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 안준범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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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체제극복을 위해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하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불평등… 핵심적인 문제는 불평등의 크기 자체라기보다는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평등의 구조를 분석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 [21세기 자본], <3-7. 불평등과 집중 : 기본적 지표>, 토마 피케티, 2013.


자본주의체제의 '불평등' 주제에 천착해 온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013년 [21세기 자본]이라는 저서를 통해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한 바 있다. 당시 '노동' 대신 '인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고수한 그는 자본주의 체제 전환을 적극 주장하지는 않았다. 주요 내용은 자본수익률(r)은 4~5%인데 반해 경제성장률(g)은 장기적으로 1~1.5%이므로 이 'r>g'의 부등식은 불평등과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자본주의 체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인데, 이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300년 이상의 방대한 '불평등' 데이터로 무장한 그의 적은 '주류 경제학'이었다. [21세기 자본]에서 토마 피케티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정치경제학자였다.




"결정적 문제는 불평등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의 기원이요, 정당화 도식이다... 모든 것은 다시금 불평등의 기원과 불평등의 정당화에 달려있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서론>, 토마 피케티, 2019.

"불평등'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적이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3-13.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토마 피케티, 2019.

"각각의 불평등주의체제는 사실상 나름의 정의 이론에 기초한다. 불평등은 정당화되어야 하고 이상적인 사회적, 정치적 조직화의 그럴듯하고 일관된 관점에 의거해야 한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4. 경계와 소유 : 평등의 건설>, 토마 피케티, 2019.


토마 피케티는 2019년 "본인의 책 중 한 권을 읽는다면 이 책을 읽으라"며 최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내놓는데, 이 책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 현대화'와 '투명한 국제 누진세연대' 등을 결론으로 했던 [21세기 자본]보다 좀더 왼쪽에서 '정의로운 소유', '정의로운 조세(누진세)', 정의로운 교육' 등이 기반된 '참여사회주의'와 '정의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계', '대안적 조직화' 등에 바탕한 '사회연방주의'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를 자임한다. 
독점자본의 초집중화로 인한 '불평등' 심화와 이로 인한 자본주의체제 위기는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를 6년만에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21세기 자본]의 인기를 업고 전세계 투어를 하면서 청취한 여론과 더 방대해진 '불평등 데이터'의 영향일 수도 있다.

"특히 서유럽에서 20세기 민주사회주의와 사민주의가 거둔 대체로 긍정적인 결실을 감안하면...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사용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7. 21세기 참여사회주의를 위한 요소들>, 토마 피케티, 2019.


[21세기 자본]을 통해 '불평등'의 '구조'를 분석한 그는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이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한다. 주류 '경제학'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경제학"을 학문적 배경으로 한 정치경제학자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의 방대해진 '좌파적' 버전으로서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유럽 외 다른 지역(인도,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까지 넓혀진 데이터와 1천페이지 이상의 분량으로 썼다. 굳이 이렇게까지 길게 쓴 이유는 하이에크나 '시카고학파' 등의 주류 경제학자나 '질서자유주의자'들을 데이터 뿐만 아니라 분량으로도 질식시키기 위함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과 함께 나는 몇 가지 주요 개념을 중심으로 서평을 해보고자 한다.
공산주의 몰락으로 신자유주의가 강화된 세계체제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국제연대를 통해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의 토마 피케티의 특징은, 기존 '좌파' 개념을 본인식으로 굳이 대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1. 철학적 기초 : 공정으로서의 '정의'



"혹자들은 어쩌면 내가 언급한 '정의'의 원칙들이 1971년 존 롤스가 정식화한 것들과 유사하다고 여길 것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타당성이 있다. 다만 유사한 원칙들은 훨씬 오래된 문명에서, 또한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조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을 덧붙여야만 한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7>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토마 피케티의 철학적 기초는 '평등'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정의'의 '자유주의'다. 그의 철학적 스승은 유럽의 칼 마르크스가 아니고 미국의 존 롤스다. '불평등'을 연구하는 피케티의 철학적 지향은 '평등사회'가 아니다. '정의로운 소유', 정의로운 조세', 정의로운 교육', 정의로운 경계' 등 '정의'이며, 정의론'의 관점에 따라 '불평등'은 철폐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되는 것이다. '불평등'이 정당하다는 게 아니다. '정당화'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인데, 그 '정의론'이 바로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의 사상이다. 즉, '정의'는 기본적으로 '평등'에 대한 요구이며, 사회의 '최소 수혜자'인 소수에게 '최대 수혜'가 보장된다면 그 '불평등' 또는 '차등의 원칙'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롤스는 기계적 '공리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쓸모있는 체계적 이론이 될 정의론을 제시함으로써 선을 극대화한다는 관념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87절)고 [정의론](1971)에 쓰고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의 두 원칙... 첫째,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즉 (a)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b)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 존 롤스, [정의론], <11절. 정의의 두 원칙>, 1971.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조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별은 공공의 이익을 근거로 한다'는 내용인데, 고전적인 과학적 사회주의가 주장한 '평등' 이념과 '생산수단 사회화' 정책을 지양하고 '공정'이나 '정의' 개념으로 '평등'을 대체한 1959년 독일 사민당의 고데스베르크 강령이나, 1971년까지 정립한 존 롤스의 [정의론]이 피케티의 철학적 기초다. 


2. '자본'과 '이데올로기'


"오늘날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의 추구의 역사... 달리 말해, 역사에서는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중요하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결론>, 토마 피케티, 2019.


피케티는 '자본'을 새삼스레 연구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현 체제로서 경제학자임에도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역사에 주목한다. 마르크스에게는 '허위의식'이었고 알튀세르 등의 후학들에게는 '실질적'인 힘으로서 '이데올로기'는 피케티에게도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역사적인 정치관념이자 '불평등' 체제를 극복하는 현실적인 힘이다.


"역사에서는 사상들과 이데올로기들이 중요하다. 새로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구조화하는 것을 언제나 가능케 해주는 것이 바로 사상과 이데올로기다... 전반적으로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단절들과 과정들이 불평등의 축소와 변동을 가능케 했으며, 이는 우리의 가장 고귀한 제도들, 인류 진보라는 관념이 하나의 현실이 되도록 해주었던 그런 제도들(보통선거, 무상의무교육, 보편적 의료보험, 누진세)의 기원이다. 미래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 현재의 불평등과 현행 제도는 보수주의자들이 뭐라 생각하든 유일한 가능태가 아니며, 그 자체로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재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달리)... 내가 강조하는 것은, 관념의 영역, 즉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영역에 진정 자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서론>, 토마 피케티, 2019.


[21세기 자본]에서 피케티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 분석틀인 토대-상부구조의 '사회구성체'를 '추상적'이라며 거부하는데, '불평등' 체제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극복하는 '이데올로기'의 '현실적'인 힘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는 현재 '불평등'의 원인으로서 '자본'과 함께 피케티 야심작의 제목이 된다.


3. '삼(3)원사회'-'소유자사회'-'신소유자사회'


"... 프랑스 혁명 당시 해결된 중심 문제는 정당한 소유 문제가 아니라 절대권력과 중앙집권국가 문제였다. 주요 목표는 지역 귀족 엘리트와 사제 엘리트의 절대권력을 중앙집권국가로 이전하는 것이었지, 소유의 광범위한 재분배를 조직하는 게 아니었다... 종교적 초월성에 의지했던 삼(3)기능 도식을 저버린 순간부터, 사회의 안정성을 보장해줄 새로운  답을 찾아야만 했던 것...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은, 혼돈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주고 삼기능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인한 공백을 채워줄 새로운 초월성을 제공한다. '소유의 신성화'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의 종언에 대한 답이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1-3. 소유자사회의 창안>, 토마 피케티, 2019.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사회발전단계설' 중 자본주의 이전 단계인 '봉건주의'는 종교 사제계급과 세속 전사계급의 지배동맹이었는데 상업과 자본의 발전과 함께 '제3계급'인 부르주아지를 탄생시킨다.본인만의 개념을 만드는 피케티는 이 '봉건주의'와 '절대왕정' 시기를 '삼(3)기능사회' 또는 '삼원사회'로명명한다. '사제-전사-상인'의 3계급사회라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이 '앙시앵 레짐'을 단두대로 보내고 '자본주의'를 공고히 한 '자유주의'적 혁명이었는데, 피케티의 개념으로는 '소유주의'다. 경제적 소유와 자산의 크기에 절대적으로 비례하는 권력의 시대로서 '소유의 (준)신성화'가 이루어진 사회라는 의미다. 


"칼 폴라니는 '소유자사회'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바로 문제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 사이의 애매함을 노정하는 '자유주의'라는 용어보다 '소유주의'가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사적소유의 준신성화')을 더 잘 포착한다고 본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3-10. 소유자사회의 위기>, 주83, 토마 피케티, 2019. 


피케티는 굳이 구분하려 하나, '이데올로기'로서 '소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이며, 자본주의 이전의 체제 '이데올로기'는 '삼원주의'다.
이러한 역사의 궤적에 따라 현대 초국적 금융자본주의는 '하이퍼자본주의'로,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 '신소유주의'가 된다. 
피케티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의 발흥은 유럽의 '소유주의'로부터 미국의 '신소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소유 집중의 진화와 관련해서는, 소유 집중이 언제나 소득 불평등보다 훨씬 강도높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우선 상기하게 될 것이다... 자산 집중이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에 도달했을 때조차, 이는 소득 '불평등'의 가장 높은 수준에 필적한다... 20세기에 전개된 소유 집중의 감소는 그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되는 중대한 역사적 혁신이다. 자산은 물론 여전히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하지만 근대사회의 역사상 최초로 총 재화의 상당부분(수십 %, 심지어 거의 절반)이 부유하지 않은 90%에 속하는 사회집단에 의해 보유되었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3-10>.


'신자유주의('신소유주의')'의 전개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중위계급(중산층)'의 등장 또한 목도되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소유의 초집중과 '불평등'의 극단적인 심화다.


4. '하이퍼자본주의', '브라만좌파'와 '상인우파' : '교육 균열의 반전'


"1990~2020년 하이퍼자본주의적인 디지털 세계화... 늘어난 운송수단 이용과 특히 정보기술로 가능해진... 전에는 겪어본 적 없는 문화적이고 사회경제적이며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상호의존과 교류..."
- [자본과 이데올로기], <3-13>.


'신자유주의' 시대의 초국적 금융자본주의인 '하이퍼자본주의'는 '사회연방주의'의 기초 토대를 놓기도 하는데, 이는 <결론>에서 보기로 하고 피케티에 따르면 '하이퍼자본주의'는 다음과 같다.


"요약하자. 심대한 금융 불투명성과 병행된 강력한 소유 집중의 회귀는 21세기 초 현재의 '신소유주의' 불평등체제의 주요특징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는, 20세기에 관찰된 탈집중화가 중위 자산계급을 출현하게 했음에도 소유는 부단히 너무나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총자산 중 가난한 50%에게 돌아가는 몫은 미미했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3-13>.


한편, 이보다 앞서 '불평등'의 기원 추적으로서의 역사 속에서 '노예제사회'와 '식민사회'를 다루는 [자본과 이데올로기] 제2부에서는 특히 인도의 사례를 주요하게 다루는데, 인도는 뿌리깊은 힌두교적 계급주의와 영국 식민지 시기를 거쳐 현재는 10억이 넘는 대규모 연방체제로서 이전 [21세기 자본]의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일종의 '알리바이' 같기도 하다. 그의 광범위한 '불평등' 데이터들은 인도와 유라시아, 아시아와 남미까지 방대해졌으되 그 정도로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피케티의 인도사회 연구는 그의 '브라만좌파'와 '상인우파' 신개념을 만들어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진보적 노동자정당과 대중정당 운동의 초기에 보통선거권 쟁취를 통해 사민당, 사회당, 노동당 등의 지지자는 다수 노동자와 저학력층이었고 이 진보정당들은 힘없는 절대다수의 주요한 정치적 무기였다. 이는 유럽이나 미국 외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 이 저학력 노동자들이 만든 보통교육 체계에서 이들의 자녀들이 교육을 받고 '다중엘리트체계'가 등장하는데, 진보정당을 고학력자들이 다수 지지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피케티는 이러한 현상을 "교육 균열의 반전"이라 표현하고 있다. 


"다중엘리트체계... 이 체계의 한편에는 고학력자들의 표를 사로잡는 '브라만좌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상위소득과 자산에서 항상 선두에 서는 '상인우파'가 있다... '브라만좌파'는 학문적 노력과 능력을 믿는다. '상인우파'는 사업에서의 노력과 능력을 강조한다. '브라만좌파'는 학력, 지식, 인적자본의 축적을 지향한다. '상인우파'는 무엇보다도 화폐, 금융자본의 축적에 의거한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4>.


이는 미국의 '공화당-민주당' 또는 유럽의 '보수당-사민/사회/노동당'의 '양당체제'의 의회주의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전후 계급주의 유형의 좌우 정당체계가 고학력자들을 빨아들이는 '브라만좌파'와 상위소득 및 자산을 빨아들이는 '상인우파'로 구성된 '다중엘리트체계'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 '브라만좌파'는 친재분배와 친시장 분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상인우파'는 민족주의적이고 사회토착주의적인 노선을 따르는 분파와 친기업 및 친시장을 견지하려는 분파 사이에서 역시 갈팡질팡한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5. 브라만좌파 : 미국과 유럽의 새로운 균열>, 토마 피케티, 2019.


'촛불항쟁'을 통해 다수의 힘으로 적폐를 청산한다던 우리 사회가 '수구적폐당-민주당'의 '양당체제'를공고히 할수록 더욱 강화되는 현상과도 닮아있다.


5. '사회토착주의'와 '정의로운 경계'


"21세기 '사회토착주의자'들의 누진세에 대한 의지박약... 사민당, 사회당, 노동당이나 루스벨트식 좌파정책과 연결되는 과거 전통에 결부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탈리아 오성운동은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걸로 보이는 기본소득에는 매료되지만, 기본소득에 재원을 조달해줄 누진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누진세에 대한 사회토착주의자들의 의지박약은 또한 수십년간 납세거부 이데올로기가 폭발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원리가 신성시된 결과다. 실제로 21세기 초의 하이퍼자본주의는 격화된 국가간 경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6. 사회토착주의 : 포스트식민적인 정체성주의의 덫>, 토마 피케티, 2019.


유럽에서 제도권 좌파인 '사회민주당' 계열들이 '브라만좌파'화 되면서 다수 노동계급과 괴리되고 기득권인 '상인우파'와 공통지점이 많아지는 한편, '정치'외 '노동-환경-젠더' 등의 진보적 가치를 담는 다양한 진보정당이 부진한 틈에서 극우 파시즘이 다시 힘을 얻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어김없이 '인종주의' 또는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피케티는 이를 '사회토착주의'라는 신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세력의 특징은 전체주의, 파시즘, 다수의 실질적 정치 참여를 방해하는 '양당체제'로 나타나는데, 체제의 필연적인 경제위기를 기회삼아 국내 다수 노동자들의 배타적 '인종(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세를 키워나가는 정치세력이다. 이탈리아 '오성운동' 같은 경우는 보수우파와의 연합은 물론, '누진세' 도입은 관심없이 '기본소득'만을 주장하는데, 피케티는 지극히 경계하는 표현이기는 하나,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다.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 역사에서 파시즘과 나치즘 등의 극단적 '전체주의' 정치세력이 '사회토착주의'의 기원인데, 다수의 실질적이고 주체적인 참여를 저해하는 '양당체제'에서는 '브라만좌파'든 '상인우파'든 같은 모습으로 수렴된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는 피케티의 개념은 '정의로운경계'다.


6. 결론 :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


"... 1980~1990년 이후 관철되어온 초불평등주의적인 새로운 서사가 숙명은 아니다. 이 서사는 부분적으로 공산주의 파국과 그 역사의 소산이며, 이렇게 된 이유는 또한 지식의 불충분한 확산과 지나치게 경직된 분과학문 장벽들, 그리고 너무 자주 타인들에게 내맡겨진 경제 및 금융문제들에 대한 시민들의 제한된 전유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활용 가능한 역사적 경험들을 토대로, 나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계를 극복하고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참여사회주의'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요컨대, 이 사회주의는 보편주의적 평등주의를 향한 전망으로, 그 근간은 사회적소유와 교육, 지식 및 권력의 분유에 있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7. 21세기 참여사회주의를 위한 요소들>, 토마 피케티, 2019.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결론의 한 축은 '참여사회주의'인데, 기존 소비에트식 공산주의 체제와 그 아류들의 "초중앙집중화된 국가사회주의"와 대비되는 신개념으로서, '정의로운 소유', '정의로운 조세(누진세)', '정의로운 교육'을 토대로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현대화'라는 [21세기 자본]의 결론을 더욱 구체화한 형태다.


"자본주의와 사적소유를 극복하고 '참여사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나는 아래의 두 축에 입각할 것과 이를 심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법률제도와 조세재정제도를 바꿔서, 한편으로는 기업 내 권력을 더 폭넓게 분유하여 자본의 진정한 사적소유를 제도화... 다른 한편으로는 막대한 소유에 강력한 '누진세'를 적용하는 가운데 자본의 일시소유 원칙을 확립..."
- [자본과 이데올로기], <4-17>.


소유와 자산의 '투명성'과 '정보공개'의 중요성을 주장한 [21세기 자본]의 결론에 이어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누진세'는 '소득'과 '상속' 뿐만 아니라 '연간누진소유세'의 '3종 세트'로 결합된 '부유세'로 구체화된다. 이는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닌데, 1914~1945년 세계대전과 경제 위기를 거치며 유럽과 미국에서는 법률로서 상위 자산계급에게 70~90%에 육박하는 '부유세'를 통해 보편복지의 재원을 마련하고 경제성장을 이룬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880~1914년의 유럽 '호시절(벨 에포크:belle epoch)'은 어느 시절보다 불평등했고 상위 자산계급에 대한 세율이 높지 않았으며, '소유자사회'를 공고히 했던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입법 과정도 전후의 누진세 제도를 정착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피케티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세제'는 연간누진소유세, 누진상속세와 누진소득세의 결합이다. 그에 의하면 누진소유세와 누진상속세는 국민소득의 5%, 누진소득세는 45% 상당한다.


"소유자사회의 몰락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소유관계를 조정하기에 알맞은 정치체의 규모라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한다. 경제무역 관계와 소유관계가 초민족적 수준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소유자사회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은 민족국가 이상의 정교한 어떤 형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인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3-10>.


[자본과 이데올로기] 결론의 다른 한 축은 '사회연방주의'인데, '정의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계', '대안의 조직화'를 그 내용으로 한다.

[21세기 자본]의 주요 결론 중 하나는 단연 '민주주의'였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체제전환' 또는 '체제극복'을 위해 '국제적 사회민주주의' 형태로서 소유의 재분배와 기후 위기 등에 대응하는 '유럽의회' 중심의 '유럽연합'으로의 전환과 국제연대를 지향하는 '정의로운 민주주의'와 '사회토착주의'를 극복하는 '정의로운 경계'를 제시하고 있다.


"요약하자. 공적소유는 공권력으로 사적소유가 지닌 힘들의 균형을 잡는다. 사회적소유는 기업 차원에서 생산수단 통제와 권력 분유를 지향한다. 일시소유는 사적소유를 순환시키며 지나치게 막대한 보유가 지속되는 것을 막아준다... 사적소유 극복을 위한 이 세가지(공적소유, 사회적소유, 일시소유) 형태는 상호보완적이다. 달리 말해, 공적소유, 사회적소유, 일시소유의 혼합에 의거해야 자본주의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지속가능하게 극복해낼 수 있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3-11. 사민주의사회들 : 미완의 평등>, 토마 피케티, 2019.


또한 '불평등'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한계에 봉착한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그 '대안의 조직화'를 기획해야 한다. 그러나 피케티 또한 이를 현실적으로 '구체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역사적 집단경험'에 기반한 '집단적 숙의'의 민주주의 과정 속에서 도출할 수 밖에 없다.


"계급투쟁과 달리, 이데올로기 투쟁은 인식과 경험의 분유, 타자에 대한 존중, 숙의와 민주주의에 기초한다. 그 누구도 정의로운 소유, 정의로운 경계, 정의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세금(누진세)과 교육에 관한 절대적 진리를 결코 보유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사회의 역사는 정의추구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분석한 경험을 토대로 나는 확신하건대, 자본주의와 사적소유를 넘어서서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에 기반한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결론>, 토마 피케티, 2019.


토마 피케티가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스스로 말하듯, 그의 이러한 결론들은 현대 역사 속에서 유럽 사민주의 운동과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집단경험'의 연장선이다.
이것이 '불평등' 체제극복을 위해 '불평등'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 피케티의 의 방식이다.



[어셈블리]의 '공통적인 것'이든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기본 재화'든 인간의 지식, 자산, 자본, 생산수단, 권력, 선거, 보건의료, 교육, 기후, 생태 등 일체에 대한 다수의 '재전유'를 기획하는 것.
이것이 현재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이다.


"이 책에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목표가 있다. 
경제학, 역사학 지식에 대한 시민의 재전유에 기여하는 것."
- [자본과 이데올로기], <결론>, 토마 피케티, 2019.


***

1. [21세기 자본](2013), 토마 피케티,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
2.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3. [정의론](1971), 존 롤스, 황경식 옮김, <이학사>, 2014.
4.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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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피엔스 -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한다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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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의 '욕망'과 [코로나 사피엔스]의 '결단'
- '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 [포노 사피엔스], <혁명 전야 -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온다>,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는 이후 10여 년 사이 70억 지구 인구 중 30억 명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신문명' 적응에 적극적인 부류들은 "앞으로 스마트폰이 대세일 것"이라 주저없이 예상했으나 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인류 문명을 잠식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예상'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은 불가한 것일테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권위자'로 불리는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 최재붕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오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뜻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데 마치 뇌와 스마트폰이 생체적으로 연결된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예측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하는 '신인류'의 모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들고다니는 '게임기'에 불과했던 스마트폰의 '유희성'을 생활화하여 삶의 전영역으로 확장시켜 네덜란드 사상가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개념의 정점에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PC 게임을 하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소비 영역이 '온라인' 시장으로 획기적 전환을 하게끔 하는 '무한욕망'의 소비자이자, 디지털 플랫폼 신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다양하고 강력한 '팬덤'을 이룬다. 아마존, 우버, 카카오 등은 이런 '팬덤'을 포착하여 '킬러콘텐츠'를 만들어 전산업을 문어발처럼 장악하고 거대한 '디지털 지주회사'가 된다. 현재 이들 '신인류'가 우리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보편적 인식이 되어 있다.

2020년에 '팬데믹(pandemic)' 증상으로 전세계를 덮친 전염병인 '코로나19(사스-코로나바이러스2)'로 인해 직장의 '비대면 업무'나 '재택근무' 등 노동환경의 변화와 학교의 '온라인 수업'이 급격히 도입되는 지금, 산업이나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운영방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강제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후의 문명을 '포스트-코로나(Post-corona)'로 명명하며 더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또한 진단하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름 짓자면 '호모 코로나리우스(Homo coronarius)' 정도가 가능하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학명의 규칙이 무너진 합성어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점을 감안하여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음에도 본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였다."
-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CBS 시사 프로그램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작금의 '코로나 재난'에 관한 국내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2020년 4월에 방송에서 처음 불린 '코로나 사피엔스'다. 이 명칭은 '학명'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포노 사피엔스'식 명명에 따르는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지었다는 '포노 사피엔스'식 작명의 기원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 추측되는 바,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전영역을 포괄하며 아우르는 '인류의 전역사'로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자연사적 고찰'이 이 역사관의 기본 바탕이다.


"시장혁명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자본이 선택한 문명의 표준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입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신인류의 '욕망'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설정한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이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 특히 기성세대는 신문명을 빨리 배우고 습득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는 구한말 서구의 신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고 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신인류는 이미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포노 사피엔스'로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의 진보를 토대로 한 인류의 '진화'를 역설한 유발 하라리식 '빅 히스토리'의 계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가 '사피엔스'의 범주에서 쫓겨날 것만 같기에.

다만,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포노 사피엔스]의 독자는 '사피엔스' 일반이 아닌 혁신적 '기업가'들에 국한되어 있는 듯 하다. '신인류'가 촉발하는 '혁명'은 '시장혁명'이므로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세계 5대 기업'의 사례를 따라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 개발에 발빠르게 참여하면서 이와 관련된 신기술에 필요한 부품의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통해 알리바바 등과 함께 '아시아 7대 기업'에 선정된 우리의 삼성전자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기업의 표본이 된다. 삼성 재단의 대학교수가 기업들에게 행한 강연을 토대로 쓴 [포노 사피엔스]가 보기에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머리띠'와 '이념투쟁'에 다름 아니며, 급격한 산업개편을 조절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는 '신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태로 보이는 듯 하다. 한편으로, '포노 사피엔스'의 '소비 욕망'은 '상수'이므로 이에 따라 급격하게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하고 법으로 규제하려는 국가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낙오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에서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가속화하므로 '기성세대'는 더이상 '포노 사피엔스'의 '신문명' 흐름에 역행하면 안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그리하여 [포노 사피엔스]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길만이 남게 된다. 
물론, [포노 사피엔스]의 결론은 "그래도 사람이 답이다"라고 끝맺으나 그 '사람'은 '무한욕망'의 소비자들과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스타일난다'라는 디지털 소매기업을 로레알 자본에 거액으로 판 기업가는 우리 사장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배달의 민족을 독일 거대자본에 높은 가격에 팔고 라이더들 수수료 후려치려는 기업가 또한 [포노 사피엔스]의 추천글을 썼다.




한편, '코로나19'는 '포노 사피엔스'의 '시장혁명' 와중에 체제전환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화학적 '백신' 외에 우리 사회에서 잘 운용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행동방역'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전염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개발 욕구를 제한하는 '생태방역'을 강조한다. 자연을 침해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박쥐가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막무가내 개발식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는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와 칼 폴라니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이 생태 재난 위기를 통해 이제는 '시장'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도 미국식 '야수자본주의'를 벗어나 유럽을 빗댄 '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엮은 [코로나19]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앨릭스 캘리니코스 등은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지속 전파될 수 밖에 없는 '집단적 축산업'을 강화하고 도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빈곤층의 결집으로 사회적 전염을 더욱 불평등하게 퍼뜨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이 기회에 극복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인류는 '신문명'이라는 '욕망의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아야 하는 동시에 이 '무한욕망'의 물결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도 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장악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의 '욕망'을 본원적인 '절대상수'로만 상정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없어졌지만 결국 나중에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는 지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혁신'적이지 못했던 다수가 굶지 않도록 어떤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제'와 '해고금지'를 통한 고용보장제도가 절실한 이유다.


"... '포노 사피엔스'가 '문명의 표준'입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문명의 기준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판단은 '데이터'가 합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데이터'로만 말하는 '신문명'조차 극소수 부자들에게 초집중되는 금융자산의 정확한 '데이터'의 부재와 그 '불투명성' 앞에 무력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불평등체제'로서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포노 사피엔스'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사피엔스'의 '욕망'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포노 사피엔스'의 '혁신성'은 화수분과 같은 '이윤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 나는 특히 소득과 금융자산의 평가 및 등록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경제, 금융 불투명성의 증대를 강조할 것이다. 정보와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를 어김없이 찬양하는 문명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을 이런 사태는 국가 공권력과 통계당국의 책임 회피 문제를 드러낸다."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13장 -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인간의 다양하고 무한한 '욕망'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신문명'에 의한 '혁명'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사피엔스' 다수의 의지로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조차도 불평등한 지금, 다수의 '사피엔스'에게는 [포노 사피엔스]의 '무한욕망'보다 [코로나 사피엔스]들이 기획하는 '체제전환'의 '결단'이 필요하다.


***

1.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2.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3. [코로나19 -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노동자연대 엮음, <책갈피>, 2020.
4.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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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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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의 '욕망'과 [코로나 사피엔스]의 '결단'
- '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 [포노 사피엔스], <혁명 전야 -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온다>,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는 이후 10여 년 사이 70억 지구 인구 중 30억 명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신문명' 적응에 적극적인 부류들은 "앞으로 스마트폰이 대세일 것"이라 주저없이 예상했으나 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인류 문명을 잠식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예상'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은 불가한 것일테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권위자'로 불리는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 최재붕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오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뜻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데 마치 뇌와 스마트폰이 생체적으로 연결된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예측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하는 '신인류'의 모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들고다니는 '게임기'에 불과했던 스마트폰의 '유희성'을 생활화하여 삶의 전영역으로 확장시켜 네덜란드 사상가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개념의 정점에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PC 게임을 하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소비 영역이 '온라인' 시장으로 획기적 전환을 하게끔 하는 '무한욕망'의 소비자이자, 디지털 플랫폼 신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다양하고 강력한 '팬덤'을 이룬다. 아마존, 우버, 카카오 등은 이런 '팬덤'을 포착하여 '킬러콘텐츠'를 만들어 전산업을 문어발처럼 장악하고 거대한 '디지털 지주회사'가 된다. 현재 이들 '신인류'가 우리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보편적 인식이 되어 있다.

2020년에 '팬데믹(pandemic)' 증상으로 전세계를 덮친 전염병인 '코로나19(사스-코로나바이러스2)'로 인해 직장의 '비대면 업무'나 '재택근무' 등 노동환경의 변화와 학교의 '온라인 수업'이 급격히 도입되는 지금, 산업이나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운영방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강제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후의 문명을 '포스트-코로나(Post-corona)'로 명명하며 더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또한 진단하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름 짓자면 '호모 코로나리우스(Homo coronarius)' 정도가 가능하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학명의 규칙이 무너진 합성어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점을 감안하여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음에도 본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였다."
-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CBS 시사 프로그램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작금의 '코로나 재난'에 관한 국내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2020년 4월에 방송에서 처음 불린 '코로나 사피엔스'다. 이 명칭은 '학명'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포노 사피엔스'식 명명에 따르는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지었다는 '포노 사피엔스'식 작명의 기원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 추측되는 바,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전영역을 포괄하며 아우르는 '인류의 전역사'로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자연사적 고찰'이 이 역사관의 기본 바탕이다.


"시장혁명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자본이 선택한 문명의 표준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입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신인류의 '욕망'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설정한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이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 특히 기성세대는 신문명을 빨리 배우고 습득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는 구한말 서구의 신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고 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신인류는 이미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포노 사피엔스'로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의 진보를 토대로 한 인류의 '진화'를 역설한 유발 하라리식 '빅 히스토리'의 계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가 '사피엔스'의 범주에서 쫓겨날 것만 같기에.

다만,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포노 사피엔스]의 독자는 '사피엔스' 일반이 아닌 혁신적 '기업가'들에 국한되어 있는 듯 하다. '신인류'가 촉발하는 '혁명'은 '시장혁명'이므로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세계 5대 기업'의 사례를 따라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 개발에 발빠르게 참여하면서 이와 관련된 신기술에 필요한 부품의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통해 알리바바 등과 함께 '아시아 7대 기업'에 선정된 우리의 삼성전자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기업의 표본이 된다. 삼성 재단의 대학교수가 기업들에게 행한 강연을 토대로 쓴 [포노 사피엔스]가 보기에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머리띠'와 '이념투쟁'에 다름 아니며, 급격한 산업개편을 조절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는 '신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태로 보이는 듯 하다. 한편으로, '포노 사피엔스'의 '소비 욕망'은 '상수'이므로 이에 따라 급격하게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하고 법으로 규제하려는 국가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낙오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에서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가속화하므로 '기성세대'는 더이상 '포노 사피엔스'의 '신문명' 흐름에 역행하면 안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그리하여 [포노 사피엔스]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길만이 남게 된다. 
물론, [포노 사피엔스]의 결론은 "그래도 사람이 답이다"라고 끝맺으나 그 '사람'은 '무한욕망'의 소비자들과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스타일난다'라는 디지털 소매기업을 로레알 자본에 거액으로 판 기업가는 우리 사장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배달의 민족을 독일 거대자본에 높은 가격에 팔고 라이더들 수수료 후려치려는 기업가 또한 [포노 사피엔스]의 추천글을 썼다.




한편, '코로나19'는 '포노 사피엔스'의 '시장혁명' 와중에 체제전환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화학적 '백신' 외에 우리 사회에서 잘 운용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행동방역'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전염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개발 욕구를 제한하는 '생태방역'을 강조한다. 자연을 침해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박쥐가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막무가내 개발식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는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와 칼 폴라니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이 생태 재난 위기를 통해 이제는 '시장'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도 미국식 '야수자본주의'를 벗어나 유럽을 빗댄 '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엮은 [코로나19]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앨릭스 캘리니코스 등은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지속 전파될 수 밖에 없는 '집단적 축산업'을 강화하고 도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빈곤층의 결집으로 사회적 전염을 더욱 불평등하게 퍼뜨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이 기회에 극복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인류는 '신문명'이라는 '욕망의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아야 하는 동시에 이 '무한욕망'의 물결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도 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장악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의 '욕망'을 본원적인 '절대상수'로만 상정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없어졌지만 결국 나중에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는 지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혁신'적이지 못했던 다수가 굶지 않도록 어떤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제'와 '해고금지'를 통한 고용보장제도가 절실한 이유다.


"... '포노 사피엔스'가 '문명의 표준'입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문명의 기준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판단은 '데이터'가 합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데이터'로만 말하는 '신문명'조차 극소수 부자들에게 초집중되는 금융자산의 정확한 '데이터'의 부재와 그 '불투명성' 앞에 무력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불평등체제'로서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포노 사피엔스'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사피엔스'의 '욕망'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포노 사피엔스'의 '혁신성'은 화수분과 같은 '이윤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 나는 특히 소득과 금융자산의 평가 및 등록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경제, 금융 불투명성의 증대를 강조할 것이다. 정보와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를 어김없이 찬양하는 문명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을 이런 사태는 국가 공권력과 통계당국의 책임 회피 문제를 드러낸다."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13장 -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인간의 다양하고 무한한 '욕망'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신문명'에 의한 '혁명'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사피엔스' 다수의 의지로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조차도 불평등한 지금, 다수의 '사피엔스'에게는 [포노 사피엔스]의 '무한욕망'보다 [코로나 사피엔스]들이 기획하는 '체제전환'의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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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2.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3. [코로나19 -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노동자연대 엮음, <책갈피>, 2020.
4.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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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 책갈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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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의 '욕망'과 [코로나 사피엔스]의 '결단'
- '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 [포노 사피엔스], <혁명 전야 -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온다>,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는 이후 10여 년 사이 70억 지구 인구 중 30억 명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신문명' 적응에 적극적인 부류들은 "앞으로 스마트폰이 대세일 것"이라 주저없이 예상했으나 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인류 문명을 잠식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예상'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은 불가한 것일테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권위자'로 불리는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 최재붕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오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뜻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데 마치 뇌와 스마트폰이 생체적으로 연결된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예측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하는 '신인류'의 모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들고다니는 '게임기'에 불과했던 스마트폰의 '유희성'을 생활화하여 삶의 전영역으로 확장시켜 네덜란드 사상가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개념의 정점에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PC 게임을 하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소비 영역이 '온라인' 시장으로 획기적 전환을 하게끔 하는 '무한욕망'의 소비자이자, 디지털 플랫폼 신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다양하고 강력한 '팬덤'을 이룬다. 아마존, 우버, 카카오 등은 이런 '팬덤'을 포착하여 '킬러콘텐츠'를 만들어 전산업을 문어발처럼 장악하고 거대한 '디지털 지주회사'가 된다. 현재 이들 '신인류'가 우리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보편적 인식이 되어 있다.

2020년에 '팬데믹(pandemic)' 증상으로 전세계를 덮친 전염병인 '코로나19(사스-코로나바이러스2)'로 인해 직장의 '비대면 업무'나 '재택근무' 등 노동환경의 변화와 학교의 '온라인 수업'이 급격히 도입되는 지금, 산업이나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운영방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강제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후의 문명을 '포스트-코로나(Post-corona)'로 명명하며 더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또한 진단하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름 짓자면 '호모 코로나리우스(Homo coronarius)' 정도가 가능하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학명의 규칙이 무너진 합성어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점을 감안하여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음에도 본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였다."
-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CBS 시사 프로그램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작금의 '코로나 재난'에 관한 국내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2020년 4월에 방송에서 처음 불린 '코로나 사피엔스'다. 이 명칭은 '학명'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포노 사피엔스'식 명명에 따르는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지었다는 '포노 사피엔스'식 작명의 기원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 추측되는 바,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전영역을 포괄하며 아우르는 '인류의 전역사'로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자연사적 고찰'이 이 역사관의 기본 바탕이다.


"시장혁명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자본이 선택한 문명의 표준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입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신인류의 '욕망'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설정한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이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 특히 기성세대는 신문명을 빨리 배우고 습득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는 구한말 서구의 신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고 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신인류는 이미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포노 사피엔스'로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의 진보를 토대로 한 인류의 '진화'를 역설한 유발 하라리식 '빅 히스토리'의 계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가 '사피엔스'의 범주에서 쫓겨날 것만 같기에.

다만,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포노 사피엔스]의 독자는 '사피엔스' 일반이 아닌 혁신적 '기업가'들에 국한되어 있는 듯 하다. '신인류'가 촉발하는 '혁명'은 '시장혁명'이므로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세계 5대 기업'의 사례를 따라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 개발에 발빠르게 참여하면서 이와 관련된 신기술에 필요한 부품의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통해 알리바바 등과 함께 '아시아 7대 기업'에 선정된 우리의 삼성전자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기업의 표본이 된다. 삼성 재단의 대학교수가 기업들에게 행한 강연을 토대로 쓴 [포노 사피엔스]가 보기에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머리띠'와 '이념투쟁'에 다름 아니며, 급격한 산업개편을 조절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는 '신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태로 보이는 듯 하다. 한편으로, '포노 사피엔스'의 '소비 욕망'은 '상수'이므로 이에 따라 급격하게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하고 법으로 규제하려는 국가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낙오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에서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가속화하므로 '기성세대'는 더이상 '포노 사피엔스'의 '신문명' 흐름에 역행하면 안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그리하여 [포노 사피엔스]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길만이 남게 된다. 
물론, [포노 사피엔스]의 결론은 "그래도 사람이 답이다"라고 끝맺으나 그 '사람'은 '무한욕망'의 소비자들과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스타일난다'라는 디지털 소매기업을 로레알 자본에 거액으로 판 기업가는 우리 사장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배달의 민족을 독일 거대자본에 높은 가격에 팔고 라이더들 수수료 후려치려는 기업가 또한 [포노 사피엔스]의 추천글을 썼다.




한편, '코로나19'는 '포노 사피엔스'의 '시장혁명' 와중에 체제전환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화학적 '백신' 외에 우리 사회에서 잘 운용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행동방역'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전염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개발 욕구를 제한하는 '생태방역'을 강조한다. 자연을 침해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박쥐가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막무가내 개발식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는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와 칼 폴라니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이 생태 재난 위기를 통해 이제는 '시장'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도 미국식 '야수자본주의'를 벗어나 유럽을 빗댄 '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엮은 [코로나19]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앨릭스 캘리니코스 등은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지속 전파될 수 밖에 없는 '집단적 축산업'을 강화하고 도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빈곤층의 결집으로 사회적 전염을 더욱 불평등하게 퍼뜨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이 기회에 극복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인류는 '신문명'이라는 '욕망의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아야 하는 동시에 이 '무한욕망'의 물결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도 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장악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의 '욕망'을 본원적인 '절대상수'로만 상정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없어졌지만 결국 나중에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는 지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혁신'적이지 못했던 다수가 굶지 않도록 어떤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제'와 '해고금지'를 통한 고용보장제도가 절실한 이유다.


"... '포노 사피엔스'가 '문명의 표준'입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문명의 기준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판단은 '데이터'가 합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데이터'로만 말하는 '신문명'조차 극소수 부자들에게 초집중되는 금융자산의 정확한 '데이터'의 부재와 그 '불투명성' 앞에 무력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불평등체제'로서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포노 사피엔스'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사피엔스'의 '욕망'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포노 사피엔스'의 '혁신성'은 화수분과 같은 '이윤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 나는 특히 소득과 금융자산의 평가 및 등록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경제, 금융 불투명성의 증대를 강조할 것이다. 정보와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를 어김없이 찬양하는 문명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을 이런 사태는 국가 공권력과 통계당국의 책임 회피 문제를 드러낸다."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13장 -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인간의 다양하고 무한한 '욕망'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신문명'에 의한 '혁명'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사피엔스' 다수의 의지로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조차도 불평등한 지금, 다수의 '사피엔스'에게는 [포노 사피엔스]의 '무한욕망'보다 [코로나 사피엔스]들이 기획하는 '체제전환'의 '결단'이 필요하다.


***

1.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2.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3. [코로나19 -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노동자연대 엮음, <책갈피>, 2020.
4.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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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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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a manet, verba volat (스크립타 마네트, 베르바 볼라트)
- '독서의 역사'와 '서술의 역사'의 역사


"... 책을 숭배하는 정신이야말로 문명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의 하나이다... 인민통치 집단이든 전체주의 통치 집단이든 국민 모두가 어리석은 존재로 남을 것을, 그리고 국민들이 자신들의 퇴행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알맹이와 가치가 없는 것들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그런 상황에서 독서가들은 오로지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 [독서의 역사], <마지막 페이지>,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읽기(reading)'가 먼저인가, '쓰기(writing)'가 먼저인가.
읽을 것을 쓴 게 이미 있으니 '쓰기'가 앞섰던가, 이미 읽은 걸 서사로 풀어서 쓴 것이니 '읽기'가 앞섰던가.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같은 무의미한 질문이겠으나 '읽기'와 '쓰기'의 '역사'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우리 시대의 몽테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책들을 읽고 그 의미들을 회의하고 사색한 내공으로 [독서의 역사](1996)를 썼다. 그가 돌아보는 '독서', 즉 '읽기(reading)'의 역사는 '정치사'나 '비평사' 등의 연대기적 순서에 따르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독서 행위(읽기)' 또는 독서의 역사'는 그 자체의 역사라기 보다는 '독서가'들의 역사이며, 그 역사는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독서가들 각자의 역사"(같은책, <마지막 페이지>)다. 따라서 생물의 진화나 자연과학의 진화 등 '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연성'으로 점철된다. 모든 과학의 시작은 '우연'이었을지 모르나 그 진화과정은 '필연'의 논리가 있는데 비해, '독서가'들의 역사는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말한 '미술이 아닌 미술가들의 역사'처럼 '과학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의 '우연적 역사'가 사회경제 체제의 '필연적 역사'를 토대로 전개됨을 상기한다면 수긍할 만 하다.

기원전 10세기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그림문자나 그 얼마 후 페니키아에서 알파벳 문자 또는 숫자 등의 기록이 등장한 동기는 '문명의 유지'와 '전승'이었을 것인데, 그 이후로도 오랜 시기 동안 '문자 문명'은 소수 지배계급의 특권에 불과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 피지배자들은 19세기까지도 '읽기'가 허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수의 '읽기'는 그 다양한 해석과 창의력, 상상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쿠바의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독사(讀師)'는 글을 모르거나 읽을 시간이 없던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모여 읽을 책을 선정하고 노동 중에 라디오처럼 글을 들려주었는데, 같은 세기 대서양 건너 영국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단결금지법'처럼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역시, 지배자에게 민중의 '독서'는 '체제전복'적이고 두려운 것이다.그래서 대부분의 '독서회'가 '탄압'받는 것인가.


"... 문장 하나만 읽을 줄 알게 되면 누구든지 금방 모든 문장을 알 수 있게 된다. 더욱 중요한 점은 독서가는 그 문장을 반추하고 그 문장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문장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인류가 창조한 다른 어떤 물건들과 달리 '책'은 독재에 맹독으로 작용해 왔다. 절대권력은 모든 독서를 공식적인 독서로 제한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양한 의견이 담긴 도서관 대신 독재자의 말만으로 충분해야 했다."
- [독서의 역사], <금지된 책읽기>, 알베르토 망구엘.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립하고 후속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도시에 최초의 대형 도서관을 지을 때 수많은 두루마리들은 지배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류 지식의 다양성를 담보했을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들은 '지식'을 의미하는 두루마리나 서판 등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문자'를 통한 지식의 중요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나 이슬람은 각각 '성경'과 '코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유일신'의 의지를 민중에게 전달했기에 성모 마리아가 대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을 때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왕이 된 예수'였던 '예언자 무함마드'는 한 손에 칼과 다른 손에 '책'을 들었으며, '유일신'의 '사자' 또는 대리인들은 '책'과 '문자'를 중심으로 '이단'을 갈라냈다. 다수를 지배하는 중세의 교리는 '문자'라기 보다는 상징적 '아이콘'으로 가득한 '그림'이었지만, 항상 다수의 역사를 스스로 써온 인류는 이 '그림'을 '문자'로 전환시키고 이 '상징'들 또한 다수와 공유하며 언제 어디서든 '체제전복'을 기도한다.
다수 민중들의 '읽기'와 '독서'는 늘 그 자체로 '체제전복'적이다.


"코덱스의 편리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서기 400년 경이 되자, 고전적인 형태의 두루마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의 책들은 사각형으로 여러 장 모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의 위대한 장점... 제작 속도, 텍스트의 동일성, 그리고 상대적으로 값이 싸다는 이점...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 [독서의 역사], <책의 형태>, 알베르토 망구엘.


서기 4백년대에는 소장하고 읽기 불편했던 두루마리 형태에서 양피지를 접어 지금의 책 형태로 만든 '코덱스'가 발명되었고, '문자'와 '지식'은 비단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소지하고 다니며 그 권위를 인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14세기에는 '안경'도 발명되었고, 드디어 15세기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성경]의 대량생산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는 육필 필사본의 화려한 장식적 필체 또한 대중화했기에 16세기에는 인쇄술의 발전이 육필 필사의 기술도 함께 발전시키게 된다. 전자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종이책' 고유의 양식과 질감, 냄새는 늘 인류와 함께 하는 것처럼. 망구엘이 고백한 것처럼 사실 내게도 '독서'란 '문자'나 '지식'을 얻는 행위를 넘어 '책'이란 '사물'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기도 하다. 스무살 때는 '멋있게 보이려고' 들고 다닐 때가 더 많았다.
어쨌든, 다수 대중'의 독서는 그 머릿수 만큼이나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을 쏟아 놓기에 정치권력의 독점적 권위는 자연스레 균열이 난다. '민주주의'의 문명적 토대가 싹을 틔운다.


"스크립타 마네트, 베르바 볼라트
(Scripta manet, verba volat)"


중세 시대만 해도 '독서'는 눈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암송을 동시에 해야 했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라 '신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어야 했기 때문인데, '문자'를 다수가 공유한 이후로 독서가들은 자신의 침대에서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로 쓰여진 것은 영원히 남고, 말로 표현된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Scripta manet, verba volta)"는 라틴어 문구는 원래, 중세 암송 시대에는 "글은 조용히 죽은 것이고, 말은 생생히 날아오른다"는 의미였지만, 근대 이후 묵독 시대에는 "글은 영원히 남고, 말은 공허히 날아간다"는 뜻이 되어 '지식'을 공유함에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이 되었다.
망구엘에 의하면, 책은 "간단한 도구의 상징적 의미보다 훨씬 복잡한 상징적 의미를 독서가에게 부여"(같은책, <상징적인 독서가>)함으로써,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재창조"(같은책, <책읽기와 미래예언>)한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문자로 남고 독서가들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퇴행시키기도 한다. 
아마도 발전의 사례가 대부분일 것인 반면,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기독교와 이슬람 또는 독재정권의 '금서목록', 파시즘이나 나치즘 등과 같은 전체주의자들의 반복된 '분서' 선동은 퇴행의 대표적 사례다.


"... BC 3천년대 말 즈음 인간 사이의 의사전달의 본질을 영원히 바꿔놓을 기술이 개발되었다. 바로 글을 쓰는 기술이다... 작가가 텍스트에서 손을 뗄 때에만 그 텍스트는 텍스트로서 존재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이 시점에서 텍스트는 한 사람의 독서가가 읽어줄 때까지 조용한 존재로 남는다... 이렇듯 모든 기록은 독서가의 아량에 크게 의존한다... 바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읽기'는 '쓰기'를 신격화해 주는 것이었다."
- [독서의 역사], <최초의 시작은 진흙조각에서>, 알베르토 망구엘.


19~20세기 독일 비평가 쿠르티우스는 "세상과 자연이 책이라는 생각은 카톨릭 교회의 수사학에서 비롯되어 신비주의 철학자들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같은책, <책읽기의 은유>)고 했는데, 인류의 지식과 문명이 '문자'의 매개체인 '책'이라는 실물 뿐만 아니라 '문자' 이전부터의 '세상'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으로부터 추출된다는 것이지만 기원전 3천년경이 되면 인류는 '쓰기(writing)'를 통해 한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문자'를 통한 '지식'의 독점의 기원은 바로 '쓰기'였으며, 이러한 저술에 대한 다양한 독해를 가능케 한 '서사의 힘'이었다.


"나는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 예측할 수 없는 우연, 사회제도와 자연환경이 뒤엉켜 빚어낸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당대의 역사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다. 역사의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발전'이라고 하는 몇 가지 역사서술 환경과 내용과 관점과 방법의 변화는 힘있는 서사로 구현할 때만 독자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들을 만나본 소감이다."
- [역사의 역사], <에필로그 - 서사의 힘>, 유시민, <돌베개>, 2018.


망구엘은 '독서'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를 쓰지 않았다. 본인의 독서 이력으로부터 유추되는 창의적이고 다양한 '독서가'들의 개별적인 역사를 서술하는데 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독서가'들의 역사가 워낙 다양하므로 그 역시 본인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들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로서의 저술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은 최근의 저서 [역사의 역사](2018)에서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역사가의 시조' 헤로도투스로부터 [사기]의 사마천, 14세기 이슬람 '문명사학자' 이븐 할둔, 유물사관의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우리의 박은식과 신채호, 백남운 선생, [역사란 무엇인가]의 에드워드 카와 최근 '빅히스토리' 역사가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 등의 '역사서술(writing history)'의 역사를 일별한다. 즉, '역사'란 19세기 독일의 반동적 군주제 역사가인 레오폴트 랑케의 건조한 문헌적 역사가 추구한 '사실 그대로'의 서술이 불가능하며, 각 '역사가' 개인들의 시대적 한계와 나름의 '철학'적 관점, 정치적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이므로 '역사서술의 역사'인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y)' 또는 '사학사(史學史)'를 주제로 하되 본인의 '쓰기'는 학술적인 것이 아니기에 '역사 르포르타주(르포)'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읽기(reading)'와 '쓰기(writing)'의 역사적 관계는 인류 지식과 문명의 역사 자체로서 일목요연한 정리가 불가한 방대한 영역일 것이다.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가 아닌 '독서가'의 역사를, 유시민이 '서술'의 역사가 아닌 '역사서술'의 역사를 주제로 삼은 이유다. 

'역사'를 소수의 지배자가 독점하던 시대는 다수 피지배 민중들이 문자를 공유하고 독서를 통해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함으로써 오래전에 물러갔다. 그러나 인류의 '지식'과 '문자'를 다양화하고 보편화하려는 '민주주의'적 시도가 주춤하는 시점에서, 하나의 정치세력 진영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현상에서 '역사서술'의 독점과 전체주의적 폭력은 여전히 기생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우선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지라도, 소수 '역사가'들의 '쓰기'에 의해 취사선택된 텍스트들은 다수 '독서가'들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읽기'에 의해 통제되고 재창조되어야 한다. 모든 '텍스트(text)'들은 이미 창작되고 나면 '작가'의 손을 떠나는 독립적 '생물체'가 되며, '정치'가 그러하듯 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는 수많은 '독서가'들의 손에 의해 더욱 풍부해진다.
이것이 우리 '사피엔스' 문명의 역사 속 '민주주의'의 역사이며, 그것이 '역사서술'과 그 '독서의 역사'에서 유일한 '철학'적 방향이다.

이렇게 또한 "글은 영원히 남는(Scripta manet)" 것이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낭독회),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증명이었으며("하늘의 도는 무엇인가!"), 할둔에게는 학문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적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 [역사의 역사], <제6장 -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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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2. [역사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돌베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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