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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망상(妄想) 폭주(爆走), 폭렬(爆裂)!!!
현실 세계와 판타지가 뒤섞인 웃음 폭탄 기관차가 달려간다!!!
이건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감상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자.. 이쯤되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대충 짐작이 가시리라.
그렇다.
새벽 4시에 미친듯이 폭소하게 만들었던 책.
밤은 짦아 걸어 아가씨야.
일단 제목부터 무척이나 상콤발랄하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예전에 모리미 토미히코를 몰랐던 시절 - 사실 이 작가의 책을 읽은 것도, 이 작가에 대해 알게 된것도 일주일 남짓이다 - 에도 책 제목과 표지에 이끌려 찜을 해두었던 책이다.
하지만, 근간도서라 할인률이 적어서 책값이 좀 내리면 사야지 했는데, 그만 <달려라 메로스>의 요상한 맛에 중독되어 급기야는 이 책까지 사들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달려라 메로스>보다 더 즐겁게 읽었다.
뭐랄까, 작가의 톡톡 튀는 어휘 구사력에 시종일관 웃음이 터졌다.
에들 들자면,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애정을 과시하는 신혼부부를 보며 선배가 하는 말.
신도 두려워 하지 않는 그 열기는 순식간에 참석자들을 새까맣게 탄 누룽지로 만들었다
라던가.
도도씨의 잉어들이 회오리 바람에 날려간 순간을 묘사한
도도씨가 가장 사랑하는 비단잉어들이 비늘을 찬란히 빛내며, 마치 '멋진 용이 되어 돌아올게요' 하는 것처럼 저녁 하늘로 날아 올라갔습니다
라던가...
정말이지 어쩌면 이런 어휘를 구사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표현이 책 구석구석 산재해 있지만, 아직 못보신 분들을 위해 궁금증으로 남겨 놓겠다.
일단 이 책은 두 화자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
흑발의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선배와 흑발의 아가씨.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며, 선배는 반말체, 아가씨는 공손체를 쓴다.
총 4개 파트로 나뉘어지는 것은 봄부터 겨울까지의 4계절을 의미하며, 봄~가을에 이르는 사건은 하루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겨울은 며칠에 걸쳐 진행되지만..
하루에 정말이지 많은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도!
게다가 주인공도 특이하지만, 조연급들이 단연코 우세하다.
이 작품은 조연이 없으면 정말 그렇고 그런 러브 스토리가 되었을테니.
회오리 바람에 양식하던 잉어가 모두 하늘에 날아가 버린 도도씨. 3층 전차를 타고 다니며, 가짜 전기부랑을 만드는 사채업자 이백 옹(翁), 스스로 텐구라 말하는 히구치, 히구치와 함께 다니며 아가씨에게 공짜술을 마실 수 있는 인생의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하누키, 헌책 시장에 강림한 헌책의 신으로 추정되는 꼬마, 학교 축제에서 괴팍왕이란 연극을 쓴 빤쓰총대장, 학원제에 코끼리 엉덩이란 작품을 출전한 노리코... 등등...
수없이 많은 그러나 개성으로 똘똘 뭉친 등장인물과 후배와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선배, 그러나 정작 후배인 흑발의 아가씨는 선배의 마음을 모른다. 주위 사람은 다 눈치채고 있었는데도....
가을 축제편까지는 폭주하던 기관차가 겨울편 나쁜 감기 사랑 감기에서는 그 힘을 조금씩 잃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재미없어진다는 뜻은 아니고, 봄부터 가을까지 폭풍처럼 눈보라처럼 해일처럼 밀어닥치던 그 절묘하고 기묘한 순간이.. 봄바람처럼 바뀐다는 것이다.
대충 결말은 짐작이 가시리라 믿지만, 굳이 언급은 하지 않겠다.
교토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그녀와 그녀를 쫓아 우연을 가장하고 포진하고 있는 선배의 발걸음을 쫓아다니다 보면, 마치 내가 교토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특히 좋아한 파트는 심해어들편으로 교토의 여름 헌책 시장이야기이다.
심해어들이란 표현과 여름 헌책 시장이 왜 관련 있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테니 구체적 언급은 피하겠다.
어쨌거나, 헌책 시장을 방문한 선배는 제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그녀가 그곳에 출현할거라는 믿을만한 정보통에게 들은 정보로 그곳을 방문한다. 그곳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 그리고 그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할 각오인 선배.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어릴적 좋아했던 그림책을 찾아 다니고 있다.
헌책 시장에서 히구치와 만난 그녀.
스스로 텐구라 말하는 히구치씨는 왠일인지 그날따라 감동적인 말을 그녀에게 해준다.
"출판된 책은 누군가에게 팔림으로써 한 생을 마감했다가 그의 손을 떠나 다음 사람 손으로 건너갈 때 다시 살아나는 거야. 책은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다시 소생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지. 신은 나쁜 수집가의 손에 갇혀 있던 책을 세상에 풀어 줌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게 해주는 거야."
히구치의 말을 듣고 나도 괜시리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한 번 읽고 책장에 모셔둔 책이 책장 몇 개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이제까지는 책을 판다는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는데,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 책을 세상에 해방시켜야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책장속의 책들아.. 미안. 헌책 신님 죄송하여요...)
상콤 발랄 유쾌 통쾌 이상 야릇한 이야기가 한세트로 나왔다.
기발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현실과 판타지가 적당히 버무려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망상 폭주 기관차에 동승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