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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의 소설
정세랑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8월
평점 :
사랑하는 작가 정세랑의 새 책.
미니픽션이라기에 조금 아쉬웠지만 안살 도리는 없다.
늘 다정하고 현대인에게 결핍된 건강한 이야기를 주는 작가이기 때문에. 거기에 더해 반짝이는 문장과 좋은 재료를 잘 다루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듯, 짧은 분량의 소설이라 직설적이고 빠르다.
책을 다 읽는데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정세랑의 장편이 기다려졌다.
- ˝너는 여기 계속 있기에 너무......˝
˝너무 워?˝
아라가 다시 물으면 말하던 사람은 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아라는 형용사의 빈자리를 좋아했다. 그것은 기대감 같은 것. - 11
- ˝......과찬하자. 아주아주 조금만 과찬해버리자.˝
내가 말했다. 과찬해서, 이 매력이 애매한 원두에게 기회를 주자. 더 나아질 기회를. - 20
- 변덕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현실 세계의 연애가 참혹할 때 그것에 대한 환상을 써도 되는가 하는 고민에 깊이 빠진 상태였다. 세상이 드물게 나쁜 사람들과 평이하게 좋은 사람들로 차 있다고 믿던 시절엔 마음껏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달콤하고 달콤해서 독할 정도인 소설을. 아라는 사랑을 믿었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는 관계를. 모두가 무심히 지나친 특별함을 서로 알아봐주는 순간을. 연애소설을 사랑했고 연애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3일에 한 명씩 여자들이 살해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다음에, 성매매 산업의 거대하고 처참한 실태를 알아버린 다음에, 화장실에 뚫려 있던 구멍들이 뭐였는지 깨달은 다음에, 디지털 성범죄 추적 기사들을 내내 따라 읽은 다음에 아라 안에서 무언가가 죽었다. 죽어버렸다. 대단한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인으로 제대로 기능하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시민이기만 해도 로맨스는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스스로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아라는 이 사회가 연애소설의 기반을 흔들 만큼 역겹게 뒤틀린 것에 깊게 탄식했다. - 29
- 여성 창작자들만 살얼음판을 걷듯 윤리에 대해 고민한다고 투덜대는 동료들도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남성 창작자들이 해온 것처럼 이런저런 금기 위에서 제멋대로 데굴데굴 구르고 뭉개면 왜 안 되느냐고 말이다. 데굴데굴하는 상상만으로도 위안은 되었지만, 더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걷지 못하면 버려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여성 창작자들에게 한층 가혹했다. 그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금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발을 옮겨놓을 수밖에. - 33
- 책의 말미에 로알드 달이 자주 했던 말이 써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친절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것 중 최고의 자질이다. 용기나, 관대함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더.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그의 책은 친절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현정은 울다가, 사후 세계가 있다면 로알드 달이 먼저 건너간 세계일 거라고 생각했다. - 207
2022. aug.
#아라의소설 #정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