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야철신
어느새 밤이 되었다. 푹 젓은 모습으로 대장간에 돌아오니 떡보 밖에 없다.
[어이~, 너 왜 이제 오냐? 아까 행수님이 찾으셨다]
[네..]
[그 꼴로 들어오지 마라. 바닥 젖으면 쇳가루 못 쓸어낸다]
[행수님은 어디 계세요?]
[아까 나가셨어]
나는 떡보의 만류에 대장간의 대문은 넘어서지도 못하고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다보니 아버지 드릴 찬을 못 마련했다.
[미음만 드시면 힘이 없어서 더 아프실 텐데..]
약 한 첩 못 써본지 벌써 한 참 됐다. 살아있는 게 용하다는 의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아버지가 모진 고문 때문에 병을 얻고 자리보전을 하신지 벌써 몇년째다. 원래는 무가의 귀족이었는데, 모함을 받은 것이라고 어머니가 알려주셨다. 이야기 서책에서 본 대로 가자면 나는 모함을 한 자들을 물리치고자 갖은 수련을 다 하여 힘을 키워야 하건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귀족이 아닌 우리는 가산도 다 빼앗겨 이렇게 볕도 안 드는 초라한 집에 산다. 나랑 같이 품을 팔던 어머니도 작년에 돌아가셔서 이제 이 집 가장은 나다. 먹고 살자니 그렇게 좋아했던 서책도 볼 시간이 없고, 약 값은 필요한데 하루에 한 끼 먹기도 어려워 대장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귀족의 자제 최정진이 아니다. 같이 놀던 다른 놈들도 나를 모른 채 하며, 나도 그들을 보지 않는다. 이 대장간에 들어가게 된 날부터 결심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직공이 되어 돈을 많이 벌겠다고....
[그래..무엇이든 희망을 가지면 된다. 넌 잘할 거야]
내일부터 대장간에 일하러 다닌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그렇게 한 마디를 건네셨다. 비록 심부름 정도지만 돈도 생기고, 밥은 공짜인데다가 부엌데기 오월이가 아버지드릴 찬도 몰래 빼내주니 이 아니 행복할쏘냐! 적어도 점심전까지는 행복했다. 그때까지는..
[도련님~밥은 왜 안 주시나요?]
[아버지 드릴 미음도 간당간당한데 네 입에 들어 갈 건 없다]
[전 한창 클 때라 끼니는 꼭 먹어야 해요]
[요괴가 인간의 밥을 먹는다는 소린 들은 적 없는데..]
[전 밥 먹고 자랐어요]
살림살이가 너무 없어 휑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부엌인 곳에 들어가 멀건 죽을 끓이고 있자니 새지가 말을 건다. 이놈은 이제 완전 의탁이다. 구해주었으니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건 당연한 나의 의무라나..
[그럼 밥 주던 대로 가]
[거긴...거긴 싫어요]
[거기가 어딘데?]
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못 들은 척하며 멀건 죽만 바라본다. 아버지 드릴 상을 차리고 나서 작은 종지에 새지 것을 담아 놓으니 반색하며 달려든다.
[감사합니다~맛있게 먹을게요]
지금 작은 방안은 내게 기대어 반쯤 일어나 않은 아버지와 수저로 죽을 떠 넣어드리는 나, 그리고 종지에 얼굴을 박은 새지, 그렇게 두 사람과 요괴 한 마리가 있다. 아버지는 못 보시기 때문에 신경 쓸 것은 없으니 그냥 두었다.
[도련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몰라]
[에이 참, 좀 생각을 해보신 후에 대답하세요]
[생각해봤는데...몰라]
설거지를 하는 내 옆에서 노닥거리던 새지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 우리 집에 하나 뿐인 밥그릇을 조심히 닦고 있어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사신들의 회합날이예요. 더불어 요괴들의 잔칫날이구요]
[사신? 죽은 사람을 데려간다는 저승사자?]
[아니요. 주작, 현무, 백호, 청룡이요]
[그것들이 진짜 있나보구나]
[그럼요. 저도 있는데..왜 없겠습니까? 가끔 도련님은 맹하신 구석이 있으시다니까요]
새지는 친해졌다고 생각하는지 슬슬 농도 한다. 살짝 흘겨보자 흠흠하며 목을 고르더니 설명을 한다.
[동서남북의 각 방위에 따라 이를 지키는 신인데,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가 그것입니다. 보통 때는 동명왕 영혼의 안식처인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사악하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일 년에 한 번 다 같이 모여서 회합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