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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 - The Day He Arriv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제목이 조금은 촌스럽게 들리는 < 북촌방향> 이다. 영어 제목을 어떻게 했으려나 했더니 " The Day He Arrives" 란다. 나름 의미심장하게 잘 지은 것 같다. 그가 도착한 그 날을 기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영화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서울 북촌에 그가 도착한 그 시간부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대구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유감독(유준상 분)은 오랜만에 나들이겸 서울에 온다. 딱 선배인 형만 (김상중 분)만나고 가겠다고, 그냥 조용히 며칠 처박혀 있다 갈거라고 중얼대는 그, 애써 다짐을 하는걸 보니 예전엔 그가 그렇지 않았으며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단 짐작을 하게 한다. 아니다 다를까, 그의 결심은 애초부터 일찌감치 틀어져 버린다. 만나려던 형은 핸드폰을 꺼놔 연락이 되질 않고, 별로 반갑지 않은 후배는 길거리에서 알아 보고 반가워 한다. 시간을 때우려 주점에서 낮술을 하고 있던 그는 영화과 학생들을 동석을 하게 된다. 자신의 영화와 거취에 대한 이런 저런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 거나하게 취한 그는 옛 애인(김 보경 분)을 찾아간다. 2년만에 찾아온 그를 냉대하던 그녀는 그와 잠자리를 하고 난 뒤 다시 잘 될 거라는 희망에 부푼다. 물론 그건 그녀의 동상이몽이기에 그는 애매한 말만 남긴 채 --행복해야 해~~~! --눈썹 휘날리게 도망친다. 만에 하나 그녀가 정신을 차려 진실을 캐물을 시, 빠져나갈 말을 생각해 내야 하는 상황이 귀찮기 때문이다.
드디어 형을 만난 그는 형이 자주 만난다는 보람씨(송선미 역) 와 함께 "소설" 이라는 술집으로 향한다. 미모의 여교수인 보람씨는 유감독에게 호감을 표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댄다. 유감독과의 관계에서 새로울게 하나도 없는 형은 그녀의 호기심이 마뜩잖다. 일상이 되버리면 주저앉아 버릴 흥분이니 말이다. 하지만 감독을 할 정도면 남들과 다른 무언가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보람씨는 그가 그저 신기할 뿐이다. 언제나 당신을 주시하겠다는 보람씨의 주사에 유감독은 고맙다고 해야 하는건지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 하는건지 난감하다. 한편 "소설 " 술집 주인을 본 유감독은 깜짝 놀란다. 그녀가 오늘 아침 헤어진 옛 애인과 닮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고민하던 그는 점차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조용하게 지내다 가겠다는 그의 서울 나들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란스러워 진다. 반갑지 않은 후배와는 할 말도 떨어졌는데 자꾸 부딪히고, 함께 영화를 찍었던 선배에게선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고 만다. 이지적으로 보이던 보람씨가 집 나간 개때문에 펑펑 우는 가운데, 그런 보람씨를 달래는 형을 보면서 실소하던 그는 "소설 " 술집 주인에게 남자 친구가 여럿이며, 술집 안에 방이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하고 트이는데...
유감독의 서울 3박 4일 나들이를 그린 것으로, 거시적으로건 미시적으로건 줄곧 " 반복되어지는 "일상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데, 언뜻 <Groundhog Day: 사랑의 블랙홀>이 연상되었다. 전혀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긴 하지만 반복되는 삶을 사는 주인공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사랑의 블랙홀은 마법에 의해 매일이 반복된다는 설정이라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무런 마법 없이도 반복되어진다는게 다르다면 다르려나?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름이 끼치도록 말이다.
그렇다. 유감독, 그는 이번엔 좀 다른 뭔가가 있으려나 기대를 안고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언제나처럼 뻔하다. 형과의 만남은 오래된 사이니 그렇다고 해도, 새로운 인연마저도 설렘을 지나치기도 전에 식상함과 지루함으로 끝나 버리는건 너무했다. 조심스럽게 건네지는 어색한 대화들 속에서 당신은 누구인가요?를 고민하기 보단 "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보이나요?"를 외치는 관계이다 보니 하루를 보내건 이틀을 보내건 그들과의 관계에서 진전이 없긴 마찬가지다. 일상의 고착화가 전부고, 어느새 내려야 할 종점이다. 그렇다보니 서울에서의 사흘동안 유감독 주위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다니지만 다들 피상적이다. 그 어떤 것도 그의 일상이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그에겐 그만의 아우라가 있어서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의지마저 바꾸는 아우라의 힘을 그러게 얕잡아 보면 안 된다니까. 그 덕분에 그에게 달려 드는 여자들과의 관계 역시 한결같이 똑같이 끝난다. 2년전에 만난 여자건 어제 만난 여자건 다를게 하나도 없다. 그녀들이 그에게 가지는 환상이나, 그가 그녀들에게 날리는 마지막 이별의 멘트마저도. 거시적으로 되돌이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힘이 이런 것이로구나, 교본을 보는 듯 했다. 참 나... 고작 " 행복해야 해..." 라는 말로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다는걸 이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됐는데, 다른건 몰라도 그점에서만은 이 남자의 독창성을 알아줘야 하지 싶다.
그렇게 존재의 진지한 소통이나 깊은 공감이 전무하다 보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절간에 사는 스님보다 고립되어 보이던 사람이 주인공인 유감독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지긴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일상의 숨겨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을 꿈꾸지만 언제나 제자리인, 그날이 그날인 삶, 타인들 속에서 오히려 희미해져가는 것이 바로 우리네 모습이니 말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과연 그의, 아니면 우리들의 일상의 저주를 풀 마법의 주문은 존재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는 영원히 그 일상의 저주속에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일까? <사랑의 블랙혹>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마법을 풀 열쇠를 찾아낸다. 당연하다. 그 영환 보는 모두가 행복하라고 만든 로맨틱 코미디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배려는 바라지 않는 것이 좋다. 현실을 배반하고 싶지 않은 성향이 뚜렷해 보이는 감독은 자신이 찾지 못한 마법을 우리에게 하사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뭐, 행복하지 않으면 또 어떻겠는가? 적어도 사기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싶다. 그 열쇠를 찾는 것이 너도 나도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추신1- 아무리 봐도 주인공 유감독은 홍 상수 감독 자신을 투영해 만든 캐릭터가 아닐까 싶던데, 그래서인지 주인공에 본인이 직접 출연을 했다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음엔 연기자로 출연해 보심도...
추신2--타인들의 대화를 엿듣는 생경함? 이랄까 가소로움을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는데, 그게 의도적인 건지 아니면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다. 영화가 삶보다 더 고상해서도 예뻐서도 미화되서도 안 된다는게 감독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직설적인 대화를 엿듣게 하는게 이 감독만의 스타일인 것 같긴 하다. 하여간 드디어 나도 봤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네영카 초대로 본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