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16 : 안사의 난 이중톈 중국사 16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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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治' ; 興 百姓苦, 亡 百姓苦
- [안사의 난], 이중톈, 2016.


"그 상황은 실로 '흥해도 백성은 고생이고 망해도 백성은 고생이다(興 百姓苦, 亡 百姓苦)'라는 말과 딱 맞아떨어졌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낙양 '민중'의 고난은 사실 '제국'의 미래가 순탄치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단지 당사자들은 아직 그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들은 잘못된 길로 계속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 문명이 부패하다가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 [안사의 난], <3장. 반란의 전말>, 이중톈, 2016.


이제 기원전후 수백년을 거쳐 세계지도 위 동서양 '데칼코마니'를 찍던 [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지나 왔으니, 중국 통사 시리즈의 기획자 이중톈의 '전공'인 '제2제국'의 절정 '당(唐)'나라 '제국'을 다시금 돌아볼 때가 되었다.

유발 하라리처럼 이중톈 역시 인류의 역사에서 '제국'이라는 정치체제와 국가제도를 높게 평가한다.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에 실로 직접 지배할 수 없는 광대한 영토에 폭압만이 아닌 관용을 베풀었고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넓은 품으로 다양한 문화를 '용광로'처럼 녹여내며 결과적으로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빅히스토리' 역사가 유발 하라리는 '제국' 일반으로, 중국 역사가 이중톈은 '제1제국' 한나라와 로마와의 비교를 거쳐 궁극의 '제2제국'인 [수당의 정국]으로 말이다. 이후 송나라와 같은 대제국의 기반은 이중톈에 의하면 이른바 "문화의 항공모함"([수당의 정국], <5장>)으로서 관용과 포용을 갖춘 '당' 제국이었다.

그러나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든, 당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든 이 모든 빛좋은 '제국의 치(治)'는 쇠락으로 향하기 전 잠깐 빛나던 찰나였고 그나마 다수 민중의 고생은 변함이 없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증국 속담 '興 百姓苦, 亡 百姓苦', 
즉 '흥해도 백성은 고생이고, 망해도 백성은 고생'이라는 말은 역사의 진리다.
적어도 '황제'와 '제국'이 살아 있는 한.

"그때 거의 모든 사람이 안녹산이 곧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알았다.
단지 현종만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조짐을 양국충과 안녹산의 갈등 탓으로 돌렸고 그것이 어쨌든 둘이 작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정, 인사, 재정의 권력을 독점한 양국충과 제국 최고의 무력을 갖춘 안녹산의 대립이 장차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 [안사의 난], <2장. 잠재된 위기>, 이중톈, 2016.


적어도 근대 민중민주주의와 현대 공화정체제가 정착되기 전까지 '제국'의 중심인 '황제'는 '공공성'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한 번 정당성을 얻은 왕조를 멸하고 새 왕조를 열기 위해서는 그 '공공성'을 보증받을 명분이 필요했다. 대부분 '천명'을 조작했지만 그 모든 시작은 '제국' 내부의 모순이었고 과정은 다수 농민반란이었으며 결론은 '천하' 즉 '공공성'을 훔치는 '찬탈'로 귀결되었다.

무측천의 사후 왕자 이융기는 권력 주변 여인들을 연달아 살해하고 다시금 당나라를 재건한다. 20대 후반의 이융기가 당나라 현종이 되어 713년부터 약 20년간 연 '개원의 치'다. 처음의 그는 자신의 측근인 요숭, 송경, 장열과 우문겸 등의 재상을 두루 등용하며 그 동안 정체된 제국의 제도를 혁신하기도 했다. 

그러던 당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귀비'(양옥환)를 온천탕으로 끌어들인 것이 740년이었다. 2년 뒤 연호는 '개원'에서 '천보'로 바뀌었고 이듬해 '천보의 난'의 주역 소그드인 이민족 장수 '안녹산'(알락산;빛)이 입조했으며 양귀비의 먼 친척오빠 '양국충(양소)'이 세족의 권신 이임보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양귀비', '양국충', '안녹산' 이 세 사람에 의해 당 제국은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중심은 '제국'의 '황제', 당 현종이었다.

"이세민과 이융기, 앞뒤로 시차가 100년 정도 나는 이 두 이씨 황제는 아주 비슷한 경력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맏아들이 아니었지만 정변에 성공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때 '정관의 치'와 '개원의 치'라는 찬란한 역사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라면 이세민은 5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반면, 이융기는 78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이세민의 단명은 '명군'이라는 그의 영광스러운 호칭을 보전시켜 주었지만, 그보다 20년 이상을 더 산 이융기는 그 시간 때문에 '명군'에서 무도한 '혼군'으로 바뀌어 전형적인 이중 인물이 되고 말았다."
- [황제들의 중국사], <당 현종 이융기, 양귀비를 죽인 냉혹한 카사노바>, 사식, 2004.


26세에 기치를 들고 29세에 혁신군주가 된 당 현종이 50대 후반이 되었다. 수양제와 기질적으로 닮았고 찬탈 배경도 비슷했던 당 태종 이세민은 상대적으로 일찍 죽어 그나마 '정관의 치'로 기록되었지만 그 나이보다 더 산 당 현종 이융기는 예쁜 며느리를 강탈해서 '양귀비'로 삼았고, 도박을 잘한다 하여 건달 '양국충'에게 '제국'의 재정을 맡겼으며, '제국'의 '포용'이나 '관용'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중앙권력 견제를 막기 위해 이민족 장수를 기용하자는 양국충의 건의에 따라 민족간 국제 브로커 '안녹산'과 그의 사기공범 사사명을 중용했다. 
실로 '양귀비'는 현종을 정치로부터 멀리 떼어 놓았고, '양국충'은 중앙정치 독점을 위해 공을 세우는 변방장수들을 내쳤으며, 북동서 일대의 '3진' 절도사가 된 '안녹산'은 거란과 실위, 해족 등 북방민족과 없는 전쟁을 만들면서까지 공로를 조작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공공성'과 무관하게 부정과 부패로 지방권력을 전횡하는 절도사와 변방의 무력을 배제하면서 당시 유일 '공공성'의 상징인 '황제'를 고립시킨 환관권력 등을 키운 국가경영에 무능한 중앙권력의 시작은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즉 '안사의 난(安史之亂)'이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은 비록 755년부터 763년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진압되었지만, 중앙권력은 고립되고 지방권력인 절도사 군벌세력은 독립했다. 회흘족 같은 소수 이민족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산동의 소금장수 왕선지를 이은 황소의 농민반란군이 '황금갑옷'을 두르고 당 제국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사실 태종부터 현종까지, 심지어 무측천의 시대에도 '제국'의 꿈은 줄곧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꿈을 가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장안은 로마와 마찬가지로 한때 세계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단지 전자는 동양의, 후자는 서양의 수도였을 뿐이다.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라고 장려한 것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 [안사의 난], <5장. 당시의 정신>, 이중톈, 2016.


그러나 당제국을 멸망시킨 자는 황소가 아니었다. 그의 수하였던 주온이 황소를 배신하면서 '황제'에 붙어 반란의 진압에 협조했고 반란군 지도자 황소는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자결했다.

당 제국으로부터 '주전충'이라는 이름을 얻은 주온은 제국의 절도사가 되었고 중앙권력의 환관과 사대부를 전부 몰살시키면서 '황제'도 갈아치웠다.
[오대사] 등의 기사에 따르면 최고의 '살육 황제'였던 '후량 태조' 주전충은 당 제국을 멸하고 '5대10국'의 시대를 열었지만 너무 잔혹한 나머지 아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전공'인 중국 역사가 사식(史式)이 쓴 [황제들의 중국사](2004)에 의하면, '후량 태조' 주전충이나 당 현종 이융기 같은 인생 궤적은 거의 모든 '황제'들의 보편적 본질이다.


"중국 역사상 '황제' 제도는 정말이지 가장 황당한 제도였다. 수많은 직업들 중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일정한 자질과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로지 '황제'라는 직업은 아무런 자질이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누구든 쫓아가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빼앗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두들 납작 엎드려 만세를 부르며 섬기려 들었다.
중국 역사서 중 특히 '기전체' 역사가 가장 웃긴다. 그 자가 부랑아가 되었건 도적놈이 되었건 부모형제도 몰라보는 빌어먹을 놈이 되었건 용좌에 단 며칠,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으면 사관은 즉시 '제(帝)'니 '상(上)'이니 하는 존칭을 갖다 붙이면서 하늘과 땅에 버금가는 덕을 가진, 고금에 둘도 없는 거룩한 분이라며 공적을 칭송한다... 이에 따라 주온 같이 짐승 축에도 끼지 못할 물건조차도 '황제'로 인정하여 '후량 태조'([구오대사], <양서>, '태조기')로 불러야 하니,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황제들의 중국사], <후량 태조 주온, 황제가 된 살인마>, 사식, 2004.


당제국을 쇠망케 한 '양귀비'와 '양국충', '안녹산'과 '사사명'을 이용하고자 권력투쟁의 한복판으로 중용한 자는 '제국'의 '황제', 당 현종 바로 자신이었다.

'살인마 황제' 주전충을 기용한 자도 당나라 '제국'의 '황제'였다.

또 다른 관점으로,
흥하거나 망하거나 민중들만 고생시키는(興 百姓苦, 亡 百姓苦) '제국의 치(治)'는,
현대의 '공공성'인 '민주주의' 또한 지나친 신화화를 경계해야 하는 다른 한편의 반면교사일 수도 있겠다.

***

1. [안사의 난(安史之亂)], 이중톈 중국사 16](2016),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3.
2. [황제들의 중국사](2004), 사식, 김영수 옮김, <돌베개>, 2005.
3. [두 한(漢)나라와 두 로마(Roma) - 이중톈 중국사 9](2014), 이중톈, 한수희 옮김, <글항아리>, 2016.
4.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5.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6.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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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9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이중톈 중국사 9
이중텐 지음, 한수희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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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양자역학'과 '데칼코마니' 제국문명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이중톈, 2014.


"중화와 로마는 '신본(神本)'이 아니라 '인본(人本)'을 따랐다. 그랬기 때문에 중화는 '예치(禮治)'를, 로마는 '법치(法治)'를 발명했다. '법치'든 '예치'든 둘 다 '인간의 자치'였고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았다.
...
한(漢)나라의 공헌은 중화 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이었다... 두 개의 한(漢)나라는 '군주제도'의 표본이다.
로마(Roma)는 현대 국가에 원형을 제공했다... 사실상 '공화제'와 '법치'를 견지하면 시민 민주주의든 입헌군주든 현대 문명이다. 이것이 로마의 공헌이다."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저자 후기>, 이중톈, 2014.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대중저술가인 이중톈(易中天)은 역사를 '추리소설' 기법으로 풀어낸다. 사실 '역사학자'는 문헌이나 유물 등의 단서를 가지고 해당 시대의 사건과 인물 등을 추적하고 조사하며 추리하여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종의 '탐정'이다. 여기에 더해 이중톈의 장점은 역사라 하여 학술적이거나 장황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 만연체의 대가인 나라면 이야기를 더 늘어놓을 텐데, 이중톈의 역사 '추리'는 간략하다.
즉, 군더더기 없이 할 이야기만 적는다.

이미 2006년에 [삼국지] 이야기(국역은 [삼국지강의])로 중국 전역에서 선풍을 일으킨 이중톈은 현재 총 36권의 얇은 책으로 선사로부터의 중국 통사를 쓰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6권까지 번역되었는데, 36권은 총 6부에 각 부당 6권씩 배정되어 '6x6=36'이라는 고전적인 '36계' 구조를 갖추려는 듯 하다. '완전한 수'인 '3의 배수'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에게 '36'은 각 개별단위들의 교차와 조합으로 사실상 '무한'을 의미한다고 나는 본다.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삼황오제'부터 계보를 갖춰 온 이래 2천 년간 이어진 역사관 대로 약 1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1부 '중국의 뿌리'로부터 아마도 '일대일로'의 현대 중국까지 기획하고 있으리라. 

뻔한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를 다 읽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흥미로운 작가 이중톈의 '전공'이라는 '수(隋)-당(唐)' 제국 이야기는 궁금했다. 뛰어난 글솜씨로 중국 '정사'들에 실린 이야기를 아주 간략한 요점으로 정리해내는 이 중국의 실력자가 자신의 '전공'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말이다. '수-당' 제국을 알기 위한 사전 지식으로 '위-진 남북조'에 관한 책까지 덤으로 읽은 이유다. 

역시 이중톈은 나 같은 글쓰기 생초보는 흉내낼 수 없는 실력으로 독자대중에게 중국 '정사'들을 읽어주고 있었다. 추리소설처럼 마냥 읽다보면 어느새 [사기]나 [한서] 및 [후한서]와 [신/구당서] 등의 해당 시기 기전체 '정사'들의 <열전> 내용이나 편년체 [자치통감]의 그 시기 기사들을 읽는 셈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중국인인지라, '중화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의 '전공' 당나라 제국은 '제1제국'인 '진(秦)-한(漢)' 시대에 이어 '제2제국'으로 불리지만, 36권 이중톈 중국 통사 시리즈 '3부'의 표제는 '제2제국'이 아니라 '세계문명권'이다. 즉, 중국은 당나라에 이르러 완연한 '세계문명'을 완성했다는 시각인데, 역사란 힘있는 자의 서술과 해석일 수도 있기에 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의 관점에 따로 논평을 할 수는 없다. 
일면 맞기도 하나 다 인정하기에는 한반도의 '소수민족'으로서 한편으로는 석연찮기도.

이중톈에게 중국의 '세계문명'적 형태는 당나라에서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기원전부터 지속된 통일제국 '한(漢)'나라가 본격적인 기원이다. 
최초의 '제국'은 진시황이 열었지만 진(秦) 제국은 폭정으로 인해 단명했고 한고조 유방의 한나라 제국은 전한과 후한을 거쳐 4백년 동안 유지되었으므로 '세계문명'적 보편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두 한나라'로 지칭된 한고조 유방의 전한과 광무제 유수의 후한은 중앙집권적 '군주제도'의 보편적 표본의 시작이었다는데, 역시 석연치 않다. 세계 최초의 '제국'인 서아시아의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폭정만 일삼아서 그렇다 쳐도 그들에 이은 '페르시아' 제국의 '관용'도 있었고, 그 외 개인의 '자유'를 외친 그리스 민주정 같이 제국과 다른 국가제도도 있었기에 '군주'의 '제국'이 '세계문명'을 대표하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중톈 역시 유발 하라리처럼 인류 역사에서 '제국'이 가장 효율적인 국가제도로 보고 있다.


"후한 환제 연희 9년(기원후 166), 즉 조조가 11세였던 해에 외국 사절단이 낙양에 왔다. 그들은 상아, 무소뿔과 거북 껍질을 가지고 와서 낯선 제국에 숭고한 경의를 표했다([후한서], <서역전> 참고)..
이들이 얼마나 오래 걸어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분명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서 당시의 중국인들은 해서국, 이간이라 불렀고 후한의 공식 역사책에 기록된 명칭은 '대진'이다.
'대진'은 바로 '로마'다.
파견된 사절단의 '대진왕 안돈'은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 [두 한나라와 두 로마], <1장. 세계 - 로마인이 왔다>, 이중톈, 2014.


그렇기에, 이중톈은 유럽의 '로마(Roma)'를 끌어들여 세계지도의 동쪽은 중국의 '두 한나라(전한-후한)'와 서쪽은 유럽과 서아시아의 '두 로마(서로마-동로마)'로 놓고 세계사의 '데칼코마니'를 만든다.

비슷한 시기, 
전후로 나뉘고 동서로 분할되는 중국 한나라와 유럽 로마의 비교다.
두 제국의 차이점은,
중국은 유학의 '예'로써 국가를 다스렸기에 중앙집권적 군주제의 '표본'을 만들었고 주기적 폭정과 농민반란으로 왕조가 교체되기는 했지만 대개 '인의'와 '덕치'로 집권했다는 것과,
로마는 공화제의 신념으로 황제들조차 구속하며 시민의 권익을 향상시킨 '법치'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두 문명의 공통점은,
창조주나 유일신을 배제한 '인간의 자치'였다는 것인데,
이중톈에 의하면,
한나라는 '유학'의 '무속화'로 인해 망했고,
로마는 '기독교'의 '유일신'에 의해 쇠락했다.
즉,
후한의 건국자 광무제 유수가 칼을 내려놓고 '문치'를 확립하며 후한 개국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겉으로 내세운 '도참사상'은 중국 역사에서 뿌리깊은 '도가' 사상과 결합하여 후한 말기 황건 농민군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무속화'된 한나라 정치가 '종교화'된 농민반란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로마 황제권 확립을 위해 국교로 공인된 '유일신' 사상의 선구자 '기독교'는 신처럼 무소불위가 되고자 했던 로마황제를 무릎 꿇리며 결국 로마 자체를 잡아먹었다.
이 두 제국의 '세계문명'은 4~5세기 소빙하기를 거치면서 이민족과의 결합을 통해 세계사를 또 한 단계 발전시키게 되는 점에서 또 한 번 '양자역학'적 '데칼코마니'를 그려낸다.
중국은 위촉오 [삼국지]와 서진 '팔왕의 난'을 거쳐 '5호16국'의 역동으로, 
로마는 '동로마' 비잔틴으로의 문명확대를 한편으로 서유럽은 '게르만'의 열국으로,
세계지도의 좌우 '데칼코마니'를 찍어낸다.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2부 '제1제국' 중 9권 [두 한나라와 두 로마]의 주제는,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5세기 세계사의 '양자역학'과도 같이 서로 직접적인 접속이나 영향이 없었음에도 다른 듯 닮은 양대 거대 제국의 필연적 종말이다.

시리즈를 다 읽을 마음은 없지만 한나라 '제국'의 전통을 이은 이중톈의 '전공'인 '세계문명' 당나라의 쇠망을 다시 한 번 읽을 차례다.

그래서 다음은,
무측천 쿠데타는 별 관심은 가지 않으니,
시리즈의 3부 '세계문명권'의 16권,
8세기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
[안사의 난] 이야기다.

***

1. [두 한(漢)나라와 두 로마(Roma) - 이중쳰 중국사 9](2014), 이중톈, 한수희 옮김, <글항아리>, 2016.
2. [안사의 난 - 이중톈 중국사 16](2016),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3.
3.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4.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5.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6.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톈,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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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재전쟁 - 왜 위나라가 이기고, 촉나라는 패하고, 오나라는 자멸했는가!
와타나베 요시히로 지음, 노만수 옮김 / 더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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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이념'
- [삼국지 인재전쟁],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오늘날에도 흔히 쓰이는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유명한 말은 '인맥'에 의해, 또한 '국가권력'에 의해 되풀이되는 강권통치 발동에 맞서온 중국인의 지혜인 셈이다.
이렇듯 '인맥'은 '삼국지' 시절이라는 아주 먼 옛날부터 형성되어 왔다. 그리고 순욱이나 제갈량이 조조와 유비와 대치하는 상황부터, '군주'에 대해 자율적 권위를 가진 '귀족'이라는 유구한 중국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지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 그것이 [삼국지]의 시대였다."
- [삼국지 인재전쟁], <에필로그>,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중국의 '꽌시'가 있다.
'관계(關係)'다.
우리의 '인맥'과 비슷하나, 중요한 건 실질적으로 맺어진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실질적 '관계'가 그것일 게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천하통일'을 지향하는 강력한 제왕적 국가권력 아래 종속되어 온 지 역시 수천 년이기 때문이리라.

알고보면 천하를 훔친 가장 큰 '도적'인 '황제'가 '하늘'이었고, 고대로부터 '공공성' 그 자체였다. 
다수 민중들은 물론 지배계급들도 이 '천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세월이 또 몇 천 년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한 지 반세기도 안되는 우리 역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下有對策)'은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의 공통사항이다.
강권적인 권력이 '정책'을 내리면 다수 민중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표현될 수 있겠다.


1.

"인간관계(인맥)는 '중국의 기본'이다. 그리고 인사는 만사의 기본이다... '인맥 형성 방식'(1장)... '국가의 관료제도 구조'(2장)... 위나라는 '혁신'(3장), 촉나라는 '전통'(4장), 오나라는 '지역'(5장), 진(晉)나라는 '제도화'(6장)에 서술의 중점을 두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프롤로그 : 인재와 인사는 만사의 근본이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일본의 '삼국지' 전문 역사학자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 속에서 위-촉-오 삼국을 거쳐 천하통일을 이룬 서진(西晉)의 '인재전쟁'을 분석하였다. 원제가 [삼국지 인사] 정도 되는 듯 한 이 책의 국역본은 [삼국지 인재전쟁](<더봄출판사>,2023)이다.

저자는 중국의 삼국시대 '학연'과 '지연', '혈연(혼인)' 등 '인맥'의 관점에서 당시 국가 시스템과 각국의 '인사'를 분석하는데, 정리하면 조씨의 위나라는 유교적 허위에 대항한 조조의 '혁신' 이념, 유씨의 촉은 한나라를 부흥하려는 제갈량과 유비의 '전통' 이념, 손씨의 오나라는 강동에 웅크린 '지역주의', 그리고 사마씨의 진나라는 귀족서열의 '제도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2.

"이처럼 '명사(名士)'가 '문화자본'에서 유래한 권위를 배경으로, 사회통합의 기능을 맡은 경우는 후한 말기에 많이 나타난다. 후한의 관치와 향거리선(관리추천제도)으로 유지되어 온 지역사회의 질서는 후한 말기에 이르러 호족의 지지를 받은 '명사'들이 도맡게 되었다. 조조를 비롯한 군웅들이 '명사'를 데려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2장. 국가 시스템과 출세의 사다리>,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정사 [삼국지]든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든, 당시의 난세를 헤쳐나가던 영웅들에게는 '명사(名士)', 즉 '세상에 이름난 선생'이 있었다.
후한 말기 환관세력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에 이를 비판하며 유학자 선비들은 [경학]을 근거로 서로의 명성을 빛내주었다. 이들은 깨끗하다 하여 '청류'라 불렸고 반면 환관권력의 청탁으로 출세한 자들은 '탁류'가 되었다. 

이 '명사'들의 '이념'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었다. 한나라 시절 관리 선발제도였던 '효렴'이라는 제도는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는 '효'와 청렴한 '렴'의 기준으로 추천받는 제도였기에, 후한 말 부패한 세상에서 '청류' 재야운동권들은 유학이라는 전통적 이념을 다시금 세우고자 했고, 이들이 서로서로 '학연'과 '지연', 나아가 '혈연'을 이어가며 '명사'가 되었다.


"이처럼 조조는 '명사'와의 알력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인사기준을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선포하며 '반유교주의'를 명확히 선언했다
...
위나라 문제와 명제는 유교에 대한 조조의 강한 도전을 계승하지 못했다. 유교는 그 정도로 강력하고 강인하고 끈질겼다. 조위가 사마씨에게 권력을 장악당한 것은 문제, 명제가 빨리 죽은 것만이 원인이 아니다. 문제도 명제도 '시대의 변혁자' 조조의 위대함을 이어받거나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3장. 위나라, 시대를 변혁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조조도 젊어서 이 '청류'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그는 출사하여 직접 세상을 바꾸고 싶었기에 환관이었던 양할아버지 조등의 후광을 활용하여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곧 황건농민반란의 난세를 맞았다. 그 나름의 '혁명'과 '개혁'을 꿈꾸는 과정에서 당대 최대의 세족이었던 '여남 원씨' 원소와 대결하기 위해 조조는 많은 '명사'들의 지지를 모았고 그의 책사 중 최고의 선비 순욱은 역시 당시 강력한 가문이었던 영천지역의 '여남 순씨'였다. 조조에게 후한 황제를 영천군 허현(허도)으로 옮겨와서 황제를 끼고 최고 권력자가 되라는 대책을 낸 순욱이라는 책사가 필요했고 그의 순씨 가문 인맥은 조조에게 더욱 중요했다. 
조조 정권은 조씨와 원래 성인 하후씨 집안의 무력과 순씨 세력의 '이념'을 결합하여 난세에 '혁명'을 하고자 했으나, 한나라 황실 부흥을 바라던 순욱의 '이념'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조의 '혁명'과 맞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나의 장자방(장량)"이라 칭하던 순욱을 숙청하고 만다.

위선적인 '효도'와 '청렴'을 부정하고 극복하려던 조조는 순욱과 같은 유학자 '명사'들을 숙청하면서 '오로지 능력 위주로 등용한다'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내걸고 인재를 구한다. 
그러나 '창업'과 '수성'은 다르다. 조조(위무제)의 아들 조비(위문제) 이후로는 위나라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학을 극복할 수 없었다.

'혁명'이 끝난 곳에서 '멸망'은 시작된다.


"제갈량을 맞이하기까지의 유비 집단은 이러한 (도원결의) '의리'를 핵심으로 한 강력한 '용병집단'이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책사로 맞이하고, 이를 계기로 '형주 명사집단'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집단을 '의리'로만 결속시킨 용병집단에서 제갈량 등 '명사'를 핵심으로 하는 정권으로 환골탈태시키는, 즉 질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힘겨루기와 대립은 다르다. 제갈량과 유비가 대립하고 있었다면 조조가 순욱을 죽인 것처럼 제갈량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과 유비는 '한실부흥'이라는 최종목적이 완전히 일치했고, 서로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한(漢)나라를 부흥 시킬 것인지? 그 수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유비는 조조와 달랐다.
큰 전공이나 세력 없이 원소와 조조, 유표 등의 군웅들에게 빌붙다가 익주라는 최변방에서 백만명도 안되는 인구로 촉한 황제가 되었으니 전투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실은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처럼 다시 한 번 한나라 황실을 부흥한다는 거창한 이념을 뒷받침해줄 배경이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유비는 진수가 말한 '백절불요', 백 번 꺾여도 주저앉지 않는 불세출의 영웅이며, [삼국지 인재전쟁]의 저자 와타나베 요시히로에 의하면 '전투도 잘했다'고 한다.

유비는 본질적으로 소규모 '용병집단'의 대장이었다. 푸틴에게 도전했다가 비명횡사한 프리고진처럼 애초에 조조, 원소, 유표나 심지어 여포에게 조차도 비할 수 없었지만, 제갈량의 형주 지역 '명사' 집단을 만나면서 '촉한정통론'의 이념을 비로소 구체화할 수 있게 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삼국의 정립이 아니라 이를 통한 천하통일이 목표였기에, 유표 사후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본격적으로 천하통일을 도모한다.

물론, '의리'로 뭉친 난세의 용병대장으로서 유비의 최후 또한 관우의 복수에 바쳐졌지만, 제갈량은 조자룡과 달리 유비의 오나라 정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단다. 아마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의 저자 요시히로의 말처럼 유비의 전투력을 믿은 당시까지는 전투실전 초보자 제갈량의 형주 탈환 도박이었을 수도, 아니면 내가 보기에는 유비라는 걸림돌 없이 제갈량이 촉한의 전권을 장악하여 북벌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제갈량은 조조 같은 대군벌의 휘하에서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킬 수 없음을 알았고,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학연'으로 엮인 형주 지역 '명사'들과 '지연' 및 '혈연'을 맺고 '와룡'이 되어 영웅을 기다렸다. 여기에 걸린 게 유비였을텐데, 어쨌든 유비와 제갈량의 '천하통일 이념'은 같았던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가 '천하삼분지계'의 요충지였던 형주를 딛고 서쪽 파촉 지역의 익주로 가서 황제가 되기까지 '형주 명사'를 주력으로 '익주 명사'까지 조율하며 죽을 때까지 분연히도 북벌을 시도했다.

유비가 조조와 달리 '명사'를 탄압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배경이다.


"보통은 그곳(남방)에서 발달한 한민족 문화가 북방민족(5호)이 건국한 북조문화와 다르기에 '육조(손오-동진-송-제-양-진)' 문화라고 부른다... 지역에서 생존한 손오의 존재형태가 이렇게 손오를 기원으로 간주하는 '육조(六朝)'라는 개념을 형성해 갔다.
...
(손오는) 군주권력 강화로 이어질 법한 조조와 같은 혁신적 정책이나, 제갈량처럼 조씨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통해 한(漢)나라를 지키는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었다. 즉 육손은 '강동'이라는 지역을 위해 살았다."
- [삼국지 인재전쟁], <5장. 오나라, 지역과 함께 생존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강동의 손씨 오나라는 그냥 '지역주의'다.
한참 후 '5호'라는 이민족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던 북조 문화에 밀려 남조가 비로소 '중화'의 일부로 인정되기까지 이 남방 '6조'의 기원이 손오라고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 강동의 오나라는 변방의 지역 소국에 머물고자 했지 위나라와 촉나라처럼 천하통일을 꿈꾸지 않았다. 강동지역 '명사' 사회는 물론 군부의 주축인 적벽대전의 주역 주유와 육손도 장강 이북을 넘을 생각이 없었고, '원조 천하삼분지계'를 주장했던 강동의 지식인 노숙의 목적도 '삼분'이었지 '천하통일'은 아니었다.

결국, 손권 사후 서진이 강동을 쳐들어온 후에야 '지역'을 넘어서고자 깨달았던 오나라 '지역' 인재들은 대부분 그냥 남방 '6조'의 원조로서 남고 말았다.


"후한에서 삼국 시대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되었던 '인맥'은 이렇게 해서 '혼인' 관계를 통해 고착화되었다. 바꿔 말해서 '인맥이 귀족제라는 제도로 조직화'되어 갔다고 해도 좋다. '명사'의 시대였던 삼국 시대와 '귀족제'의 시대가 된 서진 시대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요컨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다가올 서진의 성립을 위해 '공-후-백-자-남'이라는 계층제로 이루어진 '오등작(五等爵)'의 수여를 통해서 귀족과 군주권력의 긴밀성을 표현하고, '귀족'을 국가 신분제로 서열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 신분제를 '귀족제'라 부른다... 사마소는 '귀족제'를 형성함으로써 군주권력과의 거리를 통해서 '귀족'들을 서열화하고, 그 '자율성'을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6장. 서진, 조직을 제압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사마의는 어릴적 난세의 피난길에서도 유학 경전을 공부하며 자란 '명사'였지만, 난세에 태어난 그는 조조와 순욱, 유비와 제갈량 같은 선배들과 달랐다. 사마의에게 유학적 혁신이나 전통 따위는 자기 가문 생존의 부속물이었다. 그는 출세와 가문의 생존을 위해 주로 '혼인 관계'를 이용했다. 아들의 배우자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갈아치웠고, 이후 사마사와 사마소라는 아들 둘을 거쳐 손자 사마염이 건국한 진나라는 이 가문들을 황제의 절대권력 아래 '귀족제'로서 서열화시켰다. 

지방 호족의 '지연'이나 '명사'의 '학연'의 시대는 가고, 사회계급은 귀족들의 혼인과 '혈연'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냐마 수천 수백 년간 군주의 절대권력에 대하여 할 말은 하고 견제도 하며 '자율성'을 유지해 온 '명사'들의 이념이 사마씨 서진의 '귀족제'로 인해 절대권력에 수렴되었다.

이후 유학에 노장사상을 버무린 추상적인 '현학'을 논하며 부채들고 화장이나 하고 다니다가 술이나 약에 취해 픽픽 쓰러지기나 하던 동진의 남조 귀족문화는 사마씨 일족의 서진 정권이 확립한 강권적인 '제도화'의 결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이처럼 '한(漢)'이라는 나라는 '한족(漢族)의 나라' 중국에서 특별하고, 제갈량은 그 '한'이라는 고전 중국의 최후의 지킴이였다.
이 '한나라 이념'의 지평 위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우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탄생하고,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제묘가 세워진 것이다."
- [삼국지 인재전쟁], <4장. 촉나라, 전통을 계승하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2019.


진수의 [삼국지]는 서진시대에 지어졌는데 위나라를 찬탈했으나 중원의 전통을 잇고자 했던 진나라 권력에 의해 삼국 중 '혁신'의 위나라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여기에 한나라 '전통'을 잇는 촉한의 유비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약 천 년 후 원나라 말기 한족의 민족해방 투쟁 시기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대놓고 유비의 '촉한정통론'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대중적인 소설에 따르면 한족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유비와 제갈량 외에는 조조를 필두로 다들 '난세의 간적'일 뿐인데, 삼국지 시대의 치열한 '인재전쟁'과 함께했던 '혁신'과 '전통' 등의 '이념'은 흥미로운 소설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영웅들과 인재들이 목숨걸고 추구했던 그 치열한 '이념' 자체가 본래는 한낱 '신화'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

1. [삼국지 인재전쟁](2019), 와타나베 요시히로, 노만수 옮김, <더봄>, 2023.
2. [난세의 리더, 조조](2013), 친타오, 양성희 옮김, <더봄>, 2022.
3. [조조 평전](2000) / [유비 평전](2004),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 / 2015.
4.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5.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6.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7.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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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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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비 딕]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모비 딕], 허먼 멜빌, 1851.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5


1.

"내 이름을 이슈메일(Ishmael)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 [모비 딕], <1.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허먼 멜빌, 1851.


"Call me Ishmael."

유명한 첫 문장이라고들 한다.
내가 이 오래된 영문학 '고전'을 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 첫 문장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난 후였다.

직역하면,
"내 이름은 이슈메일" 또는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가 되겠지만,
의역을 한다면,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정도가 더 어울린다고 소설가인 역자 김석희 선생은 말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 '하갈'이라는 그의 하녀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이스마엘(Ishmael)', 영어식 발음으로  '이슈메일'이라는 인물은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 의해 쫓겨났기에 '방랑자' 혹은 '세상에서 추방당한 자'의 성경식 대명사가 되었다. 소설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은 본명이라기 보다는 상징적 이름으로 보는 게 좋다고 역자 김석희 선생은 말한다([모비 딕], '옮긴이의 덧붙임', <작가정신>, 2011). 즉,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바다를 헤매는 화자를 상징적으로 은유한다는 것이니 "Call me Ishmael"을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로 의역한 것이다. 실제로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 작가 허먼 멜빌의 이 장대한 작품을 소설가인 역자는 '창작'의 정신으로 의역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일단,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 1819~1891)이 31세인 1851년에 발표한 대작 [모비 딕(Moby Dick)]의 화자는 본명은 알 수 없지만, 일단 '방랑자'의 상징으로서 '이슈메일(Ishmael)'이라 해두고 긴 고래 이야기를 시작한다.


2.

"... 쾰른 대성당이 탑 꼭대기에 아직 기둥을 세워둔 채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 [모비 딕], <32. 고래학>, 허먼 멜빌, 1851.


[모비 딕]의 주인공은 화자인 '이슈메일'이라기 보다는,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Ahab)'일 수도 있고, 남태평양의 흰색 늙은 향유고래 '모비 딕(Moby Dick)'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읽으면 주인공은 사람인 '에이해브'일 수도, '자연'의 그것으로 보면 고래 '모비 딕'일 수도 있다. '죠스'나 '47미터' 같은 식인상어 영화의 주인공이 사람인가 상어인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르듯이 그렇다. 어쩌면 19세기 소설 [모비 딕]이 그 기원이 아닐는지.

소설은 장황하고 방대하다.
특히 '고래'와 '고래잡이(포경업)'에 관한 이야기는 작가가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연구한 19세기 당시의 자료를 토대로 설명해 준다. 학자나 전문가는 아니지만 스무살부터 육지를 벗어나고자 상선과 고래잡이배를 타고 나갔다가 또 다시 탈주하여 식인종 섬에서 지내기도 하다가 해군이 되어 다시 뭍으로 돌아온 작가 멜빌의 경험이 진하게 녹아있다. 
물론 당시는 바닷속 관찰이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20미터가 넘는 길이의 고래를 전체적으로 묘사할 수가 없었다. 뭍에 올라와 야자나무를 들이받고 죽은 고래는 금세 썩고 해체되어 본래 바다에 살던 모습을 재현할 수 없었다. 뼈만 조립해 놓고 상상의 살을 붙여대는 지금의 공룡 재현과 같던 시절이다. 

멜빌은 자신의 조사와 연구, 수년 간의 원양어선 체험을 총동원하여 총 135장에 달하는 소설 [모비 딕]의 수많은 장을 빌어 '고래'와 '고래잡이'에 관해 친절하고도 장황하며 세밀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나 19세기의 시대적 한계로 인해 '고래'라는 '대성당'의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못한 채 이 "웅장하고 참된 건물"의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에 손에 맡겨"두고 있다. 

'고래잡이' 어부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메두사 머리로 물리쳤다는 바다괴수 '크라켄' 또한 어차피 상상의 괴물이라 심해 대왕오징어나 대왕문어 또는 이들을 잡아먹는 대왕고래의 합체물 아닐까 한다.
'고래'는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래 하느님의 말을 전도하라는 지시를 안듣고 도망친 예언자 '요나'를 삼켜버리는 바다괴수로서 첫 역할 이후로 과학의 발전으로 그 온전한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렇게 내내 베일에 싸인 존재였고 세계를 위협하는 상상속 괴물의 무한한 원천이기도 했다. 
어쩌면 멜빌이 [모비 딕]을 쓰던 19세기 중반까지도 '고래'는 그런 존재였을는지 모른다. 


"제우스의 아들인 용감한 페르세우스는 최초의 고래잡이였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모험담과 비슷한 이야기에 저 유명한 성 조지와 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가 페르세우스 이야기에서 간접적으로 유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성 조지의 이야기에 나오는 용이 바로 '고래'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옛날 연대기에서는 고래와 용이 묘하게 혼동되는 경우가 많고,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 [모비 딕], <82. 포경업의 명예와 영광>, 허먼 멜빌, 1851.


고래가 워낙 크다 보니 소설에서 묘사하는 고래잡이 장면도 세밀하게 와닿지는 않으나 죽은 고래를 배에 올릴 수는 없고 바닷속에 둔 채 지방질 껍질을 벗기고 큰 머리를 잘라 올려 배 위에 거는 장면들이 나온다. 당시로서 고래는 고기보다는 연료와 미용 따위로 쓰는 고급 기름을 얻기 위해 사냥당했다. 북방의 해역에서는 주로 수염고래로 불리는 '참고래(그린란드고래)'였고 남양에서는 머리가 몸길이의 절반 가까이 되는 '향유고래'가 그 대상이었다. 아마도 '향기로운 기름'을 가진 '향유(香油)' 고래가 가장 값이 나갔을 터, 에이해브 선장은 오래 전 세상에서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흰색 향유고래 '모비 딕'을 잡다가 한쪽 다리를 잃었고,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망친 화자 이슈메일은 우연히 에이해브 선장의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에 역시 여관에서 우연히 한 침대를 쓰게 된 식인섬 출신 작살잡이 '퀴퀘그'와 함께 타게 된다. 

'피쿼드'호에는 다른 선원들도 많다. 독선적이고 말이 안 통하는 독재자 '에이해브' 선장이 있고, 별다방의 시조인 1등항해사 '스타벅'은 독실하고 진지하며 그나마 폭군선장에게 할 말은 한다. 2등항해사 '스터브'는 내가 가장 마음에 든 캐릭터로 힘든 고래잡이업과 빡센 직장상사인 선장 앞에서 한시도 개그를 놓지 않는다. '스터브'가 '에이해브'를 처음 만난 장면부터 최후에 '모비 딕'에 의해 전원 몰살당하기까지 내뱉은 말과 행동 모두 개그에 대한 그의 진심을 보여준다. 3등항해사인 땅딸이 '플래스크'는 '스터브'의 개그 말벗으로서 듀엣을 이루며 양념을 쳐준다. 이들 세 명의 항해사는 고래를 잡을 때 띄우는 개별 보트들의 대장들이다. 본선의 선장이 중대장이면 이 항해사들은 소대장이다. 이들 보트는 작살잡이 분대장들을 두는데 이 선원들이야말로 듬직하기 이를데 없다. '피쿼드'호의 작살잡이 세 명은 모두 '야만인'이다. 1등 '스타벅'의 밑에는 '이슈메일'의 절친 식인종 '퀴퀘그', 개그맨 '스터브' 밑에는 북미 인디언 '타슈테고', 땅딸이 '플래스크' 밑에는 아프리카 흑인 '다구'가 있다. 이들 작살잡이들은 기골이 장대하여 배의 온갖 힘든 일을 해결하고 고래잡이 보트에서는 작살로 고래를 공격한다. 사실 듬직한 이 작살잡이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기에 화자는 이들이 노까지 젓지 않고 빈둥거리다가 작살만 던지면 고래란 고래는 다 잡힐 거라고 깨알같이 논평을 한다. 

아무튼, 선장이 폭군이든 항해사들이 독실하거나 개그맨이거나 땅딸보거나 작살잡이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더라도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돛대 위의 망꾼이 고래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일사분란하고 치열하게 고래를 사냥한다는 것. 큰 돈을 벌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경제적 동기가 일차적이지만, 일단 고래와 싸울 때는 말할 수 없는 진지함과 엄숙함과 사명감이 있다. 위험하고 더럽고 힘든 '3D' 업종의 대명사지만 일할 때는 누구보다 멋지고 자부심 넘친다. 
사실, 독자로서 내가 [모비 딕]을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중년이 된 우리 세대가 본인 일이 아무리 지겹고 싫게 느껴져도 막상 내 일을 하고 내 역할을 맡을 때 임하는 삶의 자세. 진지한 사람(스타벅)도, 개그맨(스터브)도, 키가 모자람(플래스크)이 있어도 자기 역할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삶에 대한 엄숙함.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나는 내 일과 역할이 끝날 때까지 개그맨 '스터브'처럼 유쾌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소망은 유언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개그 한 문장을 쓰는 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읽은 [모비 딕]의 주인공 역시,
바다괴수 '모비 딕'이 아니라 고래잡이 선원들이었다.
힘들고 험하고 천하지만 자기 일의 기원을 신의 아들 '페르세우스'나 구세자 '성 조지'에서 찾을만한 그 개성적인 인물들 말이다. 다시 말해도 그 중 단연 나의 롤모델은 개그맨 '스터브'다.


3.

"그가 서 있는 기묘한 자세도 나를 놀라게 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양쪽, 뒷돛 밧줄 가까이에 있는 널빤지에 지름이 1.5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는 고래뼈로 만든 다리를 그 구멍에 끼우고, 한 손을 들어서 밧줄을 움켜잡고 꼿꼿이 서서는, 끊임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뱃머리 너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두려움 모르는 눈길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 단호하고 양보할 수 없는 무한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 [모비 딕], <28. 에이해브 선장>, 허먼 멜빌, 1851.


소설을 읽는 내내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이 떠올랐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03

사실상 주인공인 외다리 존 실버가 소설이 한참 진행된 이후 등장하듯, 역시 고래한테 다리를 잃은 외다리 에이해브 선장도 변죽만 울리다가 <28장>에서야 등장하되 모습은 한참 더 뜸을 들인 후에야 나타난다.


"에이해브는 바다에서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깊은 바다 속을 들여다 보자, 기껏해야 흰 족제비만 한 하얀 점 하나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살아 있는 그 점은 올라오면서 점점 커지더니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밑바닥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얗게 반짝이는 이빨이었다. 그 이빨들은 구부러진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았었다. 그것은 '모비 딕'의 벌린 아가리와 두루마리처럼 말린 턱이었다. 그의 거대한 몸통은 아직도 푸른 바닷물과 어우러져 어렴풋이 보였다. 번쩍이는 입은 마치 문이 활짝 열린 대리석 무덤처럼 보트 밑에 딱 벌어져 있었다. 에이해브는 이 무서운 유령을 피하기 위해 조타용 노를 옆으로 비스듬히 휘둘러 보트의 방향을 바꾸었다."
- [모비 딕], <133. 추적-첫째 날>, 허먼 멜빌, 1851.


'모비 딕'은 아예 전설과도 같이 말로만 대양을 떠돌기만 하다가 총 135장 중 <133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중적으로 사흘간 짧게 등장한다. 그것도 물줄기를 뿜는 다른 고래떼와 달리 백상아리처럼 바다괴수답게 깊은 물속에서 큰 아가리를 벌린 채 수직을 그리며 위로 솟구친다. 3일간의 추적과정에서 모두 그렇게 등장하는 '모비 딕'은 과연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잡아가려는 고대의 바다괴수 '크라켄'이나 성 조지에게 퇴치된 중세의 전설괴수 '드래곤'에 필적한다. 화자 '이슈메일'은 고대 사람들이 상상하던 용과 그리핀 등을 포함한 대부분 거대괴수들의 모티브가 바로 고래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지만,
소설의 제목도 고래 이름인 [모비 딕(Moby Dick)]이기는 하지만,
혹자는 비극적 최후를 알면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도전하는 '에이해브' 선장이 주인공이라고 논평하지만,
내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개성 넘치는 고래잡이 선원들이다. 
세상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보다 그 세상에 치열하게 뛰어든 그 사람들이다.
두 세기가 지났지만 변함없이 열심히 내 일을 해내며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이다.


"연극은 끝났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난파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 [모비 딕], <에필로그>, 허먼 멜빌, 1851.


그렇게 '90년대 한 시절 '신세대'였던 우리세대 모두는 그 당당했던 선원들처럼 언젠가 한 순간에 무대에서 사라지겠지만, 
또 어느 누군가는 화자 '이슈메일'이 그랬듯 살아남아서 우리를 주인공처럼 기억해 주리라.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4y

***

1. [모비 딕(Moby Dick)](1851), Herman Melville,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2. [Treasure Island](1883),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3.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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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지음 / 돌베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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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90년대 '신세대'라 해두자
- [1990's], 윤여일, 2023.


"1990년대 초중반 '신세대론'이 기세등등할 무렵, 1980년대와 작별하는 후일담 문학이 부상했다면, 1990년대 후반 '신세대론'이 위력을 잃어갈 무렵 30대인 기성세대가 1980년대를 긍정적으로 회상하며 자기서사를 구축한 것이다. '386세대론'은 '신세대'를 탈정치적이고 개인적이고 소비지향적인 세대로 담론화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변별하며 자신의 출현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후로 10대와 20대에 관한 세대론은 짧고 다양하게 변주되었지만, '386세대론'은 486, 586세대론으로 업데이트되며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이처럼 호황기에서 (IMF) 불황기로 넘어가며 젊은 세대담론은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공통점이라면 어느 쪽이든 기성세대가 젊은세대를 대상화하고 평가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 [1990's], <6. 세대, 혼란의 범주>, 윤여일, 2023.


일단, 나를 '신세대'라 해두자.
First, call me 'new generation'

나는 1974년도에 태어났고, 1993년에 스무살이 되었다.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아직 서른살도 안되었고 서울 종로에서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목도하려는 열정으로 친구들과 그 '천년의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남들보다 굼뜨고 조숙하지도 못했던 내가 스무살에 세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는 더 이상 군사정권 시대가 아닌 '문민정부'였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독재'보다는 '개혁'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스물한살이 되었을 때 후배들을 보게 되었고 선배인 나는 그들을 유행 따라 'X세대'라 불렀다.

부조리한 군부독재와 독점자본의 세상에 저항했던 1980년대 선배들을 동경했던 나는, 옆구리에 거대한 모토로라 삐삐를 차고 자가용을 끌려고 운전면허 학원에 가던 한 살 어린 후배들에게 세상을 바꾸는데 관심없다며 비난의 말을 던지기도 했다. '80년대식 끝물을 들이고 있었던 선배들이 보기에 '신세대'였던 나는 'X세대'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동경했던 '80년대 젊은이들은 '90년대 말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기성세대'인 '386세대'로 무대 위에 등장했고, 나는 여전히 그들이 규정하는 세대로, '90년대 '신세대'로 머물렀다. 


"1990년대는 동질적 내지 연속적 시기로 환원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이질적 시간성들이 교차하고 혼재하고 갈등하는 여러 국면들로 짜여 있다. 그래서 그 때를 회상하는 사람의 이유와 방식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소환된다. 1990년대는 하나가 아닌 복수다."
- [1990's], <2. 문제적 시대로서의 1990년대>, 윤여일, 2023.


'90년대 초반 'X세대'와 중반의 'Y세대' 등은 지금 21세기의 'MZ세대'처럼 특정시기의 세대론을 지칭한다. 현재는 'X-Y-Z세대'가 없지만, 어느 시대든 '신세대'는 존재한다. 로마시대나 삼국시대에도 여전히 젊은이들은 '싸가지'가 없었을 테고 어른들이 보기에 그래서 세상은 '말세'였을 게다. 다만, '어린이'나 '젊은이', '청춘'이나 '청년'이 아닌 '신세대'로 세대론이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가 내 생각엔 1990년대 아닐까 싶다. 아니면 말고.

기성세대가 되어 정치와 경제 전반의 권력이 된 '80년대 청춘 '386세대의 회고와 추억으로 내가 접했던 1980년대는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했다. '후일담 문학'으로 문화권력까지 접근하던 '80년대가 보기에 1990년대는 더 이상 '변혁이론'도 안 통하고 '포스트모더니즘' 같이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혼돈'의 시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혼돈'에 앞장섰던 자들은 '소련의 몰락'과 탈냉전', '변혁이론의 쇠퇴' 등을 맞아 한 시대를 청산하고자 했던 '80년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90년대의 '신세대'는 여전히 '80년대 기성세대의 영향력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사회학자 윤여일 박사는 2016년에 1990년대 '탈냉전' 시대 [동아시아 담론]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으로서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주제를 연구할 때 주요 소재가 '잡지(雜誌)'였다. 그에 의하면 1990년대는 '잡지의 시대'였다. 시대의 저항과 진보를 대표하는 담론들이 수많은 무크지와 계간 및 월간지로 등장했다가 '90년대 후반의 불황기를 거치며 명멸했다. 윤여일 박사가 2023년도에 [1990's]라는 표제로 전 사회적 영역에서 1990년대의 특징을 설명하고자 했을 때는 박사논문 집필 과정에서 수행했을 '잡지'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조사, 그러나 [동아시아 담론]의 주제와 무관하여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꺼내고 싶어서였을 거다.

결국 저자의 논문 [동아시아 담론]과 대중서 [1990's]의 결론은 같다. 1990년대의 '유산화', '역사화'다. 즉, 우리 역사에서 1990년대를 돌아보고 재역사화하여 미래로 이어지는 사상적 담론을 그려보자는, 뭐 그런 것 아니겠는가.


"... 그래서 1990년대는 무엇이었나... 희망도 자라났으며 위기도 드리웠다. 어떠한 변화는 원치 않았는데 닥쳐왔고 어떠한 변화는 그토록 갈구했으나 지난했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변화들 중에는 1980년대와는 달리 지금 시대에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게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1990년대는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만이 아니다."
- [1990's], <2>, 윤여일, 2023.


그래서 '90년대 '신세대'였던 나 또한 묻게 되었다. 나에게 1990년대는 무엇이었나.

군부독재의 종식과 문민정권의 등장, 초중반의 경제활황과 후반의 IMF 초유의 불황, 새세상을 꿈꾸었다면 역시 실망했을 수도, 역사는 진보하지만은 않는다며 회의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세기말이었기에 그랬는지 지난 시대인 '80년대를 계승했을 수도 부정했을 수도 있겠다. 또한 21세기하고도 사반세기가 지나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도무지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의 본격적 태동기였을 수도 있겠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나날의 시사적 사건에 그때그때 반응하는 것보다 그 사건을 사태, 추이, 국면 그리고 시대의 징후로 옮겨서 읽어내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에는 더한 정신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굳이 그런 노력을 감당하려는 자가 있다면, 과거의 '잡지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 [1990's], <16. 에필로그>, 윤여일, 2023.


사실, 1990년대 말 이십대 중후반의 내가 만약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면 어떤 '당선소감'을 낼까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며 몰래 써보았을 때, 그 주제는 '90년대의 '부재(不在)'였다.
'80년대에 열렬하게 세계의 '변혁'을 외쳤던 그 세대들의 '부재', 현실에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 '부재'하던 '신세대'의 사상. 허생이 뒷문으로 달아난 좁은 방을 바라보던 어영대장 이완처럼, 어느덧 멍해져 버린 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잡지'를 통해 1990년대의 징후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한때 '90년대의 '신세대'였던 나는 생각한다.

지난 시절 인류의 '고전'들을 '20세기 소년'이자 '90년대 '신세대'의 눈으로 읽어서 계속 남겨보자. 
'90년대를 살았다 해서 다 같을 수는 없지만, '다양성'의 시대였던 '90년대를 함께 통과했던 사람들이었으니만큼 한 시절 '신세대'의 이름으로 인류의 '고전'들과 몇 가지 책들을 나와 같은 세대들에게 읽어주자. 
'노동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범상하게 커서 '노동자'가 된 나의 '90년대 관점으로, 나와 같이 늙어가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자.

내가 쓰는 서평 아닌 '서평' 또는 소설 아닌 '소설'의 독자는,
'20세기 소년'들이자 '90년대 한 때 '신세대'들이다.

한 때 우린 '변화'와 '다양성'을 지향하던 한 시절 같은 '신세대' 아니었는가.

그렇게,
아직도 '책 읽어주는 노동자'인 나를 여전히, 
일단 '90년대 '신세대'라 해두자.

***

1.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2. [동아시아 담론 - 1990~2000년대 한국사상계의 한 단면], 윤여일, <돌베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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