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동물농장>
tatton 가든을 구경하고 나니 체력이 방전됐다. 슬슬 그냥 집에 갈까 했더니 아이들이 그런다.
“엄마 동물들은 어디 있어?”
티브이만 보겠다고 방구석에 있던 아이들을 불러냈던 힘은 ‘동물’이었다. 이제까지 말 없는 화초만 보았을 뿐 그 어디도 움직이는 건 없었다. 아, 여기 산책 온 강아지들은 제외. 넓어도 참 많이 넓은 테이턴 파크. 다시 힘을 내어 몇몇 사람들이 가는 길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스쿠터의 힘을 빌어, 나는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온 힘을 다 해 찾아간 테이턴 농장. 이곳은 옛날 모습 그대로 농장을 운영했다.
우유를 짜고 그 우유를 옮기고 암탉들은 사람들에게 계란을 선물한다. 돼지는 잘 먹고 잘 지내다 고기가 된다. 동물 삶이 있는 그 곳에 1800년대 만들어진 기계들이 전시되어있다. 동물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옆에 번듯하게 그들이 인생을 끝낼 도살장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풍경을 글로 어디서 만났던 것 같다. 아, 동물농장.
이 풍경은 동물농장의 풍경이었다. 어렸을 때 재미로 읽었던 동물농장. 결국 돼지가 두 발로 걷고 불쌍한 말 복서가 죽임당하는 이야기. 저 곳에 놀러갔을 때 읽었던 ‘빵을 달라’는 말이 유독 많았던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의 정치 우화 버전이었다. 주인공 에티엔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정치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 다음 이야기가 바로 ‘동물농장’이다.
에밀졸라와 조지 오웰 둘의 공통점은 좋은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대학 진학을 실패했다. 과학고나 민족사관고를 나왔으나 수능 3등급을 받았다고 하면 될라나. 나는 오히려 엘리트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기에 대중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을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본다.
‘동물농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 첫째 딸 나이였다. 그 때 나는 단순하게 돼지랑 개는 나쁘고 양은 무식하며 말은 불쌍하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돼지와 개를 미워했고 양같이 순하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어딜 향하는지. 또 더 놀라운 건 비단 오웰이 겪었던 과거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 어떤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이제 난 이 책을 읽고 이런 결말을 내려 본다. 아무리 선한 의도였더라도 생명체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고인 물은 썩는다. 어제 그 사람이 구원자였더라도 내일의 부패 대마왕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세계문학전집을 읽다가 소름 돋는 내용이 있었다. 조지 오웰은 런던 근처에 살았다가 인도에서 돌아온 후 전전한 동네 중에 워링턴이 있었다. 작가로 글을 쓰는 시기였다. 테이턴 농장은 워링턴 근처에 있다.
“어느 날(당시 나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다)나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꼬마가 커다란 달구지 말을 몰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꼬마는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말에게 채직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약 저런 동물들이 자기들의 힘을 인식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저들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인간들이 동물들을 부려먹는 것은 부자들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우크라이나판 서문}”
정치는 모두 잘 먹고 살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결국 그건 앞에서 나대는 사람의 독점으로 바뀐다면 권력이동 사기극일 뿐이다.
1800년대 사회에 대해 용감하게 소리를 내어 작품을 만들어 내던 두 작가 에밀 졸라와 조지 오웰. 이 두 인물은 죽어 없어졌지만 글은 남아 여기 남아 있다.
“두 개의 악 가운데 어떤 것이 덜 악한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뿐이며 그 이상의 것은 결코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