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 문학동네 청소년 13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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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은 왜 괴담에 열광하는가?

굳이 청소년이라고 국한시키는 이유는 경험에서가 아닐까 싶다. 나도 예전엔 괴담을 많이 이야기했던것 같다. 청소년 시절 " 너 그거 알아?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 괴담이야기.. 지금은 그다지 괴담이라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것 같다. 이제 중학생이 된 딸아이가 친구들과 괴담이야기를 하며 무섭다고 하면서도 괴담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어쩜 괴담은 청소년들의 스트레스 해소의 돌파구가 아니었나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내게 예전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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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아이는 사라져야 해. 그들이 첫 번째 아이를 없애고, 첫 번째 아이가 되기전에...

 

경쟁의 사회, 언제부터 우리 청소년들은 이런 경쟁의 사회에서 살게되었을까? 유독 청소년 자살도 많고, 학교 폭력도 많은 사회... 그래서랄까, 그래서 나와 경쟁이 되는 아이는, 혹은 나를 괴롭히는 아이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픈 열망에서 만들어진 괴담.. 두번째 아이는 사라진다는...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더 무서운 것은 어떤 아이가 사라지게 되면 그 아이에 대한 기억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대목에서 가장 섬뜩했던 것 같다. 단순히 두번째 아이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모든 추억을 사라지게 하는,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없애게 하는 무서운 괴담... 무엇이 그렇게 우리의 아이들을 잔혹하게 만들었을까? 메말라 가는 청소년들의 심리를 저자는 대변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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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이야기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비슷하게 사춘기의 불안과 공포를 각렬하게 호러동화로 써내는듯하다. 그래서 관심이 간다. 그건 아마도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자리인지라, 그들의 학업 스트레스는 충분히 이해할것만 같다. 나의 학창시절에서도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었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느끼는 것은 그에 비할데가 아닌것 같다. 현재 아이들은 늘어난 학습량, 과열된 사교육, 그리고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들.. 그리고 예전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현재는 수면위로 드러나 꽤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들.. 그래서 아이들은 괴담에 더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귀신이 4층 창문에서 길을 묻던 단순한 공포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경쟁자가 되는 아이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수도 없게 잔혹함을 가진 이야기로...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듯...

 

괴담.JPG < 여고괴담 中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대변되었던 그 옛날의 청소년 문제들. 1등을 강요하는 공부하는 기계뿐이라는 생각에 자살을 했던 그 이야기가 이제는 우정이 지독한 질투로 변했을 때, 서슴치 않고 그 우정을 흔적부터 없애버리고자 하는 무서운 사회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는 흔적마저 없어지는 그런일을 없겠지만 정말로 두번째 아이가 사라지는 연못은 없겠지만,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점점더 자신의 내적 갈등에서 빚어지는 것에서 남을 해쳐서라도 첫째 아이가 되고 싶다는 그런 사회상이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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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생각 : 오늘, 나에게 감사해 광수생각 (북클라우드)
박광수 지음 / 북클라우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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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 난 만화를 잘 보지않는 편이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두, 애니메이션 영화도, TV 프로그램에서도...

그렇다고 아예 안보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신문에 연재되던 이 '광수생각'을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기 기억으로는 가끔씩 우리가 아는 뻔한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했고, 시사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고, 저자 이야기가 있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부담없이 읽을수 있는 에세이가 아닌가 싶다.

 

어쩜 특히나 내가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는것 비슷한 세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이제 부모님의 보호에서 벗어나 이제는 부모님의 보호자와 또 내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야말로 가장 경제활동이 활발해야하는 세대이다. 그래서 그런지 글 중간중간 비치는 저자의 어머니의 이야기에도 가슴 한켠에 먹먹함을 느끼게 한다. 조금씩 추억을 잊어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내비치며 저자는 스스로를 위로해 나간다. 아마도 나는 그런 나이가 되었나보다. 삶에 지쳐 잠시 가던 길을 멈췄을 때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나를 제일 많이 이해해 줄 사람은 바로 나이다. 조금씩 성숙해진 나와 함께 책임감도 커졌기에 삶에 지치더라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도록 나를 위로해줄수 있는 나.. 그래서 잘 버티고 견디는 나를 위로해주며 건넬수 있는 한마디 '오늘 나에게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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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베리 나이트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 1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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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추리,스릴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잔잔하지 않았나 싶다. 살인쇼라는 엄청난 사건을 밝혀지는 과정은 그리 긴박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시체가 발견되고 그 주변을 탐문수사를 하는 과정이 왜 이리도 지루한 건지... 아마도 강한책들을 연달아 읽은터라 어쩌면 이 소재가 그다지 마음에 꽝하고 와닿지 않은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코 형사의 아픈과거를 이야기하는 부분부터는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고, 집중할수도 있었다. 헌데,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살인쇼를 보면서 왜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며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묵인을 할까? 혹은 내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에서 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왜 사람들은 그 살인쇼를 즐기는가 하는데 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근성을 갖고 있기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런 살인쇼를 벌이는 것일까?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를 장식하는 성폭행,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살인사건들.. 이제는 좀 짜증이 날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사건이 대량으로 일어나고 있다. 왜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터인데 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일까. '은둔형 외톨이'라는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질병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황폐화시키는 것인가? 날이갈수록 우리들은 나 아닌 다른이들에게 무관심하게 된다. 나로 인해 그들이 불편해하더라도 나는 상관이 없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목숨을 잃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웃도 믿을수 없고, 가족도 믿을수 없게되어 버린 사회에서 과연 이런 살인쇼가 없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예전같으면 그저 책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라고 단정할수 있는 그런 소재이겠지만 요즘 사회가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과연 저런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하지 못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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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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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하다.

이 제목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다. 어쨰서 책읽는 여자는 위험하단 말인가?

하지만 부제로 따라오는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라는 말을 보면 그럴듯도 하다.

13세기즈음이라고 하면 여성의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을 터이다. 또한 여성은 한 인격체라기보다는 남성의 소유물정도로 인식되던 시기가 아니었을성 싶다. 따라서 소위 '책읽는 여자'는 사고를 하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듯 어쩌면 남성이 주체가 되는 시기에는 당연히 위험한 존재였으리라.

 

남자는 여자에게서 지나치게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여자의 본분은 책읽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18세기에조차 이러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독서가 중요시되고 있다. 남자는 물론 여자들에게.. 아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그 중요함이 대두되고 있다. 독서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을수도 있음은 물론 세상을 바로 볼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의 문제라고 하면 그 옛날 책읽는 여자들을 경계했던 것처럼 오늘날은 청소년들에게 책읽는 것을 경계하는 것만 같다. 물론 겉모양새는 그렇지 않다. 온갖 권장도서들과 독서인증제 등을 내세우며 독서를 강요하지만 실상은 여러 사교육과 집중이수제에 치여 아이들은 좀처럼 책을 읽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독서라는 것은 스스로 원하는 책을 읽을 때 사색과 더불어 독자의 배경지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 강요로 인해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그림들을 보면 그녀들에게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는것 같다. 오히려 독서하는 여성들의 편견때문에 더욱더 열정적으로 책을 읽는것 같다. 본의의 의지를 담아 이루어내는 것만큼 정열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그 정열적인 것이 오히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무서운 열정으로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그녀들의 저력이 대단한 것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수 있는 휴식같은 독서가 그 이면에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 저력을 예상하며 독서를 하겠는가. 그저 단순하게 책읽는 기쁨에 빠져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경쟁력이 커져가는 것이다.

 

결코 책읽는 여자가 위험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세대는 스스로 책읽는 자들이 위험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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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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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빠지고 그의 소설을 읽겠다는 신념으로 그의 책을 수첩에 빼곡히 적어놓을때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었다. 추리소설에 어울이지 않게 예쁜 '레몬'이라는 이름! 예쁜 레몬속에 있는 그 시큼함, 나는 원래 신것을 좋아하기때문에 레몬이 좋았는데 과연 저자는 이 소설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궁금했다.

 

그런데 정말 레몬처럼 이 소설속 이야기는 정말로 독특했다. 과연 이런일이 실제로 벌어질까하는 생각이 든다. 뭐, 과학의 발달이 언젠가 꼭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 낼수 있겠지만 이 소설은 1993년에 발표했다니 그때는 정말로 믿기지 않는 그런 혼란의 소재일수밖에 없으리라.

 

항상 저자가 많이 사용하는 기법으로 주인공인 마리코와 후바타의 이야기가 교대로 서술되고 있다. 마리코와 후바타는 닮았다기보다는 완전 똑같다. 그녀들이 어렸을적 자신들도 모르게 헤어졌던 쌍둥이가 아닐까 의심해볼수도 있었지만 후바타가 마리코보다 한살 많다. 물론 그들이 직접적으로 만나는것은 결말부분에서 단한번뿐이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복제였다는 그래서 누군가의 분신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또다른 자아찾기에 나선다.

 

유전공학이라는 분야는 참으로 조심스럽다. 특히나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같은 기술은 더더욱 말이다. 유전자 조작에 의해 생겨나 생물체는 자칫 천적이 없어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킬수 있는 소지가 지극히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복제라는 아마도 생명연장이나 모든 것에 비추어 볼때 참으로 필요할수도 있겠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자유로울수가 없다. 과학에 대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모든 생명체보다 우위에 있겠다는 인간의 자만심일까? 인간복제라는 사안은 참으로 편안할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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