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하늘에 쏘아 올린 화살 똑똑! 역사 동화
문미영 지음, 김언희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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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어른이지만 동화를 읽는다. 동화책은 어린이에게 양보해야지라는 생각을 예전에 안 했던 것은 아닌데 어느날 문득 잘못사서 읽은 어린이 도서가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그때부터 가끔 동화책을 읽는것 같다. 내 어린시절에도 이렇게 창작동화가 많았었는지 아닌지 기억은 잘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요즘 동화책을 읽다보면 너무나도 부럽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다른 이에 대해 잘 알기 전에 외모나 환경을 보고 먼저 판단할 때가 있어요.

때론 그 판단이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지요. 앞의 경우를 선입견, 뒤의 경우를 편견이라고해요.

- 작가의말 中, p.6 -


작가의 말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선입견과 편견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구려인들은 다용맹하다는 생각, 중국이나 신라, 백제와 인접한 국경 덕에 전쟁이 끊이질 않아서 힘이 센장수가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무열이는 수레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무예나 축국 같은 운동에는 영 소질이 없다. 반면 무열이 형인 유열이는 활쏘기 등을 비롯하여 뭐든지 잘한다. 다른나라에서 온 홍화도 그런 편견 때문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도 한민족은 아닌것 같은데 말이다. 예전에도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만큼 우리가 잘 녹여낸 것은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은 살짝 아쉬운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글로벌한 시대에 한민족이면 어떻고 다민족이면 또 어떠랴.


단순한 동화이긴 하지만 선입견과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어른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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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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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 책은 내게 조금 난해했다. 첫시작은 신해년 시월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으로 그 서막이 오른다. 정조 15년(1791) 신해년에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교 박해사건을 시작으로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아마도 조선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며 그에 따라 박해를 받는 이들의 이야기인가 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임금의 고뇌도 보인다. 과연 나랏님에세 신의를 지키고 충을 보여야 하는 유교의 나라에서 서학의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있다. 게다가 서학을 믿었다는 이유로 백성을 죽여야 한다니 말이다. 실제 가톨릭교사 해서, 관동지방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문제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들어오고 권상연이 호남출신이라는 데서 문제가 야기되었다고 한다. 유교, 유학을 숭봉하여야 할 사림에 속한 사람으로서 정치와 제도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것이 큰 문제로 작용했다고 한다. 아마도 종교 이전에 정치적인 세력들과 관련이 있어서 더 큰 문제로 야기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조는 이정도에서 끝내고 관대한 정책을 써서, 더이상 가톨릭 교도에 대한 박해를 확대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이 이야기가 그대로 언급이 되기 때문에 실제 역사서를 읽는것인지 소설을 읽는 것인지 분간이 되질 않기도 하다. 그것이 역사소설을 읽는 묘미가 아닌가.


윤지충의 집에서 나온 하나의 그림. 13인이 식가를 하는 그림은... 중앙에 예수라고 불뤼우는 사람과 오른쪽에 보이는 사람은 혹시 장영실이 아닌가라는 의문. 이 소설은 많은 역사속 인물이 서로 연관되어 연상되기도 한다. 표면상으로 과학적으로 뛰어났던 장영실과 다빈치를 연결하고는 있지만 난 그 속에서 세종과 정조를 보았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유독 관심이 가는 이가 바로 세종과 정조이다. 세종께서는 선천적인 천재라고 한다면 정조께서는 후천적인 천재라고 생각하는데 장영실을 통해서 그 두분을 묘하게 연관을 시켰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두분 모두 대단하다고 들었었다. 작가님의 의도인지 아니면 나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백성들을 생각하셨기에 종교라는 이유만으로 백성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임금님의 고뇌는 얼마나 컸을까 싶다.


"... 당대를 이끌던 지성들이 신앙과 배반의 갈림길에서 최후를 설정하고 그 전야를 상징하기 위해 그렸다고 하옵니다."

임금의 귀에 신앙과 배반의 갈림길은 오묘하고 낯설게 들렸다. 다빈치는 예수와 같은 시대를 살았을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예수의 열 두 제자를 불러놓고 그 밤에 믿음과 배반의 만찬을 즐겼을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

"처음부터 다빈치의 구상은 열두 제자들의 의도와 같았단 말인가?"

- 본문 中, p. 308,309 -


"신앙과 배반의 갈림길"이라는 말이 다른이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지만 난 한참을 이 글자에 매달렸었다. 굳이 그것이 신앙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믿음과 배반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동안의 나라의 근간이었던 유교와 서학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완력으로 한쪽길로만 이끈다면 박해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역사속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유독 임금의 고뇌에 더 눈길이 가는건 아마도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그리고 생애 모든 나날을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정조에 대한 내 감정이 우선시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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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이향규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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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이야기가 소설인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보니 소설은 아니고 또한 참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작년에 "아일라"라는 영화를 보았다. 터키에서 제작된 영화였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이 전쟁고아인 아일라를 맡아서 키우다가 다시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남기도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만나게 되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영화가 떠 올랐었다. 그 때, 아주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과연 그 젊은이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참전을 했었을까.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오셨던 아버지, 혹여 북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불이익을 당할까 이산가족찾기에도 신청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던 아버지를 둔 저자를 따라 여행을 시작한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난 그 일이 잘된 것인지 아닌것인지 판단을 하지 못하겠다. 그 일로 인해서 본격적인 통일에 대해서 논의가 된다거나 어떤 진전을 보여야만 하는데, 정치적인 입지만을 따지듯이 서로들 계산기를 두르리는 탓에 오히려 관계가 더 후퇴한것만 같은건 나의 잘못된 생각일까.


당신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습니다

For your 'tomorrow', we gave our 'today'

- 본문 中 p. 45 -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졌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과거의 수많은 의병, 독립투사들이 많은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나라를 물려주었는데 그 후손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살아가는것인지.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이지경이 되었는지 참 개탄스러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지금 이시점의 우리를 위한 희생이 비단 우리 조상뿐만은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 전쟁영웅으로 칭송받는 것도 아닌 젊은 청년들이 바로 이 땅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나의 미래는 그들의 오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영국에서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이라 부를 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애초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전쟁이라는 뜻이었나봅니다.

- 본문 中 p.54 -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돌아간 영국 청년들에게 그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그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하프크라운 동전 한닢과 치즈 샌드위치 한개, 그리고 맨체스터로 돌아가는 기차표만을 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아무로 한국에 대해서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바로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 수많은 청년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결코 우리에게는 시간이 지나 망각되어서도 그리고 애초에 기억하지 않는 그런 전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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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후손
박숙자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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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작했다. 1666년 억류 생활 끝에 탈출하여 1668년 귀국했다. 그 해에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했다.


예전에 역사시간에 배운듯했는데 꽤 생생했다. 이유인즉, 작년초에 제주에 가면서 읽었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여행갔을 때는 하멜 이야기보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것이 더 관심있어서 등한시 했었다. 살짝 보니 현재 하멜상선전시관이 있는 용머리해안에 하멜이 표착한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쪽보다는 수월봉 부근과 차귀도에 더 적합하다고 한다. 조선에서 탈출하여 아마도 13년간의 임금을 요구하는 서류의 첨부 자료로 보고서를 작성한듯하다. 그 이야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 표류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62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독신이었다. 조선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해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하멜 보고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는 있지만 저자께서도 몇사람을 제외하고 허구적인 인물임을 밝혀두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줄기 속에서 3가지 이야기가 뻗어나와있다. 하멜과 해심, 그리고 한국인이지만 혼혈탓에 유독 서양인 같아 보이는 남진수의 증조부인 남민석과 선이, 그리고 남진수와 재인의 이야기이다. 아마도 하멜의 유전자였던 탓이었는지 증조부와 진수는 유독 피부가 희고 갈색 눈동자엔 푸른 빛 테가 둘러져 있다. 워낙에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받았던 진수는 일찍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외국인인 재인을 만났다. 아버지는 워낙에 강하게 재인을 반대했고 군대를 가기전 부모님께 다시 한번 만날겸 한국에 와서 그들은 하멜의 자취를 찾아 제주와 그가 그 옛날 머물렀다던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병영을 방문한다.


난파된 배에서 어렵게 생명을 부지했지만 조선에서의 그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래도 그에게 힘이 되주는 사람은 이곳에서 만난 해심과 아들 용이였다. 물론 뜻하지 않게 조선에 왔지만 인도적으로 그들을 보낼줄수는 없었는것인지. 하긴 그 당시 조선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인도적이란 말은 그다지 어울리던 시대는 아닌것 같다. 게다가 그들이 보내달라고 외쳤던 곳은 일본의 나가사키로 보내주기에도 그다지 일본과 좋은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일까. 어떤 사람이 지도자로 오느냐에 따라서 그들은 삶은 힘들기도 혹은 형편이 나아지기도 했다. 아무리 그 나라에서 잘해준들 어찌 그들이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이 없을까. 아마도 그들 또한 그들이 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멜은 그렇게 해심과 아이들이 있는 조선을 뒤로하고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뭐 어차피 하멜은 돌아가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의 조선에서의 삶은 어떻게 기억될까. 고향에 대한 향수병과 함께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조선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기란 쉽지 않겠지.. 이 소설을 읽다보니 그의 이야기도 궁금해지기는 하다. 아무래도 우리의 인상이 좋지 않아지는건 싫은가보다. 다른책에 비해서 좀 큰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쉽게 책장을 넘길수 있는 그런 소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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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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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퓨처리즘의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SF의 걸작!!


그런데 정작 나는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이라는 분야를 잘 몰랐다. 그래서 찾아보니 아프리가(Afro-)와 미래주의(futurism)의 합성어로,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문화, 역사와 선진 기술의 발전을 융합시킨 문화 양식이라고 한다. 또한 옥타비아 버틀러는 SF계의 그랜드 데임(grande dame)으로 불린다고 한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프로퓨처리즘의 세계를 전혀 모를뻔했다.


이 책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좀 낯선 분야여서, SF쪽을 몇편 읽었었는데 잘 이해하지 못해서 선뜻 읽지를 않아서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것인지 스토리에 동화될수가 없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어느순간 내가 이 책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역시 그랜드 데임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나 할 정도로 말이다. 작품 소개를 읽어보면 이 <와일드 시드>는 저자의 '도안가(Patternist) 시리즈' 중 출간 순서상으로는 다섯 권 중 네 번째, 소설 속 시간 순으로는 첫번째 책이라고 한다. 이 말을 먼저 읽어본 순간 '아, 이러면 이 시리즈를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이 책을 덮는 순간 꼭 읽어보리라 결심했다. 그만큼 옥타비아 버틀러를 처음 만난 내게도 이 <와일드 시드>는 무척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하겠다.


타인의 육체를 빼앗는 능력으로 수천년을 살아온 나쁜 남자 '도로', 변신과 치유 그리고 불사의 능력으로 수백년을 버텨온 여자 '아냥우'. 도로는 초능력자들을 찾아내 한마을에 모은 다음,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거나 서로 교배시켜 새롭고 강한 일종의 초인 일족을 만들고 있다. 그에게 인간들은 어떤 존재일까. 그저 교배와 개량의 대상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것만 같다. 그에게 아냥우는 매우 관심을 끄는 여성이다. 그녀는 모습을 바꾸는 능력을 가진 초인이지만 도로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야생종(Wild Seed)이다. 도로는 그녀에게 '손으로 묻지 않아도 되는 자식을 주겠다'라고 제안하고 도로의 일족 마을 휘틀리로 간다. 그러나 아냥우의 생각과는 달리 도로는 그의 아들 아이작과 결혼하라고 명령한다.


습관은 깨기 힘들다. 삶이라는 습관, 두려움이라는 습관.... 심지어 사랑이라는 습관까지도. (p.385)


그저 새로운 능력을 가진 오래동안 살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위해 도로는 마치 실험하듯 초능력자들을 교배시킨다. 한참을 읽다보면 무엇을 위하여 도로는 이런 일을 벌이는지 알수 없어진다. 그는 마치 떠돌아다니는 유령처럼 본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사람 저사람 육체를 옷입듯이 건너다닌다. 그래서 더 두려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언제 그에게 점령당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냥우도 자기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복종하고 또 복종했다. 자신의 일족을 꾸려 나가던 본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그저 습관처럼 복종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도로의 노예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일, 그리고 아무도 실행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


음... 이 거장의 이야기를 어떻게 내가 뭐라 할수 있을까. 그야말로 홈빡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뿐이었다. 나에게 새로운 분야를 보여준 그녀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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