 나는 감정의 절제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다. 받히면 바로 받는다. 뒤끝 작렬이고 욱하는 성격이 있다. 사람 살고 죽는 목숨 걸린 일이 아니면 여간해서는 핏대 세우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번 '욱'하면 그다음은 결론을 생각 안 하고 저질러 버린다. 살면서 얼마나 조심하며 휘말리지 않으려는 자각을 매번 하고 있다. 그런데 특히 억울함과 울분이 생기면 참기가 참 곤란하다. 누가 실컷 설명했는데 "왜요?라고 한다면?" 이세끼 나랑 싸우자는 거지? 나와 새꺄 한판 붙자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참 대단한 억제력이다. 어디서 본 거 같지 않나?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고 했다. 맞다. 기자가 막가자고 하는데 막가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참는다. 대단한 절제력이자 인내력이다. 수준 떨어지는 조무래기들에게 질문받는 고도의 인내력은 빛을 발한다. 기자들의 수준은 이미 언론의 수준이었다. '왜요'라니?

사진을 찍어 오면서, 가까웠던 친구에게 한때, "사진의 수준을 높이라"라는 충고 혹은 비난을 많이 그리고 자주 받았다. 친구가 나의 사진을 보고 얼마나 형편없이 봤을까. 사진이나 글을 쓰면서 항상 걸리는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수준을 높이려 하다 보면 이게 또 얼마나 사진의 관념적인 허영이 생기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갈팡질팡. 사진에서만큼은 겸허하자였다. 겸허는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사진 수준이 형편없는 것은 나의 사진 관점이 형편없어 보였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가지지 못한 수준을 무슨 대단한 작가들처럼 끌어 올리기 위한 방편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사진 공부를 꾸준히 하려고 들었으며 사진 책을 자주 읽기 시작했던 건지도 모른다. 예술적인 부분에 대해 수준을 논하는 것은 사건의 진실이나 사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에 겸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없는 사실, 없는 진실, 있는 사실, 있는 진실을 역으로 엮으려 들었다면 겸허하기란 참 곤란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참 괴로운 거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수준이 결정될 수도 있고 예술이란 명확히 떨어지는 사실적 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라서 말이다. 이렇듯이 우리 일상에서도 삶의 태도나 자세, 말과 행동에서 수준은 일반적으로 나온다.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고상함과 저급함의 차이는 그 뉘앙스에서 얼마든지 알아차리고도 남는다. 그런데 글로 밥 먹고사는 직업인 기자가 고작 "왜요?"라니 코미디보다 재미는 없었다.

 

어느 사람치고 완전한 사람은 없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는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좌든 우든 별개이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살다 보면 때로는 손에 오물이 묻을 경우가 생긴다. 사람 사는 일이 고고한 산 위의 낙락장송처럼 이슬만 받아먹고살지는 못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얼마든지 오점이 생길 수도 있다. 실수를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대놓고 도둑질하고 부정한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이익을 취하려 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안타까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사고 소식, 노회찬 의원의 사고 소식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적극적으로 방어도 못하고 스스로의 결벽증에 자신을 먼저 파괴시켜 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누군 태산 같은 부정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고개 쳐들고, 내가 뭘 잘못했니라며 당당하게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모르며 그로 인해 생긴 피해자들이 울부짖어도 모른 척하며 무시하기 일쑤인데, 살다 보면 생길 그 작은 티클 하나가 암 덩어리처럼 자기를 파괴시켜 버리는 것과 어떻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일에도 계획적이냐 의도적이냐와 실수이냐 과실이냐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크다. 평생 살아온 삶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려 했던 그 진정성이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티클만한 부정에 그동안 삶의 전부를 도매금으로 매도 시켜버리니 스스로의 자괴감은 얼마나 크게 자신을 학대했을까라는 점이다. 누군 당연하게 생각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본 그들의 삶이 그렇게 부정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누가 그렇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비난하기는 너무나 쉽다. 누구처럼 한 평생 동안 사기꾼같이 산 놈도 안 죽고 뻔뻔하게 사는데 왜 스스로를 죽였을까,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사건이었다. 여기에 언론이란 놈들은 불씨 하나에 기름을 붓고 불을 키우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처럼 비난 일색이니 이걸 견딜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이른바 언론 타살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에 대한 기사를 쓴 기자들의 글에 대한 책임은 결코 적다할 수는 없었으나, 어느 기자 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펜의 힘은 총칼보다 강하다고 한다만은, 펜도 때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심리적 무기나 마찬가지다. 전직 대통령이랍시고 깍듯하게 예우는 못할망정, 버스에 올라타면서부터 고속도로를 달려 청사 앞 포토라인에 서는 전 과정을 헬기까지 띄워서 망신을 주며 있지도 않는 논두렁 시계를 사실인 것처럼 흘려듣고 받아쓰기 한 세끼들에게 어떻게 조져 버려야 마음이 후련할까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건 비단 나뿐만 일까? 당신 본인 자신은 자신에게 퍼붓는 비난을 감내할 힘이 있을지라도 그 주변 사람들 전부 털고 가족까지 먼지 털듯이 뒤져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면 일반 시민에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는 짓거리가 아닐까 한다.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가끔 내가 나를 잘 모를 때도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과거의 행동과 결과를 통해서 현재를 유추는 가능하다. 이유 없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행동이라도 심리적 요인은 다 있기 마련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현재를 판단하기 위한 과거의 기록이나 언행을 통해 오늘을 유추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진을 15년간 틈틈이 찍어 왔다면 오늘날의 판단은 '아 내가 사진을 참 좋아했구나'로 평가받을 수 있는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어떤 행동이나 결과물로 오늘을 따져 보는 것이 차선은 될 수 있기도 하다. 사람은 삶의 무수한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추적하다 보면 그 흔적들이 오늘날의 삶의 얼굴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 흔적을 통해서 오늘날의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 어떤 사람의 평가를 얼마나 알고 쉽게 평가할 수 있을까. 어떤 이익을 위해서 관계했던 사람들의 인식이나 기록 등등 이런 것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로 평가하는 게 옳은 방법이다. 비록 심리적인 의도를 완벽히 파악할 방법은 없다. 다만 근거의 자료를 증거로 삼아 재단하는 것이다. 선한 삶을 살았는지 악행을 일삼고 살았는지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그와 관계한 사람들의 증언도 물론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어느 한 방향의 일방적인 뉴스에 매몰되어 가치 편향이나 인식 편향이 확립된 경우이다. 이젠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구체적인 것은 직접 찾을 수야 없으나 간접적으로나마 다양한 sns 루트를 통해서 얼마든지 크로스 체크도 가능하고 이젠 심지어 사건의 직접 당사자의 의견도 발표되는 경우도 많다. 교차로 체크된 정보로 접한 정보로 판단해야만 한다. 또한 워낙 SNS나 유튜브나 방송이나 언론에서 검증도 되지 않는 어떤 목적을 가진 왜곡된 정보나 개인적인 편견적 의견이 정보처럼 나도는 것 또한 검증이란 거름망으로 걸러서 받아 봐야 내 판단의 오류가 틀리지 않음을 자신할 수 있다. 틀린 정보나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받아 들이 뉴스로 인해 내 가치관이나 사상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렇게 오해된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이젠 빅데이터 시대라고 한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어디서 신용카드를 쓰며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등등 구매 기록과 이동 기록 만난 기록 등등 정보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서일 뿐이지 객관화시킬 자료는 어딘가에 분명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의 관계와 과정들을 추적하면 뭔 작당을 벌이는지 무엇에 헌신을 하는지 나온다. 있는데도 찾아 보지 않는 기자라면, 직무유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런 취재라며 하루 종일 종편 TV에서 떠드는 의혹성 뇌피셜의 기사를 가지고 믿을 수는 없다. 사실 확인 진실의 추적 뭐하나 재대로 한 것도 없이 단편적이고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본 사람의 평가를 신뢰하는 것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노인네들의 하루 종일 종편 TV에 빠져 있는 게 차단된 정보와 크로스 체크 검증도 없는 능력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거다.

 

요즘의 뉴스를 만들어 내는 언론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 불러주거나 언질만으로도 의혹만 제기하고 의혹을 확인도 없고 받아쓴 기사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없는, 타이틀에 대해 클릭 장사꾼 같은 언론들에게 "국민의 알 권리"라는 사명감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론에서 나오는 70% 기사는 국민이 몰라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또한 기사가 없어도 인터넷으로 찾아 보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공공기관 등에서 나오는 자료들이 홈페이지마다 잘 정리되어 있으니 굳이 언론의 정보가 아니더라도 굳이 아쉬울 것도 없다. 누구나 다 찾을 수 있는 자료라면 굳이 언론사를 통해서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이 가진 존재의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돈 벌어서 밥은 먹고 살겠는가? 점점 주목도가 낮아지고 광고 수주도 안되면 점점 매출은 떨어질 것이다. 그동안 쌓아 놓았던 적립된 자본으로 얼마 간은 버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식으로 계속 나갈 경우라면 언젠가 기자들 월급도 못 주는 날이 반드시 온다. 누군가 점점 아쉬워하지 않은 시점이 누적되어 간다. 정보가 언론에 독점되었던 시대와 아닌 시대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글이 길었으나, 이왕 긴 글에 한 가지만 더하자. 그 당시의 선택은 좋든 싫든 그 나름의 가치관으로써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국민이 확 바뀌지도 않는다.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어너더 뉴 네셔널이 될리가 없는 이유가 다 같은 국민이 선택이었다는 것만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역시 신도 아니다.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이있을 수 있다. 앞으로도 어떤 일로 오명을 받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전임이 워낙 어질러진 판에서 새로 선택받았기에 기대치가 어느 전직 대통령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현장에서는 사고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여전히 생활고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있고 사회적으로도 서로가 이익이 충돌하는 많은 현장에서 각박하며 사회적인 경제적인 모순이 상존한다. 이걸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확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도 오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국민이 얼마만큼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과 대등하게 스스로가 요구에 준하는 바뀜도 있어야 하는 것을 간과한다. 내가 당신을 선택해서 권력을 줬으니 당신은 내가 준 권력으로 당장 내가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편하게 뭔가를 이루어 내라는 요구가 누적될 것이고 이 요구에 부응이 잘 되지 못하면 다시 권력을 감시하듯 질타할 것이다. 흔히 그랬잖는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럼 이게 또 누구 때문일까? "이익 앞에서는 나만 이어야 하는 국민"과, "손해 앞에서는 나만 아니면 되는 국민"과 ""불의는 어지간히 잘 참으면서 불이익은 불같이 나서서 피해에 저항"하는 모습도 이 역시 국민이다. 국가의 미래가 북유럽처럼 바뀌기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지 부터 국민들 제각각의 저마다 주어진 공정함, 공평함에 대해 얼마나 가치롭게 살고 있는지 먼저 자문해봐야 할 문제이지 대통령 혼자서 백날 머리 쮜어 짠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거다. 권력이 바뀌었으나, 국회도 그대로이고 검찰도 그대로이고 언론도 그대로이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는 환경에서 전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선택하지 않았으나 그를 잃고나서야 지금의 문재인을 얻었다. 이미 북한발 위협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나는 다른 거 다 제쳐두고서라도 만족한다. 몇십 년전의 전쟁의 공포. 이거 하나 막는 것만으로도 점수 이미 반은 채웠다. 부디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으로 갈라진 두 나라라 하더라도 제각각 아프지 않게 오손도손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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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9-24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힘 있는 격문이자 뛰어난 명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yureka01 2019-09-24 23:45   좋아요 0 | URL
하루 종일 종편 보는 뉴스거리가 답답해서요..

유매 2019-09-24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yureka01 2019-09-24 23: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9-25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6년 당시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탄핵은 조선일보가 불을 지피고, 한겨레가 받고, jtbc가 쐈다는 말이 공감이 갑니다. 그때 종편이 없었더라면 아마 100만 촛불이 켜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탄핵 지지율이 85%정도 되었을 때, 문재인 후보의 대선 지지율이 40%수준임을 생각한다면, 촛불의 반수가 문재인 정부에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야겠지만, 박근혜를 반대했던 국민이 모두 개혁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현실은 바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yureka01 2019-09-25 09:02   좋아요 2 | URL
네 맞습니다.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다고 개혁에 찬성과는 별개입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관련된 개혁에는 정의나 공평이란 가치관과는 멀어지거든요..
내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혹은 내가 이익을 적게 보더라도 공정함을 더 우선하는 것...
이게 가치롭게 사는 길이긴 한데 현실에선 아주 멀리 있거든요.
그래서 개혁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로사 2019-09-25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식히는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yureka01 2019-09-25 12:26   좋아요 1 | URL
어느 누구라 하더라도 완벽할 수야 없을 겁니다.
인간의 기본 전제가 불완전함이라서요.
그렇기 때문에 진일보하느냐 후퇴하느냐라는 과정에 있는 거라서요.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권력자가 되었으니 한꺼번에 완벽히 하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사회적 시스템이 한발짝씩 앞으로 전진하는 개선이나 개혁을 주문할 수 밖에 없거든요..

지난 정부시절 얼마나 퇴보했었는지 생각해보게 되거든요..
최소한 그러지는 말아야 하니까요,,

감사합니다~

cyrus 2019-09-25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니까 어떤 이슈에 대해서 신중하게 의견을 내지 못하겠어요. 저는 제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이슈를 분석하고 싶거든요. 제가 모르는 이슈는 쭉 지켜보되 의견(결론)을 내지 않아요.

yureka01 2019-09-26 23:11   좋아요 0 | URL
공식적 언론이 찌라시처럼 될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비공식적 언론도 참고 해서 상충되는 뉴스의 관점을 살펴봐야 하거든요..그래야 판단이 되거든요..일방적이면 속는 수가 있어서요..

강옥 2019-09-25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번 읽었네요. 곱씹어 읽을만한 글이라서 -
지도자를 잘못 만나 국민들이 고생인지, 정치수준(=국민수준)이 낮아 이 지경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까지 당했던 거 니가 다 물어내라, 뭐 그런 심사라고나 할까
저는 어느 모임에 가서나 정치, 종교 얘긴 절대 안 합니다. 싸움나니까요 -
그냥 내 심지만 굳게 갖고간다, 그리 생각합니다.

yureka01 2019-09-26 23:13   좋아요 0 | URL
정권이 새로 들어서면 기대치가 높죠..어느 정권이나 비슷하죠..
그런데 기대치에 부응한다해도 결과가 나쁠 수도 있거든요.
선출된 정치가는 신이 아니라서요..
다만,...그 의도하는 진로가 과정으로서 추구하는 바가 진일보하는 것을 추구하는가 이걸 판단해야죠..
완성은 없거든요...

2019-09-26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6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1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장 생활 근 30년 넘게 근무하며 눈칫밥 먹다 보니, 두 가지 분위기에 좀 밝아진다. 누가 지지하고 좋아하며 찬성하는 건지, 반대로 누가 자기를 지지하지 않고 싫은 티가 팍팍 나는지, 대충 감이나 느낌적 느낌 등의 그 눈치를 읽게 된다. 지근한 관계가 아닐 경우라면 지지하든 반대하든 별로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다. 어쩌다 마주치는 먼 관계라서 연관이나 연계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대자가 상당히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이라면 관계적 상황이 괴로워질 수 있다는 거다. 눈치를 보게 되는 이유이다. 만나지 않아서 안 보고 살면 눈치 볼 것도 없지만, 가족이나 가까인 지인이라 안보고 살 수도 없을 경우, 그러려면 지지하지 않는 자의 동감과 교감을 얻어야 하는 과정이 필수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진 생활에 제일 큰 걸림돌이 와이프였고 또는 가족 중 몇몇들이다. 열심히 돈이나 많이 벌어서 안락하고 풍족한 생활을 바랐던 건데 카메라 들고 돈도 안되는 사진이나 찍으러 돌아다니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본에 부합된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철저한 부응을 제대로 못했다. 더구나 직장 생활이라는 게 다 누구에게 노동력이나 지식과 시간을 제공하고 받는 급부인데 능력 부족으로 고액의 연봉도 받지 못했다. 뭐 대단하게 좋은 스펙의 입지전적인 업역도 아니었으니, 그저 지방의 소소한 소기업의 월급쟁이였다. 돈도 안되는 사진이나, 혹은 예술 따위는 전~혀 아니라는 식의 반응들이 일반적인 주류이다. 물론 가족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사람의 행복에 대한 관점이라는 게 그런 것들이 많았다. 장사꾼같이 영업적인 돈벌이보다는 사진이나 예술이나 찾겠다고 사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한심하고 걱정스럽고 못나 보이고, 부족하게 보이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관점에서 보는 공감의 지지와, 반대로 탐탁하지 않는 사람의 성향이 상당히 갈리는 기준이 있었더라. 그게 각자가 가진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가 결정되고 과정을 결정하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지지자 대부분은 그나마 책을 좋아하고 자세히는 알지 못할지라도(물론 나도 디테일하지 않음) 간간이 자본을 제외한 것들에 대해 보려 하는 등의 호기심도 있는 편이었다. 행복의 근원이 오로지 세속적인 것에만 있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가 찬성 파였고(몇몇의 시인 분, 혹은 화가 분 등등 이른바 예술 계통에 활동하시는 분들이 찬성 파였다.) 물질적인 욕구와 욕망에 대부분의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비공감자 내지는 반대자였다. 결과적으로 요약하자면, 비유물론자는 찬성파 대열이었고, 유물론자(자본론자)는 반대파 대열이란 대척점을 이루고 있더라.

물론 그게 어느 것이 나쁨도 아니다. 대부분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따라서 이에 의거해서 옮음으로 판단하고 주장하며, 반대자에게 심정적으로든 강요이든 어떻게든 바꾸길 바라며, 좋지 못한 시선을 보내고 반대한다는 의사를 피력할 때는 그 차이로 인해서 반대자와의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행복의 관점은 전부 다르지만, 자본주의적 사회에 살면서, 수렴되는 행복은 어디까지나 자본 축적이라는 생각이 다수를 이룬다. 다수는 이 반대되는 소수를 향해서 질타하고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파가 간과한 것은 인간의 욕망이란 게 자본적 집약만이 행복의 모든 총체를 이루었다거나, 합집합이라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딱 하나만이 가진 가치의 전부처럼 믿는다는 거였다. 흔히 자주 듣는 말 중에 "돈이 최고지"라는 말이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문장이고 함축된 의미이다. 한 평생을 죽어라 돈 버느라 일만 하다 보니 바다같이 많은 돈을 번다해도, 결국 욕망의 그릇은 그보다 더 크고 많은 비교 상대적인 박탈감이 자기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로 향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이란 욕심과 욕구와 결합된 무한대의 사이즈를 가졌는데, 다 이루기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벌 만큼 번 사람도 늘 비교로써 결핍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열심히 일 했는데도 막상 내 호주머니가 빈 것처럼 착오같이 여겨지기도 하고 늘 남의 호주머니가 더 크고 우람해 보이는 효과 착시가 일어나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비교론적 행복이란 것이 얼마나 웃기냐면, 내가 사는 30평에서 10평에 사는 사람 보고 행복감을 느끼며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반대로 40평을 보면 불행해진다는 거다. 내 기준의 비교론적인 관점에서 보는 행복은, 불행과 늘 교차한다. 혼자만 몰래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찾은 적도 없고 그 가치도 모르고 무시하며 산다. 비교당하며 사는 삶은 늘 불만과 불안에 떨며 자신의 삶을 부정하려 든다.


그러나 현실이란 것이 자본주의식 체재에 살면서 자본에 영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의 목적 전부를 자본에 집중하기에는 그 상대적 박탈감과 결핍을 어떻게,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가? 자본은 더 큰 비교 우위의 자본으로만 이기고 흡족할 것이며 이에는 더 큰 자본에 비교당하면 다시  만족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가 이를 대신할 조금의 만족이란 것은 무엇이라야 할 것인가?

인생은 본질적으로 태생적 부조리함이다. 존재 자체부터 찾아오는 이별과 고통과 슬픔과 기쁨이란, 이미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비슷했다. 당연히 돈으로도 해결이 결코 안된다. 해결된 것처럼 보여도 수억만만큼을 준다 해도 이별을 막을 길 없고, 시간의 소모는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절대성 앞에서 상대적 가치란 그래서 절대적 허무할 따름이다. 또한, 사회가 사유를 통해서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며 산 것이 자본만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무시한다. 늙어서 하는 소리가 허망하다는 주류의 소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체재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일정 부분은 돈벌이를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나, 자본만이 오직 그 전부가 될 때, 또는 돈벌이가 삶의 전부이자, 존재적 생존 목적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 때라는 게 결과론적인 "허무"를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생의 삶, 이 자체가 영업만 생각하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도 다 아는 부분이지만, 당장에는 아니라며 미루고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릴 때, 미루고 미루다 결국 놓치는 것들을 나중에 가서야 소회로 토로하는 안타까움이라는 점이다. 콘트롤 되지 않는 무한의 욕망은 그래서 뒤끝이 길고 긴 회한과 미련이 만든 법이다.

먹고살고 하는데 사실 그리 많은 돈은 필요 없다. 다 상대적으로 많아야 좋을 뿐, 적정한 수준의 기준은 전부 다르겠지만 일정 부분 국민주택 규모와 서민형 suv 정도는 과시는 아니지만 부족하지는 않다. 그러나 삶의 외형적 수준에 인생이 비교당하면 상황은 오로지 돈벌이 욕망에 젖어들게 된다. 이것을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놓치는 경향이 많이 있다. 불행은 비교할 때 만들어지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 과연 당신과 나와 우리는, 절대적으로 흡족하고 만족한 자기 나름의 삶에 대한 방식이 있을까? 살면서 무엇엔가 쾌락하지 않고도 희열이 있었는가? 각 개인 스스로 고유한 음미할 수 있는 즐김이 무엇인가? 자기 방식의 고유성은 굳이 설득할 것도 없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해봤는데 이거였다는 것도 "사기"가 많다. 내가 해보니 매우 좋더라는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일 뿐이다. 나만의 고유한, 남들도 이해하지도 못하더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도출한 자기 혼자의 희열이라면, 굳이 나타내려 하며 자랑삼아 말도 할 필요도 없다. 굳이 떠들어 주장할 이유도 없다. 제 혼자만 좋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왜 사진이 좋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난 애써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말해봐야 뭐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굳이 억지스럽게 보일 법한 주장도 하고 싶지도 않다. 나만 그럼 그만이고 넌 안 좋으면 그로써 그만일 뿐이다.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은 영업 같아 보이기도 하여서 내가 영업할 필요도 못 느낀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물론 묻는 사람도 없다.

아빠가 재벌로 둔 자식이 대체 뭐가 부족해서 마약으로 말초적 쾌락에 몸을 담그는 이유 뭘까. 삶이란 대체 어떻길래 신경계를 마비시키는 물질을 탐닉하는 걸까. 이룰 수 있는 것을 거의 원하는 대로 대부분 자본으로 충족되고도 남을 텐데 왜 그렇게 혈관에 주삿바늘을 꼽고 헤롱댈까. 그게 다 이유 없을 수가 없다는 거다. 삶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그게 뭐가 되었든, 완벽한 삶이란 없다. 불완전한 이 삶의 부조리에 대한 천착이 마약이라는 게 얼마나 가여운 일인지 모를 일이다. 돈이 너무 많아서 타락한 삶이나 너무 없어서 돈 때문에 매몰된 삶이나 불행하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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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7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7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곤 실례 2019-09-17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만, ㅎ,
저도 주부의 입장에서 한마디 한다면
와이프가 협조적이지 않은 이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두분은 경제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만약 입장이 바뀌어서 님의 부인이 자기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며
공동으로 써야할 자본을 제법 자주 빼간다면 좋은 마음으로 지지 하시겠습니까?
역지사지를 할 수 있어야만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yureka01 2019-09-17 23:08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와이프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돈을 적당히 쓰고 즐긴다면 환영합니다.
사진 찍는데는 돈이 그리 많이 들지는 않죠..
문제는 시간이었어요....

겨울호랑이 2019-09-17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사람들은 옆구리에 붙은 살은 빼려하지만,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듯합니다. 몸의 다이어트와 마찬가지로 돈의 다이어트도 기쁘게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yureka01 2019-09-17 23:09   좋아요 2 | URL
재미있는 사례연구 논문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사는 대구 성서지역서 30년전에 개발될 당시, 토지개발에 따른 토지 보상금을 수령한 사람들을
추적한 논문이었거든요.
80%가 토지보상금을 대부분 투자 실폐나 낭비등으로 소진했고.나머지 20%가 다른 토지로 대토 비용으로 사용하여 더많은 부를 쌓았다는 결과였거든요.
다수가 자본이 생기면 살짝 혼이 뜨곤 하죠...그런 말있죠.없던 사람이 많이 가질수록 사람이 맛이 간다는 말....

적정함을 안다는 거....자기 그릇을 안다는 건 정말 어렵죠..

강옥 2019-09-18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영래샘 책이 썩 마음에 드셨나봐요. 보고 또 보니 더 반갑네요 ㅎㅎ
제가 알기론 조샘도 아마 돈 안되는 일에 열심이셨던 것 같고
유레카님의 생각과 비슷한 고민도 하셨던 것 같아요.
글 쓰는 사람은 볼펜 하나만 있어도 되는데(요즘은 컴터 하나만-)
사진가는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게 많잖아요. 카메라도 좀 비싼가요, 출사경비 또한 만만찮고 시간도 많이 들고
배우자의 취미생활을 이해 못하면 일생이 괴로울텐데 우리집처럼 각자도생하면 딱 좋은데 말이죠.

yureka01 2019-09-18 12:17   좋아요 0 | URL
네 책이 너무 좋더군요.시도 사진도 의미가 아주 치밀한 느낌이었어요..

멍하게 사진 담으면 결코 시가 나오지 않아서요...

제가 가진 카메라가 진짜 싸구려 저급기종입니다.
이거 얼마 하지도 않는 기종이었어요...

출사도 거의 대부분 동네 출사라서 몇시간 장거리 뛰는 출사는 거의 없었기도 합니다.

문제는 돈벌이에 신경써야지 왜 돈도 안되는 사진이냐는 거..
특히 사진은 동네든 어디든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라서요..

이상하게 다른 집 부인들은 남편 꼴 뵈기 싫은 게 많다는데,
제 안사람은 자기 눈에 안보이면 불안증이 있는 거 같아서 ㅎㅎㅎㅎ

그런데 한 10년 정도 이해시키고 노력하다보니 이젠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사진 담으로 안나가면 어디 안가냐고..이젠 찍은 사진을 달라고도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찍은 사진으로 유용하게 써먹더라구요..ㅎㅎㅎㅎ

이젠 카톡등 제가 찍은 사진으로 와이프 계정에 사진 올려 놓으면
지인들도 이젠 알아요....

스마트폰 카메라가 아무리 좋다고는 하나, 카메라 사진과는 비교가 안되죠..
그걸 알아 차린거라서요..

2019-09-23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3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9-23 15: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벌 2세가 마약에 빠지는 것이나 부자였던 사람이 수백 억을 강원랜드에서 날려 가난한 독거 노인의 신세가 된 것이나
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저는 우선 자신이 매료될 만한 어떤 세계를 가지지 못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새로운 유혹에 빠졌다고 보죠. 글쓰기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이 적지요. 이미 자신이 매료된 세계가 있으니까 말이죠. 유레카 님은 글쓰기와 사진으로 행복한 세계에 계십니다. 이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행복인 거죠.
돈은 꼭 필요합니다만 돈 걱정이 없는 정도로만 있다면 되는 것 같아요. 돈이 많다고 해서 더 행복한 건 아니기 때문이에요.

건강하고, 돈 걱정이 없을 만큼 매달 연금이 나오고 게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견입니다.

yureka01 2019-09-23 20:13   좋아요 1 | URL
매혹과 유혹의 차이인가 봅니다..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죽을 때까지 세상이나 주유하며 떠돌며 사진 찍으로만 다니고 싶어집니다.ㅎㅎㅎㅎ

2019-09-23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3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5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5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 서재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이란 빌미가 글쓰기의 동기였으나, 책을 읽고 치미는 감정을 토로하는 글도 간간이 쓰게 되기도 하고, 혹은 이외에도 책에 관해서거나 이에 대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적은 글도 있다. 어쨌거나 무슨 글이 되었든 간에, 이를 통틀어 글쓰기라고 하자. 을 쓰다 보면 느끼는 감정들이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글의 문장을 지어 낼 때, 나 스스로가 글을 잘 못쓰는 구나하고 새삼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문장 구성이 이상할 때도 많고 중구난방으로 산만하기도 하고 간간이 글의 논점인 주제를 잃고서 엉뚱하게 삼천포로 빠지기도 한다. 또는 비슷한 주장을 계속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했던 이야기 또 하면 글은 상당히 재미가 없게 된다. 더구나 누구라도 지적할 수 있는 오자와 탈자, 심지어 맞춤법과 띄어쓰기조차 틀리는 것도 너무 많다. 아마 이 글조차 틀린 문장이나 잘못된 문장과 다른 맞춤법이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게 나의 국어 실력이요, 문장 실력이라 느끼는 부분이다. 항상 포스팅하기 전에 맞춤법 검사로 확인해도, 맞춤법 검사한 글이 제대로인지 검증하기도 벅차다. 문장 검사는 나중에 AI 문장 검사기를 기다리기로 하자. 뭐, 너무 잘 쓸 수 있는, 그런 재능 있는 것도 아니고, 이를 일찍 감치 발견했더라면 작가했을 거 같지도 않다. 글쓰기에 제대로 못 되는 실력이라는 걸 스스로가 알아차리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글을 쓰게 됨으로써 나의 부족을 알아차리게 된다. 읽기는 먹는 것이고 글을 쓰는 것은 토해서 게워 내는 거다. 어쩌면 글이란 우웩 우웩 흥건하게 게워 내야만 속이 편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슴에 담아두면 병나거든. 비록 못나게 쓸지라도 글은 쓰야 한다. 써지기도 하고... 

두 번째가, 글을 쓰다 보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지식의 결핍이다. 무엇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신처럼 전부 다 알아서 줄줄 나오는 것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개념을 잡고 글을 써야 하는데 자주 모르는 것들에서 막히는 경우가 있을 때다. 글을 쓰게 됨으로써 나의 무식함이 가장 잘 들어 나는 부분이다. 글은 무식해야 쓰게 되는, 그러니 계속 책을 찾게 되는 동기가 되고, 또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글을 쓰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느끼는 것. 글쎄 글을 안 쓰면 많은 걸 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글쓰기는 내 결핍의 확인 용이라는 점. 글을 쓸려면 계속 지식을 배우는 공부가 필요한 이유이다. 물론 많이 배운 학자나 지식가들의 글이 전유물처럼 대체적으로 글은 많이 배워야만 나오는 게 맞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몰라도 알아가면서 쓰야 하겠지. 

세 번째가 사유가 부족하다는 것도 느낀다. 아는 것이 부족하니 동원할 단어의 부족과 생각의 부족으로 나온다. 치밀하지 못하고 엉성함의 글쓰기는 사유 부족의 증명과도 같다. 고전적인 명언인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가 되려면 일단 뭐라도 쓰려 들면 사유가 얼마나 치밀하고 깊은건지 그 정도가 나온다. 얄팍한 것임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글쓸 때 나온다. 흡사 빨랫감에서 수분이 툭툭 떨어질 정도로 맺혀야 물이 떨어지는데 비틀어낸 수건은 뒤틀리는 어색함이 나온다.

그래서 글을 자주 써봐야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무식함을 들어내고, 스스로 부족한 단어를 들어 냄으로써 이 반작용으로 더 추구되는 책과 글쓰기로 이어지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작가도 아닌데 왠 글쓰기라고 말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얼마나 무식하고 부족하고 덜 익어 설었는지 글을 자주 써보면 안다. 그것도 장문의 글 A4나 원고지 몇십 장 되는 글을 써보면 글 문이 막히는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란 것을 느낌다. 단어 몇 개로 어디 인터넷 댓글하고는 차이가 많다. 마음 같아서는 청산유수처럼 글이 줄줄줄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삶이겠지만 보잘것없다는 걸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글을 쓰는 자와 쓰지 않는 자로 나눌 수 있다. 글쓰기가 주제이니까 글을 쓰지 않는 자에 대해 논외로 하고, 글쓰는 자에 대한 생각도 있다. 글을 잘 쓰는 자와, 나처럼 글을 자유자재로 못 쓰고 부족함으로 글을 쓰는 경우로 나눈다. 물론 난 후자다. 여기서 문제는 글을 못 쓴다고 해서 글을 안쓰게 될 때의 문제이다. 앞으로 돌아가서, 글을 쓰는 자와 안 쓰는 자의 구분에서 글을 안 쓰는 자의 가장 큰 이유와 변명이 글을 못쓰니까 안쓴다라고 하는 거다. 문맹이 없는 사회라고는 하나, 읽기에 못지않게,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역시 문맹이나 마찬가지로 같다. 글 한줄 쓰지 않는다는 것의 문맹은 읽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글을 안쓰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사유 부족을 못 느낀다. 무식해도 글을 안 쓰니, 내가 얼마나 아는게 빈약한지를 모른다. 그래서 글 쓰지 않는 사람들 중에 많은 자들이 세상에서 자신이 평균 이상의 지능으로 내 지식이 좀 많다고 느낌적 느낌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내가 해본 것들을 문장으로 서술하기 위한 것에서 아무것이나 쓰지 못할 때, 결국 생각의 정리와 일관성이 부족한다. 생각이 다듬어지지 못하며 산만하여 두서없는 굴곡진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요란을 떨고 있을 뿐이다. 불쑥 불쑥 스치는 생각이 정리가 안된다면 이는 글쓰기 부족으로 연결된다. 이는 글을 써보면 안다. 지식을 정리하고 생각이 얼마나 정리가 되어야 글이란 문장으로 나열하여 논지의 맥락이 일관되게 나올 수 있는지를 말이다.

내가 대학 입시 때 처음으로 도입된 논술시험이 있었다. 학력고사의 점수와 지원한 학과에서 다시 논술시험을 쳐서 학력고사와 논술시험의 합산한 성적으로 합격 여부를 가렸다. 그러다 입시제도가 바뀌면서 논술시험이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 소위 이름있는 유명한 대학을 지원 실력도 없어서 논술시험에 대비해서 해봤자 고작 신문의 사설을 자주 읽으라는 논술시험을 대비용이었을 뿐이었다. 글을 쓰라는 것은 없었다. 논설을 쓰는 기자들이야 글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글이 논지에 부합하게 써 내려가겠지만, 사실 논술 시험에 무슨 문제가 나와서 어떻게 문제지의 여백을 글로 매울 수 있을 것인지 재대로 교육 받은 것도 없었다. 그나마 수험서를 제외한 여러 가지 책이라도 읽은 학생들이야 이런저런 조합으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책도 변변히 없었기도 했지만, 읽기만 했지 쓰지는 못했고 막상 쓰려 하면 어떻게 첫 스타트의 단어를 적으면서 이어가야 할지 참 난감했을 것이다. 이런 논술시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어 버렸다. 요즘의 대학 입시에 별도로 논술 시험만으로 전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쉬운 것은 정원의 몇 퍼센트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대학에서 수학 능력을 평가하려면 지식도 중요한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글쓰기 즉, 논술이 아닐까 한다. 논술이 왜 필수가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리포트를 하나 쓰더라도 글쓰기 작문이고 전공 시험을 보더라도 대부분 논술로 답을 적는데, 어떻게 입학시험에서 논술시험 전형으로만 국한 시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쓸려면 일단은 뭐든 많이 읽어야 한다. 읽지 않고 글이 쉽게 나오는 경우도 있긴 하나, 이는 글쓰기에 특출난 사람일 테고 대부분은 뭐든 읽고 정보를 얻어서 사유가 결합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두서 없이 섞여 있는 견해를 논지에 적합하게 풀어 체계화시켜 나가는 작업이 글쓰기일 것이다. 에세이나 소설, 시와 산문형식의 글도 형식에 걸맞은 글쓰기는 결국 기본적인 토대가 쓰기란 생각의 정리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일종의 마음의 배설이다. 들어간 인풋에 아웃풋이 없을 때 사람은 정신적으로 탈출구가 없다. 쌓인 것이 울분이라면 쏟아야 하듯이, 쌓인 감정이 축적될수록 눈물의 량과 농도가 짙어지며 이것을 글로 풀어 낼 때, 시원함을 느끼는 것처럼 화장실 안 가는 사람이 없듯, 글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한다. 어떤 노인네가 자신의 굴곡진 삶은 소설 3권도 부족하다고 토로한다. 그만큼 쌓인 것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처럼 일기라도 3권을 풀어써보면 이게 자서전이 된다. 어느 인생이든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잘 없다. 늙어간다는 것은 쌓인 게 많아 무거워진다는 거다. 결국 쏟아내듯 토로하듯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의 삶이 정리가 되고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또한 누군가 그 글을 읽게 됨으로써 자신의 삶의 과정을 알게 되어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는 바탕이 곧 글이 될 것이다. 죽기 전에 다 쏟아 놓고 게워 내고 나면 떠날 때도 홀가분할지도 모르겠다. 가지런히 정돈시키고 물려줄 건 물려주고 버릴 것은 버리고 살아온 삶의 사랑은 가져갈 것도 생기는 이유도 바로 글쓰기가 아닐까 한다.

인류의 역사는 서술의 역사일 것이다. 역사가 쓰이지 못했더라면 역사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시간일 뿐이다. 그런데 이 살아온 인류들의 역사가 기록되었기에 오늘날의 현재도 있는 까닭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비단 역사의 서술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글 또한 역사의 일부이다. 그런 일부와 일부가 모이고 모여서 거대한 전체의 역사를 이루는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 글을 못쓴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간혹 글 쓰라면 초등학생 생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 젖는다. 그러나 아무리 글쓰기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도, 특히 밥벌이나 돈벌이를 위해 글을 이용하는 것은 위험성이라는 리스크를 안아야 한다. 그동안 밥벌이를 위한 글이 얼마나 목적에 순수한 글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익에 따른 글쓰기의 관건은 글쓰기의 목적에 대한 순수성이 글의 성격을 규정한다. 따라서 순수한 목적이 아닌 다른 어떤 목표에 의한 글쓰기는 언제든 자신이 쓴 글이 자기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이는 글을 아예 안 쓰는 것만도 못할 수도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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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11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는자가 되고야 말겠습니다 “마음의 배설”이란 표현이 너무 좋습니다 유레카님 추석명절 잘 보내십시오~

yureka01 2019-09-12 05:44   좋아요 1 | URL
그럼요.가슴에 뭔가 쌓아두면 이게 병이되죠.자꾸 풀어 내야죠..ㅎㅎㅎㅎ
카알벨루치님도 넉넉한 보름달 같은 추석 만드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9-1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레카 님 명절 잘 보내십시오

yureka01 2019-09-12 05:45   좋아요 0 | URL
^^ 곰발님도 명절 좋은 시간 많이 만나시길~^^..
감사합니다~

2019-09-11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2 0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2 0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2 0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09-12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이 갑니다^^ 유레카님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yureka01 2019-09-12 05:50   좋아요 0 | URL
글쓰기 자신감이 저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써야하죠..
하다보면 조금 늘겠지요 뭐..ㅎㅎㅎㅎ
명절 즐거운 시간 많이 만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초딩 2019-09-12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멋진 사진과 서평 감사합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yureka01 2019-09-12 21: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되시고요..넉넉한 한가위 만드시길 바랍니다.^^..

2019-09-12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2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9-09-12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추석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명절 보내세요.^^

yureka01 2019-09-12 21:34   좋아요 1 | URL
네..기숙사갔던 딸아이가 오고나니 집이 꽉찬 느낌 좋네요...

즐겁고 넉넉한 연휴되시길..

감사합니다!~

강옥 2019-09-15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의 기본은 독서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 경험상으로는 -
초딩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새소년‘같은 잡지를 열독했고
활자라고 생긴 건 다 찾아 읽었던 것 같아요. 오죽하면 국어사전을 읽었다니까요
국어사전 속에 내가 모르던 낱말이 너무나 많아 잠도 안 자고 읽었어요. 얼마나 재미있던지.
책 때문인지 몰라도 상상력이 무궁무진해 한때는 만화가가 되고 싶기도 했답니다 ㅎㅎ
중학교 다닐 때 ‘여학생‘이라는 잡지에 소설을 응모해 가작인가 입선인가 했던 기억이 있어요.
‘학원‘이라는 잡지에 투고도 했지요. 참 옛날 옛적 얘기에요.
한때는 나의 개인사를 써보기도 했고, 집안 내력을 써보려고 작정하기도 했던..... ㅎㅎ
그 글쓰기의 오랜 역사가 오늘날의 블로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유레카님과 글과도 만나고.
죽기 전에는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아요.
잘 쓰건 못 쓰건 그냥 내 마음의 토로애 지나지 않을지라도. 유레카님도 그렇지 싶은데요 ㅎㅎ

yureka01 2019-09-15 20:50   좋아요 0 | URL
역시 소시적 부터 책을 좋아하실 줄 침작했습니다..
그럼요..읽는 것의 완성은 쓰기니까요.

저도 극히 공감~~~물론입니다..잘쓰건 못쓰건...쓰여야죠..

2019-09-16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6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7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7 14: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7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그 내용을 글로 기록한 것을 말해야 합니다. 머릿속에 책에 본 내용, 글의 내용이 남아 있다고 해도 말을 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쉬워요. 오류가 나도 좋으니 일단 머리에 있는 걸 꺼내야 해요. 그런 다음에 내가 말한 게 잘못됐는지 아닌지 점검해야 돼요. 예전에 읽었던 책이나 쓴 글을 다시 봅니다. 독서모임에 참석하면서 말하기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어요.

yureka01 2019-09-17 16:41   좋아요 1 | URL
글쓰기란 문장 구성과 말하기란 문장 구성이 좀 다르죠.
문어체와 구어체의 차이...

저도 말은 그닥 조리 있게 말하기가 글쓰기만큼 어렵네요.

2019-09-23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3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름의 연비 북즐 시선 1
조영래 지음 / 투데이북스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사진을 찍어 시와 접목시킬 때, 하이브리드(융합)이다. 직관과 은유가 합쳐 근사한 비빔밥같이 섞여서 피상에서 구상으로 발전하는 발견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사진만으로는 부족하고 시만으로도 안되는 것을 섞고 뭉쳐 조각하듯 지어낸다. 사진과 시의 문장을 통해서 발현되는 놀라운 관점의 발상이, 사진 시집 곳곳에 녹아 상상의 물이 염색되어 베여들었다. 창작이란 노력만으로는 안된다고도 한다. 시인은 하늘이 내는 거라고도 한다. 이는 하늘이란 뜻이 천부적 재능의 또 다른 은유적인 표현일 터다. 이런 발상의 놀랍고도 흥미로운 재미가 사진 시집을 읽는 묘미를 더한다. 가끔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런 상상이 기립하며 조각할 수 있지? 혹은 어떻게 이런 사진 시선이 나올 수 있는지, 어떻게 시의 문장이 이렇게 기발한 단어로 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흥겨운 의문이 나올 때가 있다. 사진의 직관적 시선에서 감정은 덩어리로 뭉쳐진다. 절묘해질수록 시의 문장이 간결한 진액처럼 진한 발효와 응축된 은유로 나올 때, 나는 즐겁다. 살다 보면 현실에서 만나는 게 대부분 머리 아픈 것들이 많은데, 이 사진 시집은 흥미와 재미를 더한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사진과 시의 조합이 눅진하게 다가오는 즐거움이다. 저자의 이미지적인 상념의 내공이 다져진 탓이 매우 클 것이란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내압을 높이고 드디어 흘러넘쳐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압력 분출. 이게 이 사진 시집으로 탄생된 배경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진으로 보고서도 못 보는 것을 시로 인해 상상의 구체성을 보게 하는 게 짧고 그윽한 감탄으로 나온다.

 

그러나, 시는 내공만으로도 안된다. 시인을 흔히 농부에 빗대는 이유가 농사는 끈질김에서 나온다. 하루 이틀 한해 두해 이렇게 차곡차곡 지어야 한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 것도 시를 짓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자천하지대본처럼 시인천하지대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 물론 사진도 시처럼 지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도 모른다. 발현은 쌓임으로써 충족된다. 그래서 가을날에 곡식이 익어 추수를 하듯 시집은 익어가서 문장이란 열매로 나온다.

 

오래전 사진이 없던 시절에서도 그림 속에 시를 지어 문장에 그림을 덧댄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도 얼마든지 화가의 텍스트를 그림에 넣고 낙관을 찍어 퍼블리싱을 했었다. 그런 점에서 사진에 시를 녹이는 작업은 새삼스럽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글이란 어디에 붙여도 문제는 없다. 그림의 내용을 압축하든 시의 은유를 그림에 첨부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자유의지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사진에 시 몇 줄의 힘은 사진의 힘과 합쳐져서 압축하며 압력을 높인다. 사진 시집을 받고 나서 읽은 후, 첫 느낌은 역시나 기대했던 이상의 사진과 시였다. 무언가 오랫동안 다져진다는 것은 사진과 시를 더 딴딴하게 다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몇 번에 걸쳐 급조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시간적으로 거친 과정 속에서 하나하나 사진 한 장과 몇 줄의 시가 꾹꾹 눌러야만 다져 낸 것이 자신의 사유와 호흡을 넣게 되면 시멘트처럼 굳고 단단하게 양생되었으며 단단하게 굳어 도자기를 굽듯한 시간의 인고를 거쳤으리라.

 

영화 "kingdom of haeven"의 마지막 부분의 협상 대화에서 나오는 문장을 떠올리고 인용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사진과 시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분명 시인은 "나싱(Nothing) 엔 에브리싱(Everything)"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낫씽, 즉 아무것도 아닌 거. 사진은 일상의 흔히 보는 그런 피사체일 텐데 시인의 섬세한 사유적 시의 디테일은 모든 것처럼 사진을 수식한다. 그래서 시가 에브리싱이 아닐까. 그래서 사진과 시는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지만 이 아무것에서 에브리싱 즉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진은 철저히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없었던 것을 있는 것처럼 찍을 수는 없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이미지이지 사진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철저한 현실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그래서 없는 것이 나싱이고 시적인 상상력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거다. 이 시집 한 권에서 사진을 찍어 표현하는 방식과 시를 덧댄 방식의 결합에서 나는 낫씽과 에브리싱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낫씽과 에브리싱이 저마다 다 가지고 있다. 돈이 에브리싱일 수도 있고 사랑이 에브리싱일 수도 있다. 에브리싱의 이외는 다 나싱일 것이고,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관념 또는 사고방식에 의한, 살아가는 환경과 삶의 조건과 교육의 정도와 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따라 나싱과 에브리싱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럼 무엇이 나싱인지, 어떤 것이 에브리싱인지 가려 볼 일이다. 왜냐면, 이는 나싱이 아무것도 아닌, 그러니까 무심코 흘러 버리는 전혀 주목도가 없는 것과 자신의 삶의 전부를 걸어 낸 좋아하는 주목도가 굉장히 높은 것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런 결정이 삶에 다시 들어와 장래의 삶의 질과 행복감의 여부를 결정하는 덩어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인의 사진과 시는, 나싱과 에브리싱이다.

 

​수록된 몇 편의 시와 사진을 감상하자.


 

사진은 창문을 통해 사선으로 들어와 쏟아지는 빛이었다. "흐트러진 나", 흐트러짐은 흡사 힘겨워서 흐트러지고 정돈되지 않는 나였기에, 배낭에 꾸깃꾸깃 주워 담고 멀리 떠나온 길이라고 표현한다. 본디 여행은 여정을 통하여 삶의 정돈이다. 멀리 떠나온 길은 여행 중임을 암시하고 그래서 여행을 통해서 흐트러짐을 추스르고 가지런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거라 짐작한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빛이 가득한 것은 빛의 직진성이 주는 가지런함일지도 모른다. 그래 사진은 직선의 빛이 아니었던가. 사진에서 빛 이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빛이 반사되고 산란되어 퍼지며 부딪혀서 내 시야에 빛이 들어와야 비로소 모든 게 된다. 피사체는 빛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행길에서 어느 모델에서 맞이하는 창문이었다 치자. 낯선 곳에서의 방에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켜 커튼을 열고 들어오는 빛은 눈을 때리는 듯 눈이 부신다. 사진에 빛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거라는 것을. 내가 시인 작가처럼 상상을 하게 되는 감정이다.

 


 

 

일몰 무렵의 해변(다대포가 아닐까 추측해본다.)에 빈 의자가 있는 사진에 걸린 시이다. 역으로 보면, 의자는 사람이 앉는 도구이지만, 반드시 사람만 앉아야 할 법칙은 없다. 해질 무렵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그리운 사람의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는 비었다고 시인을 표현했다. 그러나 빈 의자에 사람은 떠나도 해질 무렵의 의자에 밀물 빛이 살포시 앉았다. 사람은 비었으나 대신에 빛이 잠시 앉은 의자. 그리고 어둠이 빛이 앉은 의자를 대신하여 자리를 물려준다. 의자는 또 누군가 앉을 것이다. 의자의 역할이 잠기지 않는 해변에도 있지만 빈자리가 아니었다. 빈자리가 아닌 의자는 그래서 빛과 어둠이 교차하여 앉는다. 물론 언젠가 그리운 사람이 다시 와 빈 의자를 앉을지도, 혹은 누군가 다시 앉거나. 언젠가 언젠가 그곳으로 다시 가보면 의자가 사라질 수도 있으나 빛과 어둠은 그 자리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결국 빈자리는 잠기지 않음을 해석을 한다.


 

사진 프레임 끄트머리에 보이는 오래된 지붕일 것이다. 거센 바람에 붙들고자 시멘트 블록을 얼기설기 매달았다. 사진은 분명 시멘트 블록인데 시인은 어느새 낡은 시멘트 블록을 산사의 풍경으로 탈바꿈하는 시선(視線)에서 시선(詩仙)으로 이어진다. 낡고 고단한 블록은 낭랑하게, 가볍게 땅그랑 땅그랑 바람 소리를 내는 듯하다. 사진의 은유가 이런 거다. 보는 것을 보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산사의 풍경으로 은유하는 메타포를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 이게 어쩌면 사진의 현실을 보이지 않는 산사의 풍경으로 치환시키는 관념적 전환을 보고 있다.

 


 

 

누가 바닷가에서 소주 나발을 불었을까. 그윽하게 취해서 소주 병 던져 혹시나 깨져 나간 파편이 흩어진 해변이었을 것이다. 날카로운 소주병 파편은 해변에서는 위험한 흉기가 된다. 혹시나 맨발로 걸었다가 깨진 소주 병에 다칠 수도 있는 위험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러나, 파도는 이 위험을 날카로운 예단을 갈고 갈아 유순하게 닯았으리라. 모난 파편같은 울화통을 깍고 깍아서 오랜 시간동안 파도에 닯았을 것이다. 깨진 소주병은 결국 파도에 시간을 더하니 그 어떤 울분이 파도에 절삭되어 옥돌로 탈바꿈이었다. 깨져 날카로운 소주병 파편이 에메랄드로 변하는 환골탈퇴의 환생으로 보았던 거다. 시간을 바라보고 심리적 변화에서 물리적인 변화까지 내다 본다. 살다보면 뽀죡하고 예리했던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 어디 한두번이었을까. 그러나 파도의 시간은 예리한 날카로움을 환생시켜 다시 보석으로 태어나게 하는 힘, 이게  시인의 상상력이다.

 

매너리즘에 빠져 늘 하던 대로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무심하고 무덤덤으로 지나고 만다. 흥미로운 일도 별로 없고, 축축 늘어진 채 즐거울 일도, 하다못해 하루에 얼마나 흐뭇한 느낌으로 짧은 시간이라도 많지가 않다. 현대 도시 사회에서 만나는 과정이라고는 늘 피곤과 바쁨의 연속이다. 자신 혼자만이 즐겨 하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그나마 휴일이랍시고 방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나면 오락의 대상 이외엔 별로 해본 것도 없다. 시간의 공허함에 빈 것처럼 시간은 속절없다. 그렇다고 일상을 전혀 물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일상은 원래가 너무 재미없는 무덤덤한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무덤덤한 일상의 삶이 환생하듯 세상의 변화에 관조하며, 말초적 쾌락이 아니라 지긋한 관조로 보는 사진과 이에 걸친 시는 일상의 자기만의 탈출이다. 오로지 벌어먹고사는 인생은 때론 구차하다. 그러나, 가끔은 시인의 사진과 시로 만나 일상의 구차함에서 탈출하여 시선의 관조와 시의 문장으로 관념적 탈출은 어떨까?. 시집 한 권이 흡사 사골 국물 머시듯이 꿀꺽 꿀꺽 넘어간다. 시집 한 권의 심리적 포만감. 그리고 일상에선 만날 수 없는 것들의 관조적 시선과 사유의 문장들. 멋진 영화 한편의 아름다운 내레이션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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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9-02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모음집인가 했는데 글이 참 좋아 검색해보니 시집으로 나온 책이네요.
전자현미경실 연구원이라는 이력도 이채로운 분이고요.
소주병이 옥돌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인내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yureka01 2019-09-02 15:05   좋아요 2 | URL
사진을 넣은 시집이었어요....
사진과 시의 조합이 근사했습니다...^^..

Nussbaum 2019-09-02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면서 뭔가 대상을 보는 관점이 조금 더 깊어진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더 관심있게, 혹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yureka님의 간결하면서도 좋은 글이 사진과 잘 어울리네요.

yureka01 2019-09-02 22:57   좋아요 2 | URL
사진을 담는 피사체는 어떤 의미로 정한 이유의 선택이거든요..
무덕대고 선택하지는 않는 의도이거든요..
당연하게 더 자세히..살펴~~서 보는 것...사진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그런 카메라의 랜즈가 없더라도 가능한 선택임에도,
사람은 눈으로 보는 시선과 카메라 랜즈를 통해서 보는 시선은 차이가 나죠..
더 관심있고 더 자세히 보게 되는 원리입니다..
감사합니다.

2019-09-04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옥 2019-09-04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영래 샘은 디카시를 600수 이상 쓰신 분이에요.
순간포착, 순간언술, 순간소통의 디카시는 경남 고성에서 발원한 문예운동이랍니다.
하이브리드 라는 표현보다 퓨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도 싶구요.
조영래 시인은 디카시 초창기에 입문해서 십년 이상 디카시를 쓰신 분이니 대단하지요
사진시와 디카시의 경계가 다소 애매해서 헷갈리는 분들도 많지만 저도 사실 디카시에 매력을 느끼고 있답니다.
문제는 정체성인데요..... 세월이 가면 정립이 되겠죠 ^^*

yureka01 2019-09-04 20:52   좋아요 1 | URL
사진에 600편의 시를 쓰신 분이라니..놀랍네요..
시집속의 사진과 시 한편한편 모두 의미가 강하더라구요..
네 퓨전..이것도 어울리는 표현입니다.공감됩니다....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디카라는 말은 별로 와닿지가 않아서요.
디지털 카메라...
이걸 줄여서 디카인데 사진과 시이지 디(지털)카(메라)시는 왠지...좀 느낌이 살지 않는 거 같아서....

디지털 카메라라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인데말이죠..
뭐 어쨋거나 저쨋거나 전 사진시라고 부르고 싶어요...

2019-09-07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8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6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6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