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 다잉 다이어리 -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제니스 A.스프링 & 마이클 스프링 지음, 이순영 옮김 / 바롬웍스(=WINE BOOKS)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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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년동안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한 책이다. 임상심리학자이자 아내이고 엄마로써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저자는 엄마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홀로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5년 후까지 아버지를 돌보면서 간병이는 것이 생각보다 쉽기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을 생각하면 보다 잘 해야 하겠지만서도, 자신의 생활이 있고, 간병을 한다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저자 자신이 임상심리학자라서,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 같은 느낌들을 정리한 것인데, 놀라운 것은 그녀 역시 자신의 일엔 객관적이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서구의 임상 심리학자가 이럴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병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싶다. 


뭐, 간병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건 다른 곳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고,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아니, 실은 구역질나게 생각되었던 것은--아버지가 말기암으로 코에 관을 삽입하지 않고서는 연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그걸 빼라는 오빠의 말에 펄펄 뛰더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더 살아봤자 고통만 가중될 것이기에 편안하게 돌아가시게 하자는 것이 저자 오빠의 생각이었건만, 저자는 그동안 아버지를 위해 애를 썼던 것이 자신이니까, 자신이 그런 결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간 간병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던 오빠는 아버지를 자신보다 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쉽게 내리는 것이고, 고로 자신이 아버지가 죽고 사는 문제에 관해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냐. 하지만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생각이 단지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다. 그녀같은 경우가 전적으로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만이 진정으로 사랑을 안다는 이유로, 그들은 불필요한 생명연장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못하게 난리를 친다. 자신들이 무슨 잔다르크같은 여전사 인양 거드름을 피면서 말이다. 과연 그런 생각이나 결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지도 않으면서, 어쩌면 그런 생색내는 결정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과연 누가, 80이 넘은 늙은 나이에, 한 세상을 족히 살아온 사람에게, 말기 암에 걸려 더 이상 인간다운 생존이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 관을 코로 꼿아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식물인간의 삶을 원한다는 것이냐, 과연 그런 시간들을 지속하는 것이 효도인 것일까?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자연의 순리에 맞게 보내 드리자고 말하는 오빠가 개망나니에 불과한 것일까? 아버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그런 자식인가 말이다.

거기다 더 구역질 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아버지를 일찍(?) 죽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유산을 노려서 그런게 아닐까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내 참...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마당에도 어쩜 그리도 자신의 생각만 하는지...아버지가 백만년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돌아가실텐데, 그때 아버지의 유산이 돌아오는건 당연하지 않는가? 유산을 탐스럽게 바라보는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그것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하는건 아닐까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이 속물스러웠다. 그냥 아버지의 고통을 더 이상 연장하기 싫어서, 아버지를 위해서 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거기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착한 딸...이란 단어에 얼마나 많은 함정이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것이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때--여자들 중에선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않는건 무척 위험한 일이다. 자신이 옳다는 것에서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않는 그런 착한 여자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안해도 될 고통을 받게 되니 말이다. 그녀가 그렇게 자신만 잘나고 착한 사람인양 하지 않았더라면, 오빠가 배은망덕한 불효자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5년 동안의 간병 때문에 지쳤다고 난리를 치면서 남에게 분노를 토하는 일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부모를 간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죄책감에 두려움에 분노에 좌절에 우울에 그런 감정까지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에 더욱 더 그렇다. 그걸 제대로 현명하게 판단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거의 못 본 것 같다. 여기 나오는 저자 역시 그렇게 현명한 사람은 못 되지 싶다. 그럼에도, 저자 자신이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죽는 길을 동행했다고 본다. 그녀에게 잘 된 일이다. 그렇지 못했을 시, 그녀가 자신을 용서할 사람이 아니여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표지에 쓰여진 한 마디 말이었다.

" 죽는 건 나니까, 내 의견을 물어봐 주겠니?"
 죽는건 죽는 당사자에게 맡겨라. 누구보다 그들의 인생이니 말이다. 괜한 감상이나 착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그들이 원치도 않는 삶을 강요해 놓고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는 듯 생색을 내는 일은 하지 마라. 우린 영원히 살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성숙의 한 과정이지 않겠는가. 인간이라면 각자 해야 할 결정이고 말이다. 남의 육체에 엄청난 고통을 가하고도, 자신이 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삶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잘못된 것이지 싶다. 삶 만큼이나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러니, 당사자에게 결정하게 두라.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 하지 말았으면...어차피 우린 다 죽을 목숨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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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경관 동서 미스터리 북스 23
펠 바르.마이 슈발 지음, 양원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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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걸작 추리 소설이라고 해서 들여다 본 책인데, 기대만큼 재밌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 시대에도 이렇게 쓸 수 있었다는 것에 감탄을 해야 하는건지, 이제와서 보면 조금은 촌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에 실망을 해야 하는건지 우왕좌왕이다. 남에겐 감탄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지만, 내 진짜 심정으로는 감탄보단 실망스러운 기분이 먼저다. 어느시대에 만들어졌건 재미를 원하는 내 성향 탓이겠지. 하여간 추리 소설 부분에선 계속 진화를 하고 있다는걸 알게 해준 책이다. 다른 건 몰라도 범죄 심리학적인 면에서는 괄목할만한 성장이 이뤄지고 있구나 싶었다. 지금 이 책에서 커팅 에지한 이론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이젠 상식이 되었고, 거기에 더해서 범죄자들에 대한 이해가 한층 넓어졌으니 말이다. 어떤 점은--섹스중독자에 대한 시각--당시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 살짝 웃음이 나왔다. 북유럽이지만서도, 성에 관한 보수적인 접근이나,섹스중독자에 대한 몰이해가 촌스럽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지금 이런 시각으로 책을 쓰면 아마도 순진하다고 하겠지. 추리 소설작가로써 순진하다는 말보다 더 모욕적인 단어가 있을까 만은...


내용은 이렇다. 비가 억수로 오는 날 밤, 버스 안에서 8구의 시체와 한 명의 중상자가 발견된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학살에 국민 모두 경악하고, 빨리 범인을 잡아 달라고 난리다. 살인전담반 소속 경찰관들은 시체중 한 사람이 자신들의 동료 형사 오케 라는걸 알고는 심각해진다. 그가 한밤중에 그 버스를 탄 이유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는 가운데, 경찰들은 살해된 사람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시작한다. 누군가 그들을 다 살해하고 버스에서 내렸다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지만, 과연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으며, 오케 형사는 왜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과연 오케 형사는 우연히 살해당할 것일까? 아니면 그가 바로 살인자의 목표였던 것일까? 오케의 책상 서랍을 뒤져본 경찰은 동거녀의 누드 사진이 나오자, 그들이 그를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건가, 오케에게 다른 비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중상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을 끝으로 사망하자, 그동안 단서들을 모아왔던  경찰들은 그 단서를 모아서 그림을 그려 보는데... 과연 그들은 완성된 그림을 짜맞출 수 있을 것인가.


단 하나의 영웅이 사건을 해결하는게 아니라, 약점도 있고, 강점도 있는 다양한 살인 전담부서 사람들이 갈등과 도움을 받으면서 해결해 나가는 과정들이 볼만했다. 각자 사건을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접근해 가다 그 이야기를 짜맞춰서 진실에 접근해 가고 있었는데, 실제로 경찰관들이 이렇게 사건을 해결하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 사람이 잘 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협동으로 사건을 해결해 간다는 것 말이다. 그들이 각자 헛다리도 짚고, 갈등도 있고, 각자의 선입견에 편견에 개인적인 갈등도 있지만서도, 결국 그 모든 것이 모여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거, 얼마나 자연스럽고 그럴 듯한 전개냐.

거기에 마지막 반전도 최고였다. 다른건 몰라도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반전만큼은 박수를 쳐줘도 좋을 듯...읽으면서 그 재치게 감탄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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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평화롭겠지
헤르브란트 바커르 지음, 신석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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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진지하게 들여다 봤더라면 못 봤을 책이다. 평화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그런 노골적이고 감상적인 단어가 달린 책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 몇 장을 읽어 보니 내용이 예사롭지 않기에  제목을 확인해 보곤 놀라고 말았다. 너무 뻔해서 초장부터 김이 새는 제목이었으니 말이다. 첫문장의 매력에 이미  빠진 뒤였기에 망정이지, 제목부터 봤다면 안 집어들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제목이 가져다 준 충격이 가시질 않아, 읽는 내내 내가 이런 책을 읽다니 라면서 낄낄댔다. 하니, 선입견이란 때론 나쁜 색안경이라니까. 살다보면 모든 정보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기에, 걸러내는 것이 필요하긴 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용이지 표지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우스운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제목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절대 내가 집어들지 않았을 제목" 이라고만 각인되었었기때문에....뭐, 이젠 리뷰까지 썼으니 기억할 수 있겠지.


이야기는 네델란드 농부인 헬머가 아버지 아비를 위 다락방에 올려 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든이 넘은 아비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 그간 아들이라기 보단 노예처럼 아버지의 집과 농장을 꾸려왔던 헬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주장하기로 결정했다. 늙은 아비를 죽기도 전에 골방에 가둔 헬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사람일까? 선함이라고는 단 한톨도 몸에 지니지 않은?  집안을 내 뜻대로 꾸며놓은 뒤 비로서 안정을 되찾은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아비의 쌍동이 아들중 첫째였던 헬머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다. 천생 농부인 동생 헹크를 대놓고 편애했던 아버지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그를 무시했다. 동생이 농장을 물려 받을 거라는게 모두에게 명백해지자, 그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대학에 다닌다. 고학으로 어렵사리 문학을 전공하던 그에게 어느날 천청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동생이 애인의 차에 탔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한순간에 가버린 동생을 그리워 할 새도 없이 동생의 빈자리를 메우는 대타가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가 헹크의 자리를 대신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하는 사람들, 그에게도 다른 인생 계획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외로움을 느낀다. 서툴고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묵묵히 하다보니 어느새 30여년이 흘렀고, 그는 이제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어한다. 과연 내 인생을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까? 이렇게 인생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고 흘려 보낼 줄 나는 알고 있었을까? 내 아버지는 왜 나를 농장에 묶어 두었을까? 그것이 아버지로써 잘 하는 짓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 행복은 상관없이, 내가 일꾼으로 필요했기에 잡아둔 것이었을까? 그의 머리속은 회한으로 가득찼지만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길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묵묵히 농장일만 해온 때문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 손에 꼽는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라든다. 오래전 헹크를 죽게 했던 그의 약혼자 리트에게서 온 것이었다. 오랫동안 망서리다 편지를 하는 것이라면서, 한번 농장을 방문하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 그녀. 편지에서 리트는 자신이 그간 다른 마을 농부와 결혼을 했으며 지금은 과부라고 근황을 전해온다. 결혼생활 내내 헹크를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리트는 헬머와 아비가 자신의 인생을 망쳐놨다고 원망한다. 그녀는 또 자신의 아들 이름을 헹크라고 지었다면서, 엇나가기만 하는 그를 좀 봐줄 수 없냐고 그에게 청해 오는데...


네델란드 전원을 배경으로, 시골의 아름답고 한적한 전경이 눈 앞에 일렁이는 듯했던 소설이다. 무뚝뚝하고 통제적인 아버지 밑에서 한 평생을 보낸 한 남자가 오십이 넘어 자신의 삶을 되찾아 간다는 줄거리였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나, 쌍둥이 형제간의 애증, 그리고 주변 이웃들과 벌이는 실갱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었다.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놀랄만큼 완성도가 높다. 어찌나 생생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펼쳐 가던지,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건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건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아버지가 나이들고 힘이 없어지자 다락방에 올려버리는 아들, 이에 아버지는 자신이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묻는다. 아들의 불행이 안스럽지도,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내 인생을 망쳐놓았기 때문이에요.
         난 아버지가 내 인생을 더 망쳐놓는 것이 싫어서 의사도 부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몰라요, 헹크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했는지. 헹크하고 난 쌍둥이잖아요.
         아버진 쌍둥이 형제가 어떤 건지 알기나 해요?" _246쪽  "----


헬머에게 원망의 골이 깊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 챈 아비는 용서를 구한다. 그땐 다르게 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변명을 달아서. 물론 그것이 헬머에게 어떤 의미를 주기엔 너무 늦었지만서도, 아비로써는 타당하게 주장할 말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그가 헬머를 덜 사랑한 것도, 죽은 것이 헹크가 아니라 헬머였다면 더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맞지만, 그럼에도 아들의 인생을 일부러 망쳐 놓을 의도는 없었다는 것 말이다. 위로가 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조금 가라앉히는 진실이 아니었을런지...


결국 헬머는 아버지가 묶어놓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게 될까? 궁금하시면 책을 보심 되겠다. 살아보니, 인생이란 우리 생각대로 되는게 아닌 것 같다. 우린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그렇게 믿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란 희망을 잃지 않지만서도, 때론 그런 희망에 배반당하는 것도 인생이다. 이 책은 인생이란 그저 그렇게 서글픈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반항을 하거나 거부를 하기보단 그것도 삶임을 흔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슬픈가? 허무한가?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시는가? 그걸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우신가? 굉장하고 드라마틱한 일들이 벌어져야만 한다고 우리는 강력하게 주장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에게? 절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고 우린 울부짖어야 하는 것일까? 글쎄...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 이 책의 작가는 아마도 울부짖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녀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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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도서관
아비 스타인버그 지음, 한유주 옮김 / 이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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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졸업후, 부고 기사를 작성하는 프리랜서 기자로 살아가던 아비 스타인버그는 삼대 보험이 된다는 이유로 보스턴 교도서 사서직에 취직한다.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 10대 시절 광신이었다 할 정도로 종교에 심취해 살았던 그가 범죄자들이 득실대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금발에 빼빼마른 스물 넷, 사복을 입으면 잘 봐줘야 열 넷 소년같다는 쑥맥이 과연 범죄자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는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네가 왜? 라면서 말려 보지만,  아비의 태도는 확고하다. 무엇보다 대학을 졸업했으면 일단 자신의 밥 벌이는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생각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니 사서직이 적성에 맞을 거란 생각했던 아비는 교도소 도서관이 다른 곳과 다르다는걸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베스트셀러나 좋은 책들이 인기가 있는것은 다른 도서관과 다르지 않았지만, 교도소라는 장소와 죄수라는 신분에서 일단 보통 도서관과 같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종일 감옥에서 갇혀 지내는 죄수들에게 도서관은 만남의 장이자 휴식공간이었고, 우체국이자, 시장이며, 학교이자 ,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범죄자들이 무섭지 않을까 했던 그는 오히려 갇혀 있는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과 인간적으로 알아가게 되는데...


교도소 도서관 사서가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그런 경험들을 꼼꼼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어떤 직업이건 간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애환이 생기고, 이러저러 느낀 점들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통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말 그런 경험들을 그는 충실히 담아 한권의 책으로 냈다. 하버드 졸업생인데 교도소 사서를 한다기에, 하버드도 별게 아니군 했더니만, 책을 읽어보니 역시 하버드더라. 관찰력이나 표현력, 그리고 통찰력등이 저자가 젊은 나이임에도 똑똑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대범한 것도 넣어야 하겠지.토끼같은 범생이가 호랑이와 여우가 드글대는 범죄자속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테니까. 그렇게 범죄자들과 직접 대면하게 된 그는 선입견에 알지 못하는 그들의 면면을 알게 된다. 사서가 되기엔 포주가 제격이라는 것도, 감옥안에서 한없이 작아진 사람들도 출소하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도, 남녀 불문하고 범죄자들에게 유아 같은 면이 있다는 것도, 대부분 경계성 인격 장애자들인 범죄자 속에선 늘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도, 하드 커버 책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과 포주들의 설득력을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는 것도, 잔혹한 폭력을 저지르는 자들에게도 진솔한 인간미가 있다는 점도 알게 된다. 그것만 있나? 감동도 있었다. 교회에 버린 2살짜리 아들을 감옥에서 만난 스트리퍼가 안타까워 도와주게 된 것도,  "조폭 요리사" 라는 TV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어하는 갱단을 만나 그의 희망에 동참하게 된 것도 그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무섭기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 아비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현실의 벽 앞에서 머뭇대게 되는데, 과연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교도소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게 해준다는 점이 재밌었다. 인간적인 면 못지 않게, 그 뒷면에 감춰진 모습까지 낱낱이 까발리고 있었는데, 이 책이 저자의 성장기라고 하는 것도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회 초년생이 직장이라고 들어간 곳이 교도소다. 그는 자신의 똑똑함을 무기로 버티고 있지만, 길거리에서 머리가 굵은 범죄자과 그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갇혀 있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품을만큼 그는 선량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이미 한정되어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한없이 좋게만 보아온 포주가 실은 14살짜리를 납치하고 강간하던 녀석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더불어 풀려난 죄수에게 밤길에 강도당하는 경험도 하게 된다. 현실을 이러할진대, 그가 생각했던 유토피아, 책을 통해 인간을 조금이나마 구원하려 했던 그의 생각은 허무맹랑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해서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내가 인상적으로 봤던 것은 그가 단 2년만에 그 이치를 깨달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에 순순히 굴복한다. 역시 똑똑한 사람이다. 둔감한 사람이거나, 머리가 굳어 외골수밖엔 못하거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불행한 사람이었다면, 평생 자신이 그려놓은 기치 안에서 한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봐도 좋지 싶다.


술술 넘어간다. 재기발랄한 유머와 뭉클한 감동 덕분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새로운 정보때문이기도 하다. 범죄자들을 최대한 우아하고 품위있게 표현해 준 것도 마음에 들고, 그가 자신에게 솔직한 것도 좋다. 솔직히 도서관이라는 좁은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생겨날 줄은 몰랐다. 다만 단점이라면 하버드생답게 모든 정보를 꼼꼼하게도 다룬다는 점이다. 그럼 지루해질수 있다고 누군가 말해주면 좋겠다. 어쨌건, 이 책의 성공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한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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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자들의 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68
기예르모 로살레스 지음, 최유정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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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던 나는 체제의 억압과 정신분열증으로 두배의 고통을 겪는다. 미국에서 산다면 혹시나 사는게 호전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로 친척들이 사는 마이애미로 온 나는 곧바로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신세가 된다. 20년만에 처음 나를 본 친척들은 이 애물단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결국 고모는 나를 보딩 홈(미국 사설 요양소)에 집어 넣는다. " 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그리하여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에 그렇게 도착하게 된다. 미국이라는 거대 자본 국가의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끔찍하다고 할 수 밖엔 없는 그곳에서 나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그런 삶에 적응해 간다. 정부와 개인에게서 돈을 받긴 하지만 최소한의 물자로 보호소를 운영하다보니, 원장은 집을 사고 차를 굴리지만, 그곳에 사는 원생들은 비참한 환경에 여지없이 노출되게 되는데...


첫문장부터 나를 여지없이 사로잡았다. 이렇게 비참하지만 진실이 담겨있는 문장에서 눈을 떼기란 어려우니 말이다.


" 집 바깥에는 <보딩 홈>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나는 이곳에 내 무덤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삶에 절망한 사람들이 흘러드는 변두리의 한 보호소, 대부분이 미친 놈들이었다. 더러는 승자들의 삶을 망치지 말고 외롭게 살다 죽으라며 가족들이 버린 늙은이들도 있었다. 

[여기서 잘 지낼 게야.] 고모는 최신형 시보레 운전석에 앉아서 내게 말한다. [더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걸 너도 이해하게 될 게야.] 나는 이해한다.고모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때 구정물 찌들어 넝마 더미를 한 점 지고 공원 벤치에서 아무렇게나 먹고 자는 신세를 면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누추한 곳이라도 마련해 주다니." ---8p


 인간으로 태어나 이런 경험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죄스런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라면 더 좋은 환경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그건 어렸을 적, 삶이란게 뭔지 몰랐을때 가질만한 나른한 감상이고. 나라도 이 고모처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더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걸, 그리고 그걸  고모 역시 좌절하면서 결론을 내렸을 것이라는걸 안다. 어쩌겠는가. 인간은 신이 아니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되어 있는 것을. 타인에게서 엄청난 것들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조만간 실망하게 될지리니...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한 채 이 지옥보다 못한 보딩 홈에 자리를 잡을 수밖엔 없던 작가의 기분이 이해가 되었다. 가장 기초적인 문제조차 해결되지 못하는 곳에서 정신나간 사람들과 비참한 나날들 보내야 했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강렬한 문체로 담아 책으로 남겼다. 사설 보호소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탁월하다. 19세기 <올리버 트위스트>도 아니고, 20세기에도 인간을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수용하는 곳이 있다는 점이 가슴 아프긴 하지만서도, 아마도 그가 머물렀던 요양소가 그닥 예외적인 곳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만 못한 곳들이 수두룩 하겠지.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걸까? 라는 질문을 요즘 자주 하게 된다. 다들 저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정신병이나 기타 질환으로 가족들을 진절머리나게 하는 사람들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역시도 보딩 홈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엔 없지 않을까, 그게 아무리 비참하다고 해도 더는 할 수 있는게 없는 것이니 말이다.


종종 인간이라는 것, 산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가. 때론 죽음보다 비참한 삶이란게 분명이 있는 것이니 말이다. 결국 작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책이 성공한 이후에 말이다. 젊은 시절의 이 비참한 삶을 기억한다면, 그가 47 년이나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져. 그는 그래도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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