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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
나태주 엮음 / &(앤드) / 2021년 1월
평점 :
들어가는 말
아마 시를 처음 썼던 것은 중학교 다닐 때였을 것이다. 꽤나 두터운 공책에 이런 저런 시라고 스스로 부르는 글짓기들을 모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에서도 문학동아리에서 '이런 것이 시 이잖은가!'라며 부지런히도 글짓기를 했더랬다.
아마, 그 때, 같이 많은 종이를 낭비했던 친구들은 그것을 분명 시라고 불렀고, 아무래도 그것을 시라고 부르든 운문이라고 부르든 그건 우리들의 문제이지 남의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우리들 사이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그 뒤로, 시를 거의 접해보지 않은, 혹은 단 한번도 적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가끔 묻곤 한다. 시가 무엇인지, 혹은 시가 어렵지 않은지, 혹은 '이 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지만, 시라는 것은 어찌보면 난해한 추상화와 같고, 틀려도 아무 상관없는 문제와 같다. 작가는 그 속에 무엇인가 그려 숨겨놓았지만, 그것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고, 대부분 '학자'라 불리거나 '수험생'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몫이고, 일반적인 독자들의 몫은 그저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아마 불감증(혹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자극에 따른 둔감증)이지 않은가 싶다.
시가 독자에게 원하는 것
시가 독자에게 원하는 것은 없다. 운율이 있다는 면에서 시는 노래로 많이 비견되는데, 노래와 같다. 누군가 노래를 부를 때, 이것을 누군가 듣고 어떤 영향을 받기를 원하고 부른 노래는 없다. (혁명가나 노동요는 제외하자.) 시는 어떤 작가의 욕구나 사상을 독자에게 관철시키고자하는 글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느낌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주고픈 편지와 같다. 책 속에 있는 거의 '가장 유명한' 시귀를 한 번 보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라!' (아마,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의역을 더 많이 접했을것이다.)
시적 화자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여러 고난들이 결국은 시간이 흘러 옅어지게되고 그에 상응하는 기쁨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 것 같다. (추측일 뿐이다. 그 어떤 학자도 추측할 뿐이다. 시인을 제외하고 시에 대해 완벽히 해석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인이, 혹은 시적 화자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강요하고 싶은 것일까. 그저 시적화자는 본인이 살아보니 이러저러하더라. 라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담담히 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읽고 어떤 독자는 깨달음을 얻거나, 현재의 난관을 조금은 내려놓는 여유를 얻을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무슨 개소리냐며 책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시란 그저 그런 것이다. 이 몇 줄 안되는, 하지만 삶과 감정, 진리가 농축돼 있는 편지는 그저 쓰여진 것이다.
우리가 시에게 원하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몇 줄 안되는 속에 담겨진 삶에 대한 성찰과, 작가의 지혜, 그리고 독자의 감정을 그대로 녹여낸 듯한 공감력 때문이다. 우리는 시를 읽으며 우리네 삶을 돌아보거나, 앞날을 기대하기도 하고 옆에 앉아있거나 혹은 멀리 떠나 있는 정인을 떠올리기도 한다. 세태를 교묘히 비꼰 시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멀리 타향에 고된 일을 마치고 끙끙 고단한 잠에 빠져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짓기도 한다.
우리가 시를 보며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와 같은, 내 삶과 비슷한 삶 속에서 노래하는 시적 화자를 만나는 것이다. 특히, 세세하게 구구절절 흐뜨려놓는 여러마디 말보다 조금 더 간략하되 진솔하게 다가오는 싯구를 보며 위로를 얻는 것이다.
리리이에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괴테에게
정다운 리리이여, 너는 오래도록
나의 즐거움이었다. 노래였다.
지금 너는 나의 괴로움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나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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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괴테여, 그댄 참 오래도
내게서 즐거움을 찾는 노래를 했어요.
그댄 여전히 내게 괴로움이지만,
이제는 그대가 나의 노래네요.
- 이 서평은 컬처블룸서평단으로부터 서평단 모집에 선정되어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나 읽고 싶어서 신청하였고 솔직히 작성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