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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들어가는 말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그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를 이뤄내곤 한다. 극한의 극한. 소설은 '눈'이라는 자연환경에 '테러'라는 인위적 환경을 더해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에 내몬다. 그런 극한의 환경에서 주인공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능력을 보여준다.
당신도 '극한의 환경'에 처해본 적이 있는가.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과 고난을 겪은 적이 있는가. 필자도 꽤나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보니 봄날에 유채꽃밭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 돌부리에 발가락을 찧어놓고는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었나 싶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쿠토와같은 삶의 고난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 고난이 힘든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물리적인 고난은 가끔은 그저 '화이트아웃'이 끝나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것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화이트아웃이 온다면,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을까.
한계를 극복하는 인간의 표지
주인공 도가시는 요쿠토와댐 발전소에서 운전원으로 근무한다. 어느 날 조난객을 구하려다 친구인 요시오카를 잃고 만다. 화이트아웃에 멈춰 선 자신 때문에 친구를 잃었다는 죄책감에 살던 도가시는 약혼녀인 지아키에게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려다 테러에 맞서는 운명이 된다.
우연찮게 테러조직과 맞서게 된 도가시는, 죽은 요시오카의 약혼녀가 인질로 잡힌 상황이 되자 요시오카의 유지라 생각하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지아키를 구하고자 움직인다. 3킬로가 넘는 방수구에서 분당 3백 톤의 빙수를 견디고, 왕복 16킬로가 넘는 설산을 탄다. 생전 만져보지도 못한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테러조직과 사투를 벌인 끝에 지아키와 인질들을 구출해낸다.
언뜻, 보통의 히어로물(SF가 아닌)처럼 독자는 '과연 평범한 인간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필자도 그렇지만, 가끔 우리 삶에는 어떤 '표지'(오, 자히르 인용)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소설의 제목에도 드러나지만 그 표지는 '화이트아웃'이다.
도가시가 요시오카를 잃게 만든 '화이트아웃'. 눈과 안개와 바람이 뒤섞여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심지어 자신의 팔다리조차 인지하기 어려운 상황. 피아의 구분이 되지 않는 그 막막한 상황은, 도가시에게 어떤 표지가 된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 필자 역시도 나의 나태함이나 무력함, 혹은 의지박약으로 친우를 잃는 경우를 겪는 일은 없다. 전에 '한 순간에'라는 소설의 서평에서도 언급했지만, 살아남은 자의 무게란 누구나 쉽게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가시는 그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그 약혼녀에게 직접 전하려는 의지까지 지닌 인물이다. 즉, 테러를 맞이한 순간 요시오카를 떠올린 것은 도가시의 죄책감이나 정의감, 책임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본인의 삶이 짊어진 무게. 그것이 지긋하게 내리누르는 만큼,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확고함. 바로 그것이 현실에서도 과연 있을까 싶은 극한의 상황을 이겨낸 표지가 아닐까.
오래된 소설에서 느껴지는 지난함
확실히 첫 출판이 1995년이라는 사실이, 읽는 내내 버겁게 다가왔다. 나름 텍스트에 강한 면모를 가진 필자라고 자부했지만, 사건에 대한 엄청난 서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서 테러에 맞서는 스토리는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한 이야기지만, 작가는 모든 상황에 대해 매우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최대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한 듯하다.
아무 세부적인 수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인물의 감정이나 심리 묘사와 그에 따른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 등. 어찌 보면 이런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 작가가 얼마나 많은 자료조사와 노력, 경험, 인터뷰를 진행했을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필자도 이런 부분은 필히 본받아야겠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최근 소설들의 면면을 보자면 트렌드에 맞지 않는 소설인 것도 사실이다. 발전용 댐이나 갖가지 산악 용어 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알 필요 없고, 알고 싶지 않을 정보까지 과다하게 들어가 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세부적인 수치를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서술하는 데다가 그에 따른 인물의 감정이나 생각까지 모두 서술함으로 인해서 전체적으로 읽어야 할 분량이 과도하게 늘어난 부분이 없지 않다.
이런 부분은 테러가 일어난 급박한 상황에 벌어지는 사건 흐름에서, 세부적인 묘사에 대한 이해를 신경 쓰느라 급박함을 잊게 만들어버리는 역효과가 있는 듯하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역경을 이겨내는가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있지만 과연 상식선에서 가능한 수준인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즉,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과연 이게 가능한가?라는 의문 역시 떠나질 않았다는 것.
그럼에도 확실히, 오래된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확실한 자료조사에 근거한 디테일한 상황 설정과 묘사, 등장인물의(주연급만) 세심한 감정표현에 따른 강하고 확고한 의지(약간은 억지스러운 설정이지만)는 단연 높이 살만 하다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확실히 징병제인 우리나라라면 모를까, 평생 총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주인공이 자동소총과 권총을 쓰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출간할 때, 차라리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조금 각색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 아마 훨씬 '총기 액션'이 재밌어졌을 테니까. (예비군 만세)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