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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메이카 하시모토 지음, 김진희 옮김 / 북레시피 / 2021년 11월
평점 :
들어가는 말
트래킹, 산행을 해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원래 매우 정적인 인간으로, 산행이라고 부를만 한 일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최근에 월출산과 한라산을 종주했다. 태어나서 군대를 제외하고 이만한 인고의 시간이 내게 있었던가. 나와 아내는 섣부른 결정으로 산에 오른 것을 후회하면서도, 이미 시작해버려서 결국엔 끝을 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구조 헬기를 타지는 않았으니까.
토비는 최소한 필자가 종주한 산행의 50배 정도는 되는 거리를 혼자 떠난다. 심지어 식료품과 텐트, 각종 물품들을 가득 챙긴 배당을 메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한담?'이다. 열 두살 짜리 꼬마 아이가 그냥 산에 밤 따러 가듯 갈 거리는 전혀 아니다. 이건 고생을 사서 하는 수준이 아니라, 목숨을 건 수준이다.
작가는 왜 이런 비상식 수준의 미션을 주었을까. 성장소설이라고 치기엔 과한 설정이다. 성장 소설의 대표격인 톰 소여의 모험에서는 살인을 목격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입장에서 안위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독자들이 보면서 안심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부여해줬던 것이 아닐까. (너무 오래 전 읽어서 세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 면에서 작가는 매우 불친절하다. 마치 토비와 함께 트레일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세심한 표현과 묘사, 서술을 이어가기에 읽기에는 너무나 편했지만 읽는 내내 뭔가 마음 한 구석은 불편했다.
토비보다는 내가 성장해야할 것 같은데
토비는 여러 가지 유년시절(심지어 현재도 유년이다!) 겪은 여러가지 사고들로 인해 심적 부담감을 갖고 있다. 그런 토비의 마음이 닫히기 직전, 루퍼스라는 친구를 만난다. 여전히 본인이 불행의 아이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잊지 않았지만, 서서히 루퍼스와 절친으로 행복을 알아간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동안 함께할 버킷리스트를 만들었고, 최종 단계가 '애팔래치아 트레일 걷기'였지만 중간에 루퍼스와 다투고 만다. 스스로의 자격지심과 마음의 상처때문이었음을 알았지만 쉬이 화해하지 못하고 앙금이 남는다. 그 상태에서 불의의 사고로 루퍼스가 토비의 곁을 떠나고, 토비는 둘의 약속을 지키고자, 루퍼스에게 사죄의 의미로 버킷리스트를 완성하고자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난 토비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중에는 본인과 비슷한 상처가 있는 덴버도 있었다. 차가운 친구 숀과 군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준 윙잇. 범죄자와 착한 소녀 세이디도 만난다. 이렇게 사람들과 만나고 사색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죄책감에 빠진 자신을 놓아주는 대신 트레일을 함께한 무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그렇듯, 이렇게 토비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자신의 내면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는 사실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버려야할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켜야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찌보면 그 배경이 엄청난 트레킹 코스일 뿐, 실상은 성장 소설이다. 상처받은 아이가 어떤 계기로 길을 떠나고, 외부에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등을 만나면서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깨달아 한층 성장한다는 내용.
어찌보면 상투적인 내용을 기나긴 트레일의 트레킹 정보와 결합시키고 상황을 트레킹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로 집중시키면서 생경한 느낌을 주는 장점은 있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토비가 과연 더 성장할 구석이 있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필자가 정신연령이 낮은건지도...) 상황에 대한 묘사와 사고하는 방식만 놓고 보자면 토비는 더 성장할 구석은 없어 보였다. 물론, 스스로 불행의 원인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유아적 상상력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작가는 토비의 대변인이 되기로 했나
토비가 더 성장할 구석이 있느냐는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작가가 해야할 것 같다. 필자가 12살이던 시절, 필자가 어땠는지는 (묵비권)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절대 저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일단 상황에 대한 묘사, 트레킹을 같이 하는 듯한 디테일하고 세심한 서술은 정말 뛰어났다. 며칠을 걸은 그 시간을 단 몇 시간만에 읽어 주파했을 정도로 작가의 필력은 깔끔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깔끔한 문장력이었다. 소설 속 화자는 12살짜리 남자애다. 그렇다고 트레킹을 밥 먹듯 했다거나, 산에서 자란 늑대소년도 아니다. 심지어 소설 중반 부에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블루베리 따러 가기에서 겪은 사건을 보자면, 절대 트레킹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트레킹 구간 내내 소설 속 화자인 토비는 객과적이고 차분한 어조와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이야기해준다.
물론 작가의 입장에서, 토비의 상황에 대한 토비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우선 목적인 것은 맞겠다. 하지만 모든 소설에서, 특히 1인칭 소설에서의 서술은 독자가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을 여지를 줘야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공감과 이해가 전제되는 것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무슨 열 두살 짜리가 이런 생각을 하지?'였다.
그 결과로, 매우 빠르게 잘 읽히는 소설이라는 것이 단점이 되어버렸고, 차에 타서 풍경을 바라보듯 감정선 역시 휙휙 지나가버렸다. 성장소설에서 느껴야할 가슴 따뜻함이나 뭉클함 역시, 그렇게 마음이 붙잡기 전에 희미해져버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작가의 서술이 토비의 감정이나 상황을 독자에게 매우 섬세하게 전달해 준 것도 사실이다. 혹시 일부, 시점의 변경을 했었다면 차리라 어땠을까라는 주제넘은 생각을 넣어둘 수만은 없겠다.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