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 Punc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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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시사회장을 빠져 나오면서 '도대체 누가 이 영화를 싫어할 수 있을까? 그럴만큼 성격 나쁜 사람이 있을까? ' 했는데, 역시나, 까페에 올라오는 회원 리뷰 100% 가 추천이란다.( 우리 까페에선 추천해요, 별로에요, 괜찮아요. 등으로 등급을 매긴다. ) 그럼 그렇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별로 놀랍지도 않군, 이라면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마음속  깊숙이 뿌듯해 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맞다. 오랜만에 응원해 주고 싶은 영화를 만났다. 이유는 일단, 누가 봐도 사랑스런 영화다. 주연도, 조연도, 그리고 풀어가는 이야기 자체도...(영화와) 아무 관련도 없는 내가 막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거기다 보고 나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아무리 우울한 기분으로 영화관에 들어갔다 해도, 나오면서까지 울상이긴 힘들 것이다.  "완벽하게 불쌍한 놈"인 완득이가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우울함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테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많이 웃다보면 기분 좋아지는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어쨌든지 놀랐다. 우리나라도 성장 영화를 이렇게 감동적으로 찍을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기대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잘 찍을 줄은 몰랐다. 완벽했다. 우리나라 영화의 고질이라 여겨지는 감정 과잉 없이, 부지런히 해야 할 말만 하고 있었는데도, 그 자체로 웃기고 감동적이고 공감가고 그랬다. 그냥 객석에 앉아서는, 웃다, 폭소하다, 짠해지다, 정신없이 웃다, 정신 놓고 웃다를 반복하다 왔는데, 어찌나 롤러코스터 같던지 앞의 감정을 추스릴 새도 없었다. 인상 쓰고 집중해서 볼 필요가 전혀 없는, 이렇게 친절하고 사랑스런 영화를 보고나서 어긋장을 놓기란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는가? 아무리 내가 꼬이고 꼬인 상태라도 해도 말이다. 하여간 칭찬할 거리가 너무 많아서 비판할 것이 있다고 해도 쓸 공간이 없을 듯한 영화, 완득이의 해부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기도중인 완득이, 똥주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는 중...>

 

< 완벽하게 불쌍한 놈, 완득이> 꼽추인 아버지에 지능이 낮은 삼촌과 함께 옥탑 방에 살고 있는 완득이, 주관적으로 보건 객관적으로보건 빈틈없이 불우한 환경인 그에게 걱정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옆 집 옥탑 방에 담임 선생인 똥주가 이사를 온 것! 하늘 아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바로 나의 담임이라니, 그것도 오지랖 넓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똥주라니... 완득이가 서글픈 목소리로 불평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여 똥주의 하해와 같은 관심(?)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픈  완득이는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한다. 제발 똥주를 죽여 달라고. 내 소원 들어주심 똥주보다 헌금 만원 더 내겠다고. 딱히 하나님을 믿는건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그나마 기댈만한 구석이 하나님밖엔 없는데...하지만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완득이의 기도는 계속되고, 결국 완득이의 엄마를 찾았다는 똥주의 말에 그는 발끈하고 만다. '도대체 나도 본 적이 없는 내 엄마를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언제 엄마가 필요하대? 이제와서? ' 반발을 해보지만 요지부동인 똥주는 엄마를 한번 만나 보라고 한다. 분기탱천한 완득이는 하나님을 찾아가 협박을 한다. 이번에 기도 안 들어 주심 다음엔 절로 가겠다고. 과연 그의 당돌한 마지노선 협박이 이젠 먹힐 것인가? 이 정도면 하나님도 조금은 쫄것 같긴 한데 말이다.

 



                    

 

 

 

 

 

 

                      완득이의 기도 대상인 그 똥주선생  되시겠다.

<쌔꺄는 기본이고 막말이 표준어인 완득이의 담임 이동주>는 이름도 정의로운 사회 선생님이다. 거친 입과 거침 없는 행동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주시는 그, 덕분에 아이들은 최소한 환상에 절지 않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지만, 그걸 알 정도로 시야가 넓지 않은 학생들에게 똥주란 괴짜 선생님일 뿐이다. 걸은 입 못지 않은 드넓은 오지랖으로 본인의 개성을 더하고 있는 똥주 선생은 혹시나 상상력이 부족한 완득이가 고민할까 저어되어, 손수 "얌마"라는 호를 선사한다. 이렇게 호까지 지어준 "얌먀 도완득" 이를 그가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호시탐탐 완득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받아온 햇반을 나눠(?) 먹고, 완득이가 알고 싶지도 않다는 엄마를 찾아준다. 어디 그뿐인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완득이 몰래 완득이 엄마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 준다. 완득이가 자신의 집 앞에 산다는 말과 함께...그렇게 완득이가 질색하는 일만 줄기차게 해주고 있는 똥주 선생, 자신이 죽을 짓만 골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모든 일을 소신있게 밀어 붙이는 그. 과연 그의 진심은 통할 것인가? 도를 넘어 보이는 그의 행동뒤에 숨겨진 따스한 정에 삐딱한 완득이마저 마음의 문을 열고 마는데...

 

원작도 영리함을 따지자면 만만찮았는데, 영화는 그 영리함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킨 느낌이다. 원작의 기발함과 휴머니즘을 영화만의 상상력까지 더해서 자유자재로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용을 다 알고 보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그만큼 볼 거리가 많았는 뜻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좋은 점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히 기억해 내기도 버겁다. 선뜻 떠오르는 몇가지만 일단 꼽아보자면 첫째,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주연이건 조연이건 간에 연기가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소설 속 완득이보다 더 완득이 같던 유 아인이나, 똥주 선생의 완벽한 복사판처럼 보였던 김윤식님,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나를 웃겼던 앞 집 아저씨 김상호님, 외국인 엄마의 그늘진 현실을 실감나게 연기하시던 완득이 엄마, 보통은 멍때리고 있지만 춤이 시작되면 지골로가 되는 삼촌과 이 세상 누구보다 완득이를 자랑스러워 하는 꼽추 아버지, 그리고 꼬박꼬박 완득이를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핫산과 완득이를 만득이라고 부르는 관장님까지...그들이 티격태격하면서 만들어 가는 이야기엔 정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보신 분만이 이해하실 듯...

 

둘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이었다. 장애인 아빠과 정신 지체 삼촌, 가난, 가난한 나라에서 시집온 외국인 엄마,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장돌뱅이등...완득이에게 줄줄이 붙어있는 연관어다. 이렇게 완벽하게 불쌍하기도 힘들거라고 말하는 완득이의 자조는 틀리지 않다. 부끄러운가? 당연히 부끄럽다. 메뉴라곤 라면이 전부인 혼자 챙겨 먹는 저녁이, 홀로 잠이 들어야 하는 밤이, 구호품인 햇반을 챙겨가라는 담임의 성화가, 무엇보다 남들과 다르다는 현실이 뼈아프게 부끄럽다. 아무리 내가 부끄럽지 않다고 주문을 걸어봤자, 소용이 없다. 사회가 착한 나를 다시 나쁜 맘 먹게 해주는건 시간문제다. 이 영화의 장점은 그런 완득이의 현실을 아름답다고 포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들도 단지 인간이라는 것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가족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이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있다면 똥주 선생님이다. 그는 말한다. 가난한게 부끄러운게 아니라 굶어 죽는게 부끄러운 거라고.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똥주 선생. 그는 동정이 아니라 이해를 통해 완득이를 설득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만으로도 아마 완득이는 충분히 설득당했을 것이다. 알고보면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최소한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납득한다. 그것이 동화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성이 아니라도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게 되리니...

세째는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완득이와 똥주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소리에 민감한  앞 집 아저씨와의 에피소드는 영화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그 감칠 맛을 더했다. 결국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가지 잣대로만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무엇보다 인간은 부딪쳐 보지 않으면 실체를 알기 어렵다는 것도...  하여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쩜 그를 알아간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외 완득이와 그의 매니저 애인, 그 둘을 벤치마케팅하던 천하의 똥주 선생, 완득이에겐 호랑이지만 완득이 애인에겐 다소곳한 고양이인 관장 선생님, 처음 보는 엄마에게 라면을 권하는 완득이와, 자기 가족에 대한 기억만은 잊지 않고 있던 완득이 엄마의 처연함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소소한 것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과연 언제부터 타인에 대한 관심을 놓고 살게 되는 것일지 반성이 됐다. 아니, 반성이라기 보단 자괴감이란게 더 정확한 것이겠지만서도.

 

네째는 이름을 불러 주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내 인생을 꼬이기 (?) 시작했다고...완득이는 너스레를 떨지만서도, 이 영화만큼 이름의 중요성이 부각된 영화도 없지 싶다. 똥주는 줄기차게 "얌마 도완득!"을 불러 제킨다. 늘 그늘진 한켠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던 완득이는 똥주의 호령에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청소년기엔 그렇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빗나가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봐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이유가 되니 말이다. 하여 똥주의 완득이 타령이 실은 "관심" 의 표현이며, 비뚤어지고 싶은 마음 한가득인 완득이를 달래주는 명약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게 어떻게 비춰지건 간에, 진심은 통하게 마련인거 아니겠는가. 거기에 오랜만에 나타나 엄마 노릇을 하려니, 자격지심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완득이 엄마의 입을 떨어지게 하는 것도 완득이의 한마디다. "제 어머니여요" 라는... 그 말은 곧 완득이 엄마의 한마디로 이어진다. " 제 남편이여요."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인정해주는 단어, 이름...아마도 잃어버리기전에는 그 중요성을 알기 힘들겠지.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찾아가려는 노력과 불러 주려는 용기, 그리고 뒤늦게 나마 이름값을 하려 애쓰는 어른들의 후회가 있던 영화, 감동적이었다. 하여간 이런 영화를 보면서 미소를 짓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다들 엄마 미소를 지으면서 나왔다고 하던데, 빈말이 아니다. 정말로 흐믓해지니 말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잘 만들어진 달동네 환타지라고 하던데, 굳이 그렇게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달동네 환타지가 있기라도 했던가 묻고 싶다. 잘 만들어졌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한껏 비아냥 거리면 말해보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맞긴 하지만서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싶다. 완득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는 것, 똥주 선생님에겐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다는 것과 그 이웃들과 만난다면 눈인사 정도는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보다는 보고 난 후, 훨씬 더 마음이 푸근해 졌다는 것 말이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 도대체 이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더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지나친 욕심이 아닐런지... 하여간 이런 저런 말 필요없이 한번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일단 웃긴다. 행복해진다. 보고 나서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진다. 다만, 약간의 휴우증을 예상하셔야 할지도... 이 영화를 보고 났더니만, 다른 영화가 당최 땡기질 않는다. 아무래도 올해는 이 영화를 끝으로 마감해야 할 듯 싶다.

 

<추신--네영카 시사회를 통해 본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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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좋다 2011-11-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앞 자동차 극장에서 이상하게 기울어진 제일 앞에서 앞유리에 얼굴을 붙이고 와이프는 반대로 누워야 보이는데 불편한 자리였는데도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뭐라 표현하지 못하는 감동을 너무 잘 써주셨습니다. 짝짝짝

이네사 2011-11-15 07:21   좋아요 0 | URL
에휴, 칭찬 감사드립니다. 저도 맨 앞 오른쪽 구석자리 배치 받고는 투덜투덜 댔었는데, <밥이 좋다>님도 만만찮으셨네요. 자리에 대한 불평이 생각나지 않을만큼 재밌는 영화였죠? 책을 인상적으로 봐서, 잘못 찍었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너무 잘 찍어줘서 고맙더라구요.
덕분에, 완득이나 똥주샘같은 분들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 졌음 싶네요.
전 개인적으로, 학교 다닐때 딱 똥주 같은 샘이 있었거든요. "요즘 그런 선생이 어딨나..."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서 참 나는 복이 많은 아이였구나 합니다. "있는데..." 라고 말 할 수 있으니 말여요.^^
그나저나 영화가 잘 되서 다행이여요. 제가 밀면 흥행이 잘 안 되길래, 설마 이것도 했거든요.
다행히 모든 분들이 좋아해주시니, 저도 왠지 으쓱으쓱 하네요.
아~~~ 오핸 마시길...전 이 영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답니다. ㅋㅋㅋ
 
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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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 입장이 되어 본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간주하고 한번 생각을 해보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한 사람만 주인공인 책은 지루해지기 쉽상이니까. 게다가 난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저글링 하듯 변주해 가는게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등장인물들이 많을 시 어떻게 엮어가야 좋을지 감을 못잡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들만의 개성와 인생관으로 들려 주는데 자신이 있다. 그렇게 자신있는 분야가 있으면, 나머지만 잘 고안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연령대도, 성별도, 국적도, 직업이나 경험도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한 자리에 모아놓는가 하는 것이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보이는 사람들이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들 사이에 어떤 피할길 없는 연결점이 있어서 그들의 인생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설득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 방식일테니까. 이런 문제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의 작가가 다소 실패한듯 보였기 때문이다. 육중한 책상 하나로 인해 40여년에 걸쳐 다양한 사람들이 연결되고 있다는 그녀의 설명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어색했다는건 좀 겸손한 표현이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라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는게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책상 하나로 등장인물들이 엮인 다는 설정 자체가 어설펐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를 상상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지 싶다. 작가로써는 굉장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것이 곧바로 이렇게 작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용은 이렇다. 중년의 고독한 작가로 고집스럽게 창작에만 몰두하면서 살고 있던 나디아는 자신의 창작의 원천이었던 책상을 가져 가겠다는 전화에 당황한다. 그 책상은 27년전 칠레로 돌아간 젊은 시인 다니엘에게 받은 것으로 그는 나중에 돌려 받겠노라고 말을 했지만 칠레로 돌아간 뒤 얼마지나지 않아 군부에 의해 사망했었다. 선물로 받은게 아니라 빌린 것이니 언젠가는 돌려 줘야 될거라 라고 생각은 했으나 실제로 책상으로 돌려 받겠다고 다니엘의 딸이 찾아오자 그녀는 기분이 다운된다. 책상을 돌려 보낸뒤 창작의 에너지를 잃어버린 그녀는 홀린 듯이 책상이 돌아간 나라인 이스라엘로 찾아간다. 어떤 일들이 거기서 기다릴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한편,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서 살아나온 유대 여자와 결혼한 영국인은 아내가 죽은 뒤 그녀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한다. 아내의 비밀을 알게 난 다음 그는 비로서 아내가 젊은 사내에게 책상을 준 과거를 반추해낸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듯 초연한 자세로 일관했던 아내는 책상 하나만큼은 애지중지 소중하게 여겼었다. 그런 책상을 모르는 사내에게 덜컥 주었던 그 사건은 남편으로써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과거로 되돌아가 그때를 회상하던 남편은 어쩌면 그 일이 아내의 아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한편 유대인 골동품상인 와이즈는 아내가 죽은 뒤 아들과 딸을 정성스레 키운다. 역사 학자인 아버지의 서재를 복원하기 위해 그는 딸 레아를 시켜 책상을 찾아오게 하는데, 과연 그 책상은 원주인을 찾아 돌아오게 될 것인가? 

책상 하나에 목숨 건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였다. 냉소적인 뉘앙스를 눈치채셨는가? 그렇다, 문제는 이거다. 왜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책상 하나에 다양한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가 이 말이다. 뉴욕에 사는 작가건, 영국에 사는 작가건, 유대인 골동품상이건 ,칠레의 젊은 시인이건 간에 이 책상만 보면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연인을 대하는 듯 하는데, 그건 좀 오바지 싶었다. 공감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살다보면 이것저것 정이 붙는 것이 많다지만서도, 도무지 이 많은 사람들이 그래, 책상 하나에 목을 맨다고?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지. 한 사람만 그렇다고 하면 또 이해가 가지만서도, 책상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설명하는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작위적이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치못하게 설정한 티가 폴폴 난다는 뜻이다. 그렇다보니 몰두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니 안 그렇겠는가? 그럼에도 작가의 필력만큼은 다시 한번 확인한 책이 아닐까 한다. 상상력이나 사람들의 사연을 이끌어 내는데는 막힘이 없는 작가이지 싶다. 40대 이하의 최고의 작가라는 말을 듣는다는데, 틀린말은 아니지 싶고, 이 책은 다소 실패한 티가 난다고 해도 앞으로 이 작가가 어떤 책을 써낼지 기대가 되게 하는 필력이었다. 이 정도의 상상력이라면 언젠가, 꽃이 활짝 피어서 아름답게 피어 나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겠지 싶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지 간에 기다려볼 생각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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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악덕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28
쥬디스 슈클라 지음, 사공일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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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일상에 존재하는, 그러나 무시되거나 간과되고 있는 일상의 악덕 다섯 가지를 서술하고 있는 책인데, 무언가를 설명할 목적으로 쓴 것이라기 보단, 이렇게 쓰면 독자들이 못 알아먹는 다는 것의 교본으로 사용되고 싶은 의도하에 쓰신게 아닐까 싶을만치 가독성 난해한 책이었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갖가지 요상한 단어와 비틀린 논리로 꼬아서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는 거여요,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결국 내용이 파악하는건 고사하고, 무슨 말을 하시려고 한 것조차 짐작이 안 되었다. 물론 그것도 읽어내려갈만한 인내심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나는 인내심이 없었기에 다 읽을 수 없었다. 고로 원래 이 리뷰는 안 써야 마땅한 책겠지만서도, 그간 책을 읽으면서 든 여러 생각들이 이 책을 보면서 다시 들었기 때문에 적어 보기로 한다.

일단, 저자가 법철학 전공 교수라는데, 법철학을 목표로 쓴 책이 아니라고 함에도 그 못지 않게 어렵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정말로 법철학자들의 책을 보면 한숨이 나고 눈물이 난다. 별로 어렵지 않게 써도 되는 말들은 일부러 어렵게 쓰는데 도가 튼 사람들처럼 보여서다. 다른 분야에선 쉽게 쉽게, 일반일들도 알아 듣게끔 장벽을 낮추는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한데, 왜 유독 법철학자들은 그렇게도 목을 뻣뻣하게 세우곤 보다 더 어렵게, 다른 사람들이 절대 알아듣지 못하도록 서술해야 잘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들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사는 사람들 같고,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서, 본인들만 만족하고 사는게 얼마나 재밌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물론 어려운 말들을 쓰면서 남들과 차별된다는 생각에 으쓱하긴 할지 모르지만서도, 종종 그들의 거만에 눈살이 찌프려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엇이건 인간이 만든 것이면 그렇게 어려울리 없고, 되도록이면 쉽게 서술해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들이 끼리 끼리 어떤 언어를 쓰면서 서로를 존중하던 간에 그들의 문제긴 하지만서도, 이렇게 밖에는 원밖의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왜냐면, 그래도 법철학 정도를 할 정도면 어느정도는 머리가 있는 사람들일 것이기에, 그들이 이렇게 난해한 단어들만 골라서 다른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못 알아먹는 외계어를 작성하느라 쓰는 에너지는 그대로 사회에 환원할 시, 훨씬 더 많은 공헌을 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에너지 낭비라는 시각에서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지 싶은 것이다.

다른 것은 상아탑에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사회와 유리될 수 있는가 싶다는 것이었다. 도입부를 읽어가는데 벌써, 이 사람은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현저하게 부족하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라는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자신의 우물만 열심히 파다보니 우물밖 풍경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 그녀를 보고 천재라고 칭송을 하기만 했을 터이니, 그녀 자신으로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내린 결론들이 굉장히 참신하고 통찰력있는 견해라고만 생각하면서 평생을 보냈겠지 싶다. 그녀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녀의 견해를 뭐라 할 수는 없다. 일면이라도 시선에 틀린점은 없으니 말이다. 다만 문제는, 그게 사회 전반에 그다지 보편적이지도, 통찰력 있는 견해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심리학적인 면에서는 그게 아닌데 싶은 문장들도 눈에 뜨인다. 시야가 협소했다는 뜻이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했다는 뜻으로밖엔 해석되지 않는다. 종종 하버드 대학이라는 간판을 달면, 그들의 견해가 무조건 옳습니다요,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하버드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좋은 작가란 법은 없다. 단지 그들이 머리가 좋다는 것만은 검증이 확실하게 되어주겠지만서도 말이다. 

하여간 다 읽지도 않은 주제에 더이상 왈가왈가 하는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다른 모든 단점들을 무시하고라도, 이 책이 별 한개밖엔 안 되는 이유는 리뷰의 제목이 말해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고 해도 알아먹어야지나 뭐 읽고 말고 할게 아닌가? 일상의 악덕이라는 제목하에 이러저러한 악덕들을 --우리가 간과하고 있다는데 분노를 토하시면서--갖가지 논리로 증명하고 있던데, 우스운 것은 그렇게 다양하고 정교한 논리가 아니라도 대충 이해할 수 있는 명제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잘하면 본인 혼자 북치고 장구치면서 혼자 분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책이기도 했다. 본인만 심각하다는 뜻. 남들이 다 알고 심드렁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다른건 다 무시해도 말이다. 정말로 정말로, 아줌마. 이렇게 쓰심 못  알아 먹는다니까요. 쉽게 써야죠~~라고 항의하고 싶은 책이었다. 참 나, 역자분은 법을 전공하신분도 아니라는데, 도무지 이걸 번역하면서 얼마나 끌탕을 하셨을까?  아마도 그러게 남의 돈 먹고 사는게 쉬운줄 알아? 라면서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을 내 팽개쳐 버리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지 않으셨을런지...그러게 좋은 원작자를 만나는 것도 역자의 운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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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선생 2011-10-1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악덕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이 책의 역자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부분 부분 읽어 보았는데, 이네사님의 말씀처럼, 모든 분들이 글의 전개 방식이 참 난삽하다고 그러더라구요.
저야 번역한다고 수십 번 읽다보니, 이해 가능한 부분일지라도,
일반(전문) 독자가 읽기에 매우 난해하긴 한 모양입니다.
여하튼 좋은 리뷰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번역한다고 너무 많은 시간과 고통이 동반되었기에, 난삽한 책일지라도
저에게는 애정이 가득한 책입니다.
좀 더 쉽게 번역했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도 해 봅니다.


이네사 2011-10-18 12:29   좋아요 0 | URL
아니, 왜 역자님이 후회를 하셔요. 전 이 책 보면서 정말로 고생 하셨겠다. 그런데 별로 고생한 보람이 없겠다 싶어서 역자님이 무척 안스럽던데요.잘못 걸렸다 싶으셨겠네 했답니다. 실은 제가 법학 전공이거든요. 학부 공부하던 중에 법철학 원서도 몇 권 읽어봤고요. 번역투를 보니 딱...떠오르더군요. 아~~~ 그 말투...어떻게 어디서부터 어떤 단어로 말을 번역해야 좋을지 난감하게 하는 그런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잖아요.그냥 영어로 읽었을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번역을 하라하면 더 오리무중이 되버리고 말이죠. 그런 문장들을 그래도 정리해서 내어놓으셨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신거죠. 그런 문장을 수십 번 읽으셨다니 한숨이 절로 나오네요. 책임감이 무척 강하신 분이신가봐요. 아마도 이 책에 진짜 애정이 있다긴 보단, 열정을 쏟아 부은 결과물이기에, 그래서 애정이 생기신게 아닐까 싶어요. 대단한 열정이시네요. 부러운데요. 하여간, 역자님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런 문체는 일반 사람들에겐 정말로 고문이라는 것이죠. 제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다고 하면 다들 놀라거든요.그럼 전 그게 왜요? 한답니다. 법철학서에 비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주 아주 말랑말랑 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이해 되시죠?
그러니까...더 쉽게 번역할 수는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나마 번역이 되었다는 자체가 전 섬마을선생님의 노고때문이 아닐까 해요.
저라면 돈을 억만금 준다고 해도, 했을까? 싶네요. 정말로요. 오히려 대단하시다고 칭찬해드리고 싶어요. 그러니 불친절한 제 리뷰에 혹 마음 상하진 마시길... 이건 역자의 문제가 절대 아니고, 원작자의 문제니 말여요. 설마 그것도 모르시는건 아니신거죠?
 
나고의 아기고양이들 - 언제 어디서나 고양이 마을…나고 나고 시리즈 2
모리 아자미노 지음 / 라이카미(부즈펌)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어찌나 생생하게 마을을 그려 놨던지, 그 마을이 실재하는지 아닌지 아직까지 나를 헷갈리게 하는 나고의 고양이들 시리즈중 1탄이다. 3탄을 읽고서는 정말 이런 마을이 있다고 하면서 경악을 했는데, 이 책을 보니, 어쩌면 그저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마을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든다.왜냐고? 이렇게 완벽한 마을은 상상속에서나 가능하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인간까지 갈 것도 없이 고양이에게 이렇게 친절한 마을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게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 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던지 간에, 아무리 고양이에 대해 존종을 하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했지 싶다. 이렇게 냥이들에게 친절한 마을은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다는 거지...그저 작가의 상상으로 이런 마을이 존재했음 좋겠다 싶어 만들어낸 가상의 마을이 아닐까 한다. 나고라는 도시 말이다. 

하여간 가상이건 실재건 간에, 그가 만들어낸 고양이들의 면면들은 실재 같다. 가까이서 관찰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그런 정보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하기에 그들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잘 아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말한다. 고양이랑 사는건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라고...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정말로 그렇게 느껴진다니까. ㅋㅋ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 보시길...특히나 이번 권은 아기 고양이 특집이다. 아기 고양이를 보면서 인상 찌프리실 분들은 아마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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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소울 오브 디자인 - 세계 디자이너 20인, 디자인의 혼을 말하다
aA 디자인 뮤지엄 지음 / 이마고 / 201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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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 취재팀이 <캐비넷> 이란 잡지 창간호를 위해 6개월간 9개국을 돌아다니면서 20명의 사람을 만나 만든 모음집이다. 원래는 창간호에 실린 내용이었는데, 워낙 반응이 좋아서 단행본으로 재편집해 내놓은 모양이다. 창간호를 못 봐서 어떤가는 모르겠지만 이 책도 잡지처럼 보이긴 한다. 20명의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인터뷰해 놓은 잡지 말이다. 

디자인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책일 듯...나처럼 디자인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에겐 눈동냥 정도?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맛 보는 것은 언제나 시간 가는줄 모르는 호사이니 말이다.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디자이너 자신에 대해서는 별반 알아낼 것이 없다는 점이 단점. 그들은 어쩜 그리도 한결같이 듣기 좋은 말만 하던지...나중엔 질문과 대답을 읽는 것조차 시간낭비처럼 여겨졌다. 뭔가 배울 게 있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성실하게 답해야 하는 것인데,하긴  몇 개 안 되는 짤막한 질문에, 그 두리뭉실하고 천편일률적인 질문에 , 지금 막 만난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심도 있는 깊이 있는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긴 하겠지. 그리고 아무리 디자인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동양인이 인터뷰어 라는 것에 대한 편견도 한 몫 하지 않았는가 한다. 인터뷰 기사는 종종 타임지나 뉴스위크지 뒷면에 있는 것들을 보는데, 그들이 찔러대는 핵심적인 질문과 대답은 종종 나를 통쾌하게 한다. 그렇게 재치 있는 인터뷰는 거기 아니면 기대하기 어려운 듯...하여 듣고도 잊어 버릴만한 이야기를 꾸준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나, 원래 디자이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알만한 수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들 중에선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냥 취미로 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적인 임팩트가 있는 물건을 창조해 내는 사람들이 전혀 디자인과 상관없는 일들을 하다 그 세계로 들어와서 성공했다는 점은 신기했다. 아마도, 재능이라는 것은 배워서 되는게 아니라는걸 증명하는 것이 아닐런지... 

사진도 멋있고, 디자인에 대한 열정들도 멋있는 책이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그냥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심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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