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장을 빠져 나오면서 '도대체 누가 이 영화를 싫어할 수 있을까? 그럴만큼 성격 나쁜 사람이 있을까? ' 했는데, 역시나, 까페에 올라오는 회원 리뷰 100% 가 추천이란다.( 우리 까페에선 추천해요, 별로에요, 괜찮아요. 등으로 등급을 매긴다. ) 그럼 그렇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별로 놀랍지도 않군, 이라면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마음속 깊숙이 뿌듯해 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맞다. 오랜만에 응원해 주고 싶은 영화를 만났다. 이유는 일단, 누가 봐도 사랑스런 영화다. 주연도, 조연도, 그리고 풀어가는 이야기 자체도...(영화와) 아무 관련도 없는 내가 막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거기다 보고 나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아무리 우울한 기분으로 영화관에 들어갔다 해도, 나오면서까지 울상이긴 힘들 것이다. "완벽하게 불쌍한 놈"인 완득이가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우울함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테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많이 웃다보면 기분 좋아지는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어쨌든지 놀랐다. 우리나라도 성장 영화를 이렇게 감동적으로 찍을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기대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잘 찍을 줄은 몰랐다. 완벽했다. 우리나라 영화의 고질이라 여겨지는 감정 과잉 없이, 부지런히 해야 할 말만 하고 있었는데도, 그 자체로 웃기고 감동적이고 공감가고 그랬다. 그냥 객석에 앉아서는, 웃다, 폭소하다, 짠해지다, 정신없이 웃다, 정신 놓고 웃다를 반복하다 왔는데, 어찌나 롤러코스터 같던지 앞의 감정을 추스릴 새도 없었다. 인상 쓰고 집중해서 볼 필요가 전혀 없는, 이렇게 친절하고 사랑스런 영화를 보고나서 어긋장을 놓기란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는가? 아무리 내가 꼬이고 꼬인 상태라도 해도 말이다. 하여간 칭찬할 거리가 너무 많아서 비판할 것이 있다고 해도 쓸 공간이 없을 듯한 영화, 완득이의 해부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기도중인 완득이, 똥주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는 중...>
< 완벽하게 불쌍한 놈, 완득이> 꼽추인 아버지에 지능이 낮은 삼촌과 함께 옥탑 방에 살고 있는 완득이, 주관적으로 보건 객관적으로보건 빈틈없이 불우한 환경인 그에게 걱정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옆 집 옥탑 방에 담임 선생인 똥주가 이사를 온 것! 하늘 아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바로 나의 담임이라니, 그것도 오지랖 넓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똥주라니... 완득이가 서글픈 목소리로 불평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여 똥주의 하해와 같은 관심(?)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픈 완득이는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한다. 제발 똥주를 죽여 달라고. 내 소원 들어주심 똥주보다 헌금 만원 더 내겠다고. 딱히 하나님을 믿는건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그나마 기댈만한 구석이 하나님밖엔 없는데...하지만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완득이의 기도는 계속되고, 결국 완득이의 엄마를 찾았다는 똥주의 말에 그는 발끈하고 만다. '도대체 나도 본 적이 없는 내 엄마를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언제 엄마가 필요하대? 이제와서? ' 반발을 해보지만 요지부동인 똥주는 엄마를 한번 만나 보라고 한다. 분기탱천한 완득이는 하나님을 찾아가 협박을 한다. 이번에 기도 안 들어 주심 다음엔 절로 가겠다고. 과연 그의 당돌한 마지노선 협박이 이젠 먹힐 것인가? 이 정도면 하나님도 조금은 쫄것 같긴 한데 말이다.

완득이의 기도 대상인 그 똥주선생 되시겠다.
<쌔꺄는 기본이고 막말이 표준어인 완득이의 담임 이동주>는 이름도 정의로운 사회 선생님이다. 거친 입과 거침 없는 행동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주시는 그, 덕분에 아이들은 최소한 환상에 절지 않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지만, 그걸 알 정도로 시야가 넓지 않은 학생들에게 똥주란 괴짜 선생님일 뿐이다. 걸은 입 못지 않은 드넓은 오지랖으로 본인의 개성을 더하고 있는 똥주 선생은 혹시나 상상력이 부족한 완득이가 고민할까 저어되어, 손수 "얌마"라는 호를 선사한다. 이렇게 호까지 지어준 "얌먀 도완득" 이를 그가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호시탐탐 완득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받아온 햇반을 나눠(?) 먹고, 완득이가 알고 싶지도 않다는 엄마를 찾아준다. 어디 그뿐인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완득이 몰래 완득이 엄마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 준다. 완득이가 자신의 집 앞에 산다는 말과 함께...그렇게 완득이가 질색하는 일만 줄기차게 해주고 있는 똥주 선생, 자신이 죽을 짓만 골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모든 일을 소신있게 밀어 붙이는 그. 과연 그의 진심은 통할 것인가? 도를 넘어 보이는 그의 행동뒤에 숨겨진 따스한 정에 삐딱한 완득이마저 마음의 문을 열고 마는데...
원작도 영리함을 따지자면 만만찮았는데, 영화는 그 영리함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킨 느낌이다. 원작의 기발함과 휴머니즘을 영화만의 상상력까지 더해서 자유자재로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용을 다 알고 보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그만큼 볼 거리가 많았는 뜻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좋은 점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히 기억해 내기도 버겁다. 선뜻 떠오르는 몇가지만 일단 꼽아보자면 첫째,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주연이건 조연이건 간에 연기가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소설 속 완득이보다 더 완득이 같던 유 아인이나, 똥주 선생의 완벽한 복사판처럼 보였던 김윤식님,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나를 웃겼던 앞 집 아저씨 김상호님, 외국인 엄마의 그늘진 현실을 실감나게 연기하시던 완득이 엄마, 보통은 멍때리고 있지만 춤이 시작되면 지골로가 되는 삼촌과 이 세상 누구보다 완득이를 자랑스러워 하는 꼽추 아버지, 그리고 꼬박꼬박 완득이를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핫산과 완득이를 만득이라고 부르는 관장님까지...그들이 티격태격하면서 만들어 가는 이야기엔 정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보신 분만이 이해하실 듯...
둘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이었다. 장애인 아빠과 정신 지체 삼촌, 가난, 가난한 나라에서 시집온 외국인 엄마,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장돌뱅이등...완득이에게 줄줄이 붙어있는 연관어다. 이렇게 완벽하게 불쌍하기도 힘들거라고 말하는 완득이의 자조는 틀리지 않다. 부끄러운가? 당연히 부끄럽다. 메뉴라곤 라면이 전부인 혼자 챙겨 먹는 저녁이, 홀로 잠이 들어야 하는 밤이, 구호품인 햇반을 챙겨가라는 담임의 성화가, 무엇보다 남들과 다르다는 현실이 뼈아프게 부끄럽다. 아무리 내가 부끄럽지 않다고 주문을 걸어봤자, 소용이 없다. 사회가 착한 나를 다시 나쁜 맘 먹게 해주는건 시간문제다. 이 영화의 장점은 그런 완득이의 현실을 아름답다고 포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들도 단지 인간이라는 것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가족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이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있다면 똥주 선생님이다. 그는 말한다. 가난한게 부끄러운게 아니라 굶어 죽는게 부끄러운 거라고.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똥주 선생. 그는 동정이 아니라 이해를 통해 완득이를 설득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만으로도 아마 완득이는 충분히 설득당했을 것이다. 알고보면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최소한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납득한다. 그것이 동화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성이 아니라도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게 되리니...
세째는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완득이와 똥주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소리에 민감한 앞 집 아저씨와의 에피소드는 영화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그 감칠 맛을 더했다. 결국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가지 잣대로만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무엇보다 인간은 부딪쳐 보지 않으면 실체를 알기 어렵다는 것도... 하여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쩜 그를 알아간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외 완득이와 그의 매니저 애인, 그 둘을 벤치마케팅하던 천하의 똥주 선생, 완득이에겐 호랑이지만 완득이 애인에겐 다소곳한 고양이인 관장 선생님, 처음 보는 엄마에게 라면을 권하는 완득이와, 자기 가족에 대한 기억만은 잊지 않고 있던 완득이 엄마의 처연함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소소한 것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과연 언제부터 타인에 대한 관심을 놓고 살게 되는 것일지 반성이 됐다. 아니, 반성이라기 보단 자괴감이란게 더 정확한 것이겠지만서도.
네째는 이름을 불러 주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내 인생을 꼬이기 (?) 시작했다고...완득이는 너스레를 떨지만서도, 이 영화만큼 이름의 중요성이 부각된 영화도 없지 싶다. 똥주는 줄기차게 "얌마 도완득!"을 불러 제킨다. 늘 그늘진 한켠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던 완득이는 똥주의 호령에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청소년기엔 그렇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빗나가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봐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이유가 되니 말이다. 하여 똥주의 완득이 타령이 실은 "관심" 의 표현이며, 비뚤어지고 싶은 마음 한가득인 완득이를 달래주는 명약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게 어떻게 비춰지건 간에, 진심은 통하게 마련인거 아니겠는가. 거기에 오랜만에 나타나 엄마 노릇을 하려니, 자격지심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완득이 엄마의 입을 떨어지게 하는 것도 완득이의 한마디다. "제 어머니여요" 라는... 그 말은 곧 완득이 엄마의 한마디로 이어진다. " 제 남편이여요."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인정해주는 단어, 이름...아마도 잃어버리기전에는 그 중요성을 알기 힘들겠지.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찾아가려는 노력과 불러 주려는 용기, 그리고 뒤늦게 나마 이름값을 하려 애쓰는 어른들의 후회가 있던 영화, 감동적이었다. 하여간 이런 영화를 보면서 미소를 짓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다들 엄마 미소를 지으면서 나왔다고 하던데, 빈말이 아니다. 정말로 흐믓해지니 말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잘 만들어진 달동네 환타지라고 하던데, 굳이 그렇게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달동네 환타지가 있기라도 했던가 묻고 싶다. 잘 만들어졌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한껏 비아냥 거리면 말해보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맞긴 하지만서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싶다. 완득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는 것, 똥주 선생님에겐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다는 것과 그 이웃들과 만난다면 눈인사 정도는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보다는 보고 난 후, 훨씬 더 마음이 푸근해 졌다는 것 말이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 도대체 이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더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지나친 욕심이 아닐런지... 하여간 이런 저런 말 필요없이 한번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일단 웃긴다. 행복해진다. 보고 나서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진다. 다만, 약간의 휴우증을 예상하셔야 할지도... 이 영화를 보고 났더니만, 다른 영화가 당최 땡기질 않는다. 아무래도 올해는 이 영화를 끝으로 마감해야 할 듯 싶다.
<추신--네영카 시사회를 통해 본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