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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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드는 영광.
격변에 순응하고 소멸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영주.

그 세월을 통과하면서도 최소한의 권위를 유지하고 사그라드는 건 그 와중에도 특권이며, 이 글의 관능성, 귀족적 삶에 대한 동경.... 그런 걸 느껴보자는 걸까.
격변의 시대에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무저항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득권의 모습이 어쩌면 그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동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국민 소설이라고? 잘 모르겠다. 이걸로 드라마가 나오고,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딱히 극적 요소랄 게 있는 서사인가 싶지만... 
아름답게 영상화하려면 넉넉하게 충족하는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다.

왕정이 공화정이 되는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으나 피의 기록은 약간의 암시와 단편적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고, 존엄했던 마지막 영주의 시점으로만 서정적인 진술이 이루어져서 뭐랄까.... 존엄하게 소멸하겠다.라는 의지랄까. 

기대했던 그 시절의 서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콘체타의 서사.

뭐 이런 정도의 감상으로 마무리된다. 


- 매일 올리는 묵주기도가 끝났다. 영주는 삼십 분 동안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했다. 이 삼십 분 동안 웅얼거리는 다른 사람들 목소리가 뒤섞여 나지막이 일렁였는데, 여기서 사랑, 순결, 죽음처럼 예사롭지 않은 말들이 황금 꽃잎처럼 떨어졌다. - 9

- 그의 권위적인 기질, 어느 일면에서 엿보이는 엄격한 도덕성, 추상적인 사고에 대한 선호는 팔레르모 사회 같은 느긋한 서식 환경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오만으로, 반복되는 도덕적인 가책으로, 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경멸로 변했다. 영주가 보기에 그들은 느릿느릿 실용적으로 흐르는 시칠리아라는 강물에 표류하는 사람들 같았다. - 13

- 어머니에게는 자부심과 지성을, 아버지로부터는 호색가의 기질과 경솔함을 물려받은 파브리초 영주는 제우스처럼 눈살을 찌푸린 채 끊임없이 불만을 품고 살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이 몰락하고 가문의 재산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대응책을 강구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 14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모한 짓은 하지 않고 현상 유지에 전념하는 것? 그렇다면 얼마 전 팔레르모의 황량한 광장에 울려 퍼진 것과 같은 메마른 총성들이 의미하는 행동이 필요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총격전들 역시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 23

- "너 미쳤구나, 탄크레디! 저런 자들과 한통속이 되다니! 그런 놈들은 다 마피아에 사기꾼들이야. 팔코네리 가문 사람은 국왕을 위해 우리와 함께해야 한다." 탄크레디의 눈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왕을 위해서죠. 그런데 어떤 왕이요?" 그는 곧 진지해졌는데 그런 모습이 신비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저들이 공화국을 만들 거예요.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면 모두 다 바꾸어야 해요. 제 말 뜻 아시겠어요?" 탄크레디가 조금 울컥한지 외삼촌을 포옹했다. "곧 뵐게요. 삼색기를 흔들며 돌아오겠습니다." - 38

- 많은 일이 일어나겠지만 모두 희극이 될 것이다. 어릿광대의 옷에 핏방울 몇 개가 묻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낭만적인 희극. 이곳은 타협의 땅이었다. - 48

- 그래도 작고 초라해진 꿈을 주머니에 넣은 채 보잘것없는 위치에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다. 또 가난하지만 점잖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감탄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리고 실로 마음 깊은 데서, 거만한 그의 마음속에서 혹시 돈 치초가 살리나의 영주인 자신보다 훨씬 신사답게 행동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147

- 돈 칼로제로가 스스로 깨달은 바를 당장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면 그건 성급한 말이다. 그 후 좀 더 매끈하게 면도하는 법을 알았고 세탁에 사용되는 비누의 양에 전보다 덜 놀랐을 뿐 다른 점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세다라와 후손들은 끊임없이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계급 상승을 이루었다. 그들은 3세대에 걸쳐서 유능한 농부에서 무방비 상태의 귀족 신사로 변해 갔다. - 176

- 탄크레디는 키스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시칠리아를,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믿을 수 없는 땅을 다시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팔코네리 가문이 수 세기 동안 군림한 땅을, 지금 무의미한 반란 끝에 (그의 선조들에게 항상 그랬듯이 그에게 항복하는) 육체적 희열과 황금빛 수확이 약속된 시칠리아를 되찾은 듯했다. - 194

-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 안심이 되었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은 무엇보다 온 세상의 죽음이 될 테니까 그렇지 않을까? - 288

- 바다의 포효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 319

- 그녀의 내면은 완전히 텅 비었다. 다만 작은 털 더미에서 불편함의 안개가 피어올랐을 뿐이었다. 이것이 오늘의 아픔이었다. 불쌍한 벤디코조차도 쓰라린 기억을 암시했다. 그녀는 종을 울렸다. "아네타, 이 개는 정말 너무 벌레 먹고 먼지가 쌓였어요. 갖다 버려요."
사체가 끌려가는 동안 유리로 된 눈은 버려진 것들, 되돌려지고 싶은 것들의 무기력한 비난을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몇 분 후, 벤디코의 남은 형체는 청소부가 매일 방문하는 마당 한구석으로 던져졌다. 창문에서 던져지는 동안 그 형태가 잠시 재구성되었다. 긴 콧수염을 기른 네 발 달린 동물이 저주하듯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리며 공중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이 납빛 먼지 더미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 350

2025. mar.

#표범 #주세페토마시디람페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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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세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481
백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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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적인 세계관과 그 서사가 존재하는 시는 읽기는 가능하나 흥미가 감소한다. 너무 시인만 아는 이야기와 세계를 예쁘게, 혹은 처연하게 꾸민 느낌이랄까.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이미지와 시어들, 이야기가 나의 읽는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고.

- 단정한 기계들 깊은 밤
투명한 구름 속을 헤맨다면
서서히 지워질 수 있다면
이토록 차가운, 붉은
고깃덩어리들 그러면 나는
불 속에서 너를 지켜볼게 - 시인의 말

- 계획이 다 탄로 난 뒤에는 어떤 채도를 갖게 될까 노랗게 물든 손가락으로 너는 묻는다 - 어려운 일들 중

- 계속 쓰면 부서질 것들도 부서질 듯 모이고 참 이상하죠?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하루하루 사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병원 손님 의자 테이블 중

-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
젖은 솜처럼
해수어와 담수어의 사이만큼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 - 가능세계 중

<아홉 가지 색과 온도에 대한 마음>
초록이었을까. 그건. 눈이 내렸을까. 아니면 손과 손, 지나가는 바람 또 바람. 그런 것들뿐이었을까.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새는 지도를 버리고 숲 쪽으로 기울어진다. 빛이 많은 악기를 조심하라고 우리는 서로의 이마에 화 자를 새겨주었다.

오늘 밤 내가 할 이야기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그녀의 숨을 벗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맸던 것처럼. 부숴버리고 싶은 가느다란 뼈들. 나는 나의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갈 거야. 꿈에는 매번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사람과 얘기 나눴다. 더 어두워진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

수심은 빛을 갖는다. 새의 날개가 부러진다. 우아한 추락이구나. 붉게. 이번 사냥엔 동원될 것이 많다. 나는 네 옷섶을 풀어 최초의 발톱과 눈먼 사자의 털을 넣어준다. 그리고 상아를 깎아 만든 우윳빛 젓가락 한 벌. 빛을 통해, 빛을 통해 어두워질 것.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냄비는 뜨겁고 손과 물 혹은 손에 갇힌 손, 물에 갇힌 물. 그건 균열에 대한 이미지. 눈이 내리기 직전에는 모든 것이 자리를 바꾸지. 알 수 없는 중력, 알 수 없는 목소리. 복도를 가로지르는 칼날.

뒷모습은 증식한다. 하나둘. 그녀의 안개가 힘없이 수면을 드리웠던 것처럼.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초록일까. 몸을 관통하는 바람에 대한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무릎을 접고 그녀는 진창으로.

그때부터 이마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 작은 나무상자가 불에 덴 잠을 훔쳐갔기 때문에. 그녀가 새를 잡아왔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 소리만을 움켜쥔다. 거꾸로 처박힌 이미지들. 그것에 관여하는 음은 증발하는 성질. 불의 가장자리와 동일한 손이다.
(전문)

- 나는 슬픈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ㅓ 실은. 너무 슬퍼서 있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자꾸 구름만 봤어. 어째서 세상은 이 따위고, 어째서 새나 강물 같은 것을 보며 평화롭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하고 생각하니까. 슬픈 마음을 슬프다고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낮아지고 있어. - 종이배 호수 중
- 배운 적도 없는데 터져 나오는 첫울음처럼 마주 잡는 두 손, 흩어지는 한순간의 떨림 이름 붙이고 싶은 여러 가지 색들 뾰족한 연필을 쥐고 꾸욱 손가락을 찔러보는 책상 앞의 나날 밤은 어김없이 밤이구나. - 열대병 중

2025. mar.

#가능세계 #백은선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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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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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첫 작품. 자전적 '소설'이다.

프랑스적 문장...
이 지점을 그토록이나 좋아하지 않는데 왜 매번 자꾸 번번이 아니 에르노를 읽고 있는가.
진짜 의문임... ㅋㅋㅋ

뭐 다 좋다 치자. 스스로를 쪼개고 썰어 한 조각 한 조각 들여다보는 글쓰기라고 이해하지만,
이토록, 자기의 성적 경험과 성장과정의 좌절, 실패, 환희, 고통을 이렇게까지 가학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창녀라고 오물을 스스로 뒤집어쓰듯 생각해야 할까.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는 유년 시절의 괴로움, 품위가 없는 지리멸렬, 궁상의 가난, 자신을 너무나도 객관화하다 보니 느껴지는 과장된 불행 아닌지. 그렇게 피칠갑 된 날것의 자신을 전시하는 것이 ... 이해할 수 있으면서 한편 불편하다.

물론 그 지점이 대단한 자의식의 표현이고, 어떤 시기에는 멋진 글쓰기라고도 생각했지만...

아니 에르노의 글 중 좋았던 경험은 이 책보다는 조금 더 조금 더 콤팩트하게 집중한 글이었던 것 같다.
빈 옷장은 너무 길고 지루한 자해라고 느껴졌다.

-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묘사하거나 이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게끔 도와주는 대목은 한 구절도 없다. 탄생, 결혼, 임종, 모든 상황마다 그에 따른 기도가 존재하지 않는가. 모든 상황에 맞는 구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낙태 전문 산파의 집에 갔다가 나온 스무 살의 여자아이를 위한, 그 여자아이가 걸으면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면서 생각하는 것에 관해 쓴 구절. 그렇다면 나는 읽고 또 읽을 것이다. - 9

- 벌이다. 제삼자에게 받는 매질이다. 작고 빨간 낙태기구에 끌려간다. 이렇게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 혼자만의 잘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다. 나는 누구인가. - 13

- 이 소동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본다. 아니다, 나는 증오를 안고 태어나지 않았다. 내 부모를, 손님들을, 가게를 늘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타인들, 교양 있는 사람들, 선생님들, 예의 바른 사람들, 나는 이제 그들 역시 증오한다. 지긋지긋하다. 그들에게, 모두에게, 문화, 내가 배웠던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 - 15

- 나는 자주 오만했다. 그랬다... 나는 그랬다... 나는 모든 죄를 다 저질렀다. 목록이 길다. - 74

- 어쩌면 내 세상들 사이에 균형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표처럼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내 부모, 르쉬르 가족의 세상을 골랐더라면 더 나빴을 것이다. 인생의 반은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고,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계산대 뒤에서 감자를 팔아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며, 대학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가게와 선술집, 외상을 하는 초라한 손님들을 미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핑계를 찾고 있다.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벗어날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무엇에서 벗어난다는 것인가...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그 우스운 꿈을 꿨다. 종말이다. 아무도 없고 나만 남았다. - 98

- 나는 작은 괴물이자 더러운 여자애, 구석에서 헤매는 아이였다. - 135

- 괴물, 차라리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내게 별말을 하진 않지만, 내가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사준다. 책, 책상, 책꽂이. 어머니는 발뒤꿈치를 들고 와서 말한다. '편하게 글을 쓸 수 있게 의자가 갖고 싶지 않니? 네가 가서 직접 골라!' 책... 책... 어머니는 그것을 너무 믿어서 내게 먹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책을 아주 소중히 양손에 들고 와서 걱정스레 말했다. '혹시 이미 있는 건 아니지?' 어머니는 내 미래에, 내 지식에 기여한다고 느끼셨고 내가 책을 더럽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으며 책을 존중하라고 말했다. 그 책을 덮는 편이 어머니에게 더 낫다는 것을, 그것이 나를 그들에게서, 그들의 카페 겸 식료품점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내게 그들의 추함을 들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저 애는 책이 얼마나 많다고요! 일단 책만 원한다니까요!'라고 자랑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편안한 의자, 책꽂이, 그것은 멋도 없고 스타일도 없는 다른 가구들 사이에 계속 쌓여갔고, 아무것도 새로 산 것은 없었지만 책은 그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쌍년, 점점 더 부끄러웠다...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정교 모임에 가려고 할 때면 계속 일하는 그들과 선반, 계산, 우중충한 장면들을 생각했다.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빠, 엄마,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들, 나는 그들밖에 없다. 내 머릿속에서 커다랗게 자란 그들의 모습은 미소를 띤 얼굴로 친절하기만 한, 자신조차 잊어버리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성공하기만을 바라고 내 행복만을 원한다. 내가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꼬여 있고, 갇혀 있고, 불행하다고 해도, 분명 그들이 옳을 것이다. - 141

2025. mar.

#빈옷장 #아니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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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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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기억들을 맞춰가는 사이코드라마.

알츠하이머로 어그러진 기억들을 vr 치료를 통해 되짚어가는 이야기인데,
실종, 배신 등의 요소들이 끼어들어 불행의 이미지가 우세하다.

이렇게 어둡고 슬픈 이야기인가
결국 소중하게 살아내지 못한 삶에 대한 회한인가,
소중하게 대해지지 못해 관계의 갈증에 빠져있는 이마치라는 사람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래도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 밟아져서 다행이랄까.
노아 준영과 함께 집에서 빵을 만들어 먹고, 타로점을 치고,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그 소소한 행위들로 씻김굿을 하듯 인생을 위로하는 장면에서 애잔함을 느끼게 된다.
그 작은 행위들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새삼 자주 생각.

그리고 읽으면서 타로카드의 이미지가 있다고 느꼈는데 어? 타로점치는 장면이 나왔다. 오호..

- 이마치는 오랜만에 그것들을 마주했다. 아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끔은 그 애가 뉴질랜드나 캐나다 같은 곳으로 유학을 떠난 것 같았다. 이 모든 고통, 실패, 유실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놀라워 스스로 눈을 찌르고 싶었다. - 19

- 그녀가 스스로를 인정하는 유일한 순간은 배우로서의 순간이었다. 그 외의 삶은 모조리 실패했고,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 그 일이 그녀를 살게 했다. 일은 그녀의 전부였다. - 24

- 포도가 떨어져 밟히면 단번에 포도주가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인생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 28

-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 - 97

- 이마치는 다른 여자들도 그 애를 보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다만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매끈하던 선이 뭉개지고 지워지는 과정, 조밀하던 이목구비가 흐물거리고 늘어지는 과정, 환했던 빛이 점차 희미해지는 과정. - 213

-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한낮의 부드럽고 나른했던 물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얼음 같은 물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 발을 잡아채는 느낌에 이마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이마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그녀는 일흔 살이었고, 아직도 삶이 놀라웠다. - 365

2025. mar.

#3월의마치 #정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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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8 - 5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8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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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대하소설이라.. 이십여 권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비극적이다.

읽는 나는 이제 광복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소설 속 대한 제국의 국민들은 끝이 안 보이는 폭압의 시절을 온몸으로 겪으며 정신적으로 지쳐 우울감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단지, 몇 달의 계엄 상황도 이렇게나 답답하고 수치스럽고 낙담하는 마음이 수시로 몰려오는데, 그 시절 그들의 독립에 대한 전망이 얼마나 거대한 우울이 되었을지...(요즘 토지의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늘 이 생각이 든다... 거듭되는 같은 감상을 어쩔 수가 없다)

양현의 이야기가 주로 서술되는데, 신분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젊은 여성의 마음도 갑갑... 덕희라는 존재도.... 갑갑...

- "바보처럼 웃고 살자. 광대가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언제까지?
순철은 환국의 눈을 깊숙이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 멀지 않았다고 믿어야지. 멀지 않았을 거야." - 20

- 세월이 비정한가 망각이 비정한가, 어느 쪽일까?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잃어가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도 잃어가며 살아간다. 잃은 것의 시체가 추억이다. 그리고 마지막 잃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 188

- 언제까지 미쳐 날뛸까요?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전쟁은 끝나지요? 전쟁 미치광이 땜에 과학이 발달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과학이 발달되고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만 할 것 때문에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고 생산에 미쳐 날뛰는, 이 끝없는 낭비는 결국 인류가 전멸한 뒤에 끝이 날까요? 그래요. 군국주의는 망해야 해요! 식민지 정책은 끝이 나야 해요. 낭비와 축적의 이 병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생명이 부지될 수도 없을 겁니다. 제 사장 말대로 농춘은 거대한 군량의 저장소이며 노동자는 모조리 군수품의 부품, 뿐이겠어요?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볼 때, 지주들이 농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노동자 아닌 사람도 노동자로 공급이 될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항 없어요. 망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역사의 변혁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망해야 합니다.
오가다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 216

- 한 위인이 살다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 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영광은 밑도 끝도 없는,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사념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 304

- 이 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부심과 피해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이며 생명이다.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고 그럴 계기가 주어진다면 민초들은 다 뛸 것이야. 의병의 의기는 아직 그들에게 등불로 남아 있어. - 320

- "나는 가끔 생각하네. 동학이 좀 일찍 일어났든가, 아니면 백 년쯤 후에 일어나든다..."
홍이는 범석을 쳐다본다. 무슨 뜻이냐 묻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홍이는 답답했고 이상했다. 도대체 앞서가자는 것인지 되돌아가자는 것인지 그의 진의가 아리송했다. 범석은 슬픈 눈빛으로 홍의 시선을 받았다. - 324

-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한복이는 그런 말 할 만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었으니까. 돌밭의 질기고 못생긴 무꽁댕이 같았던 그, 밟히고 또 밟히는 길가의 잡초같이 자란 한복이, 그에게도 수십성상의 세월이 실려 이제는 제법, 몸집은 작으나마 의젓하고 사려깊은 현자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숨이 가쁘지요."
한참 만에 홍이 대꾸했다. - 345


2025. feb.

#토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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