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1501~1570년)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입니다. 숙부 이우에게 배워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올랐습니다.사가독서로 선발될 정도로 탁월한 글재주를 지녔습니다.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고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지만 자주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습니다. 안동(安東)의 토계(兎養)를 퇴계(退溪)로 명명하고, 양진암(양眞庵)과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강학 활동을 폈습니다. 1560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수양과 독서에 전력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비석에 벼슬을 적지 말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聖城李公之墓)‘라고 새기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황은 주희의 저술을 집대성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크게 높였습니다. 문집으로 「퇴계집(退溪集)」이 전하며, 주자학의 요체가 담긴 편지글을 모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성리학의 체계를 도설(圖設)한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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