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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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반려견인 '콩'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다른 수많은 반려견이 받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신체적 이유(알러지)나 경제적 상황 혹은 주거, 생활 환경 때문에라도 못 키우는 사람들 역시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려인들이 느끼는, 반려견을 키우는 이유는, 그들이 사료나 보금자리 제공 혹은 산책을 시켜주고 같이 놀아준다는 반대 급부적인 것들 때문에 우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우리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준다는 것이다. 소설 속의 다몬이 매우 듬직하게 주인공들을 보살펴주는 반면, 우리 콩이는 귀여움으로 우리를 치유해준다는 점만 조금 다르달까. 그럼에도 생각보다 읽는 내내 콩이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 콩이는 믿음직스럽지는 않은 모양이다. (웃음)

쓰나미 이후 5년간 이어지는 여정

다몬의 여정은, 종국에서야 드러나지만 한 소년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설적 추측이지만, 바로 그 소년이 쓰나미로 입은 상처를 치유해줄 뿐만 아니라 다시 겪게될 위기에서 그 소년을 지켜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단순히 운명적으로 한 개가 한 소년을 사랑하게 되고, 미래에 발생할 사고를 미연에 본능적으로 감각하여, 사고로부터 소년을 지키기위해 5년 간의 여정을 이어간다고 이 소설을 축약하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다몬은 그 5년 간 1,700키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다. 한때 광고의 모델로도 쓰였던 진돗개가 500키로미터를 헤매어 주인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 소설이 내내 들려주는 것은 단순히 그런 감동스토리가 아니다. 다몬의 목적은, 존재 이유는, 단순히 그 소년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몬은 여행하면서 치매에 걸린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범죄에 휘말리는 한 청년의 삶을, 어려서부터 쓰레기더미에서 살아남아 절도로 물든 한 범죄자의 인생을, 화류계의 여자로 자신을 빨아먹던 흡혈귀같은 남자를 죽이고 만 슬픈 여자의 말로를,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본인도 암으로 그 뒤를 따르려는 한 사냥꾼의 마지막을 만져주고 위로해준다. 그 어느 순간, 사람이 혼자라서 너무 외롭고, 타인과 나눌 수 없다고 여겨지는 난관에 부딪혀 헤매고 있을 때 듬직하게 네 발로 땅을 딛고 서서는 가야할 방향을 바라보고 나서 뒤를 돌아 눈을 맞춘다. 그리고 사람이 마음을 다잡으면 먼저 발을 뗀다. 다몬은 그렇게 5년간 만난 사람들을 모두 다독여 주고서야 본인의 마지막 꿈이자 바램이며 숙명이었던 소년을 지켜내고는 생을 마감한다.

그들의 의미

콩이를 산책시키다보면 여기저기 치우지 않은 배변들이 많이보인다. 또한 산책을 하다보면 목줄을 하지 않고 다니는 견주들도 많이 보인다. 한번은, 이렇게 길가에 배변이 많은 것은 어찌보면 반려견들에 대한 복지가 그만큼 향상된거 같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산책을 많이 시킨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전에 콩이를 키우기 전의 나를 생각하자면, 매우 불편한 상황이기는 하다. 일부의 견주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그리도 아끼는 반려견들은 욕을 먹어야만한다. 반려견의 복지에 우선해서 아무래도 반려인의 인식이 향상되야할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은 지켜야만 우리는 우리의 옆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그들이 단순히 짐승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로 들어와 우리를 감싸주는 존재들임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반려견들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는 개개인의 문제이고 영역이다. 누구도 본인이 개를 키운다고 해서 타인도 역시 개를 소중히 여기고 마치 한 가정의 일원인 것으로 예우하기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타인의 반려견에 대해 하찮은 미물 쯤으로 여기는 것 역시 지양해야만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견주가 최소한의 기본은 갖추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견주가 기본을 갖추지 못한 것이 반려견의 잘못은 아님을 한번쯤은 생각해주시기를 반려인으로써 부탁드리고 싶다.)

개를 키우든 그렇지 않든, 분명 인간이 배워야할 것은, 그들이 전혀 아무런 반대 급부 없이도 함께하는 인간에게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보낸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볼 때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개들의 사랑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되며, 간악하게 그런 점을 이용해서 학대해서도 안된다. 단지 우리는 꼭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함께 존재해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년의 말 처럼, 대부분 우리보다 먼저 떠나는 그들을 영원히 가슴에 담고 기려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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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양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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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시대'를 그 배경으로 삼는 소설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이 소설이 던지는 결론주의적인 질문은 바로, '과연 인간이 시대를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시대가 인간 군상을 그리는가'이다.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의 배경, 냉전시기와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작가가 상상한 1984년(혹은 그 어떤 미래)은 그저 상상이라기보다는 필자가 보기에 '예언'에 가깝다.

다만, 그 예언이 어긋난 점이라면, 거대 국가는 '정치'라는 걸림돌 때문에 만들어지지 못했고, 역시 '정치'라는 장난질 덕분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버림받다시피하고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려낸 사회 지배 구조적 방식과 틀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극에 달하면 결국은 만나게 되는' 원圓론적 말장난'이다. 사회주의이든, 자유민주주의이든 그것이 극에 달하게 되면 결국은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현 시대에도 그것의 방식이 조금은 다를지라도 작가가 상상(예언)했던 대중에 대한 지배방식은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시대에 지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우리의 지배층은 얼마나 이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시대에 과연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것이다.)

신어, 텔레스크린과 섹스, 그리고 경제

필자가 이 소설을 단순히 상상이 아닌 예언이라 지칭하고 싶은 것은,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현 시대의 상황들 때문이다. 일단, 크게 신어를 보자. 신어는 말 그대로 그저 '새로운 언어'에 가깝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는 역시나, 우상화를 통한 신격화에 다다라 우매한 대중을 세뇌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神어인가 오해했으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언어가 사상을 구축한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작가의 신어는 기존의 언어를 훨씬 단순화하고 획일화하여 대중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제한하기 위한 언어 혁명이다. 애초에 사랑, 자유 등에 관련된 단어 자체를 없애고, '이중사고'라고 지칭되는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제한을 위해 '좋은(good)'의 반대말을 '나쁜(bad)'이 아닌 '안 좋은(ungood)으로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 또한, 갖가지 부사어들 역시 없애고 단순히 단어를 배열하거나 이어붙여 단어를 만드는데, 예를 들어 '청년운동'이 원래대로라면 Movement of Youth인데, 이를 Youth Movement로 지칭한다. 

물론, 현 시대의 '줄임말'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은 사실이다. 발생 원인 역시 다르고 사용 목적 역시 다르다. 하지만 필자는 신어를 접하면서 현 시대의 줄임말과 인터넷 상에서의 반말과 예의없음, 그리고 '선비' 혹은 '진지충'이라 비하하는 세태를 겹쳐보았다. 현 세대를 무시하거나 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나, 그들은 이러한 '자체적인 신어 개발'로 스스로의 사상 세계를 비하시키고 있진 않은가. 그들은 스스로를 높일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있고, 스스로 낮아짐을 주변 사람까지 같이 잡아 내리 끌음으로써 하향 평준화를 시키고 있다.

또한 텔레스키린에 의한 지배층의 감시 역시 현 시대 갖가지 매체와 인터넷, SNS 그리고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도청, 감청, 불법 사찰 등을 그대로 반영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공개되어있는 시대. 스스로가 드러내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모두에게 감시당하는 시대가 지금인 것이다.

특히 소설에서 여러가지 통제의 목적을 위해 '사랑'을 억제한다. 그 부차적이자 원초적인 목적으로 '섹스'를 통제하는데, 이는 현 시대와 거울처럼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유교를 바탕으로 현재까지도 '성'에 대해 감추고 가려야할 것으로 치부해왔고,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그 움직임은 기저에 깔려있다. 게다가 그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전제되어있다. (하지만 유교이전의 고려시대 이전에 그랬듯, 소설 내 사회는 사회주의에 가깝기에 남녀차별의 기조는 없다.) 특히 자녀의 생산에 대해서는 소설과 현 시대 모두 동일한 입장을 지닌다. 소설과 현실 모두 성에 대해 감추고 부끄러운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자녀 '생산'은 강조하고 있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인데, 역시 소설과 현실 모두 마찬가지로 경제적 '빈곤'을 기본으로 한다. 경제적 빈곤을 바탕으로는 어떤 시민도 '이중사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차원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대중에게 고차원적인 '자유'에의 욕구는 없다는 것이 지배층의 논리이자 원동력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영원하다는 걸 기억하게

우리의 윈스턴은, 결국은 파괴되고 리빌드(re-build)되었다. 내면의 어디선가 계속 본인의 부당함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그 모든 예감을 조용히 묻어두고 기름냄새가 펄펄나는 진을 계속 들이부어 덮어둘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다. 그렇게 지배는 영원하다. 시대가 그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아마 사회의 지배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이 없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데다가, 그냥 개별적 생존체로써 살아가기에는 인간은 매우 약하지만 위험하다. 그렇기에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인가는 이 거대한 조직체를 올바르거나 혹은 지속가능한 방향으로(그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것은 주요한 문제는 아니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끌어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은 우매해야하며, 단순해야한다.

그럼에도 대중들은 현명해야한다. 그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서 언제나 그것을 거스를 힘은 대중에서만 나왔다.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그러했고, 영국의 자본혁명 역시 그러했으며 우리의 5. 18. 민주화 운동 역시 그러하다. 우매하면서 현명한 대중. 그래서 승리하는 것이다.

윈스턴은, 모든 그 마음의 자유와 혁명을 모두 파괴당했음에도 계속 진에 취해 텔레스크린의 '승리' 소식만을 기다린다. 오로지 본인이 사랑해 마지 않는 '빅브라더'가,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그 '당'이 승리하기를, 그 소식이 들리고 본인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를 기다린다. 이 지독한 지배층은 우매한 대중이 현명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철저히 파괴하고 세뇌시켜 대중에게 보인 뒤에야 윈스턴을 죽인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신에게 승리한다. 그 자신과의 투쟁. 그것은 이미 세뇌되어버린 자아와, 모든 진실을 깨달은 내면의 자아와의 투쟁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윈스턴만의 투쟁이 아닌, 모든 사회 구성원의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윈스턴의 죽음은 미래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가 읽었을 때, 누구든 울분을 토하고 지배층을 타도하며 우매한 대중에 조금 더 현명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바로 그의 승리이다. 그리고 그런 미래에는 인류가 분명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임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방향이 어느 쪽이든) 알기에 그 밑거름이 될 빅브라더를 사랑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하다는 걸 기억해야한다. 우리는 비록 시대의 한 지점만을 살다 가겠지만, 우리가 지금 어떤 변곡점을 찍느냐에 따라 미래에는 큰 소용돌이가 치거나, 혹은 다른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 이 서평은 컬처블룸서평단으로부터 서평단 모집에 선정되어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나 읽고 싶어서 신청하였고 솔직히 작성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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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대디
제임스 굴드-본 지음, 정지현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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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보들한 표지에 귀여운 팬더와 심통난 노랑머리 소년이 인상적인 '댄싱 대디'

귀여운 팬더가 제목에서 나오는 댄싱 대디고 노랑머리 소년이 11살 아들이다.

심통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내 생각엔 책에서 비춰진 윌의 모습보다 더 뽀루퉁하게 그림이 그려진 것 같다. 아무래도 아들 마음의 아픔과 아빠와의 서먹한 관계를 표현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소설 속 상황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거리감과 오해를 풀고자할 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자할 때 이 책이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의 핵심은 엄마를 잃고 싫어증에 걸린 아들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하는 아빠 대디의 관계회복과 로자의 죽음을 받아드리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아들은 아들대로..대디는 대디대로.. 로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아들보다는 아빠 대디에게 더 애착이 갔고 같이 힘들었다.

아내와 함께한 시간을 매일, 온종일 놓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힘들어하는 지쳐보이는 대디의 모습을 통해 지금 옆에 있어 당연하고 일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누군가가 없다면 나 또한 대디처럼 지낼테니..그래서 소설 중간부분까지는 안타까운 상황에 우울하고 감정소모가 심했는데 춤추는 판다라는 소제로 미묘한 조합이 되었다.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든 밝게 치유하고 서로를 모듬고자 춤추는 판다가 등장하는 것 같다. 댄싱대디의 결말은 예상가능했고 30대인 내 나이에 보기엔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되지만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때인 지금 가장 필요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대디의 친구인 이반의 팔에 딸 유리가 그린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 문신가게에 찾아가 영원히 남겨달라는 부분이 난 좋았다. 이 장면에서 아빠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잘 나타났다.

가족과 친구에 대해 소중함을 다시금 느껴본..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와닿아 가슴 먹먹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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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희의 수제청 정리노트 2 - 대한민국 최고 수제청 전문가
손경희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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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수제청'이라는 책 이름을 보고 살짝 설레었다.

나에게 있어 수제청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레몬청을 만들어 본 기억이다.

레몬에이드를 너무 좋아해서, 호기심과 어쩌면 카페에서 5,000원에 파는 저 음료를 집에서 저렴하게 매일매일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해봤었다. 레몬을 정성스레 구입하고 깨-끗하게 씻기도 하며 정성스럽게 만든 제1호 수제청의 결과는 너무도 썼다... 만들기는 1년 치를 만들고 맛은 없으니 몇 개월 가지고 있다가 미련 없이 버렸었다.

나한테 수제청은 그런 역사가 있다. 그러는 와중에 만난 책이 바로 '손경희의 수제청 정리노트'다. 자기 이름을 굳이 책 제목에 넣어(꼭 요리책이나 식당이 그러더라?) 정리해 두었다니.. 믿을만한 전문가에게 특급 강의를 받을 듯 희망찼다. 제목을 보면 바로 알겠지만, 벌써 노트2이라는 점..깊이 생각해보자.!

손경희의 수제청 정리노트의 구성은 처음 1장에서는 수제청에 관한 Q & A 시간이다. 유기농설탕을 사용하는 이유라던가 오래된 수제청을 버려야 하는지, 당뇨환자가 수제청을 먹어도 되는지 등이 들어있다 2장에서는 본격적인 수제청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레몬청부터 수박청, 모과청, 마늘청..심지어 청량고추청까지 22종류가 소개되었다. 3장에서는 과일을 통째로 조림한 콩포트 9종이 소개되어 있다. 마지막 4장에는 2장과 3장에서 만든 청을 가지고 어떻게 먹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탄산수를 섞을지 물을 섞을지 콜라를 섞을지에 대한 것이다.

책을 보는 내내 알록달록한 수제청들 사이에 절로 상큼해지는 환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어렵지 않아 보여 '나도 이거 한 번 해볼까? 키위만 사면 되겠는데..?'라고 자연스럽게 혼자 생각하게 된다. 간단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설명으로 이번 명절을 계기로 실패했던 레몬청을 도전해 볼까 싶다.

- 이 서평은 컬처블룸서평단으로부터 서평단 모집에 선정되어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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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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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트렌트 돌턴은 호주에서 영향력있는 저널리스트이자 '우주를 삼킨 소년' 소설 한 편으로 그해의 문학상과 올해의 책을 석권하며 전 세계 34개국을 사로잡은 작가이다. 데뷔작인 '우주를 삼킨 소년'은 작가 본인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표지가 참으로 예쁘게 인상적인 책이다. 여러 가지 색감을 담아 표현한 소년이 제목과 잘 어울린다. 예쁘고 두꺼운 이 책은 다산책방에서 펴냈는데 나에게 다산책방은 리즈머리의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에 이어 2번째이다.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 역시 재미있게 본 터라 '우주를 삼킨 소년' 또한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최악을 치닫는 삶 속에서도 '좋은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12살 소년 엘리 벨의 성장기이다. 엘리벨 주변에는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어른이 하나도 없다는 점, 엘리 벨은 어른과 같이 너무나도 성숙하다는 부분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

소설 처음부터 뜬금없이 등장하는 '너의 마지막은 죽은 솔새', '케이틀린 스파이스'라는 이상하고 기묘한 주문을 자꾸 외워 혼란스럽고 궁금했다. 읽는 내내 저 주문은 앞뒤 상관없이 계속되고 저 주문의 해답을 찾는 것이 하나의 미션처럼 책을 읽어갔다.

책 제목인 '우주를 삼키다'는 뜻 또한 하나의 미션이었는데, 세세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 표정을 읽는 방법, 비언어적인 것에서 단서를 최대한 많이 정보를 뽑아내는 방법, 바로 눈앞에 있는 말 없는 모든 것에서 말없이 이런저런 것을, 알려주는 모든 것에서 감정 표현과 대화와 이야기를 캐내는 방법을 항상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냥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것을 알려주고 표본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로 실어증에 걸린 형이고 그런 형의 말을 말없이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엘리 벨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세세한 것을 다 보고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 그가 입은 티셔츠 모양이라던가 그 풍경과 상황을 정확하게 스캔하는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 자체는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이 풍부하며 모든 상황과 언어에 단서가 담겨있으나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문장 흐름이 껄끄럽다는 것이다. 분명 원문으로 읽으면 우리가 처음 3D로 아바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라 확신한다.

- 이 서평은 몽실서평단으로부터 서평단 모집에 선정되어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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