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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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가해자들이 사건 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후일담인가..
뭐라 변명해도 범죄자들, 그들이 불안에 떨며 살아가든 말든 후회와 사죄는 알아서들 하라지 싶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가해자들이 태평 무사하게 살아가는 일이 파다하니 환기를 위한 이런 작품도 필요하다 싶다.

젠더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거기서 거기 소재가 많은 사회이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만고,
눈에 띄는 부분이라면 본격적인 불평등의 시작이 '호칭'에서 부터라는 일본의 자각.
말이라는 것이 인식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중요한 부분이다.

- 두 신참 중에 어느 쪽이 쓸만한지는 분명해졌지만, 계급이 같다면 단지 남자가 낫다는 이유만으로 십중팔구 가와베가 더 책임 있는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24

- "정말이지 구역질 나네요."
옆에 있던 시바가 실내에 다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늘 이런 식이잖아요. 결국 훌륭하신 어른들이 모여서 한다는 일이 피해 여성을 더 두드려 패는 거나 다를 게 없는 일입니까."
한순간 실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구라오카가 크게 헛기침을 하고 시바를 곁눈으로 보며,
"그래서 뭐. 요즘은 경찰도 강간에는 엄격해. 딸 가진 부모도 많고."
하고 평범한 목소리로 반론했다. "기껏 체포한 강간범을 사회에 풀어놓는 것은 경찰이 아니야. 연설이 하고 싶으면 변호사 회관이나 검찰청, 아니, 국회 앞에서 해." - 108

- "...... 당신, 나한테 뭘 시키고 싶은 건가? 원하는 게 뭐지?"
"뭐긴, 바로잡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이 세상을, 조금 더 믿을 수 있는 곳이 되도록." - 212

- 그것은 여자라는 성을 무의식 중에 낮춰보기 때문이겠죠. 성범죄라고 해도, 겨우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살인사건이었다면 체포영장 집행을 중지시켰겠습니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라는 생각을 했다면 최소한 체포는 진행했을 것이고, 그 뒤는 제대로 된 경찰의 역할대로 검찰과 재판에 맡겼겠지요. 이것은 부장님만이 아니고 정치가만도 아니고 이 나라의 바탕에 있는 우리의......"
구라오카는 제 가슴을 쳤다. "우리의, 죄입니다." - 283

2025. feb.

#젠더크라임 #덴도아라타 #이판사판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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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명언 - “○○○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시리즈 73
하지현 지음 / 위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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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얼굴을 알고 있는 정신과 의사인데 (왜지?)
아무튼 시리즈에 참여했다기에 궁금했다.

아무래도 상담을 주업으로 하는 정신과이다보면,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든 잘 정의해 주고 나아질 수 있게 하는 일을 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명언이나 이런저런 통찰의 문장을 자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 년 정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주로 잘 들어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겠지만, 나도 정리할 수 없던 나의 상황에 가이드를 설정해 주는 그런 말들도 종종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하나 마나 한? 지당한 이야기가 명언 아닐까 하는데
그런 명언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 기발한 무엇은 없다.

어쨌든 아무튼 시리즈의 초반 같은 출간되는 족족 사읽는 열의는 없어졌지만
가끔 만나면 반갑고 기분전환되는 시리즈다.

- 글쓰기에 있어 명언은 나에게 소중한 도구다. 명언의 문장은 구체적이지만 범용적 해석이 가능하다. 앞뒤에 놓인 글의 맥락을 따라 함께 움직이기에 메시지가 지나치게 퍼지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문장을 읽는 사람의 기억을 건드려 글과 접점을 형성하게 해 예상치 못한 시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명언은 익숙한 표현에서 출발하지만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친숙함과 새로움의 조화, 아는 듯 낯설기도 한 느낌이 주의를 분산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익숙한 흐름에서 놓쳤던 본질로 나아갈 문이 열리기도 한다. - 8

-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 27

- 무엇을 반복적으로 하느냐가 우리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탁월함을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 59

- 불평하지 않는다.
잘난 척하지 않는다.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 153

2025. feb.

#아무튼명언 #하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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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7 - 5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7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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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의 시간이 폭력적인 상태로 흘러가고 있는데,
토지의 인물들은 전진하지 못하는 갑갑한 상황에 갇혀있다.
그 정적인 시간 속에서 내면의 폭풍을 감내하는 이들의 울분과 고뇌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계엄 같은 개똥같은 일이 벌어지고 나니....
독립을 염원하던 그들의 그 긴 시간이 얼마나 암담했을까 싶은 마음이 더 커진다.

-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산재해 있는 산속의 무덤 세 곳을 차례차례 돌며 술을 부어 놓고 절을 한 뒤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일어섰다. 달리 할말도 없거니와 감회도 없었다. 할말이나 감회가 없었다기 보다 죽음과 이별의 냉혹함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해야 옳은지 모른다. 절대적 침묵이 냉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홍이도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 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 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넋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산새 울음, 그 소리를 들으며 산을 내려온 홍이는 상가로 향했다. - 17

-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민족은 일본의 볼모다. 일본이 망하리라는 희망적 정세 앞에서 우리가 앞날을 어둡게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소모될 것인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해서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게야. 벌써 수많은 우리 동포가 각처로 끌려나가 고혈을 짜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지원이지만 머지않아 징병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몰아낼 것이며 남경학살 때도 그랬지만 여자들은 성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조선민족을 지옥까지 동반할 거야. 참으로 무슨 힘의 가호 없이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볼모가 된 조선민족이 저들의 패망 과정에서 어떠한 환난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것도 먹물 들고 의식 있는 사람이면 대개 해보는 걱정이다. - 32

-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도 꾸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국애족, 독립을 논하지 않으면 순 날건달로 치부하지만요. 소위 운동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그 실체 이상으로 침소봉대해서 감격하고 찬양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 같은 것 아닐까요? 그것은 환상, 일종의 환상이며 기만입니다. 마른 자리에 앉아서 손뼉만 치고, 그러고는 말 없는 사람을 비난합니다.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 65

- 이중구조야. 이를테면 수구와 개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 함께 있는 거야. 함께 얽혀 있는 거야. 너도 그렇구나도 그 이중구조의 희생물이라 할 수 있어. 신여성이라 일컫는 교육받은 여성들, 그 대부분이 완상품이며 고가품일 뿐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없다. 좋은 혼처에서 주문하는 고가품이요 돈푼 있는 것들이 제이 제삼의 부인으로 주문하는 완상품이다 그 말이야. 그러면 진보적인 쪽에선 어떤가. 그들 역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여자에게 주려고 안 해. 이론 따로 실제 따로, 남자의 종속물이란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 여자가 인간으로서 있고자 할 때 인형처럼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 현실이야. 신여성이 걸어간 길은 완상품이 되느냐 망가지느냐 두 길뿐이었다. - 107

- "용기가 없는 양심... 오늘날 우리 조선인들, 특히 지식분자들이 앓는 병 아닐까요?"
서의돈은 새삼스럽게, 또 전에 없이 신중한 태도로 말을 꺼내었다.
"아무것도 되는 일 없고 이룩하는 일도 없고 자기 자신만 갈아먹는 병, 사실 총독부에 폭탄 하나 던진다고 독립이 되겠소? 길가에서 독립만세 부른다 독립이 되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용기 있는 양심이지요." - 142

- 수많은 역사, 사연이 똬리를 틀듯 둘러싸여 있는 평사리의 최참판댁, 고래등 같은 기와집,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탈환의 최후목표였던 평사리의 집을 거금 오천 원을 주고 조준구로부터 되찾았을 때, 그것으로 서희의 꿈은 이루어졌고 잃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회수했던 것이다. 그때 서희의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이었고 허망했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두려움 낯섦,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낯섦이었다. 서희는 회수한 평사리의 집에 꽤 오랫동안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다. 서희는 과거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음산한 비극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사리의 집은 의식 속에 방치된 채, 서희는 현실에 쫓겼는지 모른다. - 346

- '바로 그게 세월일 거야.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그게 세월일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시시각각 달아나고 희미해지는 것을, 새삼스럽게 서희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낀다. 묵은 상처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듯 가슴이 아파온다. - 371

2024. dec.

#토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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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글씨로 쓰는 것 민음의 시 232
김준현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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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이고 구도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관조적.

좀 흑백 같달까, 시인의 연령대에 비해 고풍스러운 느낌도.

- 나는 먼저 머리를 내밀었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나올 때의 마음을 나누자
머리칼을 넘기는 바람과 빛이 되었지 - 둘의 언어 중

- 말이 씨가 되면
어디에 묻어야 하는지
사람을 묻는 일은 여기서도
현실의 일이에요 - 현실의 일 중

< 먼 산을 바라보았다 >

내가 심지 않은 식물이 자랐다

봉숭아라고 생각하자 봉숭아가 된 식물이었다

모든 건 발목 아래부터 변심했고
나는 양말을 신었다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벗었다 양말을 벗고
흙 묻은 발을 씻었다

가고 싶은 곳과 가야 하는 곳이 다 다르고

뿌리는 긴장된 상태로
아무것도 쥐지 않기 위해
꽉 쥔 주먹처럼

죽기 전까지 펴지 않은 손에는
남은 손톱의 흔적이
절취선처럼 남아 있다

죽었다고 생각하자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사람이
어제 먹은 저녁의 흔적이 잇몸에
끼여 있고 저녁을 다 먹고도
저녁은 죽은 사람의 이와 이의 간격에 남아 있다

묘지마다 누군가가 들어 있고
누군가가 자랐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아는
누군가처럼 보일 때까지
자랄 때까지

다 피우지 않고 버린 담배처럼
나는 가위에 눌렸다
(전문)

-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는 말과 좋은 곳이 없었던 몸 사이에서
나는 적당히 존재했다 - 적당한 존재 중

- 어둠을 일곱 번 접으면 밤이 되고 어둠을 열 번 접으면 불법이니
어둠을 있는 대로 구기면 내가 될 것이다
뜨거워진 나방들이 아침마다 몸을 내려놓고 태양 속으로 숨는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해 죽는 것과
온 힘을 다해 사는 것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몸을 뒤척이자 - 연옥의 시 중

2024. nov.

#흰글씨로쓰는것 #김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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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기둥 -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42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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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길래 골랐다.

시를 잘 모르기에 사기 전에 책 소개를 꼭 읽어보고 사는데, 사실 끌리는 면이 있는 시집은 아니었다.
시라는 표현방식을 참 자유롭게 최대한 활용한 종류의 시라고 생각한다.

발랄하게 기이한 시라고 느껴지기도.

"쓸모없는 인간이 쓰는 쓸모없는 시..."라는 자조도 오히려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앙뚜안, 스트라인스, 지말... 어울리는 이들일까? 싶은.

다만 완결성이 없는 부분은 아직 나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부분.

- 벽을 앓는 모든 것은 집이 된다. 벽에 중독된 모든 것은 벽이 된다. 누구나 벽으로 태어나 벽으로 살다가 벽으로 죽듯 벽은 반복되고 벽은 난데없다 "꽃이 펴도 당신을 잊은 적 없습니다." 이런 문장은 위로조로 읽어야 할까 공포조로 읽어야 할까. - 벽 중

- 여전히
누군가 죽었다
잘 깍아 놓은 사과처럼 정갈하게 - 불면 중

- 책장을 넘기는 것은 관 뚜껑을 여는 행위이며
관 뚜껑을 열 때마다
누워 있는 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다 - 그림책의 두 가지 색 중

- 그런 식이었다 파리는
잘하건 못하건, 누군가의 주위를 서성였다
서성이다 한 대 맞았지만 죽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
노트 모퉁이에
파리가 살 만한 인간적인 삶의 조건,
이라는 구절을 휘갈긴 뒤 노트를 덮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시 쓰기는 참으로 쓸모 있는 인간의 놀이다
여름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이 가능했다 - 파리의 가능한 여름 중

- 창문을 조금 열어 빛이 바깥으로 조금 새어 나가도록 두는데
새어 나간
빛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 남는 부분 중

< 그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 안개에게 >
1
안개가 없는 마을에 정거장 같은 안개가 끼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안개를 그리워했다
안개를 낡은 속옷처럼 받쳐 입으며 그는 수치심을 던다
그는 한 꺼풀의 안개에 대해 기록한다
2
소년들은 창가에서 속손톱빛 안개를 내다본다 창문을 문질러도 안개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3
멀리 있는 것들을 미리 보여 주지 않아서 안심이 돼 사람들이 떨구고 간 손금들을 쓸어 담으며 청소부는 말한다 안개 속에서 코끼리가 섬같이 나타나도 슬퍼할 사람은 없어 애당초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수상함에 익숙해질 수밖에
4
무릎뼈를 동그랗게 오므린 채 텅 빈 욕조 속에 담겨 있는 기분이야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안개 속에서 익사해도 애도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세상은 고요히 흘러간다
5
자자, 나를 봐, 안개를 훔치고 싶다면, 쉬... 조용히 해... 이렇게 안개를 착착 개켜서 여기에 담으면 된다고... 쉬... 마늘 머리처럼 푸석한 노파가 오래된 장롱의 문고리를 매만지며 말한다 그녀는 미쳤지만 미치지 않았다 안개에 약간의 과거를 떠넘기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다
6
아무 말이 오가지 않는다 누구나 각자의 과거를 기다리며 안개를 버티는데 그들은 한 올 한 올 풀려나가는 바지의 해진 밑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모두가 발소리를 죽이며
7
안개 속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굴뚝을 내려 놓고 숨을 고른다 그들은 타인의 굴뚝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이들은 발꿈치를 들고 총총히 뛰어간다
8
그대 떠나 버리고 나는 목 놓아 울었네, 울 때마다 그림자만 흥건해져요 안개 속에서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한 유행가가 흘러나오면 그제야 사람들은 누락된 굴뚝이라든가 빠진 손톱을 찾아 나선다 그건 모두의 이중생활일 뿐 밑줄이 사라져 핵심을 알 수 없는 손바닥과는 상관이 없다
9
안개 속에서 책갈피 같은 코를 가진 남자가 복권을 판다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는 요행을 바라서가 아니라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지 그런 점에서 복권과 안개는 닮았어 안개 속에서 남자는 복권을 나눠 주고 사람들은 녹슨 동전으로 은박을 긁어낸다
10
너덜너덜해진 안개의 끝 피에로 분장을 한 피에로가 딱딱한 오줌발로 안개를 적신다 그는 오줌을 피해 바짝 엎으린다 안개의 밑창은 서늘하다
(전문)

- 책을 펼치자 문장들이 이중 매듭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고 있다. 무의미한 움직임만을 수년간 반복하는, 바위에 깔린 벌레들처럼.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 오직 한 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든,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 - 멀리서 온 책 중

- 초현실주의는 불가능하며
현실이 현실을 무력화시키는 것만이 가능하다 - 프로타주 중

- 난쟁이들이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원하는 책을 얻는다. 다시 기둥을 쌓는다. 난쟁이들은 책을 때리고 책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다ㅏ. 그럴 만도 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 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 책기둥 중

2025. feb.

#책기둥 #문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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