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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전쟁광이자 역사학자인 토니와 빈틈없는 사업가 로즈, 몽상적인 기질이 풍부한 캐리스는 대학 동창생들이다. 얼핏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어이없게도 공동의 연적인 지니아다. 그들의 남자들을 빼앗고 파괴하고 훔쳐 달아난 전적이 있는 지니아는 팜 파탈의 전형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거두었던 세 친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 후, 망가진 서로를 위로하면서 유대가 더 공고해졌다. 이를 갈면서 복수를 다짐하던 그들은 지니아가 죽었다는 소식에 안도하고 환호한다. 확인 도장을 찍으려 장례식장에도 간 그들은 비로서 발을 뻗고 잘 수가 있다면서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게 안도한 것도 잠시, 지니아가 죽은 지 정확히 4년 6개월이 지난 뒤 그들은 점심을 하려 모인 까페에서 그녀를 보게 된다. 예전보다 더 매력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지니아, 아니, 이게 왠 날벼락이냐? 혹시 우리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아냐, 지니아라면 무덤에서 다시 살아올 만도 하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부터 미심쩍긴 했어. 겐 그렇게 쉽게 죽을 아이가 아니거든...다들 동의를 하면서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서 다시는 남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살한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리고 달아난 아이 아빠의 소식이라도 듣기 위해 그들은 마음을 다 잡는다. 이번만큼은 절대 당하지 않겠다고...과연 이번엔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치명적인 매력으로 지나가는 곳마다 관계의 시체들을 무자비하게 양산해 놓는 지니아, 친구를 배신하면서도 한톨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그녀를 과연 이번엔 제압시킬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 그녀는 왜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일까?
일반적으로 남자만큼이나 여자들도 팜 파탈을 싫어한다. 특히나 임자있는 남자들을 취미생활이나 심심풀이로 빼앗는 여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세 여자들의 남편들을 빼앗아 간 지니아는 그 자체로 우리의 공통의 적이다. 주인공들의 구구절절한 사연? 들어볼 필요도 없다. 이미 나쁜 여자로 확실히 등극해 주셨다. 더군다나 피해자인 세 여자들이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데, 같은 여자로써 함께 분기탱천 해주는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행복을 빼앗아 간 지니아가 다시 돌아왔다. 죽었다길래 좋아하는 티 내지 않고 장례식에까지 참석해 주었는데 말이다. 아 ,독한 여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외다. 과연 지니아 답다고 찬탄할 수 밖에 없는 반전이다. 하지만 피해자인 그들은 언제까지 상대의 능력을 찬탄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 세 주인공들은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면서 지니아가 이번엔 어떻게 자신들을 구워 삶을려나 전전긍긍한다.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과거를 되새김질 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만으로는 사건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지니아와 대면하게 된 그들은 비로서 사건 전체를 조망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리고 그 순간, 지니아가 과거에 대해 입을 여는 순간,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던 지니아는 갑자기 묘연히 사라진다. 책을 읽는 내내 바보같은 남자들을 탓하면서 그런 여시같은 여자에게 빠져들었다니 라고 혀를 끌끌 차게 만든 당사자 였는데 말이다. 그렇게 뻔히 보이는 트릭에 속았더란 말이냐, 안타까운 마음에 주인공들의 순진함을 성토한 나였건만... 현실속으로 걸어나온 지니아가 입을 열자, 그녀와 대면하게 되자 어이없게도 그녀의 매력과 간계에 나 역시 지고 말았다. 주인공들이 그렇게 우왕좌왕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바보같아서 지니아에게 당한게 아니었다. 그저 지니아가 너무 강력한 존재라 어떤 존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일뿐. 더군다나 세상에,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남자들을 빼앗아 간 지니아에게 주인공들이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한다는 엉뚱한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지더라. 연민에 안스러움에 공감 백배라면서 내내 내 자신과 동일시하던 주인공들을 다 버려 버리고, 순식간에 지니아 편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건 참 희한한 경험이었다. 내가 그렇다 보니 주인공들이 다들 " 단 한 하루만이라도, 단 한 시간만이라도, 어쩔 수 없다면 단 5분만이라도 지니아가 되어 보고 싶다" 고 한 말이 자연스레 이해가 갔다. 비록 미워하고 증오하는 상대긴 하지만 지니아는 적어도 독창적인 적이었던 것이다. 그 빈틈없음과 철두철미함과 무자비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렇다. 지니아의 매력은 단지 아름다움이나 섹시함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통찰력과 머리가 있었다. 비록 그 머리를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썼다는 것을 좋게 봐 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환상에 절어서 자신을 속이며 사는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잣대로 세상을 요리조리 조종하는 그녀가 내심으론 어찌나 통쾌하던지...속이 다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여자들에게 흔한 유형인 희생자나 피해자도 아니었고, 수동적이고 억압적인 여자도 아니었으며, 사랑에 속아 현실을 부정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팜 파탈인가.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이러면 안 된다는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렇다. 흑과 백, 정의와 부정의, 옳고 그름의 양 극단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이렇게 개연성 풍부한 팜 파탈은 왠만해선 미워지질 않는다. 그녀가 친구를 착취하고 아프게 한 것은 사실이라해도, 이렇게 의지 넘치는 악녀에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강한 그녀에게, 철두철미하게 사악한 그녀에게 박수를...
추신--여자들에게 더 어필 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나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공감 할 만한 장면들이 많았어요. 이렇게 영리한데다 탁월하기까지한 멋진 책을 써 내다니,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가 다시 보이더군요. 여성 작가들은 시시해 라고 생각하시는 분에게 추천! 생각이 달라지실테니 말여요. 이 책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왜 이 책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지 이해가 되질 않네요. 시나리오로 만들기 딱 좋은 소설 같은데 말이죠. 하여간 이 책에 홀딱 반한 저는 이 작가가 부커상을 수상했다는 <눈 먼 암살자>가 한층 더 궁금해 졌습니다. 과연 그녀는 그 책에서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누군가 빨리 번역해 주기를 기다려 봐야 겠습니다.