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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의 문으로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평점 :
들어가는 말
구병모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위자드 베이커리였다. 그때 필자가 느낀 느낌은 '환상문학' 혹은, '현대판타지' 장르의 작가 이미지였다. 어찌보면, 나 역시도 단면만을 보고 판단해버린 것이다. 이 소설을 사기로 결정하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최소한 책 설명에서 느꼈던 분위기는 약간, 얼토당토 않지만 좀비물과 비슷한 것이었다. 잠을 잃은 사람들과 잠이 사라졌으되 그 사라진 곳이 현실인 세계에서, 이를 극복하고 해결책을 찾으러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의 모습. 그것은 결국, 좀비라는 비현실적인, 하지만 우리와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존재들과의 싸움이라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 쯤 존재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필자의 섣부른 판단을 스스로 뉘우칠 수 밖에 없겠다. 가볍게 읽고 싶어서 골라서 주문했던 책이, 겨우 2백 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너무 무거웠고, 짬짬이 읽었다지만 4일이 걸려버렸다.
나는 나지만, 내가 아니나, 너도 아니면서, 누구도 아니다.
소설 속 진여는 최근 도시에서 유행한다는 꿈 증상자 중 하나다. 제대로 된 수면을 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 그 부수적인 효과이자 주된 효과로 현실과 꿈의 경계를 살아간다. 어찌보면 책 소개가 잘못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수면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과도한 수면으로 인해 꿈이 현실로 넘쳐버린 상황과 같다. 그렇게 현실과 꿈의 경계 어디 쯤, 이것이 꿈인지 아니면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이 꿈인지, 혹은 이것이 꿈인지 아니면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이 꿈인지, 아니면 꿈이 아닌지에 대해 내내 고민한다.
약, 식물, 기구, 기계, 명상 등 온갖 기재로 꿈과 현실을 분리해 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여 역시 이런 저런 방법을 검토하다가 무기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렇게 홀린듯 따라간 센터라는 곳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사유 속, 혼란과 방황과 불투명함과 불확실함과 무력함과...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마야 역시, 그런 진여의 선택에 따라 현실을 택하고 돌아간 현실에서 꿈을 잊고 현실을 사려고 하지만, 오랫만에 돌아온 사회에서 기존 구성원들에게 멸시와 외면과 터부를 당하면서 현실과 꿈을 다시 뒤섞어버리고는, 스스로 '나 역시 누군가의 꿈에 누구인가'라는 답을 내려버린다.
끊임없는 사유의 나열, 어지럽다
당황스럽다. 서두에서 썼던대로, 필자가 기대했던 류의 소설이 아님에 당황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 그닥 독서의 분야에 대해 척을 두지 않는 편인데(몇 몇 있기는 하다), 이 책은 솔직히 너무 어렵다.
한 페이지 절반을 한 문장으로 채우는 소설을 일단 필자의 기억에는 읽어본 기억이 없다. 일단 기본적인 글쓰기의 기술에서 문장의 길이는 짧을수록 좋다. 최대한 독자의 호흡에 맞춰서 끊어주는 것이 책을 읽기도 편하고, 독자의 리듬에 맞추기도 쉬우며,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런 배려는 전혀 없다.
물론, 꿈과 현실이 뒤엉킨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 정신'이 '아닌' 진여의 사유를 쭉 서술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되려 너무나 리얼하게 표현해낸 것은 맞다. 필자가 이 긴 호흡을 숨 넘어갈 듯, 게다가 살짝 지겨울만큼 오로지 사유에 대한 서술만 남은 무미건조한 글들을 계속 읽은 것이 힘들었음에도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한 것은 소설의 내용 뿐은 아니다. 마치 숨을 참고 담배 연기를 계속 들이 마셨을 때, 혹은 잠수를 너무 오래해서 정말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튀어나와 급히 숨을 들이마셨을 때 뒷머리를 땡 하고 때리며 찾아오는 어지러움증처럼 '몽환'이라는,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스스로 혹은 독자들에게 '몽환적인 분위기'라는 평을 받은 글들도 많이 보았지만, 솔직히 이런 식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어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작가의 친필 사인을 보자면, '미궁의 중심에서 만나뵙겠습니다.'인데, 다분히 작가의 의도가 필자에게는 맞아 떨어진 모양이다. (작가의 의도가 맞...긴 할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쉬이 추천하기는 어려운 소설이다. 그 긴 호흡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치 시험을 앞두고 날 새기로 공부를 하다 새벽 4시 20분 경, 한페이지 반을 넘어가는 국어문제 지문을 2/3 가량 읽었을 때 문득 '내가 방금 졸았나?'라는 생각이 든 기분이다. 나름 필자는 독해력에 대해 자신하는 편인데,(일반인 수준에서) 웬만한 문해력을 가진 분이 아니시라면 매 페이지마다 이 같은 기분을 느끼실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인스타 등 글귀 등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두 말 할 것도 없겠다.
게다가 소재를 보자면, 예상외로 상투적이면서도 대놓고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이다. 애초에 '상아문'을 제목으로 가져온 것이나, '보리자나무'를(보리수나무라고도 한다. 감이 오는가?) 피날레로 가져온 것 등을 보자면, 이는 더 확실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치 양면이 거울인 방에 갇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앞. 뒤. 다시 앞. 다시 뒤. 그리고 앞. 다시 뒤. 그리고... 그렇게 보다보면 언젠간 내 얼굴도 희미해져 보이지 않게 되고, 더 들여다보면 사람인지 의심스러워지며, 더욱 더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나는 나지만, 저것도 나고, 저것도 내가 맞지만, 내가 맞는지 확실하지는 않고, 더 보니, 내가 아닌 것 같고, 다시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솔직히 필자도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아는 척'하는 이런 이야기를, 조금 더 솔직히, 필자의 오만한 생각일지는 모르나 현실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최 마음 깊이 이해하기 힘든 소재를, 다시 한 번 필자의 오만한 생각일지는 모르나 누구나 쉽게 읽기 참 어렵게 서술한 작가의 책을, '재밌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겠다.
다만, 마치 마약의 그것처럼, 글과 문장과 단어로 이루어진 사유와 의식과 자아의 흐름에 따라 몽롱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이 책이 제 격이라고 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