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절하게 말해야 할 사건과 시대가 있는 작가의 답답한 마음이 느껴진다.

눈을 감을 수도, 마냥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는 당혹과 혼란.
그러다가 기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야 마는 사람.

굵직하게 우리에게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 역사의 순간들에 대해 말하고 또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고 나아지려고 하는 사회를 바라지만,
그게 가능할까 싶은 절망감이 더 크다.

작가 역시 그런 절망 속에서 여전히 힘겨워 하고 있는것이,
사진을 보고 글을 읽는 나에게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된다.

- 사소한 곳에 갈 때도 사진기를 손에서 떼지 않았던 시절이 있다. 뭐 그리 보고 담고 싶은 게 많고, 사진이 소중했을까. 사진기를 좀처럼 손에 들지 않는 요즘의 나로선 기이할 뿐이다. 그때의 지나친 열정이. - 8

- 어떤 눈은 말을 한다. 입으로만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귀로만 말을 듣는 게 아니다. 눈이 하는 말을 들으려면 눈길을 마주쳐야 한다. 사진기 뒤에 숨은 채로도 눈맞춤은 벌어진다. 말하는 눈을 본 탓에 나 역시 내 눈으로 본 것에 대해 말하려 했다. - 9

- 나의 ‘보는 일’은 목격일 수도, 응시일 수도, 관찰일 수도, 방관일 수도 있는데, 펼쳐진 장면의 성격에 따라 나의 ‘보는 태도’와 ‘보는 방법’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각이란, 그저 보는 것 만은 아니다. 시각이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사고의 근간이 되는 정보가 시각을 통해 운반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점점 더 시각 정보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라 말할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그저 바라볼 뿐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자라는 풍경을 바라본다. 타자는 나를 비추는 오묘한 거울을 가진 자다. 그러니 그저 바라볼 뿐인 행위란, 실로 불가능할 수밖에. - 88

- 이 사진이 내 귀에 속삭인다. 이곳은 밀양이야. 하지만 평택 대추리야. 실은 제주 강정마을이지. 무엇이 사실일까. 삶이 뿌리 내린 터전을 빼앗고, 살갑던 공동체를 이간질해 찢어놓으며, 오도가도 못하게 가로막는 국가의 풍경을 거듭 본 탓에 낯익지만, 볼 때마다 낯설다. 숲을 가로막고, 들녘을 가로막고, 바다를 가로막는 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숲과 들녘과 바다를 벗해온 작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더 큰 공동체의 안보와 미래를 위한다는 논리는 얼마나 해괴한가. - 114

- 왜 그렇게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질타를 듣곤 했다.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궁금함으로 보는 거였는데도. 내가 품은 의문을 내 안에서 소멸시키지 않고 나누는 것을 내 작업의 본령으로 삼아왔다. 역사는 자주 반복되는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히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작은 긍정 하나는, 역사의 순환과 전진이 ‘의문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아닐까. - 224

- 다시 10년이 흐르고, 또 10년이 흘러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는데, 오늘 나는 좋은 정치 따위나 좋은 사진 따위는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왜 이래야 하는지, 이런 무도한 국가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은 여전히 머리와 가슴 속에 맴돌지만, 그리하여 발길은 여전히 ‘그곳’을 향하지만, 이제 내겐 우리가 나아질 거란 기대는 없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나빠지고 있는지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거울을 내밀 뿐이다. 의문을 버리지 않을 뿐이다. 파국이란 멀리 있는 시공간일까. 아직 당신에게 도달하지 않았을 뿐 이미 곳곳이 파국이요, 시시때때로 파국이었다. 내가 보았던 것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사진을 믿는가.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다루되,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250

2023. feb.

#말하는눈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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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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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당위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들은 쉽게 진저리가 나거든요. - 56

- 우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예상치 못한 채 살아가지만 그렇게 해서 조금씩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믿는다. 나중에 박발 할머니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오늘의 당혹스러움으르 내일로 미루는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떤가. 그런데도 기꺼이 겪어내며 살겠다면, 지금의 무게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지만 알 때까지 분투할 자세만은 취하고 있겠다면. 나쁘지도 이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 작가의 말

2022. apr.

#나의사랑매기 #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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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싶은 기분 - 요조 산문
요조 (Yozoh)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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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으로의 요조는 사실 잘 모른다.
에세이스트로의 요조는 꾸준히 읽었다.

실제와 갭은 분명 있겠지만, 가만가만한 문장이 좋아서다.

유일하게 기꺼이 접촉하여 만짐 이상 부비적대는 대상이 내 고양이 말곤 없지만 짧은 글들 속의 무해하고 귀여운 문장들을 만지고 싶은 기분이 들어 책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 익숙하게 싫어하던 대상에 낯설레 임해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묘연해질 때가 있다. - 5

- “저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실패인 것 같아요.”
참여자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자리엔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힘내세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앞으론 다 잘될 거예요. 기도할게요...... 떠올려볼 수 있는 모든 위로의 말들이 얼마나 비루하기 그지없는지를 새삼스럽게 자각한 사람들의 절망이 만들어낸 침묵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실패를 읽은 다른 사람들이 내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나 역시 다른 실패 주체들의 몸을 만지면서 함께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굴렀다. 그때 타인의 실패 앞에서 내가 끝내 찾지 못했던 언어의 실마리가, 바로 이 부근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9

- 어떤 공포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엄습한다. - 20

- 제법 공을 들여 얼마간 생각하고 난 뒤 나사의 탐사선이 찍은 목성의 표면으로 결정했다. 얼마 전에 웹 서핑을 하면서 우연히 보았다가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탐사선의 촬영 해상도도 점점 좋아지는지 목성의 표면은 내 기억보다 한층 징그럽고 기괴하고 불쾌했다. 그래, 못생김의 마스코트로 적격이다.
생각난 김에 다시 한번 검색해보려고 나도 스마트폰으로 목성을 검색해 한 블로그에 들어갔다. 거기엔 목성의 징그러운 사진들이 여러 장 나열되어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사진들의 맨 밑에 아주 짧은 문장을 발견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무 아름답다.’
웬일인지 나는 또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 151

2023. feb.

#만지고싶은기분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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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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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과 해솔의 사랑은 저주일까.
돌고 돌아 시간이 한참을 흘러도 끊기지 않는 인연이란 사실 너무 징그럽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연의 이야기는 수목 드라마 같은 이미지를 그려보게 된다.
어린 연인의 분노가 스스로를 옭아매는 저주가 되고,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연 성장인가?) 이야기.

- “아무 생각도 없어?”
도담은 답답해하며 짜증을 냈다.
“넌 뭐, 무슨 생각이 있는데?”
해솔이 맞받아쳤다. 짙은 물안개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벌을 주자.”
도담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어떤 말은 혀를 통해 입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의식을 붙들어 매고 돌이킬 수 없는 힘을 가진다. 자욱해진 물안개 너머로 가파른 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고 댐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 59

-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 100

- 두 사람 사이를 너울거리는 파도에 서로의 얼굴이 보이다 말다 하며 어른거렸다. 도담은 해솔에게 가까이 가닿고 싶었다. 그때 조류에 밀려나 두 사람이 멀어졌다. 둘은 물결을 가로질러 서로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해솔과 도담은 손을 뻗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 296

2023. jan.

#급류 #정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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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본 이야기
구병모 외 지음 / 미디어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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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솔로지가 넘쳐나니 예전처럼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들어 그래서인지 다수의 작가들의 문집은 거의 구매하지 않는다.

이 책은 구병모, 권여선 작가라서 선택했었던 것 같다.

- 조금의 과장도 없이 호흡 한 번을 놏히면 줄 위에서의 삶은 끝장이라는 걸, 올라간 자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무결점을 추구하는 동시에 끝장에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는 것이 쇼의 본질이자 즐거움의 원천이다. - 11, 소여, 구병모

- 우리는 밤을 통과한다. 그러나 밤이 우리를 통제한다. 우리는 강과 언덕, 산과 호수를 지나 한 번 안개를 지나쳤고, 다시 한번 안개를 지나친다. 드물게 선 가로등 불빛에 안개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스포트라이트처럼 희끗희끗 드러난다. 안개는 우리를 비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관객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유형의 밤을 겪어왔다. 차가운 밤, 칠흑과도 같은 밤, 끈끈한 밤, 더운 밤, 투명한 밤, 위험한 밤, 위협적인 밤. 우리는 자동차 소음을 음악으로 덮고, 음악이 시작하거나 끝날 때, 각자 갖고 있는 밤의 목록을 공유한다. 두려운 밤, 덮치는 밤, 부딪히는 밤, 갇힌 밤, 취한 밤, 도망치던 밤, 이불로 머리를 완전히 덮던 밤, 초침 수를 헤아리던 밤, 밝은 밤, 희망찬 밤, 별의 폭발을 지켜보던 밤, 시간이 없던 밤, 손에 땀을 쥐던 밤, 오랜 시간 기다렸으나 하나의 유성도 보지 못한 밤, 추월하는 밤, 가속하는 밤. 그 밤들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리고 밤과 밤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지? 우리는 밤과 함께 흘러간다. 곡선 도로에서 무심코 속도를 높이다 당황하지 않고 가속페달에서 발을 뗀다. 밤의 정지. 검은 얼음처럼 단단하던 밤의 밀도가 흐트러진다. - 150, 헤엄치는 밤, 한유주

2023. jan.

#들어본이야기 #구병모 #권여선 #듀나 #박솔뫼 #한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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