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밤 사건을 떠올렸다.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 스승님의 피를 정신없이 먹고 또 먹었다. 나는 스승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피에 더 끌렸던 걸까? 프릭스도 지금 내 기억을 보고 있을 텐데 아무 말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내가 울음을 코 속으로 삼길 무렵,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미안해, 쓸데없는 걸 물었다]
[나 그만 자야겠어. 다음에 마저 이야기 하자]
[...응...]
그는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머뭇거리며 대답했지만, 나는 모른척했다. 이번에는 내가 연결을 끊으려고 하는데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은..기웅이야. 김기웅]
[이름같은건 중요하지 않아, 이젠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 니가 어떤 모습이든, 넌 너야. 니 이름은 너만의 거니까, 잊어버리마. 그리고 내 이름도 기억해주고..잘자]
그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묘하게 우리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연결의 시작과 끝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마치 영화의 시작 지점에서 지직거리는 갑작스런 잡음이 들리는 것처럼 그의 생각이 다가올 때 노이즈가 먼저 도착하고, 연결이 끝날 때는 어두운 막이 드리워졌다. 지금 그는 나를 혼자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장막이 확실히 보였다. 그의 마지막 말이 스승님과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너는 너만이 아름다움이 있다. 민시영]
내가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걸 마침내 받아들였을 때, 스승님이 들려준 말, 이 세상의 유일한 시영이.
[자니?]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문가에 서 있던 스승님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는데 깨웠나 보구나]
[아니요. 안 잤어요. 그냥..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느라..오신 걸 몰랐네요]
스승님은 다가와 침대 가에 앉았다. 그는 나와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몸을 침대 기둥에 기댔다. 나 역시 내 가슴팍에 베개를 두고 그것만 쳐다보았다.
[내일 경찰을 만나야한다]
[혹시..그 검은 양복을 입은 뱀파이어들이 경찰인가요?]
[그래]
기억을 되짚어보니 데려가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 사건과 관련되었으니 내일 응해야하지만, 나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남자를 혼자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스승님쪽으로 몸을 내밀며 팔을 잡았다.
[같이 가주시는 거지요?]
[널 혼자 보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고맙습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에게 사과를 해야만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입가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용건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지 스승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침대에서 내려와 발끝을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죄송해요..지난 번 일..]
눈을 꼭 감고 기다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눈을 뜨고 얼굴을 들었더니 스승님은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작은 바람이 들어와 스승님의 머리를 살짝 건드리며 돌아나갔다. 이어 시리도록 차가운 달빛이 그의 얼굴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멍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져주시는 스승님의 행동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그 일은 잊어버리자. 그럴 수 있겠니?]
[노력해볼께요]
우리는 달 빛 속에서 서로를 말 없이 응시했다. 프릭스처럼 스승님과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에게 내 가슴 속의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꼭꼭 숨겨둔 마음까지, 모든 걸 보여주고 싶었다. 스승님의 검은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데, 멀리서 부엉이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와 동시에 스승님도 내게서 떨어졌다. 뒤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서는 모습에 혼자 남은 나는 몹시 추운 기분이 들어 부르르 떨었다.
나는 스승님을 사랑한다. 그 사실을 이 밤에 또 한번 각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