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악마들 -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 사계절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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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탐험가들'인가, '제국주의 첨병들'인가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예수가 태어나기 1세기 전, (중국 한무제 시기) 장건이라는 이름의 모험심 많은 중국의 한 젊은이가 비밀 임무를 띠고 당시로서는 멀고도 신비스러운 서역으로 출발하였다. 비록 그의 목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여행이 되었다. 그 까닭은 중국이 유럽을 발견하고 또 실트로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여행가'는 황제로부터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을 하사받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셈이었고, 이는 당시 두 강대국인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1장. 실크로드의 성쇠>

돈황 막고굴은 중국 서쪽 장안을 지나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있는 '천불동'으로 유명한데,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꽃피운 4~5세기 '5호16국 시대'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북위, 전진 등의 저, 강, 선비족 소수민족 정권부터 '혼혈정권'인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석굴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역시 소수민족들의 활발한 교류와 문화적 유연성으로 동서 문화가 접목되는 지점이다. 또한 '제국'의 역사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당시의 '제국'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레닌, [제국주의론], 1916.)"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을 시작하던 그 시기의 특정 체제였다.

돈황 막고굴에서 수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북방의 차르 제국 러시아가 제일 먼저 들었고 지질학자 오브루체프를 보내 돈황 고문서를 발견한중국인 왕원록 도사를 통해 일부 입수하지만 그 가치를 몰랐다. 지질학자이니 당연히 몰랐을 것인데, 당시 식민지 영토 확장이 주목표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지도의 구체적 확정을 위해 지리학자, 지질학자, 지도제작자를 오지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탐험의 선구자는 스웨덴 출신 지리학자 스벤 헤딘이다. 1899년에 헤딘은 중국 고대국경도시였다가 이민족에게 넘어간 도시 '누란'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 최초의 '제국주의' 탐험가였다. 고대 불교 유적과 당시 사람들의 기록 등 소중한 유물들을 발견했음은 물론이고 왜소한 체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가차없이 탐험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는 과연 최고였다고 칭송받지만, 정치적으로는 결국 독일 제국주의 편에 선 '제국주의자'였다. 스벤 헤딘은 유럽 제국주의 탐험가의 시조다.


"일찍이 헝가리 지리학자 로치 라요시한테서 돈황의 장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스타인은, 그곳을 발굴하거나 걸작의 벽화를 뜯어올 계획이 없었던 당시에도, 거기에 가보는 것이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2장. 돈황 - 숨겨진 고대의 서고>

이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리학자들을 철수시켰고, '동양학자'들을 파견한다. 독일의 폰 르코크,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대표적인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돈황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스타인이다. 헝가리 출신 동양학자 스타인은 헝가리어, 영어, 독어, 불어는물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나 정작 중국어를 몰라 왕도사와 돈황 고문서를 거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수차례 원정을 통해 많은 고문서를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헝가리 출신인 스타인의 조상이 흉노를 연상시키는 훈족이라 동방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도 도 한다.


"촛불 하나만을 밝힌 채, 스타인이 필사본을 가져감으로써 생긴 비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펠리오는 먼지투성이의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길고 숨막히는 3주일이란 시간을 보냈다... '처음 열흘 간은 하루에 거의 1천 개의 두루마리를 공략했다...' 그는 자신을 경주용 차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서지학자라고...비유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3장. 펠리오 -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결과는 그렇지 않았으나, 스타인이 돈황에 처음 갈 때만 해도 유물 약탈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서지학자 폴 펠리오는 대놓고 고문서 유출을 위해 그곳으로 갔다.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한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이며 13개 국어에 능하고 특히 동남아와 북경에도 거주하면서  중국어도 능통한 데다가 사교성도 좋아 [실크로드의 악마]에서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을 지녔다는 천재학자. 이전 선배들이 고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면, 이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는 지식을 토대로 고문서들을 분류하여 영리하게 유럽으로 들여와 전시회까지 연다. 불세출의 천재학자 또한 업적 욕심에 '제국주의'를 비껴가지 못한다.


"... (랭던) 워너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벽화가 있는 동굴로 들어갔고, 먹을 때와 잠잘 때만 빼놓고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내가 왜 대양과 두 대륙을 건너고, 또 몇 달 동안을 수레 옆에서 지친 몸을 끌고 걸어왔는가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연대를비정하고, 교수들의 기존 이론을 보기 좋게 논박하고, 미술사의 영향들을 발견하기 위해 온 내가, 그저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석굴 사원의 한복판에 서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5장. 랭던 워너가 위업에 도전하다>

펠리오가 왕도사를 속여 몇 차례 수탈해 간 다음, 미국에서는 동양미술사학자 랭던 워너가 온다. 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티브가 된 탐험가로 하버드대학 박물관 소속이었다. 그가 목숨걸고 돈황까지 온 이유는 불교벽화와 조상들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불굴의 이 미국인은 고대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미국으로 반출했다. 결국 워너는 중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고 폴 펠리오와 '합동 약탈작전'까지 계획하는 등 여러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중국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영화의 존스 박사와는 달리 정의나 양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한 오타니 백작은 '정토진종' 본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부친의 죽음으로 물려받은... 종파의 지도자로 취임하기 위해 귀국할 때까지 그는 장시간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보냈다... 그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었다... 종무를 맡은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기가 중앙아시아에 파견한 탐험대들의 사진과 간략한 기사를 학회에 보냈다... (오타니의) 두 권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저작-하나는 중국, 또 하나는 만주에 관한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스파이 우두머리로서 정교한위장이었을 수도 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4장. 실크로드의 스파이들>

랭던 워너의 약탈 이후 중국 정부는 돈황을 봉쇄하고 중국 화가 장대천, 상서홍, 조선 출신 화가 한락연 등이 돈황벽화 보존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는데, 1900년대 초반에 독일과 영국 등 유럽 '제국주의'가 거세게 밀려올 때 타클라마칸 주변에 정체모를 '일본 스파이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 '스파이들'의 대장은 오타니 고즈이. 일본 불교의 한 일파인 서본원사 정토진종 본파의 세습교주로 권세가인 공작의 딸과 혼인하여 백작이 되었으며 수 차례 '오타니 탐험대'를 중앙아시아로 파견하여 파산까지 아르러 '오타나 컬렉션'은 뿔뿔이 흩어진다. 학자도 아닌 다치바나 즈이초라는 젊은 승려를 탐험대장으로 한 원정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신비롭고 의아했을 것이며 결국 피터 홉커크는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일본 '오타니 탐험대'를 '실크로드의 스파이들'이라고 규정한다. 동양을 배척하는 서양 '제국주의자'의 시각일 수도 있겠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공략을 위한 첩자질은 명확해 보인다.
유럽 '제국주의'들은 '악마'였고, 일본 '제국주의'는 '스파이'에 불과했다.


19~20세기에 유럽 '제국주의'가 탐험가들을 파견했다면, 고대에는 중국의 한나라의 탐험가 장건이 있었고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있었으며 우리 신라 승려 혜초가 있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서역의 문화와 흉노의 기마력에 맞서는 '천마'의 군사력을 전했고, 현장은 '서유기'의 '삼장법사'로서 불교경전 원본을 전하면서 오렐 스타인이 가장 존경하는 탐험가였으며, 신라의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으로 중국의 승려들을 거꾸려뜨렸다.

피터 홉커크는 서양 탐험가들의 흥미로운 기록의 제목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부른 '악마들(Foreign Devils)'을 번역한 것일 뿐, '제국주의'의 '악마성'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만약 서양의 약탈이 없었으면 과연 방치되어 있던 그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되었을 것인가'라는 우문은 '역사의 가정'이라는 부질없는 전제를 깔고 있으니, '만일 박정희 아니었으면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을까' 같은 하나마나 한 질문에 불과하다.
선구적 탐험가들과 학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신비한 행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결국, 식민지 분할전쟁 과정에서 '문화약탈'이라는 20세기초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 '제국주의'의 '악마성'만이 짙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0년 3월 14일)

***

1.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 1,2], 유홍준, <창비>, 2019.
3. [돈황 이야기], 마쓰오카 유즈루, 박세욱/조경숙 옮김, <연암서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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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해제
장정일 외 지음 / 김영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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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중심'이란 없다 :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그(아틸라)가 장악한 흉노제국은 흉노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가장 찬란했던 한 장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군사 책략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군대를 지휘해 사방을 약탈했으며, 그 족적이 유럽 전체에 미쳤다. 44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다가와 해마다 2,100만 파운드의 황금을 바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흉노에 양도해야 했다. 447년, 아틸라는 도나우강 유역의 교역시장에서 꼬투리를 잡아 대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제국으로 쳐들어갔다. 70여 개의 성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비잔티움제국의 많은 지역을 유린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1장. 흉노>


중국(中國)은 글자 그대로 모든 국가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라 또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중국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서북공정'으로 진행되어 오는 오만한 민족통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에는 우리 한반도의 오래된 한민족이 고조선 연구로 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서 연구하는 '요동사'의 작업 등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서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중국 서방의 '오랑캐', 즉 서방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수많은 '오랑캐'의 시작은 중국의 기원전 6~8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북방의 집단 '흉노'다. 

아득한 시절, '동이족'의 '용산문화'인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한 서방의 '앙소문화' 주나라는 수도를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며 '동주 열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견융족'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켜 결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다. 사실 진나라는 '오랑캐' 견웅족'과 혼혈된 '오랑캐' 그 자체였겠지만 구분은 모호하고 중국이 통일된 후로는 농경이 가능한 연 강우량 15인치선을 기준(만리장성)으로 '중국인'과 북방 민족의 큰 전선을 긋게 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방민족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 불렀다. '흉노', 즉 '흉측한 노예'라는 명칭을 북방인 스스로 불렀을 리는 없으나,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조 '단군'의 유래가 '선우'와 비슷한 한자인 '단간(單干)'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와 크게 구분되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도 된다.

유목의 흉노는 전국시대 진의 서북부와 연의 동북부를 자주 침범하여 농경 생산물을 약탈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은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수확의 계절보다 건강한말을 타고 흉노족이 노략하러 내려오는 무시무시한계절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은 (주나라) 성왕이 낙읍(뤄양/낙양)을 건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왕은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일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회고하면서, 무왕이 하늘에 고하길 '제가 이 중국에 정착해 여기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언급한다... '이 중국에 정착하다'라는 무왕의 말에 언급된 중국이 바로 '중국'이라는 용어의 최초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이며 낙읍, 즉 뤄양(낙양)이 바로 그곳에 해당한다."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2장. 뤄양>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설되면 다른 소수민족들은 약화되고, 제국이 분열하면 소수민족들이 강성하여 대륙을 분할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삼국지의 무대 후한 시기 잠시 집권한 동탁과 여포도 사실 서쪽 오랑캐인 강족 일파로 추정되는데 서방 양주 출신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불태우고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한 일, 조조가 원소를 소탕하며 원소를 도운 동북의 오환족을 멸망시킨 이야기,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전개된 '5호 16국' 시대, 즉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의 다섯 '호(胡;오랑캐)'의 16개 단명정권 시대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더욱 다양하고 찬란하게 채워졌음은 이미 다수설이다. 유방의 한나라 또는 사마염의 진나라를 끝으로 이후 중국의 통일정권은 모두 이민족(선비족의 수나라)또는 그 혼혈정권(선비족과 한족 혼혈 당나라)이었으니 '순수한 중국 민족'은 없다.

최초의 '오랑캐' 흉노족은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더 밀려나며 5세기경 '신의 채찍' 아틸라는 서쪽 유럽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은 물론 서로마까지 진출하는데, '신의 채찍'은 기독교적 프랑크인(동고트족 등의 유럽인)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자신들에게 신이 채찍을 내려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은 별칭이었다. 말을 타고 약탈하고 도망가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아 반격하는 유목인의 기동전은 이후 몽골족 칭기즈칸 대제국의 기본동력이었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요동의 '예맥족' 고구려인의 모습과도 같다.

동북쪽의 '오랑캐', '동호족'은 이후 민족과 문화의 활발한 결합과 확장을 통해 오환족, 선비족, 거란족 등으로 대륙을 분할했고 아예 '숙신족' 여진은 금나라는 물론 청나라(후금)로서 중국 황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족'은 유라시아와 중근동 각 지역의 민족인 스키타이족 등과 섞이며 에프탈족, 마자르족 등의 모습으로 유라시아와 동유럽을 분할했다. 헝가리 제국을 세운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찾기 힘들다지만,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아득한 거대 민족들이 전 세계를 유목하듯 누비며 열어젖힌 다양한 문화의 힘은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인 체제"로 꼽는 '제국'의 역사를 강조하며 "매번 전투에서 지면서도 전쟁에서 결국 이기면서 버티고 유지하는" '제국'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제국'이 기록한 역사에서 밀려나고 지도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나폴레옹 못지 않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윤활유였다.

그 민족 자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스스로의 이름도 없이 명멸해 가며 중국 역사서를 통해 이름지어진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는, 오만한 '중심'으로서의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통 중국사'를 '절반의 중국사'로 만든다.

우리 자체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며 지금껏 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역사를 배운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시,
세상에는 '중심'이란 없다.

(2020년 3월 13일)

***

1.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2.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2013.
3.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4. [삼국지 해제],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김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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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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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그(아틸라)가 장악한 흉노제국은 흉노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가장 찬란했던 한 장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군사 책략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군대를 지휘해 사방을 약탈했으며, 그 족적이 유럽 전체에 미쳤다. 44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다가와 해마다 2,100만 파운드의 황금을 바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흉노에 양도해야 했다. 447년, 아틸라는 도나우강 유역의 교역시장에서 꼬투리를 잡아 대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제국으로 쳐들어갔다. 70여 개의 성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비잔티움제국의 많은 지역을 유린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1장. 흉노>


중국(中國)은 글자 그대로 모든 국가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라 또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중국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서북공정'으로 진행되어 오는 오만한 민족통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에는 우리 한반도의 오래된 한민족이 고조선 연구로 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서 연구하는 '요동사'의 작업 등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서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중국 서방의 '오랑캐', 즉 서방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수많은 '오랑캐'의 시작은 중국의 기원전 6~8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북방의 집단 '흉노'다. 

아득한 시절, '동이족'의 '용산문화'인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한 서방의 '앙소문화' 주나라는 수도를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며 '동주 열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견융족'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켜 결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다. 사실 진나라는 '오랑캐' 견웅족'과 혼혈된 '오랑캐' 그 자체였겠지만 구분은 모호하고 중국이 통일된 후로는 농경이 가능한 연 강우량 15인치선을 기준(만리장성)으로 '중국인'과 북방 민족의 큰 전선을 긋게 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방민족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 불렀다. '흉노', 즉 '흉측한 노예'라는 명칭을 북방인 스스로 불렀을 리는 없으나,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조 '단군'의 유래가 '선우'와 비슷한 한자인 '단간(單干)'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와 크게 구분되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도 된다.

유목의 흉노는 전국시대 진의 서북부와 연의 동북부를 자주 침범하여 농경 생산물을 약탈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은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수확의 계절보다 건강한말을 타고 흉노족이 노략하러 내려오는 무시무시한계절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은 (주나라) 성왕이 낙읍(뤄양/낙양)을 건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왕은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일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회고하면서, 무왕이 하늘에 고하길 '제가 이 중국에 정착해 여기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언급한다... '이 중국에 정착하다'라는 무왕의 말에 언급된 중국이 바로 '중국'이라는 용어의 최초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이며 낙읍, 즉 뤄양(낙양)이 바로 그곳에 해당한다."
-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2장. 뤄양>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설되면 다른 소수민족들은 약화되고, 제국이 분열하면 소수민족들이 강성하여 대륙을 분할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삼국지의 무대 후한 시기 잠시 집권한 동탁과 여포도 사실 서쪽 오랑캐인 강족 일파로 추정되는데 서방 양주 출신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불태우고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한 일, 조조가 원소를 소탕하며 원소를 도운 동북의 오환족을 멸망시킨 이야기,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전개된 '5호 16국' 시대, 즉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의 다섯 '호(胡;오랑캐)'의 16개 단명정권 시대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더욱 다양하고 찬란하게 채워졌음은 이미 다수설이다. 유방의 한나라 또는 사마염의 진나라를 끝으로 이후 중국의 통일정권은 모두 이민족(선비족의 수나라)또는 그 혼혈정권(선비족과 한족 혼혈 당나라)이었으니 '순수한 중국 민족'은 없다.

최초의 '오랑캐' 흉노족은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더 밀려나며 5세기경 '신의 채찍' 아틸라는 서쪽 유럽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은 물론 서로마까지 진출하는데, '신의 채찍'은 기독교적 프랑크인(동고트족 등의 유럽인)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자신들에게 신이 채찍을 내려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은 별칭이었다. 말을 타고 약탈하고 도망가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아 반격하는 유목인의 기동전은 이후 몽골족 칭기즈칸 대제국의 기본동력이었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요동의 '예맥족' 고구려인의 모습과도 같다.

동북쪽의 '오랑캐', '동호족'은 이후 민족과 문화의 활발한 결합과 확장을 통해 오환족, 선비족, 거란족 등으로 대륙을 분할했고 아예 '숙신족' 여진은 금나라는 물론 청나라(후금)로서 중국 황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족'은 유라시아와 중근동 각 지역의 민족인 스키타이족 등과 섞이며 에프탈족, 마자르족 등의 모습으로 유라시아와 동유럽을 분할했다. 헝가리 제국을 세운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찾기 힘들다지만,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아득한 거대 민족들이 전 세계를 유목하듯 누비며 열어젖힌 다양한 문화의 힘은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인 체제"로 꼽는 '제국'의 역사를 강조하며 "매번 전투에서 지면서도 전쟁에서 결국 이기면서 버티고 유지하는" '제국'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제국'이 기록한 역사에서 밀려나고 지도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나폴레옹 못지 않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윤활유였다.

그 민족 자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스스로의 이름도 없이 명멸해 가며 중국 역사서를 통해 이름지어진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는, 오만한 '중심'으로서의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통 중국사'를 '절반의 중국사'로 만든다.

우리 자체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며 지금껏 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역사를 배운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시,
세상에는 '중심'이란 없다.

(2020년 3월 13일)

***

1.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2.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2013.
3.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4. [삼국지 해제],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김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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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중국사 - 한족과 소수민족, 그 얽힘의 역사
가오훙레이 지음, 김선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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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그(아틸라)가 장악한 흉노제국은 흉노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가장 찬란했던 한 장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군사 책략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군대를 지휘해 사방을 약탈했으며, 그 족적이 유럽 전체에 미쳤다. 44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다가와 해마다 2,100만 파운드의 황금을 바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흉노에 양도해야 했다. 447년, 아틸라는 도나우강 유역의 교역시장에서 꼬투리를 잡아 대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제국으로 쳐들어갔다. 70여 개의 성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비잔티움제국의 많은 지역을 유린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1장. 흉노>


중국(中國)은 글자 그대로 모든 국가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라 또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중국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서북공정'으로 진행되어 오는 오만한 민족통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에는 우리 한반도의 오래된 한민족이 고조선 연구로 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서 연구하는 '요동사'의 작업 등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서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중국 서방의 '오랑캐', 즉 서방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수많은 '오랑캐'의 시작은 중국의 기원전 6~8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북방의 집단 '흉노'다. 

아득한 시절, '동이족'의 '용산문화'인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한 서방의 '앙소문화' 주나라는 수도를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며 '동주 열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견융족'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켜 결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다. 사실 진나라는 '오랑캐' 견웅족'과 혼혈된 '오랑캐' 그 자체였겠지만 구분은 모호하고 중국이 통일된 후로는 농경이 가능한 연 강우량 15인치선을 기준(만리장성)으로 '중국인'과 북방 민족의 큰 전선을 긋게 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방민족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 불렀다. '흉노', 즉 '흉측한 노예'라는 명칭을 북방인 스스로 불렀을 리는 없으나,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조 '단군'의 유래가 '선우'와 비슷한 한자인 '단간(單干)'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와 크게 구분되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도 된다.

유목의 흉노는 전국시대 진의 서북부와 연의 동북부를 자주 침범하여 농경 생산물을 약탈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은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수확의 계절보다 건강한말을 타고 흉노족이 노략하러 내려오는 무시무시한계절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은 (주나라) 성왕이 낙읍(뤄양/낙양)을 건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왕은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일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회고하면서, 무왕이 하늘에 고하길 '제가 이 중국에 정착해 여기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언급한다... '이 중국에 정착하다'라는 무왕의 말에 언급된 중국이 바로 '중국'이라는 용어의 최초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이며 낙읍, 즉 뤄양(낙양)이 바로 그곳에 해당한다."
-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2장. 뤄양>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설되면 다른 소수민족들은 약화되고, 제국이 분열하면 소수민족들이 강성하여 대륙을 분할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삼국지의 무대 후한 시기 잠시 집권한 동탁과 여포도 사실 서쪽 오랑캐인 강족 일파로 추정되는데 서방 양주 출신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불태우고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한 일, 조조가 원소를 소탕하며 원소를 도운 동북의 오환족을 멸망시킨 이야기,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전개된 '5호 16국' 시대, 즉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의 다섯 '호(胡;오랑캐)'의 16개 단명정권 시대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더욱 다양하고 찬란하게 채워졌음은 이미 다수설이다. 유방의 한나라 또는 사마염의 진나라를 끝으로 이후 중국의 통일정권은 모두 이민족(선비족의 수나라)또는 그 혼혈정권(선비족과 한족 혼혈 당나라)이었으니 '순수한 중국 민족'은 없다.

최초의 '오랑캐' 흉노족은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더 밀려나며 5세기경 '신의 채찍' 아틸라는 서쪽 유럽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은 물론 서로마까지 진출하는데, '신의 채찍'은 기독교적 프랑크인(동고트족 등의 유럽인)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자신들에게 신이 채찍을 내려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은 별칭이었다. 말을 타고 약탈하고 도망가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아 반격하는 유목인의 기동전은 이후 몽골족 칭기즈칸 대제국의 기본동력이었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요동의 '예맥족' 고구려인의 모습과도 같다.

동북쪽의 '오랑캐', '동호족'은 이후 민족과 문화의 활발한 결합과 확장을 통해 오환족, 선비족, 거란족 등으로 대륙을 분할했고 아예 '숙신족' 여진은 금나라는 물론 청나라(후금)로서 중국 황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족'은 유라시아와 중근동 각 지역의 민족인 스키타이족 등과 섞이며 에프탈족, 마자르족 등의 모습으로 유라시아와 동유럽을 분할했다. 헝가리 제국을 세운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찾기 힘들다지만,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아득한 거대 민족들이 전 세계를 유목하듯 누비며 열어젖힌 다양한 문화의 힘은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인 체제"로 꼽는 '제국'의 역사를 강조하며 "매번 전투에서 지면서도 전쟁에서 결국 이기면서 버티고 유지하는" '제국'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제국'이 기록한 역사에서 밀려나고 지도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나폴레옹 못지 않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윤활유였다.

그 민족 자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스스로의 이름도 없이 명멸해 가며 중국 역사서를 통해 이름지어진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는, 오만한 '중심'으로서의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통 중국사'를 '절반의 중국사'로 만든다.

우리 자체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며 지금껏 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역사를 배운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시,
세상에는 '중심'이란 없다.

(2020년 3월 13일)

***

1.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2.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2013.
3.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4. [삼국지 해제],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김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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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책소개)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2011) 외
- 스스로를 끊임없이 초월하려는 '호모 사피엔스'의'과학적 역사'


"이 책의 시작에서 나는 역사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이어진 연속체의 다음 단계라고 말했다. 사피엔스 역시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힘, 화학반응, 자연선택 과정에 종속된다... 사피엔스는...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룩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4부 20장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이른바 '빅히스토리' 열풍을 불러 일으킨 책 [사피엔스]는 영국에서 중세 전쟁사를 전공한 이스라엘 출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인류의 역사를 전 지구 역사 속의 모든 생명체와의 관계를 통해 통크게 확장시켜 고찰한다. 전쟁의 역사는 문명의 질적인 전환을 다루게 되므로 저자는 박식함을 토대로 인류의 거대한 역사, '빅히스토리'를 풀어낸다.

과학과 역사의 접합을 통해 전개되는 호모 사피엔스의 궤적에서 하라리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3가지 혁명을 통해 인류가 발전했다고 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약 600만년 전, 직립보행인호모 에렉투스는 70만년 전, 현재 인류의 직계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약 1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동하였으나 '인지혁명'은 약 7만년 전이며, 인류가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어주는 '유연'한 언어를 사용한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지적인 뇌구조는 우연하게 만들어진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사피엔스], <1부. 인지혁명>

'인지혁명'을 통해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 같은'형제들'을 멸종시키고 살아남아 진화한 결과 현재 인류가 되는데 이는 '유연한 언어'만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허구'를 만들어내고 이를 중심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로 단결하게 하는 능력 때문이기도하다.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종교, 이념처럼 현실은아니지만 현실적 힘을 지닌 허위의식,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에서 신화의 기원이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능력."
- [사피엔스], <2부. 농업혁명>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오는약 1만년 ~ 6천년 전 '농업혁명'을 통해 수렵채취에서 정착문명이 자리잡으면서 인류가 더 번영한 것으로 배웠다. 하라리에 의하면 절반만 맞는데, 인류는 '농업혁명'으로 자연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밀'이라는 작물종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란다. 농경사회는 결코 풍족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았다. 정착하면서 인구가 늘어났고 수확은 보잘 것 없어 대부분이 굶고 병균의 전염이 용이해 더 많이 죽었다는 것인데, '밀'의 번식에 더 기여하고 말았으니 차라리 수렵생활이 더 풍족하고 건강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긴, 채 백년도 안된 우리 과거만 해도 보릿고개와 전염병으로 사망률이 높았지 않은가.

"농업혁명 이래 인간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그런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 [사피엔스], <3부.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에 들어가기 앞서 '농업혁명'으로 정착의 공동체를 형성한 인류는 '문화'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계급 피라미드를 구축하고 국가를 건설하고 '제국'으로 통합된다. 하라리는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를 '형제(네안데르탈인) 살해범', 전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대량 학살자'라며 전 생명체 입장에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 하나, '인류의 통합' 최고체제로서 '제국'의 긍정성은 강조한다.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인 '제국'은 그 자체로 독재는 아니며 그 '문화적 확장성'을 통해 인류를 '통합'했는데 "전투에서는 지고 또 지면서도 전쟁에서는 이기면서 타격을 입더라도 버티고 유지하는 능력"으로 지금까지 인류문명을 발전시키고 유지한 가장 효율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에게 '제국'은 인류의 현실역사에서 '최고의 체제'이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 [사피엔스], <4장. 과학혁명>

인류의 첫 번째 '해방'은 '신화'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방시킨 '철학'이고, 두 번째는 '종교(철학)'로부터 객관적 자연법칙을 해방시킨 '과학'이다. 
'제국'의 영향으로 인류 문화가 통합되어 가던 약 5백년전 '과학혁명'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가 더 발전하고 정보혁명이 진행되고 있는데, 하라리는 다른 모든 사상들을 무위로 돌리는 한편 결코 찬양하지는 않으면서도 '과학과 자본주의'의 현실적 힘을 또한 강조한다. 
유발 하라리에게도 역사는 '과학'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인류 역사에서 '과학'적 지식에서 '세 번의 (신)대륙 발견'이 있었는데, 이'과학적 발견들'은 기존 사상체계에 혁명적 전환을 불러온 '인식론적 단절(절단)'이다.

"사실 우리가 인류 역사에 있었던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대한 이론의 '대륙들'이라고 불러야 할 것과 연계시킬 수 있는 건 아닌가... 마르크스 앞에는 오직 두 개의 '대륙'만이 계속된 인식론적 단절로 인해 과학적 지식으로의 길을 열었다... 두 개의 '대륙'이란 (탈레스 등) 그리스인의 '수학의 대륙'과 갈릴레오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열린 '물리학의 대륙'이다... 인식론적 단절에 의해 마르크스는 제3의 과학의 신대륙, 즉 '역사의 대륙'을 과학적 지식을 향해 활짝 열어 놓았다."
- 루이 알튀세, [레닌과 철학] (1968)

'과학적 지식'의 입장에서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철학은 수학(논리)적 사고의 발견으로 기존 신화적 사고와 '인식론적 단절'을, 갈릴레오로 시작된 물리학(이후 화학, 생물학 등 일체 자연과학)의 발견으로 기존 종교사상과 '인식론적 단절'을, 마르크스로 시작된 '역사유물론' 의 발견으로 기존 관념적 역사관과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면서 인류 사상은  혁명적으로 전환되어 왔다.

하라리는 한때 세계 최강이었던 중국 제국이 유럽 제국들에게 뒤쳐진 이유는 '본인들은 모든 걸 다 갖추어서 더 이상 수용할 게 없다'는 자만이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뒤쳐진 유럽 제국은 본인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과학'의 힘에 의해 계속 혁신해 나간 결과 세계를 지배했으며, 그들의 무기인 '과학과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혁신으로 인공지능, 신인류 등의 발명을 통해 끊임없이 혁신하고 결국 성공할 것이며, 이러한 '유연성'에 힘입어 '사피엔스'는 종말하고 '신적 존재(호모 데우스)'로 다시금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 영원불멸을 꿈꿨던 '길가메시'를 따서 이름지은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신(호모 데우스)'이 되려는 '사피엔스'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하기보다 '욕망'을 설계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사피엔스]는 끝을 맺는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초월하려는 '사피엔스'는 과연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과학의 주력상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우리는 머지않아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대단히 방대하고 재미있는 책이기는 하나, 아쉬운 점은 인류 역사에서 '철학의 부재'를 염려하는 유발 하라리가 인류 최고의 정치체제로서 '제국'의 '빅히스토리' 속에 더 나은세계, 더 나은 역사, 더 나은 인류 등의 상상력 따위는 다 갈아넣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빅히스토리'는 '과학과 자본주의'의 힘으로 '신'이 되려는 공상과학적 [호모 데우스]와 [사피엔스]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을 미래예언서로 재탕하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일 뿐이다.

재미는 좀 덜해도 하라리식 '빅히스토리'의 모티브였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1997)의 진지함과 겸손함이 더 돋보인다.

***

1.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1.
2.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명주 역, <문학과 사상사>, 2017.
3.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역, <문학과 사상사>, 1998.
4. [역사의 역사], 유시민, <돌베개>, 2018.
5. [레닌과 철학], 루이 알튀세, 이진수 역, <백의>, 1991.

(2020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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