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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 불편함은 어디서 오는걸까? 내 삶의 저 밑바닥에서, 내가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들과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그동안 나도 모르게 회피하고 모른척 해 왔던 것들이 확연히 드러나자 난 당황했다.
"난 지금 무얼 하고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하는 물음 같은 것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에 등장하는 주인공 여성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과 그들의 고민은 너무나 뚜렷하게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각자가 자라온 환경과 그들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배경, 성격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는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며 그녀들 스스로가 황폐해지고 그녀들 자신으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자아 정체성의 상실. 아내로서의, 엄마로서의 나만 존재하는 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나"로서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물음, 말이다.
어렸을 적 꽤 똑똑하다는 소리도 듣고, 크면 어떤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를 받았지만 지금은 남편의 직장을 따라 자신의 직장도 옮겨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줄리엣은 "남편"이라는 이기적인 존재에 가려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자신이 꿈꾸는 완벽한 삶을 목표로 열심히 달려온 어맨다는 목표를 이루지만,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에 실망하며 자신의 현재 자리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솔리는 어떤가. 출산과 육아를 반복하며 계속되는 일상에 지친 그녀는 잊고있던 자신의 여성성을 찾고자 한다. 이사를 통해 새로운 삶을 원했지만 오히려 절망을 안겨준 메이지도 있고, 알링턴파크에서(런던이나 더욱 시골이 아닌, 바로 알링턴파크 - 중산층의 삶을 대변하는-였기 때문에) 완벽한 삶을 준비하고 꿈꾸는 크리스틴도 있다.
"아이의 그네를 밀어 주는 엄마들은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들은 혼란스럽고 쓸쓸해 보였다. 마치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188p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권태롭다. 남편과의 관계, 아이들은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지긋지긋하다. 자신을 옭아매는 이런 관계들만 없다면 자신들도 사회에 나가 더 열심히 완벽하게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재의 이런 관계들은 자신들을 지치게만 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서로 만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쇼핑을 나간다. 어쩜 이리도 바로 우리의 삶과 한치도 다르지가 않은지.... 그녀들끼리의 만남(커피 모임과 쇼핑을 포함해서..)도 성공적이지가 않다. 자신들의 허무함과 좌절을 메우지도 못하고 겉바퀴만 맴돌뿐이다.
빠져나가고 싶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처럼 쳇바퀴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모험을 하기에는 겁이 난다. 하지만 그녀들은 조금씩의 변화를 통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예정된 길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해 주고 싶었다. 책임감과 올바른 길 안내가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가치 있는 것을 지키면서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자신이 가진 것도 돌봐야 하지만, 동시에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을 걱정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계속 앞으로나아가며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고 절대 한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304p
우리의 어머니들도 그렇고 현재의 나나 나의 동지들, 그리고 내 딸들....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다가간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지 못한 남자들은 이 책을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란 생각에 무언가 장난스러운 비밀을 간직한 기분이다. 커피 마시러 몰려다니는 주부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남편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부인들을 조금 더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 가정은 분명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