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이야기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여우.. 라고 하면 어떤 것이 생각나는가.
우리는 여우라고 하면 보통 구미호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구미호는 아니지만, 여우불이나 여우 요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 역시 여우에 대한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여우는 꾀가 많은 동물이고, 사람이 사는 곳 근처에 사는 동물이라 더욱더 기담이나 요괴이야기의 소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여우 이야기>는 내가 읽었던 그의 전작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제일 처음으로 읽었던 <달려라, 메로스>를 비롯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나 <태양의 탑>은 망상과 청산유수같은 달변으로 나에게 쉼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책들과 너무나도 느낌이 달라 깜짝 놀랄 정도였다.

차분하게 진행되면서도 섬뜩한 공포와 전율을 전해주는 이 책은 1,0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토라고 하면 왠지 일본의 옛역사를 떠올리게 해주는 곳이라 이런 기담이란 소재와 딱 어울려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 책에는 표제작 여우 이야기 이외에 3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어찌 보면 다 다른 이야기로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작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소설집은, 교토에 있는 한 골동품 가게 방련당과 여우탈을 쓴 남자, 그리고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몸뚱아리는 길고 긴 요괴같은 존재가 겹치며 등장한다.

모든 이야기의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소설속에 나오는 모든 등장 인물들의 관계는 묘하게 겹쳐지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집 속에 나오는 일들이 시간상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뒤죽박죽 섞여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제일 불분명한 것은 이 일들의 배후에 있는 존재와 그 결말이다.

환등속에 등장한 그 요사스러운 생김새의 존재는 요괴로도 불리고, 마(魔)라고도 불리지만 확실한 언급은 피하고 있다. 또한 여우탈을 쓴 남자의 존재와 그가 불쑥 나타나는 마츠리와의 관계도 솔직히 말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는 불분명하다. 방련당의 주인의 정체도, 마지막 이야기에 나온 할아버지의 존재와 성대한 연회의 비밀도 마찬가지이다.

읽으면서 궁금증은 더욱더 증폭되고, 그 결말이 궁금해지지만, 저자는 결말 또한 확실하게 내어 주지 않는다. 어찌보면 그게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 확실한 결말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든 기담의 소재가 되는 것은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나 사건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것은 결말을 확실하게 내지 않으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게 하는 작가의 배려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내가 책에 더 몰두하게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 실제로 교토의 옛길을 따라 걷고 있는 자신이 느껴진다.
어슴푸레한 달빛, 고즈넉한 풍경, 그리고 조용한 거리에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러나, 왠지 누군가 저 어둠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고, 누군가 나를 살며시 따라오는 것 같다.
그 느낌은 점점 구체화되어 내 몸을 둘러싼 공기가 끈적끈적하고 축축하고 비릿해져 간다.

처음엔 가벼운 기담이야기로 생각하며 읽었다가 점점 책의 내용에 몰입할 수록 그 모든 이야기는 내 마음 속에서 실체화 되어 간다.
이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은채 지금도 교토의 어느 곳에서인가 계속 이어질듯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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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태양의 탑>은제 15회 일본판타지노벨상대상 수상작이자 모리미 도미히코의 데뷔작.
그리고 내가 세번째로 읽은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이다.

이 전에 읽은 책 두 권인, 일본 유명작가들의 오마주 작품 <달려라 메로스>를 읽으며, 난 그 책속에 수록된 작품들의 원작을 모조리 찾아서 읽고 싶어졌고,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으면서 새벽 4시 만물이 잠든 밤 혼자서 미친듯이 웃었다.

단숨에 나를 사로잡고 휘어잡은 모리미 도미히코.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중에서 손에 꼽는 작가 중의 한명인 그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기대감을 갖게 된다. <태양의 탑>도 마찬가지. 그의 데뷔작인 <태양의 탑>을 손에 든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때 까지 난 한순간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망상 작렬, 포복 절도!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단 이 두가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책은 모리미 도미히코가 교토대 재학중에 벌어진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괴짜 남자 대학생들의 숫컷 냄새 풀풀 풍기는 망상과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다. 제일 앞장에서 자신의 수기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이 소설속에 묘사된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리라.

일단 작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작품의 화자인 <나>는 교토대학 5학년 휴학생으로 미즈오라는 여대생에게 차인 후, 그녀에 대한 연구 보고서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스토킹(?)한다. 사실 연구는 그녀를 사귈때부터 시작한 것이다.

시카마 다이키는 남자들만의 망상과 사색으로 한층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나날이 정진을 거듭하는 절망의 댄스 선두에서 기운차게 내달리고 있고, 다카야부 도모나오는 강철같은 수염과 머리털로 온통 뒤덮였지만 마음씨만은 고운 초대형 거인 오타쿠이다.

그리고 이도 고헤이는 지구상에 꿈틀거리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 숙명적인 분노를 느끼며 가능한 한 그들이 불행하지기를 바라는 분노의 화신이다.

이들 네명이 이 소설의 중심축이 되는 현실 10% 망상 90%의 삶을 살아가는 교토대 '사천왕'이다.

이외에도 <나>의 연인이었다가 크리스마스날 태양열로 움직이는 마네키네코를 선물 받고, "난 방에 쓸데없는 물건이 늘어나는 게 싫어요."란 한마디로 주인공을 얼어 붙게 만든, 미즈오 씨. 그녀는 이상하게 태양의 탑에 집착하는 면도 보인다.

그리고 미즈오씨를 스토킹하는 <나>와 미즈오씨를 동시에 스토킹하는 엔도. 그는 미즈오씨를 좋아하면서도 소심해서 고백 한번 못하는 소인배이다.

그외에도 사안을 가진 우에무라 양, 동아리 유령회원이면서도 동아리 빚을 걷으러 다니며 망상적 빚쟁이로 변신해버린 유시마, 대학생활을 이상한 논리로 점철했다가 송별회 회비를 떼먹고 도망간 에비즈카 선배가 지금은 멀쩡한 얼굴로 수입상품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충 봐도 평범치 않은 인물들의 퍼레이드이다. 그러나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조용한 밤 시간, 조용히 책을 읽으려 했던 나의 결심의 산산히 무너뜨리고, 나를 포복절도, 자지러지게 웃게 만들었다.

그외에도 교토대학 사냥꾼들과 마주친 사건이라든지, 에에자나이카 사건은 끝까지 나를 웃도록 만들었다. 특히 교토대학 사냥꾼들과 마주쳤을때 나의 대응 수단이었던 오른손의 귤껍질과 왼손의 개똥은 나를 미친듯이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엔도에게 보낸 선물이 <나>에게 돌아왔을때 벌어진 사태는..... 생각만 해도 어깨가 부들부들 떨린다...(웃음을 참느라고)

옛말투 문장에서 나오는 해학적인 웃음과 적절한 유머가 담긴 어휘들의 변주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천재성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 소설은 순문학 장르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읽고 나서 뭔가 깨달음을 주는 그런 의도로 쓰여진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할 수 있다.
미친듯이 웃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한참 웃다보면 우울한 기분이여 안녕, 꿀꿀한 기분도 안녕~~~ 을 외치면서 손을 살포시 흔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이 책의 계절적 배경이 되었던 교토의 겨울.
지금 대한민국도 겨울이다.
즉, 이 소설에 등장한 '사천왕'들이 부들부들 떨며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랬던 '크리스마스 파시즘'이 다가오는 계절이다. 나 역시 점차 다가오는 연말의 '크리스마스 파시즘'의 광풍속에서 생존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다.

크리스마스 파시즘의 광풍이 절정에 달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도 온 세상이 들썩들썩하겠지만, 사실상 12월초부터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넘쳐난다.
이 '크리스마스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나역시 ええじゃないか를 함께 외쳐줄 동지들을 규합해서 거리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조금, 아주 조금, 새끼손톱의 1/10의 크기만큼 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사는 소도시는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다 나오는, 얼굴만 봐도 뉘집 자식이라는 정보가 나오는 이런 소도시에서는 그런 일을 하면 부모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 일이니....

'크리스마스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는 그 날만은 조용히 집에서 우리 다섯마리 강아지들을 조직원으로 내가 '에에자나이카'의 선봉이 되어 '에에자나이카'를 한번 외쳐볼까 하는 망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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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망상(妄想) 폭주(爆走), 폭렬(爆裂)!!!

현실 세계와 판타지가 뒤섞인 웃음 폭탄 기관차가 달려간다!!!

이건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감상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자.. 이쯤되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대충 짐작이 가시리라.
그렇다.
새벽 4시에 미친듯이 폭소하게 만들었던 책.
밤은 짦아 걸어 아가씨야.

일단 제목부터 무척이나 상콤발랄하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예전에 모리미 토미히코를 몰랐던 시절 - 사실 이 작가의 책을 읽은 것도, 이 작가에 대해 알게 된것도 일주일 남짓이다 - 에도 책 제목과 표지에 이끌려 찜을 해두었던 책이다.

하지만, 근간도서라 할인률이 적어서 책값이 좀 내리면 사야지 했는데, 그만 <달려라 메로스>의 요상한 맛에 중독되어 급기야는 이 책까지 사들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달려라 메로스>보다 더 즐겁게 읽었다.
뭐랄까, 작가의 톡톡 튀는 어휘 구사력에 시종일관 웃음이 터졌다.

에들 들자면,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애정을 과시하는 신혼부부를 보며 선배가 하는 말.

신도 두려워 하지 않는 그 열기는 순식간에 참석자들을 새까맣게 탄 누룽지로 만들었다

라던가.

도도씨의 잉어들이 회오리 바람에 날려간 순간을 묘사한

도도씨가 가장 사랑하는 비단잉어들이 비늘을 찬란히 빛내며, 마치 '멋진 용이 되어 돌아올게요' 하는 것처럼 저녁 하늘로 날아 올라갔습니다

라던가...

정말이지 어쩌면 이런 어휘를 구사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표현이 책 구석구석 산재해 있지만, 아직 못보신 분들을 위해 궁금증으로 남겨 놓겠다.  


일단 이 책은 두 화자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
흑발의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선배와 흑발의 아가씨.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며, 선배는 반말체, 아가씨는 공손체를 쓴다.

총 4개 파트로 나뉘어지는 것은 봄부터 겨울까지의 4계절을 의미하며, 봄~가을에 이르는 사건은 하루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겨울은 며칠에 걸쳐 진행되지만..
하루에 정말이지 많은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도!

게다가 주인공도 특이하지만, 조연급들이 단연코 우세하다.
이 작품은 조연이 없으면 정말 그렇고 그런 러브 스토리가 되었을테니.

회오리 바람에 양식하던 잉어가 모두 하늘에 날아가 버린 도도씨. 3층 전차를 타고 다니며, 가짜 전기부랑을 만드는 사채업자 이백 옹(翁), 스스로 텐구라 말하는 히구치, 히구치와 함께 다니며 아가씨에게 공짜술을 마실 수 있는 인생의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하누키, 헌책 시장에 강림한 헌책의 신으로 추정되는 꼬마, 학교 축제에서 괴팍왕이란 연극을 쓴 빤쓰총대장, 학원제에 코끼리 엉덩이란 작품을 출전한 노리코... 등등...

수없이 많은 그러나 개성으로 똘똘 뭉친 등장인물과 후배와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선배, 그러나 정작 후배인 흑발의 아가씨는 선배의 마음을 모른다. 주위 사람은 다 눈치채고 있었는데도....

가을 축제편까지는 폭주하던 기관차가 겨울편 나쁜 감기 사랑 감기에서는 그 힘을 조금씩 잃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재미없어진다는 뜻은 아니고, 봄부터 가을까지 폭풍처럼 눈보라처럼 해일처럼 밀어닥치던 그 절묘하고 기묘한 순간이.. 봄바람처럼 바뀐다는 것이다.

대충 결말은 짐작이 가시리라 믿지만,  굳이 언급은 하지 않겠다.

교토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그녀와 그녀를 쫓아 우연을 가장하고 포진하고 있는 선배의 발걸음을 쫓아다니다 보면, 마치 내가 교토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특히 좋아한 파트는 심해어들편으로 교토의 여름 헌책 시장이야기이다.
심해어들이란 표현과 여름 헌책 시장이 왜 관련 있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테니 구체적 언급은 피하겠다.   


어쨌거나, 헌책 시장을 방문한 선배는 제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그녀가 그곳에 출현할거라는 믿을만한 정보통에게 들은 정보로 그곳을 방문한다. 그곳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 그리고 그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할 각오인 선배.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어릴적 좋아했던 그림책을 찾아 다니고 있다.

헌책 시장에서 히구치와 만난 그녀.
스스로 텐구라 말하는 히구치씨는 왠일인지 그날따라 감동적인 말을 그녀에게 해준다.

"출판된 책은 누군가에게 팔림으로써 한 생을 마감했다가 그의 손을 떠나 다음 사람 손으로 건너갈 때 다시 살아나는 거야. 책은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다시 소생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지. 신은 나쁜 수집가의 손에 갇혀 있던 책을 세상에 풀어 줌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게 해주는 거야."

히구치의 말을 듣고 나도 괜시리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한 번 읽고 책장에 모셔둔 책이 책장 몇 개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이제까지는 책을 판다는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는데,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 책을 세상에 해방시켜야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책장속의 책들아.. 미안. 헌책 신님 죄송하여요...) 

상콤 발랄 유쾌 통쾌 이상 야릇한 이야기가 한세트로 나왔다.
기발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현실과 판타지가 적당히 버무려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망상 폭주 기관차에 동승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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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 모리미 도미히코의 미도리의 책장 7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시작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모리미 도미히코의 달려라 메로스는 다자이 오사무를 비롯하여 나카지마 아쓰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사카구치 안고, 모리 오가이의 소설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재해석에서 끝나지 않고 또다른 하나의 소설로 창조한 것이란 표현이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일단 일본 원서의 제목을 살펴 보면, 확실히 잘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 나온 두 권의 책은 제목이 <달려라 메로스>로 똑같지만..
일본 원서 제목은 新釈 走れメロス 他四篇인데, 이걸 우리말로 옮겨 보자면 새로운 해석, 달려라 메로스 외 4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목에서부터 아 이 소설의 원작이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난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와 모리미 도미히코의 <달려라 메로스> 두 권을 동시에 구입했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구입했으므로, 책 제목만 보고는 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만이 있겠구나 싶었는데, 그외에도 4명의 원작 소설이 따로 있었다.
(본인 1 : 그러게, 책 정보쯤은 확인하지 그랬니?)
(본인 2 : 뭐, 아무런 정보 없이 사서 의외의 것을 발견하는 수확도 하나의 기쁨이지)

하여간, 일단 원작인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를 먼저 읽고, 모리미 도미히코의 <달려라 메로스>를 읽었다. 모리미 도미히코가 쓴 다른 4편의 소설의 원작은 아직 읽어 본 적이 없어서 좀 아쉽다. <달려라 메로스>의 경우 원작의 어떤 부분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했는지를 비교해 볼 수 있었으나 다른 4편의 경우 아무런 지식이 없어서... (苦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사카구치 안고의 경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이 만들어 졌으니 두 말 하면 잔소리. 사카구치 안고는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사막에서 잠시 언급이 된다. 

어쨌거나, 일본 문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왔던 작가들의 작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해낸다. 이런 방식은 <겐지와 겐이치로 A, B>와 비슷하다. 겐지와 겐이치로 같은 경우는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재해석해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로 만든 것이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의 <달려라 메로스>는 시종일관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었다.
특히.. 분홍색 팬티에선 완전히 자지러지게 웃고 말았다.
원작은 메로스가 돌아오지 않으면 세리눈티우스를 처형한다는 것인데, 이게 현재의 교토로 무대가 바뀌고 대학 캠퍼스로 무대가 바뀌면서 그 설정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이다.
처형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반주에 맞춰 분홍색 팬티를 입고 춤을 춘다라는 설정으로.

물론 가장 중요한 우정에 대해 역설하는 부분은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정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다자이 오자무의 달려라 메로스는 메로스가 세리눈티우스의 처형을 막기 위해 성으로 돌아오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의 달려라 메로스는 우정을 위해 도망을 간다.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을 치는 게 두 사람의 우정의 증거인 것이다.

"약속을 지키고 지키지 아니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신뢰하고 하지 아니하고도 문제가 아니야. 누를 끼쳐도 돼. 배신해도 상관없다. 서로 돕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같은 것을 목표로 하기만 하면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둘도 없는 벗인 것이다."

책 본문에서 발췌한 부분을 보면 이 둘의 우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두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우정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새로운 우정에 대한 해석이다.

<덤불속>의 경우는 유지니아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아! 그렇다고 이게 미스터리물은 아니다. 접근 방식이 유지니아와 비슷하다는 것이지.
어떤 영화에 대해 각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터뷰하는 형식이 유지니아의 사건 인터뷰 방식과 닮았단 말이다.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를 읽으신 분이면 공감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영화를 두고 이야기되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생각.
어떤 사실에 대한 입장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다. 사실은 하나지만,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각기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만을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이니까.

<산월기>도 읽으면서 계속 키득키득 거린 작품중 하나이다. 사이토 슈타로라는 정말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의 궤변에 미친듯이 웃을수 밖에 없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 시노 메로(달려라 메로스)와 세리나(달려라 메로스)도 정말이지 괴상한 캐릭터이다. 괴상한 캐릭터들이 늘어놓는 궤변이 마음에 와닿는 건, 비록 그것이 궤변일지라도 진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이상하게 보여도,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
그건 아마도 진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배척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배척을 하기도 하고 배척을 당하기도 하지만, 늘 한결같이 꿋꿋한 모습이다. 세상은 큰 무리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것만도 아니란 것을 보여 준다.

<벚나무 숲 만발한 벚꽃아래>와 <햐쿠모노가타리>는 왠지 원작이 공포소설일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벚나무 아래에는 시체가 잠들어 있어. 벚나무는 그 시체를 양분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라는 괴담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아마도 그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벚나무에 대해 사람들은 경외심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햐쿠모노가타리>의 경우, 일종의 이야기 놀이인데, 마지막 100번째 촛불을 끄기 전에 이야기는 끝난다. 100번째 촛불이 꺼지면 마물이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는 세상사람들 눈에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인물이 실제로 있는지는 결국 모르고 끝났지만... 한여름밤에 왠지 일어날 것 같은 그런 이야기였다.

전체적으로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원작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원작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난다는 것은 책이 꽤나 잘 쓰여졌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른다.
재해석하고 재창조된 글이 재미없다면 당연히 원작에 대해 관심이 가지 않게 되므로.

유쾌 발랄 상쾌 통쾌한 명작 다시 읽기.
이 책은 나처럼 <달려라 메로스> 딱 한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도, 원작을 모두 읽어본 사람이라도,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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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오르한 파묵.
그는 아직 내게 낯선 작가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오르한 파묵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아직 그의 책은 하나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1500년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즉 현재 터키의 전신인 나라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다민족 제국을 시대적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낯선 나라, 낯선 시대라는 것이 설레임도 주었지만 걱정이 앞선 것 또한 사실이다.

일단 작가 소개와 뒷표지를 읽으며 이 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혼자서 상상해보고, 또한 목차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나 목차를 본 순간 난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무엇 이다(입니다)로 1권에는 총 33개의 번호가 붙은 목차가 보였다.
사람 이름, 사물, 동물, 그리고 살인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33개의 목차는 내 궁금증을 한껏 끌어 올렸다.

심호흡을 하고, 난 첫장부터 조심스레 펼쳤다.
마치 선물 상자를 개봉하듯.

처음부터 충격적이다. 엘레강스라는 한 세밀화가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각 장마다 그 이름을 내세운 사람 혹은 사물이 1인칭으로 서술한다.
좀 특이한 것은 개, 나무, 금화, 죽음, 빨강 등의 이름을 가진 것들 역시 1인칭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개, 나무, 죽음의 경우는 그림의 소재로 쓰인 것들이고, 금화는 말그대로 그 당시 화폐, 빨강은 물감을 의미한다.
각 장에서 이름이 등장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물까지도 각각 그 장에서 1인칭 화자가 되는 책은 처음으로 읽어본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가지는 특징은 각각의 화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것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설명된다. 또한 화자들이 우리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그 시대의 모습과 세밀화가들의 활동, 그리고 베네치아나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화풍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고유한 화풍의 충돌, 또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발생하는 세밀화가들 사이의 견제와 암투등은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또한 카라와 셰큐레 사이의 밀고 당기는 사랑 놀음도 볼 만하다. 셰큐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카라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솔직히 의문스럽기도 하고, 둘 사이의 관계가 불안불안하기도 하다.

아직 엘레강스와 에니시테를 살해한 살인범은 윤곽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다. 살인자는 분명 나비, 올리브, 황새라는 예명을 가진 세밀화가 중의 한사람이지만, 살인범, 나비, 올리브, 황새의 입을 빌어 진행되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읽어 봐도 여전히 그 살인범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일단 난 나비, 올리브, 황새 중 한사람을 지목하고 있지만, 과연 그 사람이 맞을지에 대한 것은 2권을 읽어 봐야 확실해질 듯 하다.
재능에 대한 질투,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경외와 자신들의 고유의 것을 지켜야한다는 보수적 입장의 충돌, 이슬람교와 술탄이 지배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사회상 등등 흥미로운 요소로 가득한 내 이름은 빨강 1권.

2권에서는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기대감을 안고 서평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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