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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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기초로 쓴 책이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에 가까운 책. 그저 나를 위한 리뷰를 남기고 싶었다.


보통 어른들은 과거 이야기를 할 때 그런다.

내 이야기를 하면 책 몇 권은 나올 거다. 내가 얼마나 힘든 일을 살았는지 상상도 못할게다.”

이런 말씀을 하신 분 중, 실제 빈 원고지에 글자를 채운 어른은 많지 않다. 저자는 그랬다. 글을 쓰며 돈을 벌었던 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힘든 현실을 겪으며 계속 떠오르는 과거 때문이었다.



인생에서도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는 반드시 그곳에 심리적 주둔군을 많이 남겨두게 되고,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9/305)



지은이 서명숙 작가는 긴급조치 9조에 따라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다녀왔다. 어머니는 딸 인생이 매우 기구할 것이라는 사주를 듣는다. 쎈 사주를 억제하기 위해 딸 이름을 따서 가게 이름을 지으셨단다. 딸은 누구보다 똑똑한 딸로 크고 엄마는 능력 있는 여성으로 혼자 살라며 용기를 준다. 똑똑한 딸은 커서 제주도에서 고려대 교육학과에 진학한다. 학보사에 합격해 사회에 눈을 뜨고 남편과 심재철, 유시민 등을 만나 운동권에 투신한다.



저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책 이름, ‘천영초언니였다. 고려대학교 여학생이 모여 공부하고 데모를 기획한다. 이 안에서 같은 투쟁을 하는 친구지만 여성이기에 겪는 수모를 겪는다.



여학생들이 좀 참아야지. 같이 덤비면 어떡해.“ 폭력의 피해자에게 오히려 참으라고 하는 그녀가 내가 알던 그 정겨운 이모가 맞나 싶었다.131/305



그 당시 겪은 철저한 방송 통제도 피해갈 수 없었다.



철저한 사전 검열과 보도 통제로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아사히 신문에는 시위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시위를 알릴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판단에서였다.(101/306)



이런 힘든 일을 겪은 후,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무조건 국가 말을 잘 듣기만 하면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순수한 부모는 딸을 본 후 복잡한 마음에 괴로워한다. 이런 부모와 불량한 동생을 보며 국가보다 효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있기 힘든 일이 생긴다. 영초 언니와 같이 산 인연으로 피의자 신분으로 변하고 결국 제주도에서 엄마가 준 돈을 내고 감옥에 들어가는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사기와 절도를 한 죄수와 함께 투옥된다.



억울한 일로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무척 많았다. 특히 매우 긴 기간 투옥됐던 신영복 선생님이 떠올랐다. 서명숙 님은 세 개의 계절을 보낸다. 신영복님은 무려 몇 십 년 네 개 계절을 보냈다. 국가가 저지른 무시무시한 일을 이 책을 통해 같이 경험했다.



서명숙은 협조자였을 뿐, 주도자로 찍힌 영초 언니는 독방에서 외롭게 감옥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후 서울대 천재라 일컬어 졌던 정문화 선배와 결혼한다. 화자인 서명숙 작가도 대학 때부터 친했던 엄주웅과 결혼한다. 둘 다 힘든 시절 열정적인 사랑을 했지만 두 커플 사랑은 끝나버렸다. 마치 열정을 다했던 그 행동이 어떤 보답도 없이 흐지부지된 상황과 사랑 결말이 같았다. 그들이 반대한 박정희와 유신 정권은 끝났지만 향수라는 무기로 아직도 꿈틀대며 살아있다. 그렇게 박근혜는 당선이 됐고 최순실이 민주주의를 외치는 어이없는 상황.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그렇게 현실은 역사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가장 뜨거운 피를 갖고 있던 영초언니는 결국 한국을 떠난다. 타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고 뇌 기능까지 잃는다. 과연 그건 축복일까 비극일까?


앞서 읽고 같이 의견을 나눴던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주인공은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만 시간을 통해 죄가 발각된다. 반대로 이 영초언니는 옳은 일을 향해 몸을 불살랐고 결국 이루었지만 시간을 통해 다시 악이 꿈틀대고 있음을 목도한다. ‘시간은 악인에게도 의인에게도 동일하게 잔혹하다. 그렇기에 이런 책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힘든 시간을 통해 위로받아야 하는 일은 비단 저자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주둔군 이론’. 아주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간 걸 바탕으로 현재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힘. 이 힘이 지금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확실히 현재는 과거보다 낫다. 그렇지만 밝아야 하는 미래보다는 한참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치열한 과거에 대한 복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무너지고 무뎌진다. 정치적 입장도, 남녀 간의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하고 바스러진다.(307/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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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9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29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사마천의 한탄에 공감했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겪고, 악한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릴까요? 세상의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책한엄마 2017-08-29 14:07   좋아요 0 | URL
사일러스님도 읽으셨군요.제가 놓쳤나요?
사일러스님 서재에서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사일러스님 의견에 동감합니다.ㅜㅜ
그래도 영초언니는 후배가 책을 통해 삶을 의미있게 그려줘서 고마울 것 같아요.

cyrus 2017-08-29 14:14   좋아요 1 | URL
예스24에 《영초 언니》 리뷰 이벤트가 진행되었을 때 책을 읽었어요. 리뷰는 예스24 블로그에 있어요. ^^

2017-08-29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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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언급 가치도 없었던 ˝여성˝이란 변수를 끌고 들어왔다는 사실!!그걸 쉽게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작가 필력이 대단합니다.이성적이고 명확하게 여성학이 필요한 이유를 설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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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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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라 더욱 잔혹한 소설.정말 사실만으로 재미있지만-다음에는 꼭 허구로 다시 써주셨으면 좋겠다.사실이기에 느껴지는 주인공과 심리적 거리감이 너무 아쉽다.(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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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8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그 유명한, 하도 소설 같이 드라마틱해서 소설로 분류되었다는 책이죠 ?

책한엄마 2017-08-28 11:50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알라딘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요.유시민,이해찬,심재철 등등 현재 존재하시는 분이 책 안에 나와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어요.정말 차라리 소설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한 책이었어요.ㅜㅜ
 
일요일의 역사가 - 주경철의 역사 산책
주경철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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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역사에서 이해할 수 없는 광기를 보이는 인물과 사건을 찾아 11꼭지를 통해 생각해 봅니다.
역사가 입장에서 객관적인듯 주관이 들어간 에세이로 제 지적 욕구와 생각 나눔 모든 면을 충족시켜 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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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 찾기 2017-08-29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

책한엄마 2017-08-29 00:34   좋아요 0 | URL
마르케스 찾기님 반가워요!!^^*시간되면 이 책 정리해 보고 싶어요.
 
나는 '아직도' 내가 제일 어렵다 - 마음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손희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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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 안에 가진 ‘비밀’에 대한 책이다. 앞선 책은 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생긴 병, ‘우울증’에 대한 책이었다. 나는 내 마음을 알지만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에 대해 썼다. 요즘 세상은 ‘진실’을 추궁하고 산다. 자서전을 쓰고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라고 강요한다. 이에 저자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독자를 다독인다. 내가 내 마음에 솔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비밀이 있다는 건 내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라며 용기를 준다.


그렇다면 앞선 성공한 사람들이 내비친 ‘솔직함’은 무엇일까? 이 진실은 오랫동안 자신 안에 있던 비밀이 성숙해서 나온 보물이다. 이들이 자신이 가진 상처나 창피할 수 있는 흑역사를 부끄럽지 않게 한 힘은 바로 ‘비밀’이 아니었을까? 타인에게 어떻게 내 못생긴 마음을 설득시킬지 비밀이란 공간 안에서 고민했던 시간 흔적이 바로 ‘성공’을 만든 원동력이다. 비밀은 언젠가 밝혀진다. 다만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시간을 주자.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타인에 대한 본심을 숨기고 얘기하는 ‘백색 거짓말’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거짓말 또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음 다양한 사례와 연구를 통해 뒷받침한다. 자신을 위한 비밀과 타인에 대한 본심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 엄연히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저자는 내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더 이상 윤리적 문제에 얽매이지 말기를 충고한다.


나는 이제껏 솔직하고 거짓 없는 삶이 옳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게 제대로 된 세상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나는 진실하고 솔직한 글만 쓰고 싶었다. 은근히 가짜로 만든 세상을 무시했다. 동화를 쓰고 소설을 쓰면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사실이 아닌 걸 진짜처럼 쓰는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런 생각과 함께 우울감도 함께 몰려왔다. 살고 있는 현재가 더 우울하고 절망이란 사실이 어깨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더 이상 소설이 거짓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밀을 품고 있는 보물 상자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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