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삶 문학과지성 시인선 598
장수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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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의 장면들이 좋았다.

진지한 냉소가 가득했다.

- 가난한 인간들의 발 사이로
내려앉은 새떼가
땅에 정수리를 댄 채
그대로 목을 누르며
모조리 죽어버릴 때

삶이 본질뿐이었을 때
그리고
누군가 결단할 때

창공이 얼마나 푸르렀는가 - 전율과 휴식 중

- 생의 기쁨과 행복이 단순히 비 때문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어

중대하고 심오한 비극이
있을 리 없잖아 - 악마는 시를 읽는다 중

- 우리, 소설처럼 죽을 수 있겠니
복잡 미묘하게, 어쩌면 단순하게
기괴하게, 산뜻하게
모두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가지
그것은 축복일까 - 카페 '편집' 중

- 적요한 눈발에 흩날리는 적의와......
속삭임......
숭고하고 짜증 나요 - 이런 질문은 가능한가 중

- 눈사람의 박살 난 머리통처럼 매일 방으로 굴러 들어오는 봄날의 빛을 보며 그래서 나는 언제 죽나 생각한다. 아침은 왜 자꾸 오는 거지? 마음이 늘 복잡하다. - 줄넘기 중


2024. oct.

#순진한삶 #장수진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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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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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장점 다 좋지만, 우선 무척 재미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장점이다.

저항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도 잘 녹여진 이야기에, 황당하게 다가오는 새롭지 않지만 새로운 생명체들의 경고가 현실과 멀지 않아 좋다.

문어, 대게, 개복치, 돌고래 등등의 무수한 해양생물들 중 일부는 실은 위장한 외계인이라는 설정과 그것이 전혀 기묘하지 않다는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무척 재밌는데, 그 뿐 아니라 외계 생명체 또한 지구에서 나름의 노동과 삶의 투쟁을 하고 있는 존재로 그려지며 때문에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는 점으로 인류를 빗대는 것 또한 훌륭한 요소다.

말이 엄청 많고 다리 한쪽이 없는 대게의 목격담이 들려왔을 때 느껴진 안도와 기쁨은 생각할수록 웃김. ㅋㅋ

- 나는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나의 천직이었다. 학생은 선생이 없어도 스스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학생이다. 그러나 선생은 학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강단을 사랑했고 교육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것이 내 존재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학교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사라져줄 수는 없었다. - 18

- "일반 시민단체가 깨끗하게 활동해도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외국 에이전트가 되는데 실제로 외국 반체제 인사가 노동조합 설립하라고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러시아 정부가 이 대게들을 가만 놔둘 것 같습니까?"
"대게는 시민이 아니잖아요?"
내가 풀이 죽어서 미약하게 반박했다. 남편이 반체제 인사라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었다. 나도 반체제 인사에 끼워주지 않은 것은 매우 섭섭했다. - 82

- 우리는 함께 구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백수십 명이 외국계 투자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노동조합을 결성하자마자 벼락같이 문자 한 통으로 부당 해고를 당한 뒤에 8년째 싸우고 있었다. 불법 파견, 부당 해고가 맞다는 판결을 받고도 회사는 함부로 내쫓은 노동자들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다들 다른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스물세 명이 남았다. 회사는 그중 지회장 한 명을 제외한 스물두 명에게 정규직 복직을 제안했다. 8년 복직 투쟁의 구심점을 몰래 따돌리고 동지애를 정규직과 맞바꾸라는 제안을 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매우 원색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작가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고려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이 답변을 순화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치아라 마"로 여약할 수 있다. 이 외국계 투자 회사는 중앙과 지방 정부의 환영을 받으며 한국에 들어와서 공장 부지도 공짜로 사용하고 세금도 감면받고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며 한국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해서 껌처럼 씹고 단물이 빠지면 버렸다. 기술을 빼내고 축적해온 노하우를 가로챈 뒤 공장을 닫거나 또 다른 외국계 회사에 팔아버리고 떠났다. 회사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회사의 진짜 주인인 노동자들은 해고의 위협과 생계의 무게 앞에서 근심과 두려움에 잠겨야 했다. 구미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벌어지는 일이었고, 구미에는 국가산업단지가 있어서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 186

- 범고래들이 인간의 선박을 공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간 때문에 위협받고 죽고 다치고 노예로 잡혔던 생물들이 모두 힘을 합쳐 인간에게 복수하기로 결의했다면 인간은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 - 208

- 이런 삶을 견디며 오랫동안 저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을 영웅이나 반역자로 기록한다. 살아남아 뭔가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운 좋은 경우에 말이다. 첫 체포, 첫 감금, 첫 고문, 첫 강제 노동, 첫 생체 실험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 226

- 세상이 맥박 치고 우주가 진동하는 그 파동을 통해서, 물속을 질주하던 빛나는 존재들은 서로에게 외쳤다.
저항하라. -236

- 이른바 '정상인'에 대비하여, 건강하지 않은 몸, 손상된 몸, 질병을 가진 몸으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다. 생각해보면 남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애초에 '정상인'이란 환상 속의 존재일 뿐이다. 현실의 인간은 다들 어딘가 손상되고 어딘가 완벽하지 못한 물리적 실체를 끌어안고 자기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존엄하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든 뭔가 요령이나 방식이 있을 것이다. - 243

- 비인간 생물들이 없어지면 인간도 죽는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태풍과 산불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니 우리는 기후 위기에 당장 대응해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지구 생물체 모두가 살아남는 길이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투쟁. - 작가의 말 중

2024. jun.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정보라 #연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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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4 - 4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4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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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식자들의 탁상공론이 당시 시대상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그게 참... 못 봐주겠는 꼴값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는 점.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한 명희가 오히려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당시 여성이 관습을 벗어나면 어떤 어려움에 처하는지 잘 보여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교육받고 계몽된 신여성들이 느끼던 자괴감이 느껴진다. 현실과 내면의 자존감의 격차가 어쩌면 오히려 신분의 하락의 감각으로 다가왔을 것만 같은 좌절.
적국이라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인실과 오가다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도 시대의 어려움.

후반부의 빌런으로 부상한 두만은 그 아집과 자격지심으로 한계까지 망가지고 있고...

아직 독립은 요원한 시절이고... 여전히 암울. 누구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는 시절.

- 그리움이란! 완성할 수 없는 인실과의 사랑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가다를 불행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인실은 일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오가다는 결혼 아니 할 것을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는 자신의 생애가 방랑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다. 불꽃과 인내의 여자 유인실. 뜨거움과 폐부를 찌르듯 싸늘하게 들이대는 칼날의 여자. 불꽃도 그의 진실이요 인내도 그의 진실. 그 여자는 위대하지 않았고 오가다가 갈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아니었다. 오히려 험한 길 괴로움의 길로 자신을 내몰아버린 여자인지 모른다. - 65

- 우월감 그 자체가 열등감이란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조선이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조선이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우리가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일등국민이다, 일등국민이다, 구두선처럼 뇐다는 그 자체부터 일등국민이 아닌 어릿광대지요. 개인에게도 품위가 있듯, 민족이나 국가에도 품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단히 훌륭한 신사가 민족이나 국가에 관해서는 사리에 안 맞는 언사, 억지, 편견, 심지어는 살인자까지 된다는 것 어떻게 설명이 돼야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자부심 아니겠습니까? 자기 존엄과 우월감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 75

- 새로운 오백 섬지기의 토지, 그러니까 최서희로부터 나온 것인데 연학은 그 경위를 설명하지 않았다. 연학이 자신도 갑자기 땅을 내놓는 서희의 진의까지는 헤아리지 못하였고. 삼십 년 전 오백 섬지기의 땅은 할머니 윤씨가, 지금 또다시 오백 섬지기의 땅은 그의 손녀 최서희가, 그러나 실정을 말한다면 그 땅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최 참판댁과는 무관의 중생들이다. 대의를 위하여 내놓은 땅도 아니었으며, 한 사람의 비극적인 인연으로 인하여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 인한 인연의 줄은 거미줄같이 얽히고 설켜, 대의를 위함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 참판댁의 수난과 이 나라 백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동질적인 것. 원했든 아니했든 간에 이들은 어느덧 한배를 타게 된 것이며, 이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강토탈환이라는 희망봉을 향해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음을 부인 못한다. - 117

- 나라가 망하는 그 틈새 일부 여자들은 달음박질로 새 교육을 받았는데 명희 너도 나도 그 부류에 속하지만 세상의 인식이 달라지기도 전에 남자가 여자의 인격을 인정하기도 전에 이런 새로운 여자들이 나왔다는 것은, 소위 신여성들인데 공중에 휭 떠버린 상태가 될밖에 없었지. 서울의 강선혜 같은 여자가 그 대표적인 거라 할 수 있겠지. 명문거족의 딸들은 기왕의 누려온 그 특권으로 해서 새로운 학문도 시집가는 혼수같이 되어 전과 다름없는 며느리 아내로 낙착이 되었지만 그럴 수 없는 계층의 여자들은 오히려 신분이 떨어져버린 느낌이야. 남의 소실 후처댁이 심지어는 광대 취급이고 소수가 사회 일각에서는 뭔가 해보겠다고 가시밭길을 걷는데 말로는 존경한다 하기도 하지만,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교육받은 여자라는 것이 보탬이 되기보다 남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는 거지. 호기심의 대상으론 시골이라고 다를 게 없어. 더했음 더했지.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을,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우쭐해서 좋아하는 속빈 신여성도 많긴 많았지만 예부터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천한 거였어. 넌 줄곧 온실에서만 살아왔으니까, 글쎄 어느 정도 견디어낼는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담을 쌓아도 제발 내 앞만 가리는 이기주의자만은 되지 말아라. 노처녀나 이혼녀나 과부나 편협하고 옹골차고 물기 없이 말라서 자기 둘레만 깨끗이 하고 자기 식량만을 챙기는 그런 습성은 밖에서 오는 핍박 때문에 자연 그렇게 된 것이지만 그것을 이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초라해져. 우리도 살아 있다는,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야. 명희야, 우리 물기 빠진 나무는 되지 말자. - 212


2024. sep.

#토지 #4부2권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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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4 - 4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4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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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자들의 탁상공론이 당시 시대상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그게 참... 못 봐주겠는 꼴값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는 점.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한 명희가 오히려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당시 여성이 관습을 벗어나면 어떤 어려움에 처하는지 잘 보여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교육받고 계몽된 신여성들이 느끼던 자괴감이 느껴진다. 현실과 내면의 자존감의 격차가 어쩌면 오히려 신분의 하락의 감각으로 다가왔을 것만 같은 좌절.
적국이라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인실과 오가다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도 시대의 어려움.

후반부의 빌런으로 부상한 두만은 그 아집과 자격지심으로 한계까지 망가지고 있고...

아직 독립은 요원한 시절이고... 여전히 암울. 누구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는 시절.

- 그리움이란! 완성할 수 없는 인실과의 사랑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가다를 불행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인실은 일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오가다는 결혼 아니 할 것을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는 자신의 생애가 방랑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다. 불꽃과 인내의 여자 유인실. 뜨거움과 폐부를 찌르듯 싸늘하게 들이대는 칼날의 여자. 불꽃도 그의 진실이요 인내도 그의 진실. 그 여자는 위대하지 않았고 오가다가 갈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아니었다. 오히려 험한 길 괴로움의 길로 자신을 내몰아버린 여자인지 모른다. - 65

- 우월감 그 자체가 열등감이란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조선이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조선이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우리가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일등국민이다, 일등국민이다, 구두선처럼 뇐다는 그 자체부터 일등국민이 아닌 어릿광대지요. 개인에게도 품위가 있듯, 민족이나 국가에도 품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단히 훌륭한 신사가 민족이나 국가에 관해서는 사리에 안 맞는 언사, 억지, 편견, 심지어는 살인자까지 된다는 것 어떻게 설명이 돼야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자부심 아니겠습니까? 자기 존엄과 우월감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 75

- 새로운 오백 섬지기의 토지, 그러니까 최서희로부터 나온 것인데 연학은 그 경위를 설명하지 않았다. 연학이 자신도 갑자기 땅을 내놓는 서희의 진의까지는 헤아리지 못하였고. 삼십 년 전 오백 섬지기의 땅은 할머니 윤씨가, 지금 또다시 오백 섬지기의 땅은 그의 손녀 최서희가, 그러나 실정을 말한다면 그 땅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최 참판댁과는 무관의 중생들이다. 대의를 위하여 내놓은 땅도 아니었으며, 한 사람의 비극적인 인연으로 인하여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 인한 인연의 줄은 거미줄같이 얽히고 설켜, 대의를 위함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 참판댁의 수난과 이 나라 백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동질적인 것. 원했든 아니했든 간에 이들은 어느덧 한배를 타게 된 것이며, 이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강토탈환이라는 희망봉을 향해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음을 부인 못한다. - 117

- 나라가 망하는 그 틈새 일부 여자들은 달음박질로 새 교육을 받았는데 명희 너도 나도 그 부류에 속하지만 세상의 인식이 달라지기도 전에 남자가 여자의 인격을 인정하기도 전에 이런 새로운 여자들이 나왔다는 것은, 소위 신여성들인데 공중에 휭 떠버린 상태가 될밖에 없었지. 서울의 강선혜 같은 여자가 그 대표적인 거라 할 수 있겠지. 명문거족의 딸들은 기왕의 누려온 그 특권으로 해서 새로운 학문도 시집가는 혼수같이 되어 전과 다름없는 며느리 아내로 낙착이 되었지만 그럴 수 없는 계층의 여자들은 오히려 신분이 떨어져버린 느낌이야. 남의 소실 후처댁이 심지어는 광대 취급이고 소수가 사회 일각에서는 뭔가 해보겠다고 가시밭길을 걷는데 말로는 존경한다 하기도 하지만,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교육받은 여자라는 것이 보탬이 되기보다 남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는 거지. 호기심의 대상으론 시골이라고 다를 게 없어. 더했음 더했지.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을,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우쭐해서 좋아하는 속빈 신여성도 많긴 많았지만 예부터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천한 거였어. 넌 줄곧 온실에서만 살아왔으니까, 글쎄 어느 정도 견디어낼는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담을 쌓아도 제발 내 앞만 가리는 이기주의자만은 되지 말아라. 노처녀나 이혼녀나 과부나 편협하고 옹골차고 물기 없이 말라서 자기 둘레만 깨끗이 하고 자기 식량만을 챙기는 그런 습성은 밖에서 오는 핍박 때문에 자연 그렇게 된 것이지만 그것을 이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초라해져. 우리도 살아 있다는,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야. 명희야, 우리 물기 빠진 나무는 되지 말자. - 212


2024. sep.

#토지 #4부2권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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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아이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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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시장 이후 정말 오랜만이다.
장편을 쓴다면 정말 좋을 텐데, 당장 읽을텐데 라는 바람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작가도 생활인이라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으나
독자는 정말로 오래 기다려온 것이다.

그 결과인 <화성의 아이>는 만족스럽다.
이래서 기다렸지 하는 으쓱한 마음까지 들 정도.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에 일말의 폭력의 가능성을 봉쇄하려는 노력이 와닿는다.
그 폭력의 가능성이 남성이라는 성별의 인간이라는 점이.

개와 로봇과 조작되어진 인류가 오렌지색 황무지에서 일구는 세상..

기억을 삭제 당하고 화성으로 보내진, 새로운 세계에서 태어나 그곳이 자신의 온 세상인,
멋대로 포획해서 우주로 쏘아 올린, 생명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화성에 보내놓고 쉽게 잊어버린 그런 존재들이 창조하는 세상은 결핍과 외로움이 가득할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천국을 꿈꾸며 노력한다는 점이 눈물겹다.
게다가 라이카는 이미 죽은 존재이므로 다치거나 손상될 일이 없다는 설정이 너무나도 마음 편했다.


- 화성으로 쏘아 보낸 열두 마리의 실험동물 중 오직 나만 살아남았다. - 9

- 장소를 묻는 건 우리가 누구인지 묻는 것과 같아. - 16

- 그다음에는 우주에서 모아온 소리를 재생해 함께 들었다. 어쩌다 우주선의 교신이 걸려들 때는 무척 기뻤다. 쌍둥이 로봇들은 자신들이 데이터를 전송하는 푸른 별에 막연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애정'이라는 말을 알았고 '그리움'이라는 말도 알았다. 그것은 끝없이 한 방향으로 데이터를 송신하는 행위였다. - 29

- 이 폐허가 더 이상 냉혹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라이카와 데이모스가 생활이라는 리듬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 35

- 내 삶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 사이의 투쟁이었다.
사랑,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 89

- 나는 뿌리를 내리다 못해 넓게 뻗어버린, 작은 나무와도 같은 우주선이 힘겹게 이륙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망망한 우주로 달아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루의 무덤과 그 주위를 둘러싼 우리만의 생태계를 다시 시작할 별이 있을까
"이곳을 떠날 수는 없어. 여기가 우리의 '그릇'이야."
라이카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 역시 동의했다. 우리는 '그릇' 밖으로 흘러넘치면 증발해버릴 물처럼 위태로운 존재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 128

- 나는 여기에 있다. - 250


2024. oct.

#화성의아이 #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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