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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괜찮아 - 엄마를 잃고서야 진짜 엄마가 보였다
김도윤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난
중기 유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분노는 극에 달했는데 분노의 대상은 어이없게도 같이 난임 센터에
다니는 갓난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였다. 이런 분노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난임 카페에는 아이를 낳았으면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는 정말 아이조차 갖지 못한 사람에게 매너와 배려심이
부족하다며 입을 모아 비난했다.
아이
양육에 대한 고민 글과 모임들이 만들어지는 대학교 커뮤니티 글을 보며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솔직하게 그 마음을 올린 적이 있다. 이 때 그 마음을 이해한다며 토닥인다는 댓글이 붙었다. 그 때 내
마음 속 많은 분노가 기름 때처럼 끼어 있어 안 지워질 것 같았는데 비누를 만나 깨끗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당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고 웃는 가족들 집에 쳐 들어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희는 행복하냐며 칼로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던 시기였다.
결론적으로
그런 내가 애 셋을 낳아 키우고 있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이를 갖고 또 열심히 불임 커뮤니티를 보며 알게 된 사실은
긴 시간 아이를 기다린 만큼 아이를 낳았을 때 더 극심한 산후우울증을 겪는다는 사실이었다. 오래 기다렸으면
한 순간 한 순간 너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기쁨이
클수록 그 그림자는 더 진해지는 것 같다. 그랬다. 나 또한
기나긴 우울감과 힘겹게 싸워야 했다.
그 방법은 책읽기였다. 나와 같은 우울감을 이긴 사람과 왜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는 일. 그렇게
나는 입신양명을 위한 육법전서가 아니라 원해서 읽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이후 동서 친한 동생이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베란다에서 추락사를 했다. 이 책 저자 어머니처럼.
이 책은 엄마를 추모하는 책 이자 저자 자신이
겪은 우울증 극복기다. 일단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숨김없이 얘기하고 펼칠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이런 얘기를 말이 아닌 글까지 쓸 수 있다는 건 이 상처가 치유가 됐다는 말도 된다. 우울증에 대한 책으로도 엄마를 위한 책으로도 이 책은 세상에 나올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사실 예전에 우울증 관련 도서로 떡볶이 열풍을 일으킨 책을 읽었을 때와 다른 기분이라 다행이다. 그 책은 우울증이 완치된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계속되는 우울감이
나에게도 전이되는 것 같아 한동안 우울감을 오래 껴안고 있어야 했다. 나만 그런가 리뷰를 찾아보니 호불호가
매우 극심하게 갈렸다. 이 책이 주는 다른 점은 저자가 갖고 있는 우울감 원인이 분명했고 또 자신의
문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치료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사실이다.
형에 대한 이야기가 전에 읽었던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와 상황이 똑같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우 유능하고 다재다능했던 아들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첫째는
결국 집 지하실에서 마지막을 맞았고 둘째 아들은 돌을 옷 속에 넣은 채 호수에 빠졌다가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었다.
두 아들 다 죽음을 선택했음에도 이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슬픔을 넣어 놓고 자신과 같은 비극을 겪을 누군가를 위해 치부 같은 자신
일들을 글로 풀어 책으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내가 읽었고 또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한 비극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그러고 보면 엄마는 아들 둘을 정말
목숨보다 끔찍하게 사랑했고 그랬기에 자신이 그 아픔을 짊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예전 상법
시간 오수근 교수님은 상법만 가르쳐 주신 건 아니었다. 학교가 기독교라서 그런지 교회나 슈퍼 네츄럴한
일들을 얘기해 주셨다. 그 중 어떤 아들이 갑자기 죽기 직전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그 상황을 보고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께 아들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한 지인분이 정말 그렇게 되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 이야기가 회사법과 무슨 관련이 있나 생각한 적이 있다. 결국 기억에 남아 있는 건 회사법 법규가 아니라 이런 황당한 이야기다.
코로나 시대 마음대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 무엇이 아이에게 옳은 것인지 확언하기 힘들다.
라떼(“나 때는 말이지.”)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엄마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엄마도 두렵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될건지 예측할 수 없다. 아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잡귀를 통해서도 가능할란가? 그럼으로
나 또한 우울감과 가깝게 지낸다. 어떤 답도 없이 우주에 떠도는 어떤 부유물 같은 느낌. 엄마를 그리며 그 어려운 감정을 헤치며 책 한 권을 만들어 낸 작가를 보며 나 또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본다. 심각하게 이 책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며 아이들이 말한다.
“엄마 화났어?”
“ 아니, 엄마는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