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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평점 :
야시의 표지는 참으로 강렬하다.
붉은 색 표지와 머리에서 풀이 자라는 소녀의 기괴한 뒤틀린 몸.
표지는 나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일본호러 대상 수상작이란 말에 끌리기도 했다.
워낙 요괴이야기나 귀신들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 호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이기에, 이 책을 구매할때 나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판단을 옳았다.
이 책은 바람의 도시과 야시라는 제목의 두 가지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두 소설을 따로 살펴 보기로 하자.
끝없는 미로, 고도
고도는 귀신의 길, 죽의 자의 길, 혼령의 길, 나무 그림자의 길, 신의 통행로등으로 불리는 길이다. 그곳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누구나에게 보이는 길도 아니다.
길은 미로처럼 뻗어 있고, 그 길을 완전히 아는 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빌딩 사이의 조그마한 틈이 고도와 연결되기도 하고, 숲이나 덤불 속에서 고도와 연결되는 길이 열려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우연히 벚꽃놀이를 갔다가 고도로 들어가게 된 소년인 <나>는 열두살때 가즈키와 다시 고도로 들어가지만, 출구를 찾지 못하고 미아가 된다. 분명히 옆으로는 현실 세계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통로가 아니면 절대로 나갈 수가 없다.
나와 가즈키는 렌이라는 영구방랑자와 만나, 고도를 빠져나가려 하지만, 고모리라는 사람때문에 가즈키는 죽음을 맞게 된다. 고도안에 존재하는 비술의 사원을 찾아 헤매지만, 가즈키를 살릴 수가 없다.
더불어 동시 진행되는 영구방랑자 렌의 이야기는 렌의 출생의 비밀을 담고 있었다. 고도밖으로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고, 영원히 미로같은 고도를 여행하다가, 죽으면 나무가 되어 세계를 넘나드는 바람이 될 운명을 가진 렌.
고도에 등장하는 렌의 비밀은 참으로 미묘하게 서글폈다.
반면, 고도에서 태어나 고도를 끊임없이 방랑하는 렌의 삶은 어찌보면 참으로 낭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와 가즈키도 그런 모습에 동경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 고도여행을 오자던 가즈키는 고도를 영원히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나> 역시 고도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온다.
동경은 동경으로 끝날뿐....
조릿대 숲, 신사 뒤편의 덤불, 숲, 빌딩 사이의 작은 틈...
이런 곳을 통해 나가면 낯선 세계가 등장한다.
이러한 설정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소설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설정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터널을 지나, 메마른 하천을 지나면 신들의 온천이 나오고, <이웃집 토토로>는 덤불을 빠져나가면 커다란 녹나무가 있고, 그 구멍속에 토토로가 살고 있다.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 깊은 숲속에 정령들이 사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수많은 신들이 살지만, 인간들이 그곳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토끼구멍이나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가기도 했다.
고도도 마찬가지이다. 고도와 통하는 입구는 여러곳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가다가 고도를 느끼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오곤 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우연히 우리는 그런 곳으로 들어갈 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영원한 미아가 되어 죽을때 까지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끝이 보이는 골목길이었는데, 들어가는 순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세계라면?
요괴나 신이 무서운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에 고도가 무서운 건 아니다. 그곳에서는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기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 아닐까.
물건을 사지 않으면 나갈수 없는 시장, 야시
대학생 이즈미는 고교시절 동급생인 유지의 권유로 야시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러나 그곳은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였다.
가끔 모든 조건이 맞으면 갑자기 발생하는 시장 야시.
어린 시절 유지는 그곳에서 동생을 팔아 야구 선수의 재능을 샀다.
야구부 에이스로서 활약하고 고시엔까지 나갔던 유지이지만, 동생을 팔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이번엔 동생을 되사기 위해 야시로 향한다.
외눈박이 고릴라, 걸어다니는 너구리, 눈코입이 없는 달걀 귀신, 모가지를 파는 가게, 새를 파는 가게, 관을 파는 가게, 풀을 파는 소녀, 납치한 아이들을 파는 납치업자등 야시는 기괴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건을 사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을 모르고 들어온 이즈미는 유지가 자신을 팔고 밖으로 나갈까봐 걱정을 하지만, 유지의 생각은 달랐다.
동생을 팔아 넘겼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유지는 이곳으로 자살여행을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야시에 속하는 자가 되면, 바깥 세상은 더이상 자신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유지의 마음은 굉장히 서글프고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보면 오싹한 이야기인데, 오히려 서글픔이 더 많이 밀려오는 야시였다.
고도와 야시는 비슷한 성질을 가진 곳이다. 다른 점이라면 고도의 출구는 어디에나 있지만, 야시는 조건이 맞을때만 열린다는 것뿐. 고도에 속하게 되거나 야시에 속하게 된 사람은 영원히 그곳에 머물게 된다.
간결한 문장과 독특한 소재, 그리고 반전.
야시는 교훈을 주는 소설은 아닐지라도, 우리 인간들이 눈치채지도 못한채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알려준 소설이다.
내일 아침,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는 곳이 우리가 살던 세계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
<기억에 남는 한마디>
길은 교차하고 계속 갈라져 나간다. 나는 영원한 미아처럼 혼자 걷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끝없는 미로 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