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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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이야기하는 소설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에 더 매료되는 내가 되었다. 이것이 감상.

- 리포터의 목소리에서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를 전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마저도 포함하는 생명의 기운 같은 것. 그런 어마어마한 생기에 비하면 나란 인간의 외로움이란 참 하찮은 것이었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도 어떤 길은 소통이 원활할 것이고, 어떤 길은 자동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서 있을 것이다. 한 사람쯤 사라졌다고 해서 이 세계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외롭다기보다는 고독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 9

- 도박사들의 충고에 담긴 교훈은? 진실과 짐작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짐작은 대개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 쪽에 가깝다. - 34

- 꿈의 재료는 지도 위에 긴 선 하나가 바다를 스치듯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수면안대를 찬 것처럼 우리 앞으로는 어떤 풍경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는 희망을 선물하러 찾아올 외계인도, 우리를 둘러싼 기억들을 없애줄 옛 애인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가난했고, 또 적적했다.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때 우리는 가고자 해도 갈 길이 없는 진퇴양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을 하기에는 청춘이 너무 아까웠고, 새로운 인생을 원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아깝고 부족하고, 아깝고 부족하고. 그렇게 해가 뜨고 해가 졌다. - 39

- 우린 앞다퉈 자기 이야기만 했다. 떠들어대지 않을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도 우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또 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게 우리가 아는 외로움의 정의였다. - 71

2022. jun.

#7번국도revisited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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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엔딩 크레딧 이판사판
안도 유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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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피어의 이판사판 시리즈, 딱 열권을 목표로 하는 점이 매력적이라 열권쯤이야 다 읽어야지.라고 생각한 시리즈.

인쇄회사의 이야기이고, 얼마 전에 읽은 [배를 엮다]라는 책과 비슷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맡은 일을 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치는 것이 꿈인 톱 세일즈맨 나카이도와 인쇄가 모노즈쿠리로 인정받는 날을 맞이하는 게 꿈인 우라모토가 대비되어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라모토가 좋은 인쇄영업맨이 되고 책을 만드는 일은 소중하다는 이야기다.

인쇄회사가 굳이 모노즈쿠리의 경지까지 가야할 것까지 있나 싶겠지만, 그만큼 책임을 담아 일을 한다는 지점은 좋은 자세니까.
그런 조금 촌스러운 감상으로 이 책에 빠져들다 보면 하다하다 인쇄 가동률이 저조한 인쇄기까지 응원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 “충분히 협력하고 있어. 우리는 하루하루 사고 없이 작업을 마치는 것만으로도 벅차. 일개 영업맨의 개인적인 열정에 휘둘릴 여유가 없다고.”
그날 맡은 작업을 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치는 것.
나카이도가 설명회에서 말한 꿈 이야기가 생각난다. 간행물 하나하나를 무사히 납품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노즈에의 말을 들으니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30

- “요즘 영업부의 답답한 일처리 때문에 죽겠어요. 특히 우라모토가 가져오는 일감에 휘둘려서 부하들도 힘들어합니다.”
“그 아이 말이군. 저도 나름 애쓰는 것 같던데. 왜 그렇게 싫어하지?”
“이상을 말하니까요.”
스스로 놀랄 정도로 냉큼 대답이 나왔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이상을 말하는 놈들은 믿을 수 없어요. 독선적이고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남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니까.”
지로 씨는 “자네 말부터가 꽤 독선적인 것 같은데”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 119

- “엄마...... 고마워.”
“갑자기?”
“별일은 없지만...... 고마워.”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별난 아이네.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 알았다.”
엄마도 고개를 깊이 숙였다.
사실은 ‘책이 있는 인생을 만들어 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부 말로 해 버리면 도리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고마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 292

- “모로미자와 류이치의 30주년 기념작 <사이버 드러그>는 이 1호기로 인쇄했다. 판권에는 이 1호기 이름과 노즈에라는 이름도 나온다, 라고.”
“설마. ‘인쇄소 도요즈미인쇄주식회사’, 이렇게 나올 텐데.”
“도요즈미인쇄라는 글자 너머에는 전체 직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느느 거야. 판권은 책의 엔딩 크레딧이니까.”
서점에서 책 판권만 살피고 다니는 아들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렇군. 멋진 발상이야. 그렇게 생각해서 나쁠 건 없지.” - 350

- 책이 점점 안 팔리는 세상이라 인쇄업계는 가라앉는 배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라앉더라도 내가 현역으로 있는 동안은 절대로 가라앉히지 않겠다. 그런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447

- “꿈은, 내가 맡은 일을 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치는 것. 그리고 인쇄기 가동률을 유지하는 것.”
“당신이 해 온 말과 정반대잖아.”
“아니, 같아요.”
우라모토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내가 맡은 일은 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치고, 인쇄기 가동률을 유지한다. 그 축적 위에서 인쇄 회사도 모노즈쿠리를 할 수 있을테니까요.”
높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씩 가시화해 가는 것은 결국 하나의 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럼 나는 우라모토 씨의 말을 빌릴까. ‘인쇄 회사는 모노즈쿠리이다’, ‘책을 찍는 게 아니라 만들고 있다’라고.”
“전에 말씀하신 것과 정반대 아닙니까?”
“이상과 긍지가 있어야 눈앞의 일도 힘 있게 할 수 있지.”
무사히 책이 완성되어서 다행이다. 마무리가 훌륭해서 다행이다. 작가가 기뻐해 주어서 다행이다. 수주 증가를 바라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제본소 젊은 사장이 기뻐해 줘서 다행이다. 나카이도와 서로 인정해 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오늘은 소소하나마 여러 가지로 다행이었다. - 465

- 그렇다. 우리는 책이라는 필수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512

2022. sep.

#책의엔딩크레딧 #안도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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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2-05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배를 엮다>와 비슷한 느낌이라니 읽고 싶어요.

hellas 2023-02-05 12:04   좋아요 2 | URL
아무래도 책과 관련되고 특유의 회사문화 분위기 뭐 그런게 복합적인데 재밌게 읽었어요:)

북깨비 2023-02-05 1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리뷰들이 다 좋아서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보관함에 넣었다가 아직도 안 사고 있는데 헬라스님 별 다섯개를 보니 또 솟구치는 물욕을 어쩌나.. 😭

hellas 2023-02-05 12:03   좋아요 2 | URL
사실 큰 기대 없었다가 성실한 캐릭터들 보다보니 마지막엔 좀 울컥하기도 했어요. 예상외 감동을 준 점이 별점에 큰 영향을;)

blanca 2023-02-05 12: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울컥해서 막 책 덮고 눈물 흘리고 그랬네요. 반가운 리뷰입니다.

hellas 2023-02-05 12:45   좋아요 3 | URL
정말이지 감동받아버려서 다 읽고 약간 당혹스러웠어요 ㅎㅎ
 
디미티 아줌마의 죽음
낸시 애서턴 지음, 이현경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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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라노말 미스터리... 맞는 말이긴 한데 그보다는 할리퀸로맨스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나는 지치고 상처받았고를 시종일관 시전하다 좋은 이성이 다가와 상황이 안정되고 나는 너한테 반하지 않았어와 자격지심에 홀로 급발진를 자주 시전하다 결국 사랑에 빠지고마는 이야기라서 그렇다.

선대의 여성들의 웃음이 계기가 된 우정도 좋고, 디미티 아줌마의 영혼이 조종하는 마술같은 집도 좋았지만, 역시 주인공의 매력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그게 좀 안맞았던것 같다.

디미티 웨스트우드 같은 유령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면 그건 좀 즐거울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표지가 참 귀엽고 이쁘다.

- 디미티 아줌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아줌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아줌마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으르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7

- 이해하시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아이들한테는 해 주지 않는데, 어쩌면 해 주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군요. 전시에는 모든 게 산뜻하고 솜사탕 같지는 않다는 걸 아이들도 아는게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 137

2023. jan.

#디미티아줌마의죽음 #낸시애서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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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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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북페어에 갔다가 관심있는 출판사의 부스에서 구매한 책이다.
트라이벌 타투를 한 여성이 표지여서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 부스 직원들의 추천으로 고른 책이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 분께 고마워하고 있다.

흥미롭고, 잔혹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조금의 희망도 없다. 작가의 말 처럼 나도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독했을지도 모르지만.

- [저주 토끼]는 쓸쓸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출판사에서는 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이 단편집을 내기로 했다는 다분히 진취적인 의견을 준 적이 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작품을 쓸 때의 의도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 작가의 말

2022. may.

#저주토끼 #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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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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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편찬에 진심인 사람들.

사내의 입지가 좁다고는 하지만 적소에 인력을 배치해주는 회사조차도 자금을 핑계로 압박을 주긴 해도 결국 한마음인 것 아닌가 싶다.

말에 대한 집념으로 일상 생활에선 좀 툭 튀어나오는 인물들이지만 서로에게 긍정의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사회생활 환타지이기도.

대도해를 편찬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의 중심에 마지메가 있지만, 아라키, 니시오카, 마쓰모토, 사사키, 기시베, 다케 할머니와 가구야, 고양이 도라까지 모두 소중하다.

어쩔수 없이 오그라드는 일본 스타일 구식 감동의 물결을 몰아쳐대지만, 그 조차도 나중엔 괜찮아졌다.

- 누군가의 열정에는 열정으로 응할 것. - 179

2022. may.

#배를엮다 #미우라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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