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동물접기백과 - 매일매일 두뇌 트레이닝
존 몬트롤 지음, 신승미 옮김 / 봄봄스쿨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종이를 접는 시간 : 1984~2022년
- [신화동물접기백과], 존 몬트롤, 2010.


"사자의 가슴과 얼굴에, 뱀의 꼬리를 가진 채 몸통에서 불을 내뿜는 괴물 키마이라(Chimaera)..."
-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9권>, 647행, 기원후 1세기


1.

재성이네 집은 미용실을 했다. 나는 학교 끝나면 재성이네 미용실 쪽방의 다락에 재성이랑 같이 올라가 놀았다. 가끔 싸우다가 녀석한테 등이나 허벅지 또는 팔을 물려 울면서 집에 가기는 했지만, 1983~1984년 경 나의 놀이터는 친구 재성이네 미용실의 어둑신한 다락방이었다.

1981년, 당시는 '국민학교'라 부르던 초등학교 1학년 때 인천에 살던 우리집은 서울로 이사와 동대문구 이문동 산동네 어귀 전파사집 '이오사'에 세들어 살았다. 재성이네 집은 우리집 골목 내려와 큰길 건너 미용실이었는데 아마도 이문시장 '오바로크집'을 연 우리 어머니의 단골 미용실이었을 수도 있고, 악착같던 재성이 엄마가 우리 어머니에게 고리의 일수놀이를 했을 수도 있다.

인천에서 '마징가'만 알던 나는, 1983년부턴가 재성이 다락방에서 마징가 말고도 수많은 로봇들이 지구를 지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토종 태권브이는 물론 철인28호, 5종 합체 메칸더브이와 사자왕 볼트론, 고대의 용자 라이덴, 변신합체 게타로보를 [슈퍼로봇대백과사전]을 통해 알게 되었고, 사이보그009와 바벨2세의 초능력 만화도 읽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신문물 만화와 잡지를 보고 내 공책에 그림으로 베껴오느라 재성이 다락방에서 통 내려오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려서부터 16절지 갱지와 모나미 볼펜으로 살아온 나는 창의력은 몰라도 모사력은 어디서도 뒤지지 않았다.

재성이의 다락방 컬렉션에는 일본 만화책의 모작들과 [로봇대백과사전] 외에 [괴수대백과사전]도 있었는데, 이것도 일본에서 1950년대에 만든 '고질라' 이야기였다. 재성이는 <다이나믹콩콩코믹스>에서 나온 해적판 일본 '대백과사전' 시리즈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한 권에 1천원이었으면 지금으로 치면 20~30배 정도로 보아 2~3만원 정도 아니었을까 싶은데 재성이는 그 귀한 '백과사전'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고질라를 알게된 나는 역시 친구의 다락방에서 안그래도 일본 작품을 무단으로 베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수백과사전'을 내 공책에 열심히 베꼈다.

나의 그림 모사능력은 그렇게 발전되면서 급기야 고등학교 시절에는 책받침의 귀한 소피 마르소 누님 사진까지 똑같이 소묘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2. 

"키메라(Chimera)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로, 불을 내뿜는 머리가 세 개 달린 괴물입니다.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용 또는 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의 형제입니다. 벨레로폰은 사냥을 하다가 실수로 형제를 죽인 죄를 속죄하기 위해 키메라를 죽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가 납덩어리를 단 긴 창을 키메라의 목구멍에 쑤셔 넣었습니다. 키메라가 벨레로폰에게 불꽃을 내뿜자 납덩어리가 배에서 녹아 키메라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 [신화동물접기백과], <2. 신화 속 동물 - 키메라>, 존 몬트롤, 2010.


재성이의 다락방 컬렉션에서 뺄 수 없는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종이접기대백과]였다. 누나들로부터 배운 '종이학'을 통해 '주머니접기'와 '펼쳐접기', '꺾어접기' 등의 기본기는 갖추고 있던 나는 온갖 동물과 식물, 나아가 괴수 '라돈'까지 나온 그 책을 따라 종이를 접기 시작했고, 너무 많은 동식물들을 전부 접을 수는 없기에 대부분의 중간 단계를 제끼고는 맨 마지막 최고 난이도로 기억하는 '라돈'을 며칠낮을 바쳐 마스터했다. 나에게는 그 책을 구할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라돈' 종이접기를 외웠다. 그 결과 반백이 되는 지금까지 대략 38년간 나의 종이접기 최종 필살기는 대괴수 '라돈'이었다. 

우리 둘째딸 송은규양은 나를 닮아서 그림과 공작활동, 종이접기 등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재성이의 다락방이 생각난 나는 종이접기 책을 검색하여 몇 권 사주었는데, 종이접기(origami) 세계에서는 미국의 수학자 로버트 랭과 존 몬트롤, 일본의 후지모토 무네지 등이 유명하다. 이들의 종이접기 창작능력을 보노라면 가히 '오리가미' 천재들이라 아니 말할 수가 없이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이 중 존 몬트롤(John Montroll)은 어린이들이나 성인남성들도 좋아할 공룡이나 신화속 동물(Mythological Creatures), 12지신(Chinese Zodiac) 등을 많이 접는데, 그의 책 [신화동물접기백과]의 최고난이도는 <키메라>(140pg)와 <머리 셋 달린 용>(148pg)이다. 

이 모든 것들을 접을 여유도 시간도 마음도 열정도 없던 중년의 나는 사실, 최근에 닥친 주말가족 생활이 아니었다면 초등때부터의 최종 필살기 '라돈' 하나만으로 버텼을 거다. 그런데 평일 혼자 방에서 책 읽고 글쓰기 끄적대는 것이 지루해졌을 무렵 지금은 '종이접기책'으로 볼 수 없어 거의 '무형문화재' 수준에다가 현재 미국식으로 '로단'이라 불리는 불의 화신 대괴수 '라돈'을 몇 마리 접던 중 문득 다른 필살기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말에 집에 갔을 때 둘째딸의 [신화동물접기대백과]의 최고난이도를 펼쳐 보았더랬다. 그랬더니 맨 마지막 최고 난이도의 <머리 셋 달린 용>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래전 고질라 시리즈에 등장하던 고질라의 숙적, 초강력 우주 대괴수 '킹기도라'였다. 오래전 재성이 다락방에서처럼 나는 다 건너뛰고 '기도라'에 도전했고 자취방에서 일주일간 접은 결과 '머리 셋 달린 용', '기도라'를 마스터했다. 이제 나에게는 '라돈(로단)'에 이어 '(킹)기도라'의 두 가지 종이접기 필살기가 생긴 것인데, 동양에서 모든 것은 '삼세판', 즉 3의 배수가 장땡이기에 하나 더 도전해 보았다.
존 몬트롤의 책에서 <머리 셋 달린 용> '기도라' 못지않게 별 네 개의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키메라(키마이라)>를 다음 목표로 잡았는데, 역시 최고 난이도인 기도라를 마스터하니 기도라를 접는데 쓰인 온갖 기술과 패턴들의 반복이라 실패없이 금방 키메라를 접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제우스신의 아들이자 미케네 문명을 건설한 그리스 최초의 반신반인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치자 그 피에서 날개달린 천마 <페가수스>(116pg)가 태어났고, 이후 코린토스의 용사 벨레로폰은 이 페가수스를 타고 뤼키아의 괴수 <키메라>(140pg)를 처치한다. 

이제, 21세기인 2022년의 경기도 오산 독방에서 외로운 시간과 싸우게 된 방랑전사인 나는 '키마이라'까지 종이로 접어서 처치하고 말았다.


3.

오래전 [괴수대백과사전]에서 '킹기도라'의 최후가 어땠는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아마도 그로부터 1년 남짓의 시간 동안 나는 불의 괴수 '라돈(로단)'을 종이로 완전히 접어버렸고, 용돈을 모아 [괴수대백과사전]과 [로봇대백과사전]을 구입했으며, 가끔씩 내 등을 물어 이빨자국을 내던 재성이의 다락방에 더는 오르지 않았다. 그 즈음 내게는 매우 똑똑하고 호기심 많던 민수라는 새 친구가 생겼고 민수는 종이접기는 못했지만 고질라 스토리텔링에 능했다. 아마도 그 나이에 일찌감치 각종 '대백과사전'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 구성을 잘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민수는 이후 중학교 시절까지 내내 나의 단짝이 된다.

당시 우리는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1984년의 이야기다.

- 나의 필살기 : 기도라 / 라돈 / 키메라

***

1. [신화동물접기백과(Mythological Creatures and Chinese Zodiac Origami)](2010), John Montroll, 신승미 옮김, <봄봄스쿨>, 2015.
2.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기원후 1세기), 오비디우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5.
3. [해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1942), 이디스 해밀턴, 서미석 옮김, <현대지성>, 2022.
4. [Mythology](1940), Edith Hamilton, <New American Library>, 1969. - Illustrated by Steele Sav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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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7 -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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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힘!
- [난처한 미술이야기] 1~2, 그리고 7권, 양정무, 2016~2022.


"어떻게 보면 16세기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집착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불안정한 현실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고전'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이런 연극 같은 미술도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기 위한 고민의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그 고민은 결국 '르네상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서양 근대의 저변에 배어 있는 정서가 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 이야기 7], <3. 매너리즘과 후기 르네상스>, 양정무, 2022.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대형 대포로 함락시켰을 때, 수많은 비잔틴 문명이 서방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로 유입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르네상스(Re-naissance:부흥/復興)'의 서막이 열리는 사건이었다.

무엇의 '부흥(復興)'인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부활(復活)'이다.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1천년 이상 유지되어 온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후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기원후 5세기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천년 가까이 더 살아남아 로마 제국의 문명을 이어왔다. 이슬람 투르크 제국에 의해 점령당한 후 동로마 비잔틴 지식인들과 장인들이 유럽 지역으로 탈출하면서 유럽의 중세 기독교 문화에 균열이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 문명의 '부활'이자 '부흥'이다.
또한, 현재도 진행형인 문화운동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되어가고 있을 때, 우리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대적인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석기도 그 시점에 발맞춰 급격히 발전했지요. 이걸 일컬어 '인지 혁명'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혹시 이와 같은 발달, 정확히는 '미술'의 출현에 현생 인류 생존의 비결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즉 '미술하는 인간'이었기에 살아남았던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이야기 1], <1. 원시미술>, 양정무, 2016.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인 미술사학자 양정무 선생은 2016년부터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시각예술로서의 미술은 이론적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될 수 있으므로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난처한) 미술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원시부터 근세 16세기 '르네상스'까지 7권으로 나온 미술사 대작이다. 17세기 바로크와 18세기 로코코, 19세기 신고전주의와 리얼리즘 및 낭만주의 등을 거쳐 20세기 현대미술은 앞으로 예고되어 있으므로 이후 몇 권이 더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둘째 딸 송은규양의 꿈은 화가였는데, 어릴적 혼자 어린이 공룡백과사전 등을 보며 '고고학자'를 꿈꾸기도 했던 아빠인 내가 '미술사학자'를 해보라고 권유하면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예술'로서 '그림'은 좋지만 '이론'으로서의 '미술사'는 반갑지 않단다. 한편, 책읽고 글쓰고 잘난체 하기 좋아하는 나는 '이론'으로서 '미술사'는 가장 좋아하고 환호하는 영역이다. 아빠한테 칭찬 받으려고 본인은 '역사책'을 매우 좋아한다며 책 읽는 아빠 앞에 앉아 그림으로 가득한 역사만화책을 항상 펼쳐드는 우리 막내 송혜규양은 차치하고라도, 공부는 뒷전이지만 체육 좋아하는 우리 아들 송민규군에게 체육은 '이론'으로도 즐거운 일이고, 또한 누구에게는 고전 클래식 음악은 '이론'으로도 익숙한 일이듯, 나에게는 '미술사' 이론이 감히 '취미'다.

지난해 [벌거벗은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Seria Ludo', 즉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라는 라틴어 건배사를 알게 해준 저자 양정무 교수는 미술사를 통해 '인문성(Humanity)'의 부활과 실패, 그리고 부흥의 영속성을 설명한다. '예술'을 이르는 'Art'는 라틴어 'Ars'를 어원으로 하고 'Ars'는 고대 그리스의 'Techne'가 어원이다. 즉, '미술(Fine Art)'은 좋은 '기술(Techne)'에서 유래한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건축이든 인류가 시작한 일체의 '시각 예술(Visual Art)'은 '좋은 기술(Fine Technic)'에서 기원하였고, 이 '기술'과 '미술'의 목적은 '인문성'의 시각화다.

저자의 [미술이야기] 대작은 그렇게 원시 미술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장대한 미술사 속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가 된다.
300만년 전 만들어진 주먹도끼와 1만년 전 빗살무늬 토기는 실용적 '기술'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원시 인류의 미적 감각이 투영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기술을 발명하고 전수하는 능력은 인류 공동체 역사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고 당연히 사회의 발전과 함께 사피엔스는 지금껏 진화했다. 언어는 정교해졌고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가장 단순한 시각화 작업인 그림, 즉 '미술'이 그 매개가 되었다. 4만년 전 그려진 동굴 벽화는 원시 인류의 꿈과 협력의 사회 현실이 담겨져 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자와 동아시아의 고대 한자가 그림과 같은 상형문자인 이유가 그것이다. 언어가 그림과 조각으로, 이것들이 다시 문자로 진화하는 장구한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미술하는 인간'인 '호모 그라피쿠스'로서 지구의 다수 종이 되어 이 세상을 지배했다. 물론 자연의 입장에서 인류의 지배기간이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그림과 조각이 세상을 공부하는 과정이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 옆 동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시국가와 제국, 법전과 유일신교 등이 시작된 인류의 '본사(本史)'와도 같은데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전체를 파괴한 이유 또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대함을 반증한단다. 알렉산더 제국의 헬레니즘 문화와 같이 역사상 제국들은 '미술' 즉 그림과 조각, 웅장한 건축물 등으로 문명의 발전을 과시했고 민중들을 규합했다. 다수 민중들이 문자를 이해하고 책을 읽게 되는 시대는 15~16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이후에야 가능했으니 그 전까지 '까막눈' 민중들은 '미술'을 통해 사회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해 나갔다. 
과연 수백만 년에 걸친 '호모 그라피쿠스'의 역사는 유구하다.


"... 곰브리치는 그리스 미술이 바로 그 (다양성의) 주변부 문화였다고 주장합니다. 시도해보고 잘 안되면 고쳐나가는 게 바로 그리스 문명, 나아가 서양 문명의 근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집트와 그리스가 차이 난다는 주장이기도 하고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2], <2. 그리스 미술>, 양정무, 2016.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1950)에서 그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모더니즘'을 예술의 본질로 보고 있지만, 그 근원에는 '미술가'들의 혁신이 있고 그들 유럽 문명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인문성'이라고 보았다. 곰브리치는 그리스 예술을 '주변부' 문화라고 보았다는데,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고 변화발전하는 특성으로 내린 규정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해양국가 그리스는 크레타-미케네-그리스 문명을 이어가며 이들 양대 문명을 흡수하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결국 본인들만의 문화로 발전시키게 되는데, 실로 고졸기 이전 그리스 조각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거나 훨씬 조악하다. 그러다가 독자적으로 발전된 이 그리스의 유연한 '주변부' 문화는 고대 로마 제국으로까지 계승되었는데, 우리가 많이 본 그리스 조각상들은 사실 그리스 청동상들을 로마인들이 똑같이 만든 대리석 모작들이다. '트로이'의 후손들이라 자처했던 로마인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손자 핼렌의 후예라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의 미술을 따라했지만 로마인들만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트로이의 복수로써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명을 대대적으로 파괴했을 수도 있겠지만 서양 유럽인들의 '고전주의' 인문성의 모델은 연속성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로마' 문명이라 불린다.


"라파엘로의 죽음은 '르네상스' 전성기, 즉 '하이 르네상스'의 종말을 뜻합니다. 하이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원숙하게 자리잡는 시기,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이 만들어진 때(1495~1498)부터 시작해서 라파엘로가 사망하는 1520년까지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 르네상스는 대략 30년 정도입니다. 라파엘로의 때 이른 죽음은 시대 구분의 기준이 될 만큼 미술사의 변곡점을 가져온 것이지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7], <1. 로마 르네상스>, 양정무, 2022.


르네상스의 시작은 마사초의 원근법과 브루넬리스키 돔지붕 성당, 보티첼리의 비너스 등과 함께 시작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다양한 연구와 그림,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대형 천장화의 대결을 통해 미술과 미술가의 지위를 연예인급으로 승격시켰고 후기 요절한 천재 라파엘로와 노련한 미켈란젤로의 2차전으로 미술계의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를 구가한다. 교황과 군주 등 권력자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셀럽이었던 미켈란젤로는 미술가의 지위를 높이면서 장수한 만큼 응큼했다. 예술가로서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하이 르네상스' 1차전에서 늙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경멸한 것처럼 2차전에서는 젊은 천재 라파엘로를 시기했다. 세속권력과 신교의 도전에 맞서 구교인 가톨릭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화 <최후의 심판>은 가톨릭 주교들의 비난을 받고 성자들의 누드에 옷을 덧칠하기도 했다. 물론 대가인 미켈란젤로의 사후에 그의 제자에 의해서지만.

라파엘로의 죽음으로 꺾인 로마와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이후 '매너리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마지막 북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의 전원미술과 틴토레토의 바로크식 구도의 예고 등으로 진화한다. 양정무 교수가 르네상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소개하는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전 그리스-로마 건축을 중세식 바실리카 양식과 결합하여 현대의 미국 백악관이나 한국 대학 본관의 양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전'을 통해 '인문성'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재부흥은 '미술'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고전주의'는 서양 제국의 권력자들의 정치예술이 아닌, 원시로부터 수백만 년간 이어져 온 '호모 그라피쿠스', 즉 '미술하는 인간'으로서 인류 전체의 꿈이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힘이다.

***

1.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 -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2. [난처한 미술이야기 2 - 그리스 로마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3. [난처한 미술이야기 7 - 르네상스 완성과 종교개혁], 양정무, <사회평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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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2 - 그리스.로마 문명과 미술 : 인간, 세상의 중심에 서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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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힘!
- [난처한 미술이야기] 1~2, 그리고 7권, 양정무, 2016~2022.


"어떻게 보면 16세기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집착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불안정한 현실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고전'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이런 연극 같은 미술도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기 위한 고민의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그 고민은 결국 '르네상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서양 근대의 저변에 배어 있는 정서가 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 이야기 7], <3. 매너리즘과 후기 르네상스>, 양정무, 2022.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대형 대포로 함락시켰을 때, 수많은 비잔틴 문명이 서방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로 유입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르네상스(Re-naissance:부흥/復興)'의 서막이 열리는 사건이었다.

무엇의 '부흥(復興)'인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부활(復活)'이다.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1천년 이상 유지되어 온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후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기원후 5세기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천년 가까이 더 살아남아 로마 제국의 문명을 이어왔다. 이슬람 투르크 제국에 의해 점령당한 후 동로마 비잔틴 지식인들과 장인들이 유럽 지역으로 탈출하면서 유럽의 중세 기독교 문화에 균열이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 문명의 '부활'이자 '부흥'이다.
또한, 현재도 진행형인 문화운동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되어가고 있을 때, 우리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대적인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석기도 그 시점에 발맞춰 급격히 발전했지요. 이걸 일컬어 '인지 혁명'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혹시 이와 같은 발달, 정확히는 '미술'의 출현에 현생 인류 생존의 비결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즉 '미술하는 인간'이었기에 살아남았던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이야기 1], <1. 원시미술>, 양정무, 2016.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인 미술사학자 양정무 선생은 2016년부터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시각예술로서의 미술은 이론적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될 수 있으므로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난처한) 미술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원시부터 근세 16세기 '르네상스'까지 7권으로 나온 미술사 대작이다. 17세기 바로크와 18세기 로코코, 19세기 신고전주의와 리얼리즘 및 낭만주의 등을 거쳐 20세기 현대미술은 앞으로 예고되어 있으므로 이후 몇 권이 더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둘째 딸 송은규양의 꿈은 화가였는데, 어릴적 혼자 어린이 공룡백과사전 등을 보며 '고고학자'를 꿈꾸기도 했던 아빠인 내가 '미술사학자'를 해보라고 권유하면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예술'로서 '그림'은 좋지만 '이론'으로서의 '미술사'는 반갑지 않단다. 한편, 책읽고 글쓰고 잘난체 하기 좋아하는 나는 '이론'으로서 '미술사'는 가장 좋아하고 환호하는 영역이다. 아빠한테 칭찬 받으려고 본인은 '역사책'을 매우 좋아한다며 책 읽는 아빠 앞에 앉아 그림으로 가득한 역사만화책을 항상 펼쳐드는 우리 막내 송혜규양은 차치하고라도, 공부는 뒷전이지만 체육 좋아하는 우리 아들 송민규군에게 체육은 '이론'으로도 즐거운 일이고, 또한 누구에게는 고전 클래식 음악은 '이론'으로도 익숙한 일이듯, 나에게는 '미술사' 이론이 감히 '취미'다.

지난해 [벌거벗은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Seria Ludo', 즉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라는 라틴어 건배사를 알게 해준 저자 양정무 교수는 미술사를 통해 '인문성(Humanity)'의 부활과 실패, 그리고 부흥의 영속성을 설명한다. '예술'을 이르는 'Art'는 라틴어 'Ars'를 어원으로 하고 'Ars'는 고대 그리스의 'Techne'가 어원이다. 즉, '미술(Fine Art)'은 좋은 '기술(Techne)'에서 유래한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건축이든 인류가 시작한 일체의 '시각 예술(Visual Art)'은 '좋은 기술(Fine Technic)'에서 기원하였고, 이 '기술'과 '미술'의 목적은 '인문성'의 시각화다.

저자의 [미술이야기] 대작은 그렇게 원시 미술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장대한 미술사 속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가 된다.
300만년 전 만들어진 주먹도끼와 1만년 전 빗살무늬 토기는 실용적 '기술'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원시 인류의 미적 감각이 투영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기술을 발명하고 전수하는 능력은 인류 공동체 역사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고 당연히 사회의 발전과 함께 사피엔스는 지금껏 진화했다. 언어는 정교해졌고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가장 단순한 시각화 작업인 그림, 즉 '미술'이 그 매개가 되었다. 4만년 전 그려진 동굴 벽화는 원시 인류의 꿈과 협력의 사회 현실이 담겨져 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자와 동아시아의 고대 한자가 그림과 같은 상형문자인 이유가 그것이다. 언어가 그림과 조각으로, 이것들이 다시 문자로 진화하는 장구한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미술하는 인간'인 '호모 그라피쿠스'로서 지구의 다수 종이 되어 이 세상을 지배했다. 물론 자연의 입장에서 인류의 지배기간이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그림과 조각이 세상을 공부하는 과정이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 옆 동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시국가와 제국, 법전과 유일신교 등이 시작된 인류의 '본사(本史)'와도 같은데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전체를 파괴한 이유 또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대함을 반증한단다. 알렉산더 제국의 헬레니즘 문화와 같이 역사상 제국들은 '미술' 즉 그림과 조각, 웅장한 건축물 등으로 문명의 발전을 과시했고 민중들을 규합했다. 다수 민중들이 문자를 이해하고 책을 읽게 되는 시대는 15~16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이후에야 가능했으니 그 전까지 '까막눈' 민중들은 '미술'을 통해 사회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해 나갔다. 
과연 수백만 년에 걸친 '호모 그라피쿠스'의 역사는 유구하다.


"... 곰브리치는 그리스 미술이 바로 그 (다양성의) 주변부 문화였다고 주장합니다. 시도해보고 잘 안되면 고쳐나가는 게 바로 그리스 문명, 나아가 서양 문명의 근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집트와 그리스가 차이 난다는 주장이기도 하고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2], <2. 그리스 미술>, 양정무, 2016.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1950)에서 그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모더니즘'을 예술의 본질로 보고 있지만, 그 근원에는 '미술가'들의 혁신이 있고 그들 유럽 문명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인문성'이라고 보았다. 곰브리치는 그리스 예술을 '주변부' 문화라고 보았다는데,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고 변화발전하는 특성으로 내린 규정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해양국가 그리스는 크레타-미케네-그리스 문명을 이어가며 이들 양대 문명을 흡수하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결국 본인들만의 문화로 발전시키게 되는데, 실로 고졸기 이전 그리스 조각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거나 훨씬 조악하다. 그러다가 독자적으로 발전된 이 그리스의 유연한 '주변부' 문화는 고대 로마 제국으로까지 계승되었는데, 우리가 많이 본 그리스 조각상들은 사실 그리스 청동상들을 로마인들이 똑같이 만든 대리석 모작들이다. '트로이'의 후손들이라 자처했던 로마인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손자 핼렌의 후예라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의 미술을 따라했지만 로마인들만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트로이의 복수로써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명을 대대적으로 파괴했을 수도 있겠지만 서양 유럽인들의 '고전주의' 인문성의 모델은 연속성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로마' 문명이라 불린다.


"라파엘로의 죽음은 '르네상스' 전성기, 즉 '하이 르네상스'의 종말을 뜻합니다. 하이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원숙하게 자리잡는 시기,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이 만들어진 때(1495~1498)부터 시작해서 라파엘로가 사망하는 1520년까지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 르네상스는 대략 30년 정도입니다. 라파엘로의 때 이른 죽음은 시대 구분의 기준이 될 만큼 미술사의 변곡점을 가져온 것이지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7], <1. 로마 르네상스>, 양정무, 2022.


르네상스의 시작은 마사초의 원근법과 브루넬리스키 돔지붕 성당, 보티첼리의 비너스 등과 함께 시작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다양한 연구와 그림,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대형 천장화의 대결을 통해 미술과 미술가의 지위를 연예인급으로 승격시켰고 후기 요절한 천재 라파엘로와 노련한 미켈란젤로의 2차전으로 미술계의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를 구가한다. 교황과 군주 등 권력자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셀럽이었던 미켈란젤로는 미술가의 지위를 높이면서 장수한 만큼 응큼했다. 예술가로서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하이 르네상스' 1차전에서 늙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경멸한 것처럼 2차전에서는 젊은 천재 라파엘로를 시기했다. 세속권력과 신교의 도전에 맞서 구교인 가톨릭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화 <최후의 심판>은 가톨릭 주교들의 비난을 받고 성자들의 누드에 옷을 덧칠하기도 했다. 물론 대가인 미켈란젤로의 사후에 그의 제자에 의해서지만.

라파엘로의 죽음으로 꺾인 로마와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이후 '매너리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마지막 북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의 전원미술과 틴토레토의 바로크식 구도의 예고 등으로 진화한다. 양정무 교수가 르네상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소개하는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전 그리스-로마 건축을 중세식 바실리카 양식과 결합하여 현대의 미국 백악관이나 한국 대학 본관의 양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전'을 통해 '인문성'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재부흥은 '미술'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고전주의'는 서양 제국의 권력자들의 정치예술이 아닌, 원시로부터 수백만 년간 이어져 온 '호모 그라피쿠스', 즉 '미술하는 인간'으로서 인류 전체의 꿈이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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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 -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2. [난처한 미술이야기 2 - 그리스 로마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3. [난처한 미술이야기 7 - 르네상스 완성과 종교개혁], 양정무, <사회평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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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1 -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 : 미술하는 인간이 살아남는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1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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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힘!
- [난처한 미술이야기] 1~2, 그리고 7권, 양정무, 2016~2022.


"어떻게 보면 16세기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집착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불안정한 현실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고전'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이런 연극 같은 미술도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기 위한 고민의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그 고민은 결국 '르네상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서양 근대의 저변에 배어 있는 정서가 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 이야기 7], <3. 매너리즘과 후기 르네상스>, 양정무, 2022.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대형 대포로 함락시켰을 때, 수많은 비잔틴 문명이 서방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로 유입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르네상스(Re-naissance:부흥/復興)'의 서막이 열리는 사건이었다.

무엇의 '부흥(復興)'인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부활(復活)'이다.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1천년 이상 유지되어 온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후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기원후 5세기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천년 가까이 더 살아남아 로마 제국의 문명을 이어왔다. 이슬람 투르크 제국에 의해 점령당한 후 동로마 비잔틴 지식인들과 장인들이 유럽 지역으로 탈출하면서 유럽의 중세 기독교 문화에 균열이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 문명의 '부활'이자 '부흥'이다.
또한, 현재도 진행형인 문화운동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되어가고 있을 때, 우리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대적인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석기도 그 시점에 발맞춰 급격히 발전했지요. 이걸 일컬어 '인지 혁명'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혹시 이와 같은 발달, 정확히는 '미술'의 출현에 현생 인류 생존의 비결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즉 '미술하는 인간'이었기에 살아남았던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이야기 1], <1. 원시미술>, 양정무, 2016.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인 미술사학자 양정무 선생은 2016년부터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시각예술로서의 미술은 이론적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될 수 있으므로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난처한) 미술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원시부터 근세 16세기 '르네상스'까지 7권으로 나온 미술사 대작이다. 17세기 바로크와 18세기 로코코, 19세기 신고전주의와 리얼리즘 및 낭만주의 등을 거쳐 20세기 현대미술은 앞으로 예고되어 있으므로 이후 몇 권이 더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둘째 딸 송은규양의 꿈은 화가였는데, 어릴적 혼자 어린이 공룡백과사전 등을 보며 '고고학자'를 꿈꾸기도 했던 아빠인 내가 '미술사학자'를 해보라고 권유하면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예술'로서 '그림'은 좋지만 '이론'으로서의 '미술사'는 반갑지 않단다. 한편, 책읽고 글쓰고 잘난체 하기 좋아하는 나는 '이론'으로서 '미술사'는 가장 좋아하고 환호하는 영역이다. 아빠한테 칭찬 받으려고 본인은 '역사책'을 매우 좋아한다며 책 읽는 아빠 앞에 앉아 그림으로 가득한 역사만화책을 항상 펼쳐드는 우리 막내 송혜규양은 차치하고라도, 공부는 뒷전이지만 체육 좋아하는 우리 아들 송민규군에게 체육은 '이론'으로도 즐거운 일이고, 또한 누구에게는 고전 클래식 음악은 '이론'으로도 익숙한 일이듯, 나에게는 '미술사' 이론이 감히 '취미'다.

지난해 [벌거벗은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Seria Ludo', 즉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라는 라틴어 건배사를 알게 해준 저자 양정무 교수는 미술사를 통해 '인문성(Humanity)'의 부활과 실패, 그리고 부흥의 영속성을 설명한다. '예술'을 이르는 'Art'는 라틴어 'Ars'를 어원으로 하고 'Ars'는 고대 그리스의 'Techne'가 어원이다. 즉, '미술(Fine Art)'은 좋은 '기술(Techne)'에서 유래한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건축이든 인류가 시작한 일체의 '시각 예술(Visual Art)'은 '좋은 기술(Fine Technic)'에서 기원하였고, 이 '기술'과 '미술'의 목적은 '인문성'의 시각화다.

저자의 [미술이야기] 대작은 그렇게 원시 미술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장대한 미술사 속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가 된다.
300만년 전 만들어진 주먹도끼와 1만년 전 빗살무늬 토기는 실용적 '기술'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원시 인류의 미적 감각이 투영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기술을 발명하고 전수하는 능력은 인류 공동체 역사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고 당연히 사회의 발전과 함께 사피엔스는 지금껏 진화했다. 언어는 정교해졌고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가장 단순한 시각화 작업인 그림, 즉 '미술'이 그 매개가 되었다. 4만년 전 그려진 동굴 벽화는 원시 인류의 꿈과 협력의 사회 현실이 담겨져 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자와 동아시아의 고대 한자가 그림과 같은 상형문자인 이유가 그것이다. 언어가 그림과 조각으로, 이것들이 다시 문자로 진화하는 장구한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미술하는 인간'인 '호모 그라피쿠스'로서 지구의 다수 종이 되어 이 세상을 지배했다. 물론 자연의 입장에서 인류의 지배기간이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그림과 조각이 세상을 공부하는 과정이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 옆 동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시국가와 제국, 법전과 유일신교 등이 시작된 인류의 '본사(本史)'와도 같은데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전체를 파괴한 이유 또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대함을 반증한단다. 알렉산더 제국의 헬레니즘 문화와 같이 역사상 제국들은 '미술' 즉 그림과 조각, 웅장한 건축물 등으로 문명의 발전을 과시했고 민중들을 규합했다. 다수 민중들이 문자를 이해하고 책을 읽게 되는 시대는 15~16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이후에야 가능했으니 그 전까지 '까막눈' 민중들은 '미술'을 통해 사회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해 나갔다. 
과연 수백만 년에 걸친 '호모 그라피쿠스'의 역사는 유구하다.


"... 곰브리치는 그리스 미술이 바로 그 (다양성의) 주변부 문화였다고 주장합니다. 시도해보고 잘 안되면 고쳐나가는 게 바로 그리스 문명, 나아가 서양 문명의 근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집트와 그리스가 차이 난다는 주장이기도 하고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2], <2. 그리스 미술>, 양정무, 2016.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1950)에서 그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모더니즘'을 예술의 본질로 보고 있지만, 그 근원에는 '미술가'들의 혁신이 있고 그들 유럽 문명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인문성'이라고 보았다. 곰브리치는 그리스 예술을 '주변부' 문화라고 보았다는데,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고 변화발전하는 특성으로 내린 규정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해양국가 그리스는 크레타-미케네-그리스 문명을 이어가며 이들 양대 문명을 흡수하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결국 본인들만의 문화로 발전시키게 되는데, 실로 고졸기 이전 그리스 조각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거나 훨씬 조악하다. 그러다가 독자적으로 발전된 이 그리스의 유연한 '주변부' 문화는 고대 로마 제국으로까지 계승되었는데, 우리가 많이 본 그리스 조각상들은 사실 그리스 청동상들을 로마인들이 똑같이 만든 대리석 모작들이다. '트로이'의 후손들이라 자처했던 로마인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손자 핼렌의 후예라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의 미술을 따라했지만 로마인들만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트로이의 복수로써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명을 대대적으로 파괴했을 수도 있겠지만 서양 유럽인들의 '고전주의' 인문성의 모델은 연속성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로마' 문명이라 불린다.


"라파엘로의 죽음은 '르네상스' 전성기, 즉 '하이 르네상스'의 종말을 뜻합니다. 하이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원숙하게 자리잡는 시기,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이 만들어진 때(1495~1498)부터 시작해서 라파엘로가 사망하는 1520년까지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 르네상스는 대략 30년 정도입니다. 라파엘로의 때 이른 죽음은 시대 구분의 기준이 될 만큼 미술사의 변곡점을 가져온 것이지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7], <1. 로마 르네상스>, 양정무, 2022.


르네상스의 시작은 마사초의 원근법과 브루넬리스키 돔지붕 성당, 보티첼리의 비너스 등과 함께 시작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다양한 연구와 그림,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대형 천장화의 대결을 통해 미술과 미술가의 지위를 연예인급으로 승격시켰고 후기 요절한 천재 라파엘로와 노련한 미켈란젤로의 2차전으로 미술계의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를 구가한다. 교황과 군주 등 권력자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셀럽이었던 미켈란젤로는 미술가의 지위를 높이면서 장수한 만큼 응큼했다. 예술가로서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하이 르네상스' 1차전에서 늙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경멸한 것처럼 2차전에서는 젊은 천재 라파엘로를 시기했다. 세속권력과 신교의 도전에 맞서 구교인 가톨릭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화 <최후의 심판>은 가톨릭 주교들의 비난을 받고 성자들의 누드에 옷을 덧칠하기도 했다. 물론 대가인 미켈란젤로의 사후에 그의 제자에 의해서지만.

라파엘로의 죽음으로 꺾인 로마와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이후 '매너리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마지막 북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의 전원미술과 틴토레토의 바로크식 구도의 예고 등으로 진화한다. 양정무 교수가 르네상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소개하는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전 그리스-로마 건축을 중세식 바실리카 양식과 결합하여 현대의 미국 백악관이나 한국 대학 본관의 양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전'을 통해 '인문성'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재부흥은 '미술'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고전주의'는 서양 제국의 권력자들의 정치예술이 아닌, 원시로부터 수백만 년간 이어져 온 '호모 그라피쿠스', 즉 '미술하는 인간'으로서 인류 전체의 꿈이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힘이다.

***

1.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 -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2. [난처한 미술이야기 2 - 그리스 로마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3. [난처한 미술이야기 7 - 르네상스 완성과 종교개혁], 양정무, <사회평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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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 애덤 스미스부터 21세기 자본주의까지 비판적 관점으로 본
E. K. 헌트.마크 라우첸하이저 지음, 홍기빈 옮김 / 시대의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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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E.K.Hunt, 1979~2011.


"경제를 바라보는 사상과 관점을 헌트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이분법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라는 것이다."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옮긴이의 말>, 홍기빈, 2015.


1.

백발의 교수는 학생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독백하듯 강의를 이어나간다. 경제학과 전공필수 과목이라 수강생의 대부분은 경제학과 학생들이었을 거다. 영문학과는 나 혼자였다. 수학적 공식과 증명은 나오지 않았다. 얼핏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조용한 강의였지만 가급적 수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묘한 일이지만 '경제학'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수학'이 아니라 '역사학'과 함께 듣는 '경제학', 1994년 2학기에 영문과 2학년인 내가 들었던 경제학과 강의는 '경제학사(經濟學史)'였다. 재미있었지만 학점은 'B'였다. '경제학'에 자신이 생겨 내친 김에 1995년 3학년 1학기에 신청한 경제학과 교양필수 '경제학 원론(原論)'은 주류 미시경제학을 나 나름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관점에 입각하여 노트하고 '비판'적 시험 답안지를 제출한 결과 'C+'을 맞았다. 
제대 후 복학해서는 난 더 이상 경제학과 강의를 신청하지 않았고, 주로 국문학과 전공 강의를 기웃거렸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칭했지만 (정치)경제학에 역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난 후의 내 꿈은 '소설가'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문과 강의는 경제학보다 재미있었다.

그래도 내게 '경제학'은 일종의 아픈 손가락과 같이 애잔하다.
잘 하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기 보다, 
애초부터 이해할 '머리'가 없어 아쉬운 그런.


2.

"경제사상사에서 빈번하게 되풀이되는 주제 하나는 '자본주의'가 과연 '조화'를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갈등'을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라는 것인데, 이것이 이 책의 중심주제가 될 것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서문>, E.K.Hunt, 1979.


'경제학'에 아주 잠시 관심을 두었던 이십대 초반 한때 나의 관심사는 '자본주의'였다. 당시는 아직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마저 읽지 못한 상태였는데, 1990년대 초반의 대학 분위기에 편승하여 선배들을 따라 '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습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철학'을 지향했다.
'경제학사'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경제학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비판을 목적으로 했던 '비주류' 경제학 사상들과 그 기원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답안지에 자본주의 '비판'을 잔뜩 써서 내도 'B'는 맞았다. 그러나 다음 학기 '경제학 원론'은 달랐다. 수요-공급 곡선과 '한계효용',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기조정적 시장을 이해하고 변론하지 못하면 그냥 'C'였다. 
'미시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크고도 험한 산이었다.


미국의 급진적 정치경제학자인 유타대학 경제학 교수 E.K.헌트(Emery Kay Hunt : 1937~)는 그의 나이 사십대 초반이었을 1979년에 [경제사상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 초판을 낸다. 
이후 헌트는 2008년 세계 자본주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동료학자 마크 라우첸하이저(Mark Lautzenheiser)와 함께 책의 말미에 <오늘날의 경제학> 몇 장을 추가 증보하여 2011년 3판까지 발표했고, 아마도 1980년대 담배연기 자욱한 반지하 자취방에서 초판을 학습했을 우리 사회 진보적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선생이 2015년에 이 3판을 번역했다.

헌트의 입장은 명확하다. '중립'적이거나 '불편부당'하지도 않다. 대놓고 자본주의 '비판'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정의하고 계급투쟁을 이야기하며, 아담 스미스부터 현재의 주류-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서술한다. 역자 홍기빈 선생에 의하면 헌트가 영미권 경제학자라는 한계로 인해 유럽의 막스 베버와 조지프 슘페터, 북유럽 사민주의 사회의 '제도주의' 경향들을 다루지 않아 아쉬운 점은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결로 주류 경제학에 대항하고 반론을 펼친 소스타인 베블런(같은책, <12장>)과 피에로 스라파(같은책, <16장>) 같은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어 경제학에서 "정녕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소중하게 붙들어야 할 진실의 고갱이가 무엇인지"(같은책, <옮긴이의 말>) 고민하는 이들에게 "꼭 읽으라고 간곡히 권하고"(같은책, 같은곳) 있다.

E.K.헌트의 이 250년 경제학 역사 이야기책 제목은 '경제학사(History of Economics)'가 아닌 '경제사상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이다. 즉, 경제학에 관한 헌트의 기본 관점은 '개인들의 교환'이 아니라 '노동가치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그것이다. 따라서 '신고전파'라 분류되는 주류 경제학이 가정하는 '합리적 개인'이 아닌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렇기에 헌트의 '경제학' 역사는 추상적인 경제학 '이론'(Economics)의 역사가 아니라, 경제학 '사상'(Economic Thought)의 '역사'(History)가 된다.
역자는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헌트의 [경제사상사]는 경제학을 "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라는 주제를 화두로 둔다고 말한다. 저자 E.K.헌트는 <서문>에서 현재 자본주의 특정 사회체제를 "과연 '조화'를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갈등'을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라는 질문에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어떠한 대답을 제출했는지가 그의 [경제사상사]에서 '중심주제'가 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경제사상사]에서 '경제학'은 '사회적 생산'이며, '자본주의'는 계급간 '갈등'을 향해 가는 체제이다.


"공리주의 이데올로기는 토지와 자본 또한 노동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품을 생산하며, 따라서 토지 소유자와 자본가도 노동자가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생산요소 덕분에 나온 생산물의 가치 등가물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훈련... 
인간 노동이 상품의 지위로까지 추락한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에서만 여타의 상품이 인간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으며 그래서 인간들이 생산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산을 행하는 것인양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공리주의 경제학에서 생겨나는 반(反)계몽주의일 뿐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19. 오늘날의 경제학 III :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부활>, E.K.Hunt/Mark Lautzenheiser, 2011.


본인을 "편파적이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같은책, <19장>)이라고 공언하며 신고전파 주류경제학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 철학을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는 저자 E.K.헌트는, 내가 읽기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저자가 마르크스를 [경제사상사] <9장>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요강(그룬드뤼세:Grundrisse)]과 [자본론(Das Kapital)] 중심으로 각별하게 다루는 것은 물론, 개인들의 '효용'을 중심으로 한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기본 관점이 사실상 사회적 생산의 기본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으로서의 '노동가치론'이라는 점, 마르크스에 대한 헌트의 유일한 비판이 자본주의 '종말론'의 '잘못된 예측' 한 가지 뿐인 점, 마르크스의 후예로서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20세기초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본원축적론'의 관점에서 탁월하게 분석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 규정한 레닌까지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같은책, <13장>) 등이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주요한 특색이다. 이는 물론 개인 '효용'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의 '자기조정성'을 갖는다는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제국주의'를 탐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18~19세기 전통적인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효용'과 '한계주의(marginalism)'로 치환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 '갈등'을 '합리적'인 개인들의 '조화'로 '살균처리'해 버린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에 철저히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파적"인 헌트는 '경제학'을 '사회적 생산'의 '노동가치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를  '갈등'의 체제로 분석한다.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류경제학이 '신고전파'인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고전파'의 정치경제학 이론과 '공리주의' 철학을 '신비화'시켰기 때문인데, '신(新)'을 접두사로 쓴 사상 일체는 기존 사상을 '신비화'시키고 '교조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고전파'의 정치경제학을 경제학이라는 '과학'으로 수치화했고, 생물처럼 유기적인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의 '자기조정성'이라는 신화로 만들었다. 주류경제학은 '수학'과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상 현체제인 자본주의를 '종교'로 하는 신학에 불과하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 폴 새뮤얼슨 같은 경제학자들은 '신고전파'이기는 했으나 자본주의 체제의 '갈등'을 인정한 '절충주의'였는데, 그들의 '철학' 사상은 영국의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 등 자본주의 체제 변호론자들로 이어지며 정리되는 '공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였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 일체를 '효용'과 '쾌락'으로 치환하고 일반화시킨 '공리주의'는 경제학을 '노동가치'가 아닌 '효용가치'로만 파악하므로 "압정이든 시든", "자본가나 지주든 노동자든" 그 어떤 차이나 일체의 '갈등'을 탈색시키고 만다. 사회적 관계가 탈각된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의 효용과 쾌락만 남은 '공리주의' 철학은 실재하지 않는 개인만을 상정하고 있기에 현실을 변호하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쓸모없는 공허한 철학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천년왕국의 천상에 자리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철학이 '공리주의'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에서 '유효수요론'으로 주류경제학의 한 분파로 편입된 케인스주의는 '신고전파'의 '자기조정' 시장을 기각하고 정부의 시장조정 기능을 강조하며 이후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되었고(같은책, <15장>), 폴 새뮤얼슨은 '신고전파'의 '미시경제론'과 '케인스주의'적 '거시경제론'을 '절충'하여 주류경제학의 양대 기둥이 되도록 역할을 했다(같은책, <18장>). 그럼에도 이들의 철학은 공통적으로 '공리주의'였으며 '노동'보다는 '(한계)효용'에 주목했다. 
자본주의 신화에서 '공리주의' 철학은 '반계몽주의' 또는 '반지성주의'에 불과하다.


"(피에로) 스라파가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을 쓴 주된 목적은 신고전파 '한계효용이론'을 대체할 이론으로서 리카도의 '가격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불변의 가치척도'를 찾고자 한 리카도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말하는 '표준산업'의 생산의 기술조건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상품의 가격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경제 전체의 이윤율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18. 오늘날의 경제학 II : 제도주의와 포스트 케인스주의>, E.K.Hunt/Mark Lautzenheiser, 2011.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관한 '과학'적 종합분석으로 인류 사상계에서 지대한 영역을 점하고 있지만,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류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사상을 무시한채 '수학'의 영역에서 따로 놀아왔다. 그런데 1960년대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는 '신고전파'의 '수학'의 영역에서 이들의 '자본이 측정 가능한 생산성을 가진다'는 '신화'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일반균형론'을 깼다고 한다. 즉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존립할 수 있었던 주요 근거들을 '수학'적으로 무너뜨렸기에 이에 당황한 '신고전파'들이 논쟁의 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기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같은책, <9,13,19장>)이나 소스타인 베블런(같은책, <12장>) 등의 비판적 정치경제학은 지금껏 '신고전파' 경제학(같은책, <6,8,10,11,14,17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 자기 주장만 할 뿐 '철학적 토론'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1960년대 이탈리아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에 의해 이러한 '대치'가 깨졌다. 전통적 '노동가치론'에 입각한 스라파가 '신고전파'가 성역화한 '수학'의 영역에서 '표준산업'이라는 '불변의 가치척도' 개념을 가지고 '자본측정성'과 '일반균형성'의 오류를 증명했다고 하는데, 사실 헌트도 인정하듯이 이러한 '수학'의 증명과 논쟁 과정은 일반인에게 매우 난해한 과정이므로 [경제사상사]에서 상세히 다룰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소략하게 소개되고 있는 스라파의 '표준산업' 중심 증명식을 내가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저자는 물론 역자가 높이 평가하는 피에로 스라파의 업적은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에게 '수학'적 찬물을 끼얹었고 그들 자체적인 반성과 '이론'적인 수정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1979년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초판의 피날레가 피에로 스라파가 아니었을까 싶게 헌트의 스라파 평가는 매우 높다. 
비록 자본주의를 좀더 '인간적인' 체제로 수정하게끔 했던 마르크스주의와 케인스주의였지만 주류경제학이 이를 통해 채용한 것은 '이론'적 수정이 아니라 '정책'적 수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추정되는 이 책의 저자 E.K.헌트는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이론'적으로 무시하고 침묵하는 마르크스보다, '수학'의 전장에서 정면으로 반론하고 논쟁하는, 그리하여 결국 적들의 학문적인 수정까지 이끌어낸 피에로 스라파를 그의 비판적 [경제사상사]에서 무심하고 건조하게 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역자인 홍기빈 선생 또한 이 책의 <16장> 피에로 스라파 이야기를 적극 추천하고 있다. 
스라파는 '잉여가치론'을 수용하지 않았기에 비판적 정치경제학자였음에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신만의 독자적 힘으로 '수학'의 전장에서 강력한 '신고전파' 대군을 물리친 역전의 경제학자였다. 21세기 현재는 다시 '주류경제학'과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토론이 사라진 시대로 회귀했다고 이 책의 <19장>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여전히 주류경제학이 '수학'의 천상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천상의 '효용'이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한, 현실에서 다수 사람들이 생산해내는 '노동'의 가치와 만나는 날은 없을 듯 하다. 그럼에도 역시 여전히도 천상으로 직접 올라가 '수학'의 무기를 들고 자본주의 십자군들과 싸울 '이단적 경제학(heterodox economics)'이 절실하다.
비록, 그 전투의 생생함을 절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반인의 지능을 지닌 나지만, '수학'의 영역에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전사들을 기다리고 응원한다.


3. 

"나는 편파적이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 E.K.Hunt, [경제사상사], <결론 :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 1979.


백발이었지만 그리 늙어보이지는 않았던 1994년 2학기 '경제학사' 교수님의 성함은 잊었다. 그리 활력 넘치는 강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저 교수가 경제학과 '비주류'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내심 했고, 강의내용에 '비판적 정치경제학'이 많이 언급되어 나는 나름대로 그 강의에 'A+' 이상을 줬다. 비록 내가 받은 결과는 'B'였지만 내가 돌려주는 평가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뭐 'B' 정도면 틈틈이 제도 밖으로 땡땡이를 치고 싶어하던 그 당시 나의 평균으로 따졌을 때 그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스스로를 "편파적"이라고, '비판적 정치경제학자'로 공공연히 선언한 헌트는 [경제사상사] 초판(1979)을 마무리하는 절인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에서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를 이루는 인간 보편의 필요욕구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인간관을 인정하는 '사회적 관점'을 재차 강조한다. 
아마도 피에로 스라파와의 '수학'적 전투를 거쳐 수정되면서 절충주의(폴 새뮤얼슨)와 오스트리아학파(프리드리히 하이에크)/시카고학파(밀턴 프리드먼)로 '양분'(같은책, <17장>)되는 '정통파 경제학' 이야기에서 마무리되었을 1979년 초판의 결론은 헌트의 자본주의 비판 '12개 테제들' 아닐까 싶다. 
중복되기도 하여 12가지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헌트가 보는 자본주의는, 
1) 갈등과 착취 기반 시스템, 2) 계급투쟁의 근본성, 3) 노동의 상품성으로 인한 소외, 4) 시장의 무정부성과 만성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성, 5) 정서적 파편화로 인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로의 왜곡, 6) 멈출 줄 모르는 소비주의, 7) 공공성 부재, 8) 소외계층 만연, 9) 체제 영속의 도구로서의 교육, 10) 오로지 이윤만이 목적이기에 발생하는 기후위기 등으로 정의된다.

이후 2008년 세계 자본주의 체제위기를 거쳐 <18장>의 '제도주의'와 '포스트 케인스주의', <19장>의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부활이 마크 라우첸하우어에 의해 증보된 듯 한데, 40년이 더 지난 3판에서도 헌트의 초판 결론은 변함이 없거나 오히려 더 강화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비록 '경제학'과 담을 쌓은지 오래지만, 설령 마르크스주의 '잉여가치론'을 따르지 않더라도 지금의 체제만이 아닌 좀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비판적 정치경제학'과 '노동가치론'은 언제고 환영하고 응원할 것이다. 
매우 방대하고 어렵지만 경제학 '백과사전'처럼 항상 곁에 두고 사안마다 찾아보고 참고하는 '경제사상사' 한 권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 든든하다.
수년 전 사놓고 곁에만 두고 있다가 이제야 이해가 되든 안되었든 통독이나마 마쳤다는 점도 물론.

어쨌든,
1994년의 청년이었던 내가 '경제학사'에게 'A+' 이상을 주었듯,
2022년의 중년인 나는 '경제사상사'에게도 'A+' 이상을 주었다.


"... 나는 중립적이지도 불편부당하지도 않다. 나는 자본주의가 인간 합리성의 절정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증가시킴으로써 대단히 중요하고 진보적인 기능을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자본주의의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결국 퇴행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되었다. 오늘날 존재하는 시스템은 인간들이 스스로의 잠재적 가능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을 체계적으로 좌절시킨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며 비합리적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결론 :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 E.K.Hunt, 1979.

***

- [E.K.헌트의 경제사상사](1979~2011), E.K.Hunt/Mark Lautzenheiser, 홍기빈 옮김, <시대의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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