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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한 진실 - 희망에 대한 오래된 노이즈
이시형 지음 / 델피노 / 2021년 10월
평점 :
들어가는 말
서평을 쓰기에 앞서, 하단에도 늘 명시하지만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객관적이자 주관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적는다. 이러한 선언적 문구가 주는 의미는 비겁하고 건방지고 무책임하게도, '객관적이라 포장하는 주관적'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누군가의 글을 훔치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글로 표현해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그러한 부분에서 이 세상 모든 작가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꽤 많은 사람들은 글의 완성도나 작품성, 시장성 등을 뒤로 밀어두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게다가 그런 창작의 어려움은 제외하더라도 각고의 노력과 고뇌와 고심, 고통으로까지 표현 가능한 시간을 들여 만든 글이 결국은 종이 몇 장 넘기는 수고만 들인 제3자에게 평가당하는 다는 사실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글을 쓴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 어려움을 통해서 글은 더욱 윤이 나고 빛나게 변한다.
아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그리고 필자의 서평을 몇 번 이상 본 사람이라면 분명 이쯤 알아챘을 것이다. 들어가는 말에 책의 내용이 아닌 '글을 쓰는 행위의 어려움'에 대해서만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다는 것이, 꽤나 심한 혹평을 예고한다는 것을.
상상은 비약이 되는 순간 정지한다
우리는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그것은 현실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 없다고해서 무조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야 즐길 수 있다.
특히나 SF소설이 판타지나 무협과 그 궤를 달리 하는 것은 상상의 나래를 독자가 펼쳐야하는가의 문제다. 무협이나 판타지같은 장르의 소설은 독자들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이 우주, 혹은 다른 차원 어딘가에서는 그것이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라는 것을 이미 인지한 상황에서 읽는다. 이런 류의 소설은, 소설을 기반으로 독자가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독자가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독자에게 선물하는데 그 의미가 크다. 하지만 SF는 전혀 다르다. SF란 일단 그 장르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공상을 하되, 그 근간은 과학에 있다. 어찌보면 과학과 상상이라는 것은 매우 모순된 만남이다. 그럼에도 이 장르가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바로 '사실감'이다. 독자는 과학에 근거한 공상을 마치 현실(근미래 혹은 초미래)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인지한다.
즉, 독자들은 SF소설을 읽으면서 독자의 날개를 펼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독자에게 준 이야기는 과연 독자가 날아오를 수 있는 바람이었는가. 독자가 그 바람을 날개에 품고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까. 필자의 의견은 '불가'다.
필자의 생각에, 작가는 상상의 거리를 너무 멀리 잡는 바람에, 어느 정도 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난 이야기를 풀어낸 것 같다. 물론,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역효과로 인간들이 겪는 피해는 막심하다. 자본주의로 인한 불평등과 사회구조적인 종속관계에 따른 인권유린. 그런 문제들을 되돌아보기를 원하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인정한다. (소설 내용을 어느정도 언급할 수 밖에 없겠다.)
레거시사는 흔히 IT기술을 발판삼아 거의 모든 산업을 장악하고, 이를 발판으로 사회를 잠식해서 결국은 인간의 생체정보, 특히 뇌에 대한 연구를 생체실험을 통해 완성하려는 악행을 저지른다. 그런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무릎꿇은 정치인들은 레거시사의 편에서 국민들을 버리고, 역시나 자본주의의 포퓰리즘에 자포자기한 무용계층의 인간들은 아무런 노동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의미없이 살아간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일부 단체(토종 IT회사 넥스트사와 일부 시민들)가 그런 레거시사를 향한 저항을 시작하고, 건달에서 시작해 경호업체에서 일하던 제욱이 사건에 휘말려들며 레거시사의 추악한 속내를 알게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1. SF지만, 나오는 과학기술은 현재 지구상에 모두 존재하는 기술이다. 즉, 어떠한 기술적 새로운 발견이 없이 갑자기 거대한 굴지의 기업이 전 인류를 조종하려는 마음을 먹고 거의 전세계를 장악하는데,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작가가 간과한 것은, 자본주의의 맹점이다. 자본주의의 극에 있는 것은 소비다. 그 어떤 기업도 포퓰리즘을 지향하지 않는다.
2. 기업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꽤 의견이 분분할 주제다. 하지만 최소한 국외의 기업이 국내의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나 일제치하를 겪고,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의 애국심과 얼핏 사대주의로까지 비춰지는 자긍심을 보자면 더욱 그렇다.
여러 가지 더 많은 부분이 있지만 소설의 가장 큰 줄기로 볼 수 있는 위 두 가지 부분에서 필자의 날개는 옆구리에 붙은 듯 펼쳐지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작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작가가 이 서평을 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쓸 수 있는 단어로 하자면) 상상의 어떤 부분도 흥미롭지 않았고, 작가의 상상을 토대로 필자의 상상은 단 한 가지도 뻗쳐나가지 못했다.
상상도 안되는 일인데, 읽히지도 않는다
꽤나 여러 책을 읽다보면 작가마다 어투가 다르다. 어떤 작가는 구어체를, 다른 이는 문어체를, 혹은 전혀 모를 언어체를 쓰기도 한다. 마치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새로운 어투에 재미를 느끼기도하고, 알아먹기 어렵기도 하거나 듣기에 짜증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들의 성향인 관계로 되도록이면 소설에 쓰인 어투를 지적하고 싶어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 소설을 50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필자는 피곤함과 지루함을 느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기분은 지속됐는데, 일단 문장 내에 반복되는 표현이 많은데다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전문서적이나 논문을 읽는 것도 아닌데다가 내용 역시 현재의 장면을 그저 표현하는 것일 뿐인데 심한 지루함과 무미건조함이 심했다. 최대한 문장은 짧게 쓰는 것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독자의 몰입감과 읽는 호흡, 속도 등에도 이득이다. 하지만 모든 문장에 그렇게 표현되고, 장면 설명에 그 어떤 미사여구나 꾸밈이 전혀 들어가지 않으면 문장은 죽어버린다.
-그때 갑자기 로봇이 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날카로운 손가락 끝이 구영진의 목을 내리친다. 목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자 놀란 전승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려 한다.-
소설 내용 중 일부다. 박진호의 이상한 낌새를 살피러 왔다가 결국은 살해당하는 두 명의 모습이다. 갑자기 나타난 로봇, 그리고 공격. 인공지능 로봇의 공격이라는 꽤나 상징적이고 급박한 상황임에도 그 어떤 긴박함이나 처절함은 없다. 소설 전반에 걸쳐 그 상황과 장면에 전혀 상관없이 담담한 어조만을 유지하기 때문에 독자로써 그 어떤 두근거림도 느끼질 못했다.
게다가 분량때문에 생략하겠지만, 등장인물들의 대사 역시 일관성이 없다. 인간 본질이나 추구해야할 목적 등에 대한 서술에서는 한 없이 지적인 어투를 쓰던 사람이 갑작스레 쌍스러운 욕설을 내뱉기도 하고, 대통령이란 자가 경제부총리에게 뱉는 말은 시골 군수라도 쓰지 않을 경박한 어투다. 조금 확대해석하자면 몇몇 케릭터를 제외하면 지금 이 대사를 어떤 케릭터가 하고 있는지 맥락을 보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주인공의 움직임에 개연성이 전혀 없다시피하다. 넥스트사의 경호를 맡은 깡패집단의 이사였던 제욱이 괴한들의 공격을 받고, 오로지 의리 때문에 넥스트사를 찾아간다. 거기에서 미모의 노민서를 만나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레거시사에 대한 테러를 돕는다. 그러나 노민서는 깡패집단에 살해를 당하는데, 의리에 죽고 사는 제욱은 그런 노민서를 그냥 두고 시민단체라는 곳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또 앨리스라는 여자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오로지 그녀를 구하려다가 레거시사의 실체를 목격한다. 분노하고, 죽음을 불사한다. 여러 영화에서 깡패라는 존재들이 꽤나 미화되기는 했지만, 그런 미화 작업에는 엄청난 양의 물감(배경 이야기)이 필요한 법인데, 제욱에게는 그런 배경도 필요없는 모양이다. 아마 주인공이라서일까?
꽤나 방향성없이 떠들어버린 모양이다. 가슴 한 켠에서는 이런 비평이 내게 권한이 있는가라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하지만, 필자는 비평을 넘어 비난도 받을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런 서평에 휘둘리지 말고, 다음 작품으로 반박해주기를 기대해본다.(솔직히 작가는 절대 보지 않기를 바란다.)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