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이피스트 시인선 7
김이듬 지음 / 타이피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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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딘지 어리둥절한 내가 벗어나기 힘든 현실과 시선들과 나만의 관념 속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듯,
그렇게 부재했던 자아가 불현듯 다가와 나를 직시하는 그런 느낌으로 읽었다.
나를 조금 내버려둔 채, 남도 조금 내팽개쳐놓고, 그러고선 마음에 걸려 하는 그런 분위기.

양육자의 부재의 느낌도 강해서, 더 쓸쓸하다.

- 사랑했지만 죽은 강아지가 목걸이 방울 소리 내며
저승의 문턱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네가 믿고 있듯이
잠시 등장했던 이를 빼놓고는 생의 서사가 구성되지 않는다면
그 잠시가 영원이라면
혼자 갈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된다 - 키스 앤드 라이드 중

- 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를 본 적 없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을 따라간 적 없지만
반시계 방향으로 태양 주위를 도는 나의 행성을 떠난 적 없지만
언젠가는 내 삶의 방향을 바꾸리라
문을 박차고 나가 극지 쪽으로 달음박질치리라
생각만으로 맥박이 빨리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일방통행로 중

- 아주 축축한 날이었다
우리가
갈대를 보러 갈 이유가 없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마음이 늪이었다 - 시골 도둑 중

- 나는 모자라지만 씁니다. 몸을 기울여 씁니다. (...) 깊숙이 배치해도 작게 압축해도 남아 있어요. 잃어버린 것들이 더 오래 남네요. 누구든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슬픔의 질량을 진단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나보다 조그맣다, 사소하다든가 잊어라, 용서하라, 위로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잠시나마 내 노래를 들어 줘서 고마워요. 누군가 당신에게 어린아이를 이 세상에 던져 놓고 떠난 거라고 해도, 무책임하다고 해도 그런 말에 상처받지 마세요. 당신의 세상은 물결쳐 오는 파도 너머 봄날 같기를. 때때로 그 나라에도 폭풍우 치겠죠. 새들이 당신 머리 위로 날아간다면 내가 보내는 사랑인 줄 아세요. - 154

2025. jan.

#누구나밤엔명작을쓰잖아요 #김이듬 #타이피스트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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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체육과 시 일상시화 5
김소연 지음 / 아침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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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인 김소연의 시와 산문.

알던 시인의 마음을 한 번 더 보게 된 것 같다.

시보다는 산문이 많은 점도 색달라서 좋았다.

- 우리가 우리조차 알아보지 못할 때
누군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
걷는 일을 가장 잘할 수밖에 없는 때는
마음이 괴로운 경우이다. 마음의 응어리들이, 괴로움들이, 번잡한 걱정들이, 끝없이 불길하게 이어지는 번뇌들이,
먼 데로부터 차곡차곡 도착해 온
울분들이
온몸에 꽉 차 있을 때마다
나는 오래 걸었다 -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중

- 나의 애도는 시작도 못 했다. 우리의 애도는 시작도 안 했다. 애도는 많은 경우 종료되지 않는 세계이다. 영원히 현재에 있다. 해가 바뀌고 또 해가 바뀌고 다른 참사와 재난이 닥쳐도, 오히려 새로운 재난 앞에서 되살아난다.
우리는 올바른 애도를 하고 싶다. 그릇된 삶 속에서도. 올바른 애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도. - 기대어 왔던 것들에 기대어서 중

- '정치적'이라는 말도 '투쟁'이라는 말도 '여성의 시하기'를 가두는 면이 있다. 무엇보다 '시'가 가리키는 방향과 어긋나는 면이 있다. '정치적'과 '투쟁'이라는 말 속에 깃든 '승리'에 대한 열망이 여성의 시하기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의 시적 발화의 위치성은 '승패'라는 남성 서사의 핵심 요소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빚어지는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를 함께 살아내고자 하는 삶의 실천으로 파악되어야 하지 않을까. - 우리는 뭔가를 꾹 참으면서 중

- 2. 두려움과 고통에 대하여 흔쾌하기. 온전히 흔쾌해질 때 찾아오는 자유로움으로 더없이 고요하기.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서늘하다고 느끼기. 너무나 서늘한 나머지 을씨년스럽다고 느끼기.
(...)
15. 멜랑콜리, 히스테릭, 광기. 이런 말들로 규정 되어온 여성의 시는 광기 그 자체가 현실임을 항변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광기의 몸짓을 빌리지 않으면 설득이 불가능한, 두텁고도 정교한 이 폭력적인 세계를 가리키고 드러내기 위한 입장이기도 하다. - 단상 1. 열 아홉 조각 중

- 우리의 언어는 온갖 사물을 통해서 다른 사물로 이동하고, 다른 사물을 경유해서 이 세계를 날렵하게 한 바퀴 돌아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 한 바퀴의 동선을 커다랗고 시원한 포물선을 그린다. 이 포물선을 마음으로 좇으며 이 세상을 한 바퀴 돌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는 실은 제자리가 아니다. 같은 자리이지만 다른 세계가 된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다른 세계로 도착하는 일. 언어가 발 없이 행하는 모험은 이런 일을 겪는 경험이다. 쓸모가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쓸모가 너무 많아서 아름답다. 쓸모가 있으려고, 아름다우려고, 애를 쓰지 않아서 더 아름답다. - 집에서 해변까지 중

2024. nov.

#생활체육과시 #김소연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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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헬렌 던모어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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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남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 시절 전후의 여성.
전쟁의 트라우마는 깊어지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어느 것 하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의 불안한 심리가 잘 드러나 있다.
신경증적이면서도,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는 자의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서, 과연 우연히 발견된 외투가 어떤 사건으로 이어지나 긴장하며 읽다가 좀 김이 빠지는 면이 있다.

으스스한 무드를 끝까지 가져가진 못했고(호러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타인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가 성장하는 이야기에 그친다는 아쉬움이 있다.

- 가르치는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녀가 속으로 말했다. 아니면 공무원 시험을 볼 수도 있었어. 그런데 넌 필립과 결혼하는 걸 선택했지.
(...) 저 광활한 풍경 어딘가에서 오전 진료를 마친 필립이 왕진을 돌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 22

- 그녀는 생각했다. '만족'은 정확한 단어가 아니었다. 필립은 자기 인생에 속해 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물론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의 바깥에 있는 것 같을 때가 너무 많았기에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81

- "장 볼 게 많았고 푸딩을 만드는 데 오래 걸렸거든. 내가 워낙 대칙 없이 느리잖아."
"점점 빨라질 거야."
"그럴까?" 그녀는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몹시 진지했다. 그는 그녀가 동네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고 그녀의 능력을 활용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요리를 배우기를 바랐다. - 100

2024. nov.

#외투 #헬렌던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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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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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쓰기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여러 소설들을 빌어 말하는 창작, 인간의 생에 대한 고찰.

신성과 경이에 대해서도 여러 번 말하지만, 그런 경험이 그다지 없었기에 그 점은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물은 젖었다. 같은 말 같기도 하지만,
신중하게 써 내려간 작가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일면 고요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 어떤 책을 읽거나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무언가가 불러일으켜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으기', 즉 생각하기입니다. - 6

- 가로질러 올라가는,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 71

- 말의 변질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한 시기에 존중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던 단어가 다른 시기에는 무시하기 위해 쓰인다. 한곳에서 존중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 다른 곳에서는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다. 말은 자율적이지 않다. 말의 운명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니까 말의 타락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말은 타락할 줄 모른다. 스스로 숭고해질 줄 모르는 것처럼 타락할 줄도 모른다. 타락한 사람들이 말을 더럽힐 뿐이다. 이렇게 쓰이던 말을 저렇게 쓰면 그 말은 더 이상 이런 말이 아니게 된다. 적어도 그런 뜻으로는 쓰지 못하게 된다. - 102

- 불합리한 충동의 에너지가 항상 더 크다. 사랑은 오랫동안 쌓아온 견고한 합리의 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혐오와 차별은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그 안에, 주로 궤변의 방식으로, 튼튼하게 무장하고 있어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적에 대한 혐오나 조롱의 말은 그와 그의 동료들의 사기를 북돋울지언정 허물로 지적되지 않는다. 장려될지언정 제어되지 않는다. 반성과 성찰은 그 논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데, 합리적 설득을 통해 그 튼튼한 논리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불합리한 충동이며 부조리한 일격인 사랑밖에 없다. - 105

-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 - 251

2025. jan.

#고요한읽기 #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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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사람과의 통화 창비시선 509
김민지 지음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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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이고 후각적인 이미지들이 많았다.

한 권을 천천히 잔잔하게 읽었다.

- 죽음을 오랜 잠이라 여기는
깨어나지 못한 슬픔으로 산다 - 염소가 열리는 나무 중

- 유익하죠 인간은
모든 이야기 끝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기 고독의 최전선에도
간간이 인간만 죽으려 하니까 - 외따로이 중

- 태어난 걸 축하해. 아무도 없을 때 홀로 어느 방바닥과 천장을 쓸고 돌아다니던 냉장고 소리가 너의 전생이었단다. 믿기 싫다면 믿지 않아도 돼. 민지 않아도 너는 계속돼. 이 생에서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원한다면 인간이 될 수도 있어. 인간이 되면 가장 먼저 터널에 가봐. 어려운 시기를 통과한 이에게 긴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대. 요즘 터널은 그때보다 밝은데. 밝아도 여전히 무너질까 두려운 인간들이 그 속에 남아 있다. 그 광경을 보면 너도 조금은 안심하지 않을까. 같은 인간이 만든 것을 전부 믿지 않는 마음. 다 뺏기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이 덤불을 이룰 때. 조금 더 함께 하려고 뿌리째 힘껏 주먹을 쥔 나무와 서로 손을 뻗고 까지를 낀 채 자라난 나무들 사이에서 숲의 손등 위를 거니는 기분을 느껴보는 거야. 마침내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구의 기분을 - 깍두기공책 전문.

- 제 방향으로 틀어지다가
아무것도 없는 이 세계에 도착해
아무 일이나 만드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스톰 체이서 중

- 다정하고 시끄럽게 바람 흉내를 냈다. 낙하하는 게 어떤 방향의 바람을 몇 번 맞았는지 알 수 없어. 죽음만 조용하고 무성하게 사람들을 돌보는 중이다. - 시간을 재는 시간 중

2024. nov.

#잠든사람과의통화 #김민지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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