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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ㅣ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작품이 바로 이 <나목>이다. 게다가 이 작품이 박완서님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여러 작품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글이 도무지 안 써져서 절망스러울 때라든가 글 쓰는 일에 넌더리가 날 때는 『나목』을 펴보는 버릇이 있다. 아무데나 펴들고 몇 장 읽어 내려가는 사이에 얄팍한 명예욕, 습관화된 매명으로 추하게 굳은 마음이 문득 정화되고 부드러워져서 문학에의 때묻지 않은 동경을 들이킨 것처럼 느낄 수 있으니 내 어찌 이 작품을 편애 안하랴.(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책 中, p.23)라는 말때문이라도 더더욱 이 <나목>이라는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다. 이 작품은 한국전행 후 미8군 PX 초상화부에 근무하던 시절 만난 화가 박수근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혹자들은 박수근 화백이 주인공 화가 옥희도가 아니냐는 질문들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나목>은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전기나 실화가 아니라고 밝히셨다.
1.4 후퇴후 경은 어머니와 일찍 서울로 돌아온다. 경은 어머니를 싫어한다. 어머니를 이루고 있는 부연 회색이 미웠다. 백발에 듬성듬성 검은 머리가 궁상맞게 섞여서 머리도 회색으로 보였고 입은 옷도 늘 찌들은 행주처럼 지쳐 빠진 회새이었다. 전쟁중이라 그런지 모녀는 참 어두웠다. 피난지에서 올라온 큰아버지가 폐가같은 이 집에서 여자 둘이 뭐하는짓인지.. 함께 내려가자며 닥달을 하신다. 큰아버지가 동생네 식구들까지 살뜰이 챙기는구나 요즘처럼 핵가족화가 되어 친척끼리도 이러기 드물텐데 했었는데.. 이야기를 읽어가는 와중에 엄마는 왜 그리 초점을 잃은듯 회색빛이었는지, 큰아버지는 경이라도 데려가려는지 이유를 알게되었다. 나는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라서.. 그리고 한국전쟁은 이제 거의 70여년전 이야기라서 우리의 뇌리속에 아주 먼 옛날 일어났던 그런 사건처럼 여겨져서 그당시를 직접 체험하고 글로 표현한 것을 온전히 느껴지기는 무리가 있는듯 했다. 하지만 폭격을 맞아 지붕이 부서진 행랑채. 두 오빠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그 곳에서 살고 있는 모녀가 그리 밝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자신을 끔직히 아꼈던 아버지의 죽음과, 두 오빠의 죽음이 자신탓이라고 여겼던 경에게 나이가 많은 화가 옥희도는 탈출구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북에서 내려온 옥희도씨는 자식이 다섯이나 된다. 먹고 살아야겠기에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는 있지만 그에게도 고민은 있다. 요즘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참 인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인지 옥희도의 뜨뜨미지근한 태도와 경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아온, 미칠 듯이 암담한 몇 년을, 그 회색빛 절망을, 그 숱한 굴욕을, 가정적으로가 아닌 예술가로서 말일세. 나는 곧 질식할 것 같았네. 이 절망적인 회색빛 생활에서 문든 경아라는 풍성한 색채의 신기루에 황홀하게 정신을 팔았대서 나는 과연 파렴치한 치한일까? 이 신기루에 바친 소년 같은 동경이 그렇게도 부도덕한 것일까(p.360)라는 그의 외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난잡하게는 아녀도, 한순간 마음을 빼앗겼다면 어떻게 포장을 하더라도 외도는 외도이지 않았을까... 참.. 때가 때인지라... 아무리 변명을 해보지만 한순간의 일탈도 부도덕해 보인단 말이다....
경이와 옥희도는 종종 어느 문구점 앞에서 태엽을 감으면 움직이는 침팬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곤했다. "그놈이 태엽만 틀면 술을 마시는 게 처음엔 신기하더니만 점점 시들하고 역겨워지기까지 하더군. 그놈도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는 눈치였어. 그래서 그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게야.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태엽만 틀면 그 시시한 율동을 안 할 수 없고.... 한없이 권태로운 반복, 우리하고 같잖아"(p.227)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우리들 일상...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더욱더 그러한 것 같기도 하다. 경아와 화가 옥희도는 그런 권태로운 삶을 극복했을까.... 본인들은 극복했다고 믿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