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음의 밤
최지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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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밤에는 유난히 소리가 또렷해진다.

낮 동안 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어둠을 틈타 고개를 들고, 그 사이로 음악이 스며든다.

어떤 노래는 이유 없이 마음을 흔들고, 어떤 멜로디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불러온다.

<일렁이는 음의 밤>은 바로 그 순간들에 관한 책이다.

음악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을 깨우고, 슬픔을 견디게 하며, 결국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음악에는 묘한 힘이 있다.

한때 자주 들었던 노래는 재생 버튼 하나로 나를 과거의 한 장면으로 데려간다.

첫사랑, 헤어짐,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군 입대를 앞두고 잠들지 못하던 밤.

그 기억이 무엇이든, 그 자리에 음악이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일렁이다’라는 표현이 왜 이토록 정확한지 새삼 느꼈다.

감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소리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흔들린다.



슬픔을 통과하는 음악이라는 프리즘


최지인 시인은 음악을 통해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친척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밤, 전유동의 ‘호수’를 들으며 의미를 곱씹는 장면에서 그는 말한다.

이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미란 인간이 제멋대로 정하는 것이며, 무의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불러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날의 그에게 전유동의 '호수'는 어떤 의미였을끼?

슬픔을 외면하지 않되, 그 안에 잠기지 않게 해주는 장치 같은 것이었을까.


그는 낙관적이지만 가볍지 않고, 슬프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예술로 기억하고, 사람으로 이어지는 밤


이태원 참사가 있었던 10월의 어느 밤, 시인은 이상은의 ‘공무도하가’를 찾는다.

그리고 음악처럼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세상에 예술을 매개로 죽음을 기억하며 슬픔을 살아내겠다고 다짐한다.

이때 음악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 타인의 삶으로 확장된다.

하나의 음들이 모여 세상을 이루듯, 한 존재를 살게 하는 것은 다른 존재다.


그의 글을 따르다 보면 음악이 사람의 얼굴을 띠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한 부모의 삶, 할머니와 이웃들, 꿈을 찾아 떠난 친구들, 보문동 출판사에서 함께 버틴 선배들, 가자 지구에서 살아남아 한국으로 온 친구, 그리고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내.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않고, 서로의 삶을 통해서만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음악은 그 관계를 잇는 조용한 실이다.



우리에게 남은 노래들


캄캄한 밤, 지나간 시간은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몸 어딘가에 머물다 불쑥 되살아난다.

그리고 음악은 그 통로를 열어준다.

이 책을 덮고 나면 괜히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이게 된다.


이 책을 아니 이 글을 읽는다면 당신도 분명 하나쯤의 노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노래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잠시 머물다 와도 괜찮다. 우리에겐 아직 밤마다 들을 노래들이 남아 있으니까.


지금 이 밤, 이어폰을 꽂고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어딘가에 묻어둔 당신의 기억도 함께 일렁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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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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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으로 살고 있다고 믿다가도, 문득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경계가 흐려지고, 내가 정말 이곳에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

이 책은 꼭 그런 밤에 읽혔다. 읽고 있었다기보다는 뭐든 잘 안되는 짜증으로 가득한 밤.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잠시 머물렀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유난히 불친절하다.

인물들은 이유 없이 기다리고, 걷고, 떨어지고, 사랑하고, 버려진다.

산타로사 공항에서 아무도 오지 않을 재회를 기다리는 여자, 잘린 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남자, 머리가 생긴 연인을 보고 절망하는 여자,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기차를 타는 사람들.

각각의 이야기는 서사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불안한 장면 하나를 남긴 채 사라진다.


읽으면서 자주 멈췄다.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까지가 은유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최소한 나라는 독자는 끌어안기보다는 밀어내는 쪽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럼에도 남아버리는 감각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그 모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남는 감각, 설명되지 않는 불안, 끝없이 기다리는 상태, 이유 없이 지속되는 고통.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광기는 소설 속의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기괴한 감정이 변주된 것처럼 느껴졌다.


바바라 몰리나르의 세계에서 불행은 늘 이유 없이 들이닥친다.

고통의 시간은 끝이 없고, 우연히 마주치는 타인들은 대체로 적대적이며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멈추지 않는다. 기다리고, 떨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이 반복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을, 이유를 모른 채 견디며 살아왔는지.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표제작이자 단편의 마지막인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에서 침대에 묶인 남자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주사를 맞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여기서도 질문은 쌓이지만 답은 없다.


우리는 왜 이런 삶을 사는지,

누가 결정하는지,

이 삶은 언제 끝나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 하루를 통과한다.

그렇게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찾아온다.


이 소설의 밤은 시간이라기보다 상태에 가깝다.

설명 받지 못한 채 존재해야 하는 상태.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던져진 삶도 이와 같다.

우리는 늘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 삶을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럴듯한 설명을 얼핏 듣거나 찾은 것도 같지만

가끔 내가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밤은 지나고 아침은 온다.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있다.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잘 쓴 소설이라고 단정하기에도, 선뜻 추천하기에도 망설여진다.

의미를 붙잡으려 할수록 미끄러지고, 대신 어떤 감정의 덩어리만 남는다.

물론 모든 책이 명확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책은 이해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실존을 더 정확히 건드린다.

이 책이 그랬다.


지금 당신이 혼자이고, 지금이 밤이라면.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안고 있다면.

한없이 NF스러운 이 기묘한 이야기들 속으로 한 번쯤 걸어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혹시 아는가. 당신의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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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사람이 이긴다 - 사람을 남기는 말, 관계를 바꾸는 태도
이해인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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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 날아오는 말과 행동의 화살이 생각보다 크고 단단할 때, 이 마음은 단지 나의 희망 사항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다정함이 만만함으로 오해받는 순간들,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들 앞에서 우리는 종종 좋았던 마음을 거두고 싸늘하게 돌아앉는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다정함은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선택이며, 관계는 우연이 아니라 결과다.

이 책은 그렇게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독자의 등을 떠민다.



1. 다정함은 성격이 아니라 태도


책은 다정함을 좋은 말이나 부드러운 표정 정도로 축소하지 않는다.

다정함은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이자, 관계의 온도를 스스로 조절하려는 의지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의 다정함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내면을 다루는 일에 가깝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날카로워지는 이유, 친밀함이 어떻게 무례로 변하는지를 차분히 짚어가며,

말의 선택과 말투의 결이 관계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이럴 때 어떤 태도로 상대를 대하겠느냐고.



2.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를 구분하는 법


나아게 저자는 관계의 알맹이를 묻는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이 대화가 아니라 자기 말만 속사포처럼 내뱉는 사람이다.

화려하고 말 잘하고 사람 많아 보이는 관계의 대부분이 왜 끝내 공허로 남는지, 자기 이야기로만 채워진 대화가 왜 나를 지치게 만드는지,

책은 아주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관계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지만 모두와 깊어질 필요는 없다"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다정함이 자기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를 무너뜨리며 유지하는 관계는 다정함이 아니라 방치에 가깝다.

새겨두고 적어두어야 할 문장이다.



3. 다정함이 결국 나를 지키는 방식


이 책에서 말하는 다정함은 자기 존중으로 귀결된다.

사람을 볼 때 겉모습이 아니라 감정의 질감을 보라는 조언, 만남 이후의 나를 기준으로 관계를 판단하라는 문장은 실천적인 힘을 가진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어떤 관계를 선택할 것인지는 삶의 방향과 닿아 있다.

다정함은 모두에게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관계를 이끌어가는 태도에 가깝다.



이해인은 다정함을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구호로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좋은 하루의 반복, 그 하루를 만드는 작은 선택으로 다정함을 놓는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다정해지겠다는 다짐보다 먼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온도를 가늠해 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말이 내일의 관계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조금 덜 상처받고 조금 더 단단해지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결국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뜻에 가깝다.

행여 지금 어떤 관계가 버겁게 느껴진다면, 이 책은 다정함을 다시 정의해 볼 조용한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다정한사람이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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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나의 마음 그릇 (스프링) - 매일 나를 채우는 연습
김윤나 지음, 차상미 그림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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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 줄 알았더니 스프링 노트다.

정확히 말하면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하루에 한 번 마주하는 탁상 달력이다.(아 날짜는 쓰여있지 않다)


어릴 적 이런 물건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연초에 큰마음 먹고 사서 걸어두지만, 늘 1월 10일쯤에서 시간이 멈춰 버리곤 했다.

좋은 문장도, 성경 말씀도 결국은 펼치지 못한 달력 속에 남았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도 비슷했다.

'이건 과연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을까?'


아직 새해가 밝지 않았는데 스르륵 넘겨 보았다. <김윤나의 마음 그릇>은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가만히 묻는다.

오늘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지, 오늘 작은 친절 하나를 베푼다면 누구에게 하고 싶은지.

대단한 목표도 거창한 다짐도 아니다. 하루의 속도를 아주 조금 늦추는 질문들이다.



하루를 바꾸려 하지 않고, 나를 불러오는 질문들


이 책의 질문들은 삶을 바꾸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삶의 중심에 다시 나를 불러온다. 루틴한 하루가 반복되다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헛헛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책은 웃으면서 한 번쯤 해볼 법한 질문을 건넨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질문,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 다정한 질문들이다.


하루를 잘 살기 위한 정답 대신, 오늘 하루를 나답게 보내기 위한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책은 조용한 동반자에 가깝다.



왜 우리는 이렇게 마음이 헛헛해질까


작가의 말은 이 책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김윤나는 우리가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살고 싶어 하면서도, 여전히 타인의 시선과 역할에 묶여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바쁘게 반응하며 살지만, 정작 나에게 말을 거는 시간은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답 대신 질문을 한다.

나를 혼내는 질문, 다그치는 질문, 주어가 뒤바뀐 질문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묻는 성찰적 질문.

이 책에 담긴 질문들은 15년간의 상담과 코칭 현장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다.

자기 이해, 가치, 관계, 일, 건강, 행복처럼 우리가 자주 흔들리는 지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답이 없어도 괜찮다는 위로


이 책이 특히 좋은 이유는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의 질문에 바로 답이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마음은 시간을 두고 질문받기를 원하고, 어떤 답이든 격려 받기를 바란다고. 그래서 이 책은 잘 살아야 한다는 부담 대신, 나를 기다리는 법을 알려준다.


하루를 놓쳐도 괜찮고, 질문에 답하지 못한 날이 있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지속이다.

나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 주는 책이다.



책처럼 생기지 않은 책의 장점


탁상 달력처럼 세워 두고 볼 수 있는 형태다.

책장에 꽂아 두면 잊히기 쉬운 책이지만, 책상 위에 놓이면 하루에 한 번은 시선을 건네게 된다.

매일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자체가 하루를 여는 작은 의식이 된다.


차상미 작가의 파스텔톤 일러스트도 예쁘다. 

질문을 마주하는 순간을 부드럽게 감싸며, 마음을 조금 내려놓게 만든다.



새해 다짐 대신, 새해 질문을 선물한다면


새해가 다가오면 우리는 늘 다짐을 한다.

더 잘 살아야지, 더 나은 내가 되어야지. 하지만 이 책은 다른 방향을 제안한다.

더 잘 살기보다, 다시 나에게 돌아오자고.

나를 채우는 연습을 하루에 하나씩 해보자고.


그래서 이 책은 새해 선물로 참 좋다.

타인에게 주기에도, 나 자신에게 주기에도 부담 없는 다정함이 있다.

책상 위에 놓인 질문 하나가 하루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새해를 앞두고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작은 질문을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


혹시 아는가 어떤 질문으로 시작된 2026년의 당신의 하루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어떤 날이 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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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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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고 싶었던 이야기 앞에서


어릴 적 운동권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2002년 효순이·미순이 사건이 계기였다. 세상이 마냥 상식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 착각하기 마라는 듯 그 일은 다가왔다. 월드컵에, 삼성라이온즈 우승에,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모든 거리가 기쁨으로 술렁일 때도 나는 분노했다. 거리로 나갔고 동지들을 만났다. 나는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 녹색당 등의 당적을 거쳤다. 물론 당비 월 얼마 내는 게 전부였지만 나에게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과거형인 것은 한때는 이 이야기들이 나의 정체성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되려 이런 책을 만나면 한발 물러서는 쪽에 가까워졌다.


너무 많은 슬픔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로 혹은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핑계로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 바닥에서는 모를 수 없는 이름 박래군. 그래서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를 집어 들기까지 조금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도, 투쟁의 연대기도 아니다. 한 사람이 감당해 온 슬픔의 밀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슬픔이 어떻게 개인의 몫을 넘어 사회의 언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문학청년에서 활동가로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청년 박래군이 1980년대라는 시대와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연세 문학회, 기형도와 성석제, 공지영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럼에도, 그가 기억하는 것은 문학적 낭만이 아니라 최루탄 연기로 뒤덮인 교정이다.

"편하게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문장은 선택이 아니라 그의 양심의 강요에 가까웠을 것이다.


체포, 강제징집, 구속. 그는 비교적 담담하게 이 시기를 회고하지만, 그 문장 사이사이에는 국가 폭력이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부수는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혀를 깨물어서라도 저항하려 했던 순간, 그리고 끝내 굴복해야 했던 기억. 이 책에서 가장 아픈 대목은 그 폭력 자체보다, 살아남은 자의 남겨진 자괴감이다.



내 슬픔이 세상의 눈물과 만났을 때


생 박래전의 분신 이후, 박래군의 삶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설명하기 어렵다. 거리에서 형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환청, 운동이 뭔데 내 아들을 둘이나 교도소에 넣었느냐는 어머니의 외침. 숨이 막히는 고통. 그는 이 상실을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슬픔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를 이야기한다.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은 그를 더 많은 죽음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감옥에 있으면 면회라도 갈 수 있을 텐데라는 유가족들의 오열 앞에서 흘렸던 눈물.

그날 밤, 그는 그들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책이 말하는 연대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기로 결심한 이들의 선택에 가깝다.



더 낮은 곳을 향한 시선


박래군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통해 사회의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다. 장애인 시설, 부랑인 수용시설, 양지마을과 에바다 학교

언젠가 기사로 읽은 사건들이지만, 그의 글을 통해 다시 읽으면 이 문제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담은 허물어졌지만 운영 주체는 그대로 남아 있고, 법인은 이름만 바뀌어 운영을 계속한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한차례 이슈가 지나간 이후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노보다 무력감이다. 폭로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너무도 잘 알려진 진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이기 때문이다.



질 줄 알면서도 하는 싸움


대추리와 용산, 그리고 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서 박래군은 늘 진다.

그는 스스로를 지는 싸움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훈 작가의 말처럼, 이런 싸움은 져도 지는 것이 아니다.

승패로 평가할 수 없는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을 읽으며 나는 왜 나의 젊은 날과 멀어지려 했는지 깨달았다.

뜨거운 문장들 앞에서 그는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고.



눈물의 온기로 이어진 연대


마지막 장에서 박래군은 세월호 이후 생명안전 운동가로 다시 서 있다.

다섯 번째 구속, 독방에서 삼킨 눈물, 그리고 지키지 못할지도 모를 약속에 대한 자책.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과 이태원 유가족은 2020년대에도 서로를 만났고 안아 주었다.

누가 그랬나. 운동 같은 건 애저녁에 끝난 일이라고.

아니다. 아직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책은 그 연대에 조용히 희망을 건넨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박래군은 지난 45년 동안 그 온기에 기대어 싸워왔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이 눈물 앞에서 고개를 돌릴 것인가, 아니면 잠시 멈춰 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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