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고르는 여자들 미드나잇 스릴러
레슬리 피어스 지음, 도현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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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영국.

시대가 시대인지라.... 거의 60여년전 이야기 때문에 빠른 통신망을 가진 우리에게는 다소 답답함 아니면 발달한 기술력을 감사해야하나. 핸드폰도 CCTV도 없는 상황이어서.. 참 답답했던 상황이지만 그래도 주인공 케이티는 난관을 잘 헤쳐나가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어느날, 케이티의 벡스힐 집앞에 화재가 발생한다. 마음씨 좋은 글로리아 아주머니의 집이다. 사람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케이티는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글로리아 집으로 손님을 데려오는 한 중년여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데려오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추레한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얼굴에 상처가 있기도 하고, 얼굴 전체가 부은 여자이기도 했다. 손님들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그런데 그런 글로리아 집에 화재가 발생했고, 두 사람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더군다나 런던으로 새 직장을 찾아 떠나려고 했던 케이티에게 그 방화사건과 더불어 두 사람을 살해한 용의자로 아버지 앨버트가 지목되었다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의 만류에도 케이티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방화살인범을 찾아나섰고, 어느날 납치를 당하고 만다.


글로리아의 집으로 드나들던 이들은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나온 아내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폭력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고 또한 경찰의 도움을 받을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여있음은 분명한것 같다. 꼭 가정폭력이 남편이 아내에게 가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다수가 남편보다 아내가 받는 쪽이 더 우세하지 않을까 싶다. 집을 버리고 나와서도 자신을 찾아내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이들을 돕기 위한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왜 이런 문제점은 고쳐지지 않는걸까. 작가는 우리에게 참 많은 질문은 던져주는것 같다.


다행히 케이트는 무사히(?) 돌아오지만 또 한번 커다란 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처럼 남겨진 사회의 문제점들이 아닌가 싶다. 피해자들이 더 고통받는 세상. 피해자들이 조심하지 않아 범죄에 노출되었다는 생각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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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드뷔시 전주곡 - 휠체어 탐정의 사건 파일, <안녕, 드뷔시> 외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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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는 좀.. 살짝 뭔가 아쉬움이 남았는데 요건 새로운 인물이 등장을 하는군요. 평은 굉장히 좋은데... 고민이 살짝 되기는 하지만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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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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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먼저 소감부터 말하자면... 아주 재밌다. 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은 꽤 좋다. 물론 나의 경우이지만... 한동안 요런 로맨스가 가미된 책을 많이 읽었었는데, <암향>, <보보경심>, <왕은 사랑한다>, <궁에는 개꽃이 산다>라든지... <왕은 사랑한다>는 고려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니까 살짝 나라는 달라도 비슷한 풍의 뭐 그런 이야기라고 할수 있겠지...


'정사에서는 기록을 찾을수 없지만 야사에 남긴 흔적만으로도 이미 전기적인 인물이다'라는 것을 보면 아마도 역사상 신존인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워낙 중국역사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런가보다 해야지 어쩌겠나.


명문세가 랑야왕씨의 고귀한 딸인 왕현. 고모가 황후이고 그녀의 엄마는 현 황제의 이복동생이긴 하지만 공주신분이다. 그리고 현 황제의 아들인 자융, 자율, 자담과 어렸을적부터 격이 없이 지내며 자라왔다. 셋째 황자인 자담과는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관계이다. 똑같은 황제의 아들들이라고는 하나 자융만이 고모의 친혈육이고 자율과 자담은 비의 아들이다. 더군다나 자담은 황제의 총애를 얻고 있는 사귀비의 아들이다. 맞다. 겉으로는 고요히 헤엄치고 있는 한마리 우아한 백조이긴 하지만 물밑에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엄청난 암투가 숨어있다. 다음 대를 이을 황자는 현 황후의 아들 자융이고 고모인 황후는 자담을 매우 경계한다. 그러기에 왕현과 자담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더군다나 사귀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담은 3년상을 위해 황릉으로 떠나고(하지만 거의 내쫓기다시피 하고) 태자의 권력을 탄탄히 하기 위해 왕현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예장왕 소기와 혼인하게 된다. (물론 이 사실은 왕현은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혼인날 소기는 갑작스레 북방의 변고가 생겨 갑작스레 떠나버리고 왕현은 소박아닌 소박을 맞게 된다. 그렇게 홀로된지 3년후, 예장왕에게 원한이 있는 이에기 예장왕비인 왕현은 납치를 당하게 되면서 피바람이 난무하는 혼란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나라는 500여년 동안 한 왕조가 지속되지만 중국은 여러 왕조가 난무하는 가운데 학생시절부터 중국역사에 대해서는 정말로 어려웠다. 뭐,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 중국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권력을 잡기위한 다툼은 별반 다르지는 않는것 같다. 다행히 예장왕과 예장왕비가 서로를 위하며 아껴주며 '제왕의 패업'을 이루기 위한 앞길에 워낙 많은 위험이 따르고 있어서 그들은 힘들었겠지만 이야기에 빠져든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흥미진진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참.. 옛날에는 그야말로 밤새 무사하셨느냐라는 안부가 걸맞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020년 중국 최대 화제의 드라마라고 하는것 보니까 꽤 화려하게 그리고 웅장하게 그려져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두권을 합해서 1,000여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가 그냥 훌훌 넘어가는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드라마는 사양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예장왕이나 예장왕비의 모습을 그렸는데 시각화가 된 드라마에서 그런 이미지가 아니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속에 그려지는 중국황실의 모습은 한번 보고싶긴 하다. 표지에 보여지는 것만큼 화려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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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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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의 <소설, 향>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 김사과님의 <0 영 ZERO 零>이다.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소설향'을 리뉴얼해 선보이는 중편 소설 시리즈로, "소설의 본향, 소설의 영향, 소설의 방향"이라는 슬로건을 가진다. 요즘에는 이렇게 시리즈로 한국소설을 선뵈고 있는 출판사가 많은것 같다. 그래서 유심히 여러 출판사의 작품들을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그 중 처음으로 작가정신의 <소설, 향>을 만났다. 책이 작고 아담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양장본이라 책장에 쪼로록 세워놔도 매우 뿌듯하리라 생각된다.


'0'이 숫자로 한글고 영어로 한자로 늘어져 있어서 무언가 '0'을 강조하는 느낌, 혹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이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제목을 타이핑 하다가 한자를 보고 무언가 뜻을 숨겨놓은듯한 것을 느꼈다.(아닐수도 있지만 뭐, 그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던가) 한자 영(零)은 숫자가 없다라는 뜻도 있지만 떨어진다, 비가 온다, 부슬부슬 내리다라는 뜻도 있다. 처음에는 "떨어질"이란 의미만 보고 나락으로 떨어지는이라고 생각을 했다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라는 뜻도 있는 것을 보면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수도 있다고 생각도 했고 여러가지 중의적 표현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뭐 온전하게 나의 몫이니까 잘못 짚었어도 상관없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느낌은 나의 것이니 말이다.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하는 이 소설은 남자친구인 성연우와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분명 연인과 헤어지는 장면인데 알리스(주인공이 지은 영어식 이름)는 무언가 다름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하는 연우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방학때는 유럽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만난 피터 슐츠. 하지만 그는 김명훈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이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가 재혼하면서 이름이 피터 슐츠가 되었다. 피터의 이야기를 할때는 매우 인정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야기에 진행됨에 따라 무언가 이상한점을 느끼게 된다. 알리스 그녀는 매우 독버섯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 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 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본문 中, p.46)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 알리스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잡아 먹어야겠지. 하지만, 모두 그렇게 남을 잡아먹으면서 살지 않는다. 아마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수 있기에 만물의영장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무조건 남을 밞고 일어서지는 않는다. 그런면에서 알리스는 자신의 삶외에는 중요한게 없어보인다. 다른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말이다. 대부분 화자들은 나쁜 사람들을 보지 못해서 매우 이 소설의 알리스가 독특해 보였던 것 같다. 분명 악인인것 맞는것 같은데, 어찌보면 그녀의 상황을 이해할수 있었다가 또 어찌보면 뭔가 이상해 보이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독버섯 같은 알리스 같은 사람은 솔직히 만나고 싶지 않은데... 첫느낌이.. 안좋아서.. 근데, 한번 다시 이 소설을 읽어봐야할것 같다. 그러면 알리스의 다른면이 보일것 같은 느낌에서이다. 혹시 나도 알리스의 독에 중독된것은 아닐까. 조심해야 겠다. 아무래도 조심하지 않으면 알리스에게 잡아먹힐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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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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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는 수많은 동물이 있다. 사자가 4만 마리라고 하면 가축용 돼지는 10억 마리, 코끼리가 50만 마리라면 가축용 소는 15억 마리, 펭귄은 5,000만 마리라면 닭은 500억 마리가 있다. 평상시에 사자, 돼지, 코끼리, 소, 펭귄, 닭... 이렇게 동물들의 종류만 생각했고 멸종 위기종의 동물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가축용으로 길러지고 있는 동물들의 숫자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세계 인구들의 의식주를 풍족하게할 동물들이 이렇게 많은 숫자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복지를 염두해두지 않는 공장식 사육의 문제점만 생각했지 엄청난 숫자의 동물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계 인구가 늘어나고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육식을 선호하는 인구도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수요를 맞추기 위해선 더 많은 가축들이 희생되어야 하며 그 많은 가축들을 도축 기준에 맞도록 키우기엔 또 많은 사료들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소에서 근위성 세포를 추출하여 배양액에서 넣어 증식시켜 실제 근육으로 자라게 한다면, 소 한마리에서 얻은 샘플 하나당 고기 20톤, 즉 소 40만 마리 분량의 고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맥도날드 쿼터파운더버거를 1억 7,500만개를 만들수 있는 양이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의 식감을 재현할수 있을까. 정말로 고기를 먹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동물로부터 얻어지는 유제품이나 알류같은것도 전혀 섭취하지 않는 비건 정도라면 인정할수 있지만 어설픈 채식주의자들은 완전이 끊지도 못하면서 보이는 면에서만 동물을 사랑한다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한다. 조금더 동물 복지에 힘쓰고, 억지로 사료를 먹여가며 지방간을 만들면서 요리하는 푸아그라 같은 것만을 외면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도 했다. 생태계에서도 먹고 먹히는 관계가 존재하는데 왜 굳이 인간들만 유난인가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건 아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인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먹이 피라미드의 한쪽으로 비껴 서있는 존재인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먹이사슬내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동물을 빼내서 본인들의 욕심을 채우는 이들인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상품의 가치만을 따지는 냉혈한들이 아닌가. 언젠가 털코트를 위해 가죽이 상할까 기절시켜 가죽을 벗기는 장면, 구스다운을 위해 억지로 털을 뽑기도 하고 요리를 위해 지느러미만 자르고 상어를 그대로 바다로 쳐넣기도 한다.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는 헤엄도 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한다.

 

비록 인간은 생명이 있고 감정이 있는 그들을 무참하게 저지르며 얻은 것들을 입고 먹고 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 것이 맞을까.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로 인간의 생명만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이 행복해지는 미래를 택하는 것이 맞는것 같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생명공학의 결정체, 클린 미트! 사육과 도살이 사라진 미래는 어떨까. 더 나은 지구를 위한 발걸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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